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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 노예 남편 아내
- 낭만적으로 산다
- 50번째 추첨의 날
- 세븐킹덤의 기사
- 흰 개그런데 소설가가 존재와 사물의 본성을 다른 사람보다 잘못 판단할 때가 많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소설가는 그것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나는 살면서 만나거나 가까이 에서 산 모든 사람을 언제나 상상했다. 상상 전문가에게는 그편이 훨씬 쉬운 일이고 덜 피곤한 일이다. 가까운 사람들을 알려고 애쓰거나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지어내면 그만이다. 그러다 깜짝 놀랄 일이 생기면 그들을 끔찍이도 원망한다. 그들이 자기를 실망시켰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이 자기 재능에 못 미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속에서 구멍이 나고 있었다. 그 개를 훈련한 것이 나였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의 유명한 문장은 그 역명제도 성립한다는 얘기다. "내가 '당신들'이라고 할 때는 내 얘기이기도 하오." 이 명제에 따라 "tea for two and two for tea" 하는 예쁜 노래도 다른 노래로 만들 수 있다.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나죠". 이 노래에는 심지어 제목도 있다. 박애.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비상구는 없다. "무엇보다 키스의 웃음이 거슬렸어요. 그건 승리에 도취한 웃음이었어요. 여러 종류의 승리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 승리는 어떤 승리보다 보기가 역겨웠어요. 공포가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내 머릿속에 떠오른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죠. 저자는 어떻게 저렇게 바꿔놓을 수 있었을까? 고문으로? 얼이 빠져서 갈피를 잡지 못 하는 그 개를, 인간 때문에 함정에 빠져 제 반사 행동을 거스르며 겁에 질린 채 어찌할 바 모르는 그 개를, 그 역사적인 개를 보는 것이 무엇보다 괴로웠어요. 참기 힘들 만큼 추악한 광경이었죠. 그 순간엔 키스가 거의 혐오스러웠어요. 그렇지만 이 모든 일이 혐오스러웠던 것이지, 그 사람 개인이 혐오스러웠던 건 아니에요. 그렇다고 모든 걸 언제나 사회에 전가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우리는 개인의 책임으로 비열한 짓을 할 때도 있죠. 이 일엔 개를 되찾아가서 '치료'를 하겠다는 선의라곤 전혀 들어 있지 않았어요. 이건 인간들끼리의 문제였죠·····." (...) 내가 질문을 던진 친구들 대부분은 우리 입장이었다면 개에게 주사를 놓았을 것이라고, "아무리 좋은 감정 에도 한계는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오히려 지나치게 한계를 두는 사례를 주변에서 줄곧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감정 제거'라는 현대적 흐름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감정의 인플레이션을 빌미로 감정을 평가절하하길 거부하고, 100프랑의 고통이 1프랑의 가치밖에 없다고 받아들이기를, 다시 말해 어제는 단 한 사람의 죽음으로 충분했던 곳에 백 명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 인비인
- 공포의 문법<스타워즈> 팬덤의 유독함을 보면, 그 유독함은 팬질하는 작품의 내용과 별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좁아터진 세상을 유지하는 것이 욕망의 전부인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창작자가 자신의 팬들에게도 별다른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건 좀 절망적입니다. 그래도 창작자는 일을 해야 합니다. 노동만이 우리의 존재를 지탱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상자들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작품들을 쏘아 올립니다. 그 뒤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아마 좋은 감상자가 되는 것이 다음 단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브레이크넥그렇지만 진짜 문제는 절차적 지식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과 경영진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 제조 업체는 중국에 수많은 공장을 세우면서 30년 가까이 절차적 지식을 제대로 쌓지 못했다. 미국 공장이 한 곳 한 곳 문 닫을 때마다 생산 기술과 관련 지식이 영원히 사라졌다. 현장의 노동자, 기술자, 제품 설계자는 일자리를 잃었고, 공급 업체와 기술 고문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의 모든 공학적 실무 활동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남은 건 러스트 벨트로 불리는 지역뿐이었다. 일부 주지사와 시장은 이러한 쇠락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세계화라는 명분을 앞세워 저임금 생산을 추구하는 경제학자들과 경영진의 끊임없는 비난에 시달렸다. 오늘날에도 많은 미국 경제학자가 제조업의 특별한 의미 자체에 의구심을 품고 있으며, 서비스 경제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선전 같은 저임금 생태계는 마치 거대한 진공청소기처럼 미국이 쌓아온 절차적 지식을 빨아들였다. (...) 어쨌든 미국은 최소한 국내 산업 연구소에서 나오는 결과물을 직접 대량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제조업 분야에서 역량을 되찾아야 한다. 대량생산 역량이 아니라 과학적 혁신만 계속 중요시한다면, 태양광 설비를 먼저 발명하고도 생산은 중국에 넘겼던 것처럼 다시 한번 산업 전체를 잃올지도 모른다. 미국은 천재적 혁신가들의 빛나는 순간을 기념하길 바라지만, 나는 과학 연구소의 새로운 발명보다 대기업의 제품 생산이 영광스러운 성취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실을 간과한다면 미국 과학자들이 설치한, 기술 선도로 이어 지는 사다리를 또다시 중국 기업들이 밟고 오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과학을 믿고 따르겠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학적 사실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 정치적 결정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배경을 파헤치는 건 법률가 중심 국가가 더 잘한다. 권리 보호에 관심이 있는 변호사, 사회과학을 깊이 염두에 두는 경제학자, 윤리 문제를 고민하는 인문학자, 그리고 정책의 방향에 대한 토론을 요구하는 많은 목소리가 있다. 중국에는 정치적 논쟁을 위한 강력한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학자들은 그저 과학만 믿고 따르다가 사회적 빈곤만 마주하 게 될 뿐이다.
- 궤도 너머아인슈타인이 기하학 강의에서 말한 것처럼, "수학 법칙은 현실을 설명하기엔 확실하지 않고, 확실한 수학 법칙은 현실과 관련이 없다"(참고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학 명언이다). 이 말은 정량화의 한계와 비용을 잘 드러낸다. 특히 나란 사람은 무언가가 마 무리되고 명료하게 정리되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살아간다. 그렇 기에 정밀함이 진실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스스로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 나는 지금 왜 내 삶을 관찰하고 또 측정하는지 스스로에게 항상 질문하라. 마라톤을 하면서 마일리지를 쌓아 나가듯 실체가 있는 목적으로 가는 길을 돕기 때문인가? 아니면 없어도 되는 목발이나 습관 같은 것인가? 그렇다면 관찰이란 단순히 '보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관찰하는 이유는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함이지 그저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목적을 수행하려면 방향 그리고 끝이 있어야 한 다.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한 지식을 습득하고 실마리를 모아 가설을 짜기 시작하거나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알고리즘을 코딩할 수 있다. 관찰이 유용하려면 그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관찰이란 "어떠한 관점의 편에 서거나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라는 다윈의 주장처럼 말이다. 물론 과학자는 관찰과 배움, 그들이 발견한 것에 대해 계속해서 의문을 품는다. 그렇다고 해서 첫 관찰의 씨앗을 수확해 더 크게 키울 시점을 미루지도 않는다. 씨앗이 결국에는 의미 있는 발견이 되도록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니까. 평생 생각을 바꾸지 않고 고정된 관점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얻을 것이 없다(잠깐 자존심을 세우는 것 빼고는). 반면, 자신의 의견과 관점을 하나의 가설로 대하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자신의 가설이 증거를 통해 시험되고 입증되어야 하며 그 결과 지속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날 수도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 다. 모든 실험실에서 역설과 블랙 코미디가 중요 요소인 이유다. 연구란 과거에 저지른 잘못, 시간을 낭비했다는 증거,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암시 등으로 자신을 매질하는 시도다. 모든 것을 걸었어도 연구자는 자신의 직감을 언제든 버릴 준비가 되어야 한다. 과학은 이토록 찬란하게도 불확실한 세계다. 이 세계들은 막다른 길 혹은 단지 더 나은 어딘가로 가는 통로라고 판명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의 가장 중요한 기술의 하나다. 사용 가능한 퍼즐 조각들을 배열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의 형태로 나타내는 능력,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볼 뿐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해 지각하는 능력, 그리고 해결책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단순화를 통해 어떤 작동 원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사라진 상태임을 이해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우리는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일과 여가에 대해 모두 같은 난제를 마주한다. 세상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이 작은 공간조차 가능성의 측면에서 설명하자면 대단히 크다. 모두 다 가질 수는 없다. …… 자기에게 이상적인 인생이 어떤 모습인지 알아낸 다음에는 최선을 다해 그 삶을 살면서 그 과정에서 차 버렸던 다른 모든 경로는 잊어야 한다.
- 아무튼, 전화영어이야기에 참여하는 게 어떻게 이야기를 멈추죠? 이야기를 부정하면 마무리가 안 되거든. 상상을 막으면 날밤 새우는 거야. 보라고, 저기 화산이 있다고, 종일 나를 괴롭히지. 내가 아이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이유는, 아이의 상상이 흐르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상상이 흐르다가 안전하게 끝나도록 돕기 위해서야. 어차피 길어야 5초야. 아이는 곧 다른 상상으로 이동해. 화산은 나뭇가지의 마법사로 변신하지. 마법사는 빵으로, 빵은 사자로 변신하고. 굉장히 피곤하지만 그래도 재미있을 때도 있어. 수잔의 이야기를 듣고 감탄했습니다. 상상을 금지하면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먹이를 달라고 계속 조르지만 타인이 상상에 합류하면 이야기가 흐르다 땅에 흡수되어 사라진다는 말이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소멸하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시나 소설을 읽는 것은 이야기에 참여함으로써 그 이야기가 안전하게 사라지는 과정을 함께 목도하는 것인지도요.
