← books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 · 문학과지성사 · 2016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다 … 여름은 아주 짧았다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다, 생각하던 무참한 때였다, 짧았다, 는 내 진술은 순간의 의심에 불과했다 길어서 우리는 충분히 울었다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나의 출생지는 우연한 감염이었네 … 우연한 감염 끝에 존재가 발생하다가 갑자기 뚝 끊겨버리는 적막의 1초 // 어디론가 가버린 태아들은 태어나지 않은 오후 5시에 흘러나올 검은 비 같은 뉴스를 들으며 구약을 읽을 거야 그 뒤에 흘러나올 빗물 같은 레게 음악을 들으며 바빌론 점성가들에게 문자를 보낼 거야 // 모든 우울한 점성의 별들을 태아 상태로 머물게 해요, 얼굴 없는 타락들로 가득 찬 계절이 오고 있어요, 라고


동쪽에는 지나가지 못하는 나라가 있고 // 이 도시 사람들은 동쪽을 바라보며 희망은 맨 마지막에 죽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이라는 것이 너무나 뜨거워 잡을 수가 없을 때 희망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 희망을 신뢰한 적은 없었으나 흠모하며 희망의 관광객으로 걸은 적은 있었지 별이 인간의 말인 희망을 긴 어둠의 터널에 가두고 먼지로 마셔버리는 것을 본 적도 있었지


푸른 별에는 당신의 눈동자를 가진 쥐가 산다고 나는 말했지요, 당신, 나와 쥐의 공동체를, 신화는 실험실에서 완성되는 이 불우한 사정을 말할 때 // 내 손을 잡아줄래요? /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 그 막연함도 들어볼래요? // 이건 불행이라고, 중얼거리면 / 모든 음악이 전쟁의 손으로 우리를 안아주는 그런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 이건 사랑이라고, 중얼거리면 / 모든 음악이 검은빛으로 변하는 그런 처참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 다만 손을 잡아달라는 간절한 몸의 부탁일 뿐입니다 / 내가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을 가진 쥐가 당신에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얼어죽은 국회에게, 라는 편지도 맞아죽은 은행에게, 우주로 납치된 악몽에게, 달에 있는 나의 거대한 저택에게, 라고 시작되는 편지도 어떤 편지도, 아니 내가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식물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