- 케어리스 피플페이스북의 기대치는 엄마 역할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능할수록 더 보이지 말아야 했다. 몇 달 뒤 아기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때, 나는 며칠 동안 회사에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 후 마른에게, 업무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는 말과 함께 지나가듯 언급했을 뿐이다. '아이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조직 문화는 '진정한 당신의 모습, 그대로 일하라'던 페이스북의 기운찬 슬로건과는 정반대였다. 오후 5시 30분에 퇴근해 아이들과 함께 집에 있어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말하곤 했다는 셰릴의 《린 인》 이야기들과도 마찬가지였다. 페이스북에서는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과 실제로 행하는 부분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고, 특히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랬다. 예를 들면, 페이스북은 한때 프로젝트 패밀리라는 코드명으로 어린이용 페이스북의 출시를 계획했다. 세릴은 때때로 정책팀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었을 때 이걸 해내지 못 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아이들을 페이스북에 끌어들일 기회를 놓쳤다고 책망했다. 하지만 어린 자녀를 둔 페이스북의 다른 리더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자녀들의 스크린 이용을 극도로 제한했다. 소설 미디어 계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자기 아이들 사진을 소설미디어에 올린 적도 없었다. 실리콘밸리는 집집마다 나무로 만든 몬테소리 장난감이 넘쳐났고, 전면적인 스크린 금지 규칙으로 뒤덮여 있었다. 회사에서 부모들은 10대 자녀에게 휴대전화를 허용치 않는다고 떠벌리곤 했는데 이는 이들이 자사 제품의 위험성, 특히 어린 두뇌에 가하는 실질적인 피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 셰릴의 이너 서클에 속한 여성들의 영상도 상영되었다. 모두 백인인 그들은 아름다운 조명으로 연출된 화면 속에서, 궁전 같은 저택의 개인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사진발 잘 받는 아이들과 놀고, 묵묵히 지지해주 는 남편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모든 모성 우화는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노동의 대부분을 떠맡는 수많은 보모와 각종 도우미의 역할을 교묘한 편집으로 지워놓았다. 엄마 흉내만 내는 것이었지, 엄마 역할은 아니었다. 그들은 '워라밸'을 유지할 수 있는 진짜 비결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아이가 없는 것처럼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연봉이 뒷받침할 때나 가능한 현실이었다. 공식 입장과는 달리, 페이스북은 자사의 연구와 모델, 프로그램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용자 참여도를 극대화하도록 설계된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회사는 특히 젊은 사용자들의 취약성을 파고들도록 맞춤 설계된, 일련의 중독을 유도하는 기능들을 도입하면서도 그 위험성과 유해성을 감춰왔다. 참여도를 끌어올리고, 그 참여를 중독으로 몰아가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 것이다.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를 분열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는 강력한 알고리즘이, 그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커져 결국 회사의 수익성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약화될 가능성도 있었다. "움직이는 벡터 공간의 매핑"이라는 제목의 내부 메모에서, 페이스북의 CTO 앤드루 보즈워스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참여도를 극대화한다는 회사의 기조를 바꿔야 한다고 최고경영진에 촉구했다. 그는 그 전략이 무책임하게 행동 방식을 유도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부정적인 행동 방식도 포함된다고 지적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페이스북이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 우리(페이스북)가 곧 세상의 기류를 만들어낸다. (...) 하지만 최근 우리는 우리가 보여주는 콘텐츠가 기존의 선호에 반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의 선호를 강화하거나 형성하기까지 한다는 점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람들을 군집화하고, 서로 다른 지점들의 연결 가능성을 너무 이른 시점에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 우리는 너무 이른 시점에 최적화를 해왔고, 국소적 최대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최적화를 조금 완화하는 것이다. 이용 시간과 참여도에서 일부 손해를 감수하더라
- 작은 것들의 신작은 사건들, 평범한 것들은 부서지고 재구성된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갑자기 그것들은 한 이야기의 빛바랜 뼈대가 된다. 그렇대도 소피 몰이 아예메넴에 왔을 때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다. 한편으로는, 몇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기 훨씬 전에. 영국이 말라바르를 점령하기 전에, 네덜란드가 지배하기 전에, 바스쿠 다 가마가 오기 전에, 자모린 가문이 캘리컷을 정복하기 전에.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보라색 가운을 입은 시리아인 주교 세 명이 살해되어, 가슴 위에 바다뱀들이 똬리를 틀고 엉클어진 턱수염에는 굴을 붙이고 바다에서 떠오르기 전에. 마치 기독교가 배를 타고 들어와 우러난 차처럼 케랄라에 스며들기 훨씬 전에 그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사랑의 법칙'이 만들어진 그날들에서 시작되었다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사랑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받아야 하는지를 정한 법. 그리고 얼마나 사랑받아야 하는지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세상에서, 현실적인 목적을 위해..... 그는 누구였나? 그는 누구일 수 있었나? '상실의 신'. '작은 것들의 신'. '소름과 문득 떠오르는 미소의 신'. 그는 한 번에 한 가지만 할 수 있었다. 그녀를 만지면 말을 걸 수 없었고, 그녀를 사랑하면 떠날 수 없었고, 말을 하면 귀기울일 수 없었고, 싸우면 이길 수 없었다. 쌍둥이는 너무 어려서 이들이 역사의 심복일 뿐이라는 것을 몰랐다. 계산을 분명히 하고, 역사의 법칙을 깬 사람들에게서 벌금을 걷기 위해 보내진 자들일 뿐이다. 원초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완전히 비인간적인 감정에서 행해진 일일 뿐이었다. 이제 시작 단계인, 아직 인정되지 않은 두려움 - 자연에 대한 문명의 두려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 힘없는 자에 대한 힘있는 자의 두려움에서 생겨난 경멸감. 복종시킬 수도 신격화할 수도 없는 것을 파괴하고 싶다는 잠재적인 남자의 충동. '남자들의 욕구.' 에스타펜과 라헬이 그날 아침 목격한 것은, 비록 그때는 몰랐지만, 지배권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을 보여주는, 통제된 조건(어쨌든 전쟁도, 집단 학살도 아니었다)에서 진행된 임상 실험이었다. 구조. 질서. 완전한 독점을 추구하는 본성. '신의 의도'로 가장한 채 어린 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인간의 역사였다. 그날 아침 일어난 일에 우연은 없었다. 우발적인 것도 없었다. 노상강도도 개인적인 보복도 아니었다. 한 시대가 그 시대를 살고 있던 이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킨 것이었다. 실연(實演)중인 역사. 나중에도, 이날 이후 이어진 열세 번의 밤 동안에도, 본능적으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큰 것들'은 안에 도사리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다. 미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그들은 서로의 엉덩이에 난 개미 물린 자국을 보고 웃었다. 잎사 귀 끝에서 미끄러지는 어설픈 애벌레에, 혼자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뒤집어진 딱정벌레에. 강에서 늘 벨루타를 찾아내어 물곤 하는 작은 물고기 한 쌍에. 유난히 더 경건하게 기도하는 자세를 한 사마귀 한 마리에. '역사의 집'의 뒷베란다 벽의 갈라진 틈에서 살며, 쓰레기들-말벌 날개 한 조각. 거미줄 일부. 먼지. 썩은 잎. 죽은 벌의 빈 흉갑-로 몸을 가려 위장하는 작은 거미 한 마리에. (...) 그들은 덧없는 것을 믿어야만 함을 알았기에 거미를 선택했다. '작음'에 집착해야만 함을. 헤어질 때마다 서로에게 단 하나의 작은 약속을 얻어낼 뿐이었다. "내일?" "내일." 그들은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 점에서는 그들이 옳았다.
- 펑펑내 화장은 항상 이상했다. 이유를 생각하자면…… 내 화장은 그냥 '여자'처럼 보 이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루가 달리 예뻐지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여자가 되는 기술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난 그 기술을 몰랐고, 그래서 우리 무리 중에서 나만 여자가 아닌 듯했다. 내가 나의 화장을 화장이라 부르지 않고 '여장'이라 부른 이유도 거기에 있 었다. 여자애들은 특정 시기에 모두 여장을 배운다. 그걸 잘 해낸 애들은 더 이상 본인이 하는 걸 여장이라 생각하지 않게 되지만, 나처럼 못 해낸 애들은…… 평생 '여장 여자'로 살아야 한다. "선생님, 약이 나를 공격한다고 생각하는 병은 어떤 약을 먹어야 나을까요?" 마침내 나는 아픈 것과 미친 것과 슬픈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가 된 감정의 다음은 공포였다. 아프고 미치고 슬픈 내가, 나를 외로이 죽게 놔둘 것 같아 겁이 났다. 지구가 돈다고 말했던 사람 코페르니쿠스는 죽는 날까지, 아니 죽은 후에도 광인 취급을 받았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주장이 신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고 공들여 해명할수록 그는 점점 더 광인이 되었다. 그때 코페르니쿠스는 외로움을 느 꼈을까? 그는 천재였기에 광인이 된다는 것과 외로워지는 것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외로움을 각오하면서도 광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외롭지 않고자 광인이 되는 것이라고 믿던 나는 지동설을 처음 알게 된 중세 가톨릭 신자처럼 커다란 충격에 빠진다.
-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그리고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년필은 서랍 안에 녹슨 채 그대로 들어 있고, 새 울음소리는 책갈피 속에 더러더러 끼어 있고, 단힌 책과 열린 책 사이로, 말하는 입과 듣고 있는 귀 사이로 시간은 허망하게 빠져나가고, 담배와 커피와 외로움과 가난과 그리고 목숨을 하루종일 죽이면서 나는 그대로 살아 있기로 한다. 빙글빙글 넉살 좋게 웃으며 이대로, 자꾸만 틀린 스텝을 밟으며 이대로. 말하자면 나는 애초에 내 인생을 눈치챘다. 그래서 사람들이 희망을 떠들어댈 때에도 나는 믿지 않았다.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 그러나 애초에 나는 내가 백조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운 오리 새끼라고 손가락질할 때에도 나는 속으로 코웃음만 친다. 그리고 잡균 섞인 절망보다는 언제나 순도 높은 희망을 산다. 생각해보면, 우우, 지겹고 지겹다. 눈 가리고 절망하기, 눈 가리고 희망하기, 아옹! 아옹!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괴로운 기억들과 즐거운 방법적 꿈 사이를, 눈 가린 절망과 눈 가린 희망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럼 어떠냐, 뻗을대로 뻗어라. 네 팔자로 뻗어라. 어차피 한판 놀러 나왔으니까, 신명 풀리는 대로 놀 수밖에. 안 풀리면 안 놀 수밖에. (1981) 그래서 물은 더욱 공포스러워하지. 그때 허공의 보이지 않는 바람이 물에게 속삭여. "우리와 함께하라. 우리는 수도 없이 이 일을 해왔다. 우리가 공기가 된 너를 실어날라 그 산으로 데려다주마. 그러면 너는 거기서부터 다시 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물(육체)이라는 형태를 생명으로 알았던 물은 자기 죽음 앞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떨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순간은 오고, 그리하여 그 물 중의 어떤 부분은 증발해 바람에 실려갔고, 다른 어떤 부분은 사막의 모래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 그때 공기로 변하는 쪽을 택했던 물은 비로소 그것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래 속으로 자취 없이 사라져 죽음을 맞이했던 다른 부분은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죽어 떨어져나가야 했던 부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거야. 아마 우리 인간들의 삶도 그럴지 몰라. 언젠가는 그렇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오고,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오는 인생이 겉으로는 무시 무시하고 불행해 보일는지 모르지만, 일단 그 과정을 거친 뒤에는 그것이 오히려 축복이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 (1998)
- 이 망할 세상에서 사랑이라니!로맨스 신화는 사랑과 만족감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규정된 단계를 따라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쉽게 가정한다. 파트너의 성적 사회적 욕구를 비롯한 모든 욕구가 '정상적'일 거라고, 즉 스스로의 것과 유사하거나 주류 각본에서 정상이라고 여기는 욕구와 비슷할 거라고 짐작한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과 다를 때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성인기 내내 혼자 살고 싶어 하고 '원래 그래야 하는' 것보다 섹스를 적게 하고 싶어 하고 결혼을 원하지 않는 경우가 그렇다. 로맨스 신화는 충분한 성찰 없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만든다. 가령 파트너의 일터와 가까운 곳에 살기 위해 친구와 공동체를 등지고 멀리 이사를 가기도 한다. 또 친구보다 연인을 중시하게 만들고, 친구나 다른 지지 집단에 들이는 노력을 줄여 종종 고립을 유발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일부를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그 결과 우리는 낭만적 관계에서 겪는 일들을 포함해 삶의 여러 난관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다. 혹은 충분히 도움받지 못한다. 또 로맨스 신화는 질투와 소유욕을 정당화하며, 나아가 갈등을 심화하고 학대를 합리화하기도 한다. 로맨스 신화의 영향 아래에서 원망이 쌓여 곪아가고 고착화된 비난의 역학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네가 진짜 나를 사랑했더라면.... 내가 섹스하고 싶을 때 너도 원했겠지. / 나랑 결혼했겠지. / 같이 살았겠지. / 함께 아이를 가졌겠지. / 내 마음에 안 드는 활동은 그만뒀겠지. (...). 진실은 이렇다. 우리의 모든 정서적 필요를 충족해 줄, 단 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양한 연결을 맺을 때 더 안전하고 건강하며, 많은 사람과 신뢰와 연결을 키워갈 때 창의성과 끈기를 바탕으로 생존하고 저항할 수 있다. 존재하고 관계 맺는 방식에 '정상'이라는 건 없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대우받고 싶은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길 바란다면 그들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좋아" 또는 "싫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상대의 대답이 "싫어"라면 우리는 다른 데서 필요를 충족하거나, 스스로 채우거나, 충족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다. > 모든 관계는 나란한 두 고독을 더욱 단단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 사람이 자기 자신을 버리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고, 두 사람이 서로 가까워지기 위해 각자를 버리면 발을 딛을 땅이 없어져 함께 있는 일은 끝없는 추락이 될 뿐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1904년 4월 29일 파울라 모더존-베커에게 보낸 편지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삶을 완전히 뒤바꾼다. 사랑은 엄청난 동기를 불어넣으며, 이는 아름다운 일이다. 나는 친구들이 새로운 성적 낭만적 관계를 통해 창의성, 성적 표현, 정의를 향한 열정을 새로이 발견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러나 사랑은 끔찍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자존감을 잃고, 고립되고, 다른 활동이나 관계를 위협이라고 느끼는 연인과 만남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의 가치관을 저버리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들은 연인의 영향 아래에서 피어나고,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중요한 부분과 단절되기도 한다. 그러니 사랑이 우리를 깊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랑은 위험한 동시에 해방의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우리를 지금 상태로부터 흔들어 깨우고, 새로운 지평을 욕망하게 만들고, 이를 향해 움직이게 만드니까. 사랑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기를 바라는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으로부터, 사랑으로 인해 잃거나 변하지 않도록 지키고 싶은 것들은 무엇인가? 그 친구는 스스로를 등을 맞댄 두 개의 몸을 가진 사람으로 상상한다고 했다. 한쪽은 절박하게 집착하듯 연인을 향해 다가가려 하고, 다른 한쪽은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 이미지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힘든 순간에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은 간절한 욕구를 느끼는 동시에, 도저히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걸 견딜 수 없다고
- 사나운 애착나라는 여자애는 그들 한가운데서 자라고 그들의 이미지 안에서 만들어진 존재였다. 얼굴을 덮은 천의 클로로포름을 빨아들이듯 나는 그 여자들을 빨아들였다. 무려 30년이 흐른 후에야 내가 그들을 얼마나 이해했었는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엄마가 처한 삶의 조건이었다. 여기 이 부엌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는 것. 또한 이 부엌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지리멸렬해한다는 것. 이 부엌에서 엄마는 누구나 존경하고 감탄할 정도로 훌륭히 기능한다. 이 부엌에서 당신이 하는 일을 혐오스러워한다. 어쩌면 나중에 당신 입으로 말한 "여자로 산다는 것의 공허함"에 대해 분노를 키우고 있다. 그러다가도 골목에서 벌어지는 세상만사를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명랑하고 유쾌한 웃음을 터트린다. 아침에는 수동적이고, 오후에는 반항적이던 엄마는 매일 새로 만들어졌다가 매일 풀어져버리는 사람이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료를 굶주린 사람처럼 붙들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애정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어쩔 수 없이 이 생활로 끌려온 부역자처럼 느끼곤 했다. 어떻게 그처럼 처절하게 분열된 삶에 당신의 모든 감정을 쏟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무슨 수로 엄마의 감정에 감정을 쏟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네티는 나에게 스스로 정비하고 필요한 행동을 학습하면서 인생에서 더 나은 자리를 예약해놓으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는 자신은 하루하루 매력 뽐내기에만 빠져 지냈다. 엄마는 내게 더 고차원적인 인생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게 당신이 최선을 다해 얻어낸 고차원적 인생이었다. 우리는 모두 생긴 대로, 자기 욕구에 따라 살 뿐이다. 네티는 유혹하고 싶어했고 엄마는 고통받고 싶어했다. 나는 책을 읽고 싶었다.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절제하여 이상적이고 정상적인 여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추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실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 그 삶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인 여자의 삶이라는 개념은 우리를 절대 놓아주지 않고 매년 다달이, 날마다 우리를 더 깊은 갈등과 혼란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었다. 삶에 대한 확신이 약하면 약할수록 자기 방식이 옳다고 독단을 부리게 된다. 우리 각자는 자기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더 숭고한 목적에 헌신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서로를 분리시키면서 연민도 함께 거둔다. 남몰래 다른 사람들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특성을 수집하기 시작하고 그들과 자신을 더욱 열심히 분리하면서 마치 나와 너의 이 차이가 구원이라도 되는 줄로 착각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안 저러니 다행이야. 타인을 보며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혼잣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렇게 판단을 한댔자 삶이 개선되는 건 아니다. 우리는 환상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분노에서도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단단한 껍질 아래서 노여움에 차 조용히 부글부글 끓고 있을 뿐이다. 이 억제되지 못한 노여움이 우리를 고갈시키고 죽이기도 한다. 내 생각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에만 골몰하는 대신 더도 덜도 말고 딱 1분이 라도 그저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됐을 정 도로 그 긴긴 세월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우리 두 사람 다 감격하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로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 평정심도 꾸준하게 지속되지는 못한다. 공중에 흩어져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가 활기와 함께 되살아나기도 한다. 가장 필요할 때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가 하면, 그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안정적인 관계는 언제 휘발될지 모른다. 어쩌면 끊임없는 변화, 유동적인 상태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맞닥뜨리는 진실이 아닐까 한다. 이 불안정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요 인생의 신비와 약속을 관통하는 진리가 아닐까. 엄마와 나는 더 이상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있지 않는다. 드디어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영구적으로 성취되었다. 나는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흡족하게 엿본다. 약간의 공간이 나에게 이따금 찾아오는 일
-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한국 사회에서 질병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죽음은 ‘치료의 실패’로 인식된다. 환자에게는 끝까지 치료에 매달려야 한다는 압력이, 가족에게는 끝까지 살려야 한다는 도덕적 부담이, 의료진에게는 최신 치료를 제공해야 한다는 기대가 작동한다. 호스피스·완화의료를 제안하는 것은 쉽게 ‘포기’로 오해받는다. 그 결과 임종에 관한 대화는 미뤄지고, 연명의료나 호스피스에 대한 결정은 지나치게 늦어진다. 환자의 고통이 충분히 조절되지 못한 채 임종에 이르는 일이 한국 의료 현장에서 되풀이되는 이유다. 조력임종을 법제화한 나라들에서 안전장치가 충분히 작동하고 있는지이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사례를 보면 우려할 만한 정황이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기존 의료인이 조력임종을 거부한 뒤 다른 클리닉을 통해 시행한 사례 가운데 약 6.8퍼센트가 중대한 기저질환 없이 삶에 대한 피로감 등을 이유로 진행한 것으로 보고됐다. 벨기에에서도 전체 사망에서 조력임종이 차지하는 비율이 2007년 1.9퍼센트에서 2013년 4.6퍼센트로 두 배 가까이 늘었는데, 특히 여성이나 80세 이상 고령자, 요양시설 거주자처럼 상대적으로 취약한 집단에서 증가했다. 이 사례들은 조력임종이 극심한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에게만 한정된 선택이 아니라, 고령이거나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쇠약과 고립, 삶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하는 방법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한다. 완화의료와 의사조력임종이 조화롭게 공존하려면, 우리 사회와 의료인 모두가 극심한 고통 속에 놓인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소중히 지키면서 동시에 어떤 고통에 처한 사람의 삶은 끝나도록 돕는, 매우 위험한 균형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료인마저 엄혹한 조건에 놓인 삶의 가치를 스스로 절하하게 되거나, 환자가 더 잘 살도록 돕기보다 생을 마치도록 돕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쉽게 판단해버릴 위험이 있다. 저는 '완화의료와 돌봄이 임종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앞서, '고통을 완화하는 일이 의료의 핵심 목표가 될 수 있 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병원은 생명을 살리고 연장하고 완치시키는 곳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완화의료와 돌봄은 본래의 의료에 덧붙이는 부가 서비스처럼 취급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완치를 목표로 하는 치료 과정에서도 질병을 안고 살아가며 고통을 조절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원인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더라도 환자가 그 질병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돕는 것 역시 핵심적인 의료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 관점이 자리 잡아야만 호스피스와 완화의료가 의료의 필수 서비스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일리아스 좋아하세요?신들은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조건을 모르니 영원히 젊기만 하고 결핍에 시달릴 일도 없죠. 하지만 그런 탓에 그들은 어떤 영웅적인 일도 할 수 없답니다. 인간은 제아무리 뛰어난 자라 하더라도 고통과 불운을 피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그것이 불행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아마도 행운은 신들의 것일 테지만, 행복은 인간의 것일 겁니다. 불운과 불행을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처럼, 큰 불운을 겪는다면 일시적으로는 행복을 누릴 수 없겠지만 이것이 곧 행복의 소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잃 는다는 건,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탁월한 일들을 도모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사태입니다.
- 1938 타이완 여행기"평위안의 마조묘가 보존될 수 있었던 건 제국의 관용 덕분이 아닙니다. 메이지 시대에 제국 군대가 파괴했기 때문이죠. 평위안 지역의 본섬 사람들이 애를 쓰며 노력했기에 마조묘가 다이쇼 시대에 다시 지어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펑위안 신사가 몇 년 전에 세워졌죠. 마조묘에도 돌로 만든 석등과 도리이를 세웠고요. 이게 본섬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요? 제국이 본섬에 아름다운 걸 더해줬다고요? 아오야마 선생님의 말씀은 본섬과 본섬 사람을 우롱하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멋진 것들은 그저 내지인에게나 그러할 뿐이지요. 심지어는 아오야마 선생님에게만 멋진 일일 뿐입니다." "동고동락할 거예요. 부유하든 가난하든 맛있는 게 있다면 꼭 샤오첸과 절반씩 나눌 거예요." "그걸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나요?" "설사 밥 한 공기만 남았다고 해도, 아니, 아니지, 설사 밥이 반 공기만 남았다고 해도 나는 샤오첸과 절반씩 나눌래요. 쌀 한 톨만 남았다면 그 쌀 한 톨에 깃들어 있는 일곱 신 중에서 네 명의 신을 샤오첸에게 줄래요." (...) 제가 바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이 사람과 결혼한다면, 어쩌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이때 있었던 일을 조식 테이블에서 요코 씨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요코 씨는 웃으며 말했지요. "첸허 여사님도 역시 제 어머니를 좋아하셨네요." 그런가요? 그랬을지도요. 버드나무 작은 집에서의 국수도 어느새 30여 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날아가는 시간이여, 이 술을 한 잔 마시게나.' 그래서 이 시를 읊고 싶어졌나 봅니다. 그러나 서정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소설은 고하쿠, 즉 호박 보석과도 같다. 그 속에는 진실한 과거와 허구적 이상이 응결되어 있으니까. 곱씹을수록 깊은 맛을 주고,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 치즈 이야기
- 처음 만나는 양자의 세계
- 네 발의 철학자고대와 현대의 위대한 철학의 아버지들에게 이성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고 우월하게 만드는 특성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성이 무엇인지를 더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섀도이다. 이성은 커다란 도구 상자 안에 든 하나의 도구이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성이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뇌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정보 저장 구조를 조작하는 세상 속 과정에서 찾을 수도 있다. 나아가 혹시 개라면 특히 그럴 텐데, 다른 사람의 뇌에서 찾아낼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성이 어디 있는지, 누가 가졌는지가 아니라 언제든, 어떻게든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타인이 추론을 대신하도록 위임하는 것, 즉 나를 대신해 이성을 사용하게 하는 것은 결국 이성적인 행동이다. 인간은 두 가지 삶을 동시에 산다. 우리는 천국이 아닌 우리가 딛고 선 이 땅 위에서 두 삶을 살고 있다. 내부에서 사는 삶이 있고 외부에서 사는 삶이 있다. 하지만 개에게 삶은 필연적으로 내부에서만 살아지는 것이다. 견생에는 내부만이 존재하며 이는 시야에 한계가 없듯 한계가 없는 삶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듯 시야의 한계는 볼 수가 없다. 시야의 한계는 보는 것이 멈추고 보이지 않는 것이 시작되는 곳이다. 지당한 논리이다. 시야의 한계가 시야에 들어오고 그래서 눈에 보인다면, 그것은 더는 시야의 한계가 아니라 시야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시야에 나타나는 것은 한계가 될 수 없다. 이와 유사하게 비트겐슈타인은 죽음이 삶에 속한 사건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닐 것이다. 시야의 한계가 시야의 일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죽음은 삶의 한계이기에 삶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내부에서 바라본 삶, 즉 지금 살고 있는 삶에만 해당한다. 개는 이런 종류의 삶만을 살기 때문에 견생에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한계가 없다. 하지만 인생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내부에서 바라본 삶과 외부에서 바라본 삶, 두 가지를 동시에 산다. 그리고 외부에서 본 삶에는 식별 가능한 한계가 있다. 외부에서 볼 때 죽음은 삶의 한 사건이다. 개와 달리 인간은 삶을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기도 한다. 삶에서 우리는 배우이자 관객이다. 배우로서 우리는 삶에 몰입한다. 하지만 관객이 되면 삶에서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고 평가한다. 그 결과, 두 삶 중 어느 하나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이것은 삶의 개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삶 속의 의미는 진정한 행복이고, 행복은 본성에서 우러날 때 진정성을 지닌다. 그러나 개들은 우리보다 훨씬 강한 의미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개의 본성은 화강암 판처럼 묵직하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성찰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서 조각났다. 우리에게 본성이 있다면, 그것은 실체가 없고 속이 훤히 비치는 천만큼 얇디얇다. 우리가 본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추가 협상을 위한 기초 단계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기 해석적 존재이기에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연약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 나의 본성으로 말하자면, 내가 무엇인지는 물론 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도 있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내가 무엇인지 해석하는 방식,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다양한 사건과 상황에 어떻게 의미를 할당하는지도 있다. 좋든 나쁘든 내게 일어나는 일의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 내게는 어떤 의미인가? 내 삶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앞으로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나의 본성은 항상 진행 중인 작업이며, 섬세하고 지속적인 해석을 위한 노력의 문제이다. 삶 속의 의미는 본성에서 분출하는 행복이다. 그러나 나의 본성에는 고정된 것이 거의 없다. 나의 본성은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불안정하다. 나를 해석하려는 다른 사람의 노력은 나의 해석을 위한 노력에 쉽게 영향을 미친다. 나의 본성에는 행복이 분출의 도약대로 삼을 만한 확고한 기반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섀도의 견생이 나의 인생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다. 기억을 잃으면 그 기억들은 어디로 갈까? 우리 집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했던 질문이다. 좋은 질문이다. 정말 좋은 질문은
- 눈알이 제일 맛있단다하려면 그가 밑에 깔고 앉은 깔개를 빼내야 한다. 물론, 한 번의 당김만으로 뽑을 수는 없다. 여기저기서 조금씩 잡아당겨야 한다. 그 남자가 자기 권력을 휘두르려 할 때 물러서지 않는다. 그 대신, 작은 거짓말들을 흘려 넣으며 그를 매번 조금씩 넘어뜨린다. 기회가 올 때마다, 할 수 있을 때마다 그의 작은 실수를 지적한다.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가 스스로를 어리석게 느끼도록 만든다. 그와 같은 남자는 자신이 틀리는 걸 싫어하고, 창피당하는 걸 싫어하고, 통제력을 잃는 걸 싫어한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기 분노를 유치하게 표현하고, 성질이 나서 짜증을 부리고, 침울하게 삐쳐 있는다. 하지만 그 남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약한 쪽은 그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 남자가 가진 유일한 힘의 원천은 바로 당신이 그에게 기꺼이 바치는 힘인데, 지금까지 당신은 그 남자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고 끝까지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것이다. 단 한 조각도.
- AI 버블이 온다
-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여기서 마지막 대목, '달리아를 심었다고 생각했는데 가지가 튀어나왔다'를 나는 '진실한 말(자신의 단어)이 삶을 놀라운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한번 놀라고 나면 그다음 놀라움도 가능하다. 이야기의 신비로움은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야기의 신비로움은 삶의 신비로움이 된다. 그 반대말도 사실이다. 삶의 신비로움 없이는 이야기가 없다. 좋은 이야기 안에는 늘 원인과 결과의 딱딱한 인과론만으로도, 숫자로도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것이 모든 좋은 이야기 안에 있는 '고유한 기쁨'이고, 보르헤스가 언어 공동체에서 우리의 의무는 우리의 말을 찾는 것이고 단어를 찾는 것은 부적과도 같은 힘을 주고, 단어를 찾는 것이 곧 회복이라 말한 뜻일 것이다. 나는 현재 우리의 위기는 미래를 말하지 않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믿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좋은 미래를 믿지 않는다. 미래를 위한 질문을 하고 대안을 말하는 것을 너무 큰 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이 진정으로 알고 싶어 하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미래다. 진정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좋은 미래다. 언어 공동체에 속하는 우리가 이 좋은 미래를 만나는 방법은 좋은 미래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 새로운 세계의 창조 앞에는 언제나 언어와 이야기가 있어왔다. 그러니 살아 있는 자의 심장에서 나온 살아 있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살아 있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한 사람의 좋은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좋은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부드럽게' 각인되고 남아서 우리의 자아를 바꾼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드러움 중 가장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것은 인간의 변화다. (...) 살아 있는 목소리가 없는 것도, 우리가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것도 아주 슬픈 일이므로 우리에게는 어둠 속에서 함께 나눌 이야기가 필요하다. 글의 초반에 몇몇 단어들이 그립다고 한 이유는 명백하다. 나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몇몇 단어 안에 비밀이 있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바꾼다. 우선 이야기를 하면서 나부터 새롭게 바뀌고 싶다. 나의 누이는 너의 누이가 되고 나의 전투는 너의 전투가 되고 나의 늑대는 너의 늑대가 되고 너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되고 너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 되고....... 그리고 다음번에는, 우리는 정말로 더 잘 사랑해야 한다. 처음에 사랑했던 것보다 더 많이. 제 아내와 제가 사는 것, 혹은 제 친구들과 제가 사는 것이 그렇죠. 우리는 서로가 지고 있는 무게를 알아요. 제 아내와 저도 서로 상대방이 지고 있는 무게를 압니다. 저는 사람을 보면 항상 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게가 보여요. 제 생각에 사람 사이의 균형과 조화란 게 서로의 무게를 알면서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야 둘이 같이 가라앉지 않아요. (...)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당신은 타인을 볼 때 무엇을 보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타인이 무엇을 가졌는지, 무엇을 누리는지를 주로 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에,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을 누린다는 생각에 고통을 받는다. 반면 타인을 볼 때 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게를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자신의 고통으로 타인이 지고 있는 무게를 가늠해보는 사람 또한 드물다. 하지만 아주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의 말은 다르다. 그는 영혼에 바다를 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여름, 국수를 좋아하는 세월호 희생자 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강화도에 맛있는 국숫집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나는 일몰도 볼 겸 아버지와 함께 강화도로 갔다. 우리는 식사 전에 호젓한 둘레길을 별말 없이 걸었다. 좁은 흙길 한가운데 여치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커다랗고 잘생긴 놈이었다. 자세히 보니 여치의 날개 한쪽이 없었다. 아버지가 여치를 들어서 풀잎 위에 올려놓았다. 몇 발자국 걷다가 우리 둘은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한
- 공통된 것 없는 공동체이처럼 상품 교환의 논리가 일반화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당연한 경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이 당연한 경향을 그대로 두면 사회의 유지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상품 교환의 논리가 가족관계를 완전히 지배하면 가족은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국가와 시민의 관계가 서비스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로 규정되면 국가는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모든 가치가 화폐의 액수로 환산되는 곳에서는 양적 측정이 불가능한 가치, 즉 인간의 가치를 다룰 수 없게 된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이렇지 않은가? 이 사회가 인구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필연적 결과다. 지금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믿음 중 하나는 나의 행위와 그 대가 사이에 등가관계가 성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면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하고, 타인에게 가치 있는 것을 제공하면 그에 해당하는 것을 다시 받아야 하며, 피해를 보면 그에 맞는 보상을 받거나 가해자에게 같은 피해를 주어야 한다. 행위와 대가 사이의 비대칭적 교환, 완료되지 않은 교환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 상품 교환의 논리가 모든 가치를 양적으로 측정하는 것처럼, 공정 역시 양적 측정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다. 시험 성적이라는 양적 지표로 검증된 것만이 능력으로 인정될 수 있고, 그 성적은 양적 보상과 교환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한국식 공정이란 시험 성적과 소득이 등가교환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사전적 의미의 '공정'이나 'fairness'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강력한 처벌에 대한 집단적 요구는 꽤 독특한 현상이다. 명확한 의미도 없고 현실의 문제에 대응하지도 못하는데, 많은 사람이 계속 그것에 집착한다. 이것이 가해자-피해자 도식의 주요 효과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제외한 모든 것을 삭제하고 나면 개인 사이의 부채관계만 남고,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징계하는 것만이 정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정의를 실현한다고 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 내 '갑질'과 따돌림을 성토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런 일을 가능케 하는 노동법, 기업 조직과 문화, 노사관계, 위계적 사회관계의 문제를 고려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 이른바 'n번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강력한 처벌과 가해자 신상 공개를 요구했다. '어떻게 이런 온라인 집단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그런 폭력이 발생하는 환경과 구조를 이해하고 바꾸려는 시도 역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후에도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지만, 집단적 분노는 놀라울 정도로 허약해졌고, 공동체는 여전히 이런 종류의 폭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통속적 복수극을 향해 던졌던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모든 인간적 가치는 고유한 것이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고통은 등가교환될 수 없으며, 가해자에게 어떤 고통을 주어도 훼손된 인간적 가치를 상환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어떻게 '강력한 처벌'로 부채를 청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은 현실이 픽션처럼 다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서 폭력이 발생하면 대중은 관객이 된다. 시청자가 복수극 드라마를 보듯 대중이 현실의 폭력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그리고 관객의 심리 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고통이 등가교환되는 것처럼, 현실의 고통도 대중의 심리 안에서 등가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여기서 가해자-피해자 도식의 숨겨진 작동 방식이 드러난다. 사실 폭력에서 비롯한 부채관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와 분노한 대중 사이에 형성된다. 이는 감정의 부채다. 대중은 가해자의 행위에서 감정의 피해를 보고, '강력한 처벌'을 통해 감정적 보상을 받으려 한다. 만일 이것이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부채였다면, 처벌이 부채를 청산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통속적 복수극에서 피해자의 존재가 잊히는 것처럼, 현실의 가해자-피해자 도식 역시 피해자의 존재를 삭제한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항상 가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 독학이라는 세계이런 지식은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극적인 호기심에 응답하는 형태로 쌓이기 때문에 외우려 하지 않아도 알아서 머릿속에 들어온다. 의문의 씨앗은 일상에 얼마든지 널려 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뿐이다. 질문하지 않으면 거대한 지식의 강도 만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그 책에서 정말 얻은 건 그런 배경지식이 아니었다. 나는 '목숨을 걸고 전 인류를 향해 진지하게 책 한 권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이란, 그 내용이 무엇이든 무조건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금과옥조가 아니다. 더 깊이 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이다. 중요한 건,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하나의 견해로서 그것이 어떻게 성립했는가다. 결론보다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고의 경로를 밟았는지를 읽어 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 과정을 보려고 할 때, 우리의 두뇌는 비로소 움직이며 생각하기 시작한다. 지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는 타인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며, 오직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독학의 영역이다.
- 아무튼, 디지몬
- 삼체 2부
- A가 X에게모든 사랑은 반복을 좋아해요. 그것은 시간을 거부하는 것이니까요. 당신과 내가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초자들이 문을 열어 놓은 채 나란히 늘어서 있어요. 낮에 있었던 말다툼이나 최근에 죽은 사람, 누가 새로 아기를 가졌는지, 오늘 밤엔 어디서 물을 길어 와야 할지를 이야기하죠. 수천 개의 가정들. 그 가정들 하나하나마다 예측하지 못했던 비밀들이 숨어 있어요. 그들은 그런 비밀들과 떼어놓기 위해 당신을 감옥에 넣었지요. 그래서 나는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춰 당신에게 그것들을 보냅니다. 그들은 그 비밀들을 읽을 수 없고, 당신은 읽을 수 있어요, 그러니···. 몇 년 후, 그들의 추적을 피해 매일 밤 잠자리를 바꿔 가며 지낼 때 당신이 말했죠. 공중제비에서 가장 큰 유혹을 느끼는 순간이 마지막 구십 도를 돌 때라고, 그때 조종사는 다시 삶을 선택하고 평행을 유지하는 거라고. 하지만 그 선택은, 미 소플레테, 이미 거기에 있었어요. 당신과 함께 비행했던 그 침묵의 거리와 친밀함 속에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고요. 세 번의 공중제비를 하는 동안, 한 번씩 돌 때마다 우린 그 무한함을 조금씩 더 되살렸어요. 왜 눈물이 났던 걸까. 의자를 고치는 건 이렇게 쉬운데 나머지 일들은 너무 어려워서? 아니면 이젠 의자 고치는 일 같은 걸 당신에게 부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당신에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 주죠. 오래전에는, 영원함에 가장 가까운 상태는 사랑을 나눈 후 찾아오는 축복받은 느낌이라고 생각하곤 했죠. 하지만 이젠 거리에서 들려오는 희망적인 소문들을 들을 때라고 말하고 싶어요. 거리가 잘 포장되고, 총들은 모두 집안에 곱게 모셔 두고,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산수를 가르치는 그런 미래에 들려올 소문이요. 이런 텅 빈 밤에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나면, 커다란 무언가가 내게 찾아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침묵은 언제나처럼 압도적이죠. 내가 받는 것은 당신의 응답이 아니에요. 있는 건 항상 나의 말뿐이었죠. 하지만 나는 채워져요. 무엇으로 채워지는 걸까요. 포기가 포기를 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선물이 되는 것은 왜일까요. 그걸 이해한다면, 우리에겐 두려움도 없을 거예요. 이제 인간들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들의 매 순간, 매일의 삶들을요! 인간들의 삶은 어떤 합의된 규칙성에 의존하고 있는데, 각자가 그 규칙성에 나름 기여를 하고 있죠. 그 규칙성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제가 말한 잃어버린 습관이에요. 매일 시장에 신선한 과일이 들어오고, 밤이면 가로등에 불이 켜지고, 편지를 앞문 밑으로 밀어 넣고, 성냥갑 속의 성냥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넣고, 라디오에선 음악이 흐르고, 낯선 사람들끼리 미소를 주고받는 것들이, 모두 그런 습관으로 설명이 되죠. 그 규칙성에도 박자가 있어요, 아주 희미하고, 들리지 않을 때가 많고, 그리고 동시에 심장박동과 비슷하죠. 그곳에 환상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요. 그 박자가 외로움을 그치게 해주지도 않고, 고통을 치유해 주지도 않으며, 전화로 그 박자를 전해 줄 수도 없죠. 그건 다만 당신이 어떤 공통의 이야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뿐이에요. 지금 우리의 삶은 끝없는 불규칙성에 빠져 버렸어요. 그런 삶을 강요한 자들이 오히려 우리의 불규칙성을 두려워하고 있죠.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몰아내기 위해 담장을 세워요. 하지만 모든 걸 막을 수 있을 만큼 긴 담장은 불가능하고, 어떻게든 돌아가는 길은 있기 마련이죠. 위로든 아래로든. 곧 만나요. 당신의 아이다.
-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물론 '이런 책을 읽고 싶었다'는 독자의 반응은 읽은 후에 독자가 만든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왔던 '읽고 싶은 책'의 조건을 딱 충족시키는 책과 드디어 만났다는 이야기만큼 우리를 달뜨게 하는 것은 없죠. 그러므로 우리는 책을 만난 후에 '그 책을 오랫동안 기다려 온 나'라는 상을 빚어 냅니다. 사후에 기억을 개조하는 거죠. 급히 덧붙이자면 이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렇게 기억을 고쳐 쓰면서 살아가는 생명체니까요. 아마도 사람 없고 조용한 공간이 아니면 '책'이 저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일 테죠. 정말로 그렇습니다. 서가 사이를 돌아다닐 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요. 그런 때면 제가 이 세상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서가의 거의 모든 책을 저는 읽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책의 99.999999퍼센트를 저는 아직 읽은 적이 없습니다. 그 사실 앞에서 망연자실해집니다. 제가 모르는 세계가, 그리고 자칫하면 제가 죽을 때까지 모르고 끝날 세계가 그만큼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 앞에서 종교적이기까지 한 감동을 느낍니다. 도서관이 거기에 들어온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마도 무한이라는 개념일 겁니다. 거기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인생의 유한성'과 '앞의 유한성'을 자각하죠. 이 이상 교육적인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얼만큼 자신이 세상을 모르는가, 세상을 모르는 채로 일생을 마치는가. 앞으로 평생을 바쳐서 아무리 똑똑해지려고 노력한들 이 거대한 앎의 저장소 가운데 끄트머리 한구석밖에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죠. 다만 끄트머리 한구석이라고 해도 '내가 이 무한한 장소의 일부만큼은 닿을 수 있고 잘하면 그 일부가 될 수도 있겠구나' '이 무한한 장소에 내가 만들어낸 것을 보탤 수 있겠지도 모른다' 하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지적' 상태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을 한마디로 하면 '조심스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무한한 삶에 대한 '예의 바름'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내가 얼마나 세상을 모르는지, 내 앎이 닿을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좁은지에 관한 '유한성의 자각'이 지적 상태입니다.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이렇게 '무한한 앎을 향해 열린 도서관'이 있기 때문이고요. 독서인은 유용한 지식과 실용적인 정보를 얻으려고만 책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결여리 채우기 위해서 책을 선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직 여기에 없는 결여'를 기준으로 책을 선택합니다. (...) 책의 본질은 '언제가 읽어야 한다는 관념' 위에 있습니다. 출판 비즈니스는 이 '허' 慮의 수요를 기초로 존립합니다. 하이데거부터 도라에몽까지, 마루야마 마사오부터 다리오 아르젠토까지 넓게 커버할 수 있는 관용적 지성의 소유자임을 알아 달라는 제 욕망이 거기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책장에 어떤 책을 어떻게 꽃느 냐 하는 문제에는 수행적인 목적이 동반됩니다. (...) 인간은 자신이 달성한 일에 관해 종종 '바람'과 '사실'을 혼동합니다. 똑같은 일이 책장에서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저도 자주 경험하는 일인데요. 우리 집에 와서 제 책장을 본 사람들은 제가 거기에 있는 책을 전부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하죠. 설마 그럴 리가요. 책이 상품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시장을 오가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텍스트의 질이 올라가서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양쪽의 이익이 증대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유의 전부입니다. 책이 본래 상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 축복받은 집아들이 좌절할 때마다 나는 아들에게, 이 아버지가 세 대륙에서 살아남은 것을 보면 네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고 말해준다.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나 혼자뿐인 것도 아니고 내가 최초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 어번던스기술이 변화의 원동력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기술에는 가치관과 정치가 녹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기술과 가치관·정치의 관계는 쌍방적이다. 정치가 우리가 개발하는 기술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개발하는 기술도 우리가 놓인 정치적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재생 에너지가 값싸고 풍부한 세상의 정치는 재생 에너지가 비싸고 귀한 세상의 정치와 다르다. 모듈 건축으로 건축 비용이 하락한 세상에서는 주 정부와 지역 정부 예산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이미 집을 소유한 이들에게는 집의 가치가 절상하는 동시에 아직 집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집을 장만할 수 있을 정도로 집이 저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게 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논리는 벗어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가 어떤 정치적 환경을 조성할지는 뻔하다. "주거 시설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주거 시설의 희소성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체제는 그 성격상 집을 소유한 사람들과 집을 장만하려는 사람들이 맞서 싸우게 만든다"라고 뎀사스는 말한다. 조직화한 집단이 많을수록 분배를 두고 더 많이 다투게 되고, 로비 활동도 더 활발해지고, 복잡한 규제가 더 많이 생기고, 집단들 간의 협상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고, 복잡한 프로젝트를 완성하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올슨은 말한다. 풍요롭고 안정적인 사회에서는 훨씬 많은 협상이 이뤄진다. 따라서 더 많은 협상가가 필요하다. 이는 바람직하다. 사람들이 우려하는 바가 전달되고, 요구 사항이 충족되고, 서로 다른 아이디어들이 통합되고, 생각이 공유된다. 그러나 동시에 무슨 일이든 마무리하기 어려워진다. 캘리포니아주는 고속철도 수백 마일도 건설하지 못하는데 중국은 고속철도를 수만 마일 건설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중국은 화물 보관 시설을 옮길지를 두고 여러 판사와 논쟁하느라 몇 년을 허비하지 않는다. 중국 당국의 막강한 힘은 남용과 독단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고속철도의 신속한 건설로 이어지기도 한다. 법률 훈련을 정치 경력을 쌓는 데 필요한 기본 요건으로 만들면 법률적 사고가 정치의 기본적인 사고가 된다. 그리고 법률적 사고는 결과보다는 법적인 용어와 절차 준수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올슨은 번영하는 성공적인 사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복잡해져서 헤쳐나가기 어려워진다고 예측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집단들이 늘어나고 법과 절차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그런 복잡다단한 환경을 잘 헤쳐나가는 데 최적화한 사람들이 성공한다. 경제 부문에서 그런 사람들은 아마 경영 컨설턴트와 금융인들일지 모른다. 정치에서는 단연 변호사다. 변호사가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변호사가 필요하고 나라나 정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변호사가 그처럼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나라나 정치 체제라면 뭔가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 수많은 집단의 이해관계를 균형 맞추는 데 골몰해 공익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체제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 국민이라면 미국 정치 노선은 강하고 적극적인 정부를 믿는 리버럴 진영과 정부를 불신하는 보수 진영으로 나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리버럴 진영은 정부를 믿는다면서 정부가 실제로 일을 하기 어렵게 손발을 묶는 정책을 끊임없이 통과시킨다. 보수 진영은 작은 정부를 원한다고 말은 하면서 정부가 막강한 권한과 힘을 행사하는 국가 안보와 감시 체제를 지지한다. 양 진영 모두 자기들이 원하는 정부와 그 정부가 했으면 하는 역할이 모순된다. 큰 정부와 작은 정부 구분은 보통 정부의 본질적 차이라기보다 정서적 차이다. 지역 사회의 반대를 극복하려면 각종 요구에 합의해야 하고, 그러면서 건설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지역 사회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개발업자들은 몸값 비싼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기고, 끊임없이 계획을 수정하고, 심미적인 면에서 그리고 건축 설계 면에서 온갖 양보와 추가를 하고, 변호사와 회계 감사관을 추가로 고용하는 등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끝도 한도 없었다. 개발 프로젝트가 이 모든 장애물을 다
- 홍학의 자리
- 오래된 세계의 농담고전은 읽히기보다는 숭배되는 책이다. 그래서 고전 독서는 종종 파편화된다. 거창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단어들은, 그런데, 생명력이 강하다. 끝까지 살아남는다. 어떤 예술가들은 그런 희망을 포착한다. 그들은 슬픔과 절망 사이에 빛나는 아주 작은 것들을 발견하고, 그 순간을 영원으로 만든다. 그것을 우리는 예술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작은 것들의 신》에는 섬세하게 묘사하고 또 묘사하는 감각적인 문장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내용 파악이 더 어려운 면도 있다. 문장마다 깊게 웅덩이가 고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니까.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 문장에 집중하게 되는 면도 있어서, 《작은 것들의 신》을 다시 읽으면서는 다소 과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멈춰 서서 나뭇잎을 바라보고 그의 벗은 등을 만지듯이 응시하고 작은 물방울소리에 넋을 놓는다고? 그래서 소는 언제 키울 생각이야? 이런 생각. 하지만 긴 시간 이 책을 거듭해 읽으면서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작은 것들'이며, 이 순간들을 잘 붙잡는 방식이야말로 '작은 것들의 신'이 우리의 삶에 깃드는 방식임을. 카멜레온 한 마리가, 색이 아주 선명한 히비스커스 한 송이가, 바쁘게 움직여 몸을 숨기는 잿빛 정글 새가 삶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순간 등장하는 윤이 나는 대나무 경찰봉. (이 즈음에서 또한 말해야 할 것은 아룬다티 로이가 이 소설을 쓴 뒤로는 소설이 아닌 비소설 작업을 오래 했는데, 인도의 핵무기 개발, 대형 댐 건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소수자 탄압과 카스트 제도 등에 꾸준히 반대 목소리를 내며 글쓰기로 정치적 투쟁을 활발히 했다는 사실이며, 그것은 '거대한 것들'을 직접 언급함으로써 '작은 것들'을 지키는 그의 고집스러운 방법론이라는 사실이다.) 초등학생 때 내가 용돈을 아껴 사모았던 색색의 지우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밤 끌어안고 잤던 인형들은 다 언제 내 방에서 사라진 걸까. 분리, 이별, 망각은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다. 그 시기에 내가 경험한, 내게는 고유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보편적이었던 고통과 기쁨은 내가 가진 정신적 지형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못된 면, 웃긴 면, 사나운 면이 다 그렇게 모양새를 잡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때보다 더 내가 되었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은 여전히 조금씩 변화를 겪는 중임을 안다. 《17세의 나레이션》에는 이런 질문이 나온다. "너는 네 자신이 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만 빼고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니… 아니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만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니…" '세영아 알고 있니, 그 질문을 너는 앞으로도 한평생 반복하며 살게 될 거야. 그 순간 삶의 만족감이 어디서 비롯하는지에 따라서 답은 전자였다가 후자였다가 할 거야. 택일식 질문에 정답은 없다는 걸 너는 알게 되겠지만, 어떤 답을 고르는지, 어떤 태도로 답을 고르는지, 그 생각을 어떻게 삶에 반영하는지가 답보다도 중요하다는 것만은 잊지 말아줘. 네가 망설일 때 기다려줄 줄 아는 사람과 연인이 되고 친구가 되면 좋겠다. 그리고 이 모든 질문과 조언은, 네가 나이 들어가는 나날에도 중요해. 여름방학이 끝나도 빛나는 날들은 있어. 가장 어두운 날들에도 그 사실만은 꼭 붙들고 살아가.' 세영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궁리했는데, 그 말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 귀신들의 땅나는 죽었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기억은 나의 존재이자 순환의 매개다. 나의 기억과 타인들의 기억을 통해 나는 존재한다. 이곳에 존재하고 현장에 존재하고 여기에 존재하고 저기에 존재한다. 나는 기억에 의지하고 기억에 기생한다. 기억이 있는 곳, 말할 이야기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있는 현장이자 구전의 역사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과 구강과 혀끝에 존재한다. 오늘 그는 돌아왔다. 그에게는 해답이 없었다. 사람은 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어디가 집인가? 그가 돌아온 것은 속죄를 위해서도 아니고 참회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해답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귀향은 의무였다. 귀향은 그를 질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돌아와야 했다. 요컨대 서로를 얘기하지 않는 것이다. 예의로 서로를 대한다는 것은 언어의 예절을 이용하여 서로를 가능한 한 멀리 밀어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누구도 강가에 닿지 못하고 계속 표류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외로운 섬이 될까 두려워 거미가 거미줄을 토하듯이 액체 상태의 말을 분출하여 공기 중에서 가는 실을 만들고, 섬유 상태의 가는 실로 서로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가벼운 충격을 만나면 서로 흩어질 것이고, 이미 섬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서로가 부르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최소한의 가는 실 같은 예의가 있는 것이다. 절대로 의미 있는 뭔가를 묻지도 않고 인사도 건네지 않는다. 분명히 한가족이면서도 바람이 불면 먼지처럼 흩어져 날아가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처럼 상처를 받을 말은 하지 않는 것이다.
- 삼체 1부 - 삼체문제보라, 이것이 바로 벌레다. 벌레의 기술과 우리의 차이는 우리와 삼체 문명의 차이보다 훨씬 크다. 인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것들을 박멸하려고 했다. 각종 살충제를 비행기로 분사하기도 하고 천적을 키워 뿌리기도 하고 알을 찾아 없애고 유전자 변형으로 번식을 근절하기도 했다. 태워도 보고 수몰시키기도 하고 각 가정에 살충제를 비치해놓고 사무실 책상에는 파리채같이 그들을 없앨 무기도 준비해 놓았다. 이 긴 전쟁은 인류 문명과 늘 함께했고 아직까지도 승패가 결정나지 않았다. 벌레는 멸종되지 않았을 뿐더러 예전처럼 여기저기에서 횡행한다. 그 수도 인간이 나타나기 전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인류를 벌레로 보는 삼체인은 벌레는 한 번도 정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 그만 배우기의 기술- just-in-time information (지금 이순간에 요구되는 정보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의도적으로 차단함) - 나중에 보기 시스템 만들기(어차피 안 들여다볼 거긴 함) / 선택한 길 신뢰하기 / 정보 경계 설정하기 / fomo를 점검 지점으로 쓰기 / 학습을 스케줄링하기 - 자발적 강제 장치 - 행동을 끌어내기 위한 의도적 제약
- 소유하기, 소유되기그레이버는 우리가 스스로를 소비자라고 여길 때 무언가 파괴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일 바깥에서도 생산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셔먼은 착한 부자와 나쁜 부자를 나누는 일은 부자에게나 다른 모두에게나 한낱 시간 낭비라고 주장한다. 행동을 기준으로 부자를 평가하는 것 — 그들이 충분히 열심히 일하는지, 충분히 합리적으로 소비하는지, 충분히 남에게 돌려주는지 — 은 엄청나게 불평등한 부의 분배의 도덕성을 묻는 다른 종류의 질문들에서 시선을 돌리게 만들 뿐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부자에게 착한 것을 요구하는 대신 우리의 경제 체제에게 더 나아질 것을 요구해야 한다. 프로스트는 다른 사람이 돈벌이로 하는 일을 놀이로 할 권리가 자신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굳이 그 일을 하겠다면, 그때 그의 권리는 사랑이었다. 그들의 권리는 필요였다. 〈그들의 권리가 더 낫다 — 인정한다.〉 그는 양자를 분리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랑과 필요가 하나가 될 때에만, / 일이 생사를 건 놀이일 때에만, / 그 행위는 진정 천국을 위하여 / 그리고 미래를 위하여 수행된다.〉 우리가 가치를 바라보는 방식은 마추카토가 바꾸고 싶어 하는 것 중 하나다. 그녀는 우리의 가치 개념이 순환적이라고 지적한다. 〈소득은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한 대가라고 정당화된다. 그런데 그 가치는 어떻게 측정되는가? 그것이 소득을 벌어들이는가 아닌가에 따라 측정된다.〉 그리하여 《불로 소득》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만약 우리가 가치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면, 현재의 경제 체제를 손질하여 가령 어린이 복지나 환경 보전처럼 사회 전체적으로 가치 있는 것들에게도 경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도 투자는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투자하고 있나?〉 하는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비극은 이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비극은 그 글이 쓰일 시점에 이미 공유지는 사라졌다는 점, 그리고 과거에 모든 사람이 공유지에서 최대한 많이 얻어 내는 것을 방지하는 규제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이미 잊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공유지란 규제될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자유 시장 자본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이 글의 해석임을 나도 안다. 이 글이 실은 가난한 사람들의 〈번식〉을 제한하려는 논증으로서 작성되었으며 부정확하거나 아예 틀린 점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그 글의 진실성은 영향력보다 덜 중요하지.」 언젠가 한 동료는 이 글에 대해서 내게 말했다. 동료의 말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거짓말이 우리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려 준다는 뜻이었다. 〈마흔 살이 되어 갈 때, 나는 허비된 시간 속에서 시들어 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의미를 파악하고 그 속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특별한 꿈을 꾸었다.〉 코널리는 말한다. 「시간과 돈을 보면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게 뭔지 알 수 있죠」 이 이웃은 언젠가 내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시간과 돈을 음악과 연극에 써서, 콘서트와 공연을 보러 다닌다. 그녀는 예술에 투자한다. 나는 내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글에 쓰고 내 돈은 이 집에 쓴다. 나는 그동안 한 가지 결정을 내린다. 나는 책 — 이 책 — 을 팔아서 나 자신에게 시간을 사 줄 것이다. 내가 이미 글쓰기에 써버린 내 시간이 제값을 스스로 치를 것이다. 마치 푸코의 진자처럼, 무겁고 반들반들한 추가 길이 67미터의 철선에 매달려 앞뒤로 조용히 흔들리면서 그 축으로써 지구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그 진자처럼, 이것은 무동력이고 자유롭고 영구적인 과정일 것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마찰에 의해 사라지기 마련이다. 진자는 결국 느려지다가 멈춘다. 그리고 이 위에서, 시간에 대한 나의 욕망에 의해서 책들이 결국 균형을 잡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나는 갓 파낸 흙이 가득 담긴 손수레가 나의 조용하지 않은 무덤 위에서 쉬고 있는 것을 바라본다. 이제 나는 내가 판 구덩이 속에 들어와 있네, 나는 재미있어하면서 생각한다. 그리고
- 결혼식 가는 길저는 예전에 철학도였고, 여기 마렉은 재즈 연주자였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한 후에, 저희는 새 울음소리를 만드는 것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덜 해로운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죠.(동시에 저희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하고요.) 그들은 종종 그렇게 기다린다. 피아데나 같은 작은 도시, 도심의 건물들이 아무것도 가리지 못하는 이 평원의 작은 도시에서, 젊은이들은 인생이 중요해지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런 순간들은 아주 빠르게 왔다 가 버린다. 그 후에는, 아무것도 이전과 같지 않고, 그들은 또다시 기다린다. 이곳에서 시간은 종종 일 분도 안 되는 시합을 위해 몇 달 혹은 몇 년을 준비하는 운동선수의 시간과 비슷하다. 그리고 우리를 제거할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요. 우리는 뭐든 다운로드 받을 수 있어요. 천국은 살기 위한 곳이 아니죠, 세례 요한이 말한다. 거기는 잠깐 방문하는 곳이에요. 제가 아저씨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무슨 생각했는지 아세요? 루나틱이 말한다. 어딘가를 가려면 아저씨도 표지판을 찾으시잖아요, 그렇죠? 가려는 곳을 알려 주는 표지판이요. 일단 그것만 찾으면 길은 어디로든 아저씨를 이끌어 가는 거잖아요. 숲을 가로지르고, 강물을 따라 달리고, 학교와 공원과 병원을 지나고, 교외 지역을 가로지르고, 터널을 통과하고, 그 길이 아저씨를 어디로 이끌든, 표지판에서 읽은 이름에서 그곳에 대한 어떤 의미를 떠올리게 되잖아요. 우리가 여기저기 떠돌 때도 마찬가지예요. 일단 백도어를 통해 접속에 성공하면, 우리가 뭘 찾는지 아는 거예요. 제 생각에 인생에서는요, 알게 된 무언가에 대해 의미를 주는 건 장소가 아니라 사람인 것 같아요. 아끼는 사람이나 존경하는 사람이요. 지금 제 생각은 그래요, 프랑스 아저씨.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해킹을 하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한 번 더 말한다. 우리는 광기(craziness)와 속임수(cunning)와 보살핌(care)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갈 거예요. 셋 모두랑요. 'c'가 세 개네요. 권투선수 마테오는 제가 미쳤대요. 제가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다고, 제가 말해요. 물고기는 꼬리지느러미로 자신이 태어난 강의 소리를 듣는 거라고, 제가 니농에게 이야기해요.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미소를 띤 채 잠이 들죠. 마렐라를 만난 아이 엄마가 아는 척을 하고, 마렐라는 유모차 안을 들여다본다. 유모차의 덮개는 열려 있고, 아이의 눈에 햇빛이 비치지 않도록 웨딩드레스에서 떼어낸 레이스를 달아 놓았다. 마렐라는 입으로 쭈쭈 소리를 내며 아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지노랑 똑같이 생겼네, 그렇지 않아? 이것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이 상황이, 그녀가 결혼식에서 거기에 맞춰 춤추는 음악 안에 담겨 있다. 시간이 진동이 될 때, 음악이 그렇게 만들 때, 영원은 진동들 사이의 침묵 안에 담긴다.
- 갈등하는 눈동자앞서 언급한 책에서 최태현은 야생지역 보존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 작가인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의 문장, '인간의 마음이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을 인용한다. 나는 이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를 《더 커뮤니티》의 하마를 통해 이해했다. 하마의 마음에 타인을 들일 공간, 즉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이 있다는 게 믿어져서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했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진정한 동료들이 문제를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 아니겠냐고. 나의 문제가 개선되는 사이, 누군가의 문제가 악화되는 삶의 역설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마음을 지닌 자는 별 도리 없이 겸손해진다. 훗날 에르노는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가 필요했다고 고백한다. 백인 남성주의적 세계에서 감각을 포착하는 탐색 도구로 일인칭을 활용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우리 중 누구도 자신만의 삶을 사는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고 썼으나 모든 사건은 개인적인 방식으로 냉혹하게 체험된다는 게 에르노의 생각이다. 다만 책 속의 '나는' 어떤 식으로든 투명해진다면 독자의 '나는'도 그 자리에 들어올 수 있다고, 그렇게 일인칭은 보편에 도달한다고 에르노는 말한다. 못난 딸들이 으레 그러듯이 나는 작가로서의 내 결함 (충분히 첨예하지 않음, 유치함, 사유의 길이가 짧음 등) 이 모두 저 여자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물려준 엄청난 단순함과 명랑함이 아주 보잘것없는 장점 같았다. 애트우드에게 보부아르가 있듯 나에게도 있다. 징그럽게 똑똑한, 내가 절대로 쓰지 못할 문장을 쓰는 동료 작가들이. 그들은 시시각각 나를 작아지게 한다. 그러나 《타오르는 질문들》을 선물하고 보부아르에 대한 애트우드의 헌사를 소리 내어 읽어준 것도 살아 있는 동료들이다. 그들을 선망하고 두려워하면서 배웠다. 우리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 양쪽 다 글감이 된단 걸. 문학에선 풍요와 결핍을 무 자르듯 나눌 수 없단 걸. 나는 엄마의 생명력 덕분에 작가가 되었단 걸. 문학은 오랫동안 인간의 강인한 면뿐 아니라 약한 면을 아주 소중히 다뤄왔어요. "도대체가 번거롭게 사랑과 우정을 왜 해야 돼?"라는 질문은 "도대체 번거롭게 문학을 왜 읽어야 돼?"라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저의 목구멍에서 직관적으로 이런 대답이 튀어나오네요. "그야....... 안 하면 모르니까"라는 대답이요.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으면, 공들여 읽지 않으면 영영 모를 세계가 있지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기가 쉽고요. 하지만 어떤 사람을 깊이 좋아하고 사랑할수록 그에 대해 간단히 함부로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지잖아요. 헤아리게 되면 차마 그렇게는 못 내뱉겠는 말들이 생기고요. 그런 점에서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사랑과 우정을 깊이 경험하는 일과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고작 자기 자신으로만 살다 가요. 나 아닌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 어려운 시도를 계속하는 게 문학의 도전이죠. 실패했든 성공했든 간에, 대부분의 책에는 모르는 삶을 최대한 섬세하게 헤아리려는 흔적들이 담겨 있어요. 김애란 작가님은 "'모름'의 렌즈로 봐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쓰셨어요. '너라면 어떻게 느낄까?'라는 질문을 관두지 않는 성실함이 사랑하는 자와 쓰는 자와 읽는 자가 공유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해요.
-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런 건 우린 몰라. 분류하고 나누는 건 인간만 해. 쟤는 그냥 많이 먹고, 한동안 안 보였어. 기온이 엉망이라 길을 못 찾는다고 들었어. 예민한 애야. 종을 알아야만 저게 있다는 걸 인정할 거야? 모르면 쟤는 존재하는 게 아닌 거야? 너는 올리브각시바다거북이야. 나한테 필요 없는 정보야. 알려주지 마. 기억하지 않을 거야. 기억하면 외로워져. 왜? 네가 그렇게 말하지만 않으면, 나는 언젠가 저 예민한 애처럼 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어. 내 몸은 나른할 땐 숲이 되기도 하고, 헤엄을 칠 땐 파도가 되기도 해. 등을 말릴 땐 바람이 되기도 하지. 나는 자유자재로 변하고, 속하고,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구분 지으면, 선이 생겨. 넘을 수 없는. 내가 갇혀 있던 가짜 바다의 투명한 벽처럼. 선이 생기면 오래 살 수 없어. 넘을 수 없다는 좌절이, 마음을 늙게 해. 그게 너희의 장수 비결이야? 아니. 이게 원래 지구를 살아가는 방법이야.
- 이토록 완벽한 불균형너희 아빠가 나보다 자유롭다는 이유로 그에게 화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노력 중이야. 너무 전형적이지. 나는 전형적이야. 전형적이라고 느끼는 게 정말 싫어. (...) 나는 허구한 날 남편을 원망하는 임신부이자 엄마는 절대 되고 싶지 않아. 너희 아빠에게 화내고 싶지 않아. 우리는 운동선수이자 등반가로서 서로를 지지하기로 했지만 내 경력이 이렇게 긴 휴식기에 들어갔는데도 이전처럼 평등한 상태가 유지될까? 나는 남는 시간에 기저귀 가는 탁자와 유모차와 수유베개를 검색하고 있고 남편은 이 시간에 엘 찰텐에서 빵이나 먹으며 날씨가 바뀌어 또 다른 등반을 할 수 있길 기다리고 있을 텐데 우리가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 너희에게 내 바람, 내 두려움, 내가 아는 것을 이야기해두려고 해. 혹시라도 나중에 너희가 엄마를 더 잘 알고 싶어질 때 이 편지를 이용하렴. 어느 누구도 마흔이 됐을 때 인생이 뭔지 잘 모른다는 증거로 삼아도 좋겠다. 혹은 엄마가 부모로서의 여정을 시작할 때 카시트를 어떻게 끼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젖을 먹인 다음에는 꼭 턱밑을 닦아줘야 우유가 목에 껴 상한 치즈가 되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는 것도. 내 바람: 너희가 강인하면서 연약하길 바라.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지칠 정도로 반복된 일상에도 만족하는 부모가 될 수 있길 바라. 내가 이 세상에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세상에 약간의 변화를 만들면서도 너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점점 커지는 욕구에도 진실할 수 있길 바라. 우리 다리와 팔과 폐의 힘으로 같이 이 세상을 탐험할 수 있길 바라. 너희가 같은 시간에 낮잠을 자길 바라. 엄마가 분명 저지르게 될 실수를 너희가 용서해주길 바라. 내가 나를 용서하길 바라. 나는 모험이 없는 진공상태에서는 더는 존재할 수가 없어. 나는 모험의 땅을 봐야만 하겠어. 직접 보고 느끼고 숨이 멎을 정도로 감동하고 두려워하기도 해야겠고. 위험을 두려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이야. 왜냐하면 현실이란 우리 행동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거든. 우리 모험이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려주지. 나는 지금 내 어깨에 지고 있는 이 책임의 무게를 이해하려고 해. 처음으로 에티오피아의 대산맥을 등반했을 때 이 산 이상의 무엇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무시할 수 없었어. 내 모험을 하나하나 보면서 이 모험이 과연 무엇인지, 이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했어. 지금 당장은 너희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지만 예전에는 기쁘게 참여한 이런 기회를 계속 놓치면 내가 흐리멍덩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렵다. 나는 모든 걸 다 하고 싶어. 내가 원하는 건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게 옳다고 느끼는 거야. 나는 지금 이 순간, 이 순간에도 좋고 장기적으로도 좋을 결정을 내리고 싶어. 가끔은 너희와 같은 집에서 일하고 너희 소리를 듣고 너희와 있고 싶다. 가끔은 우리가 공원에 있을 때도 이메일을 확인하는데 일을 해야 하니까. 아니, 헛소리고 일을 하고 싶어서. 나는 그렇게 세상과 연결돼 있는 느낌이 너무 좋아. 두 장소 모두에 완전히 다 머물고 싶지만 언제나 반씩 나뉘어 있지. 내가 충분히 열심히 노력하고 밀고 나가면 다 해낼 수 있다고. 이제까지는 대체로 충분히 열심히 밀어붙이면 내 삶 안의 여러 조각을 하나로 모을 수가 있었거든. 지금 당장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대가가 따르지. 그리고 그 대가란 내 분노야. 몸이 덜덜 떨리고 손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의 분노.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분노를 품고 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너희에게 그런 유산을 남겨주고 싶지 않아. 나는 이 방정식에서 남자가 되고 싶어. 5일 동안 밖에 나갔다가 집에 와 26시간 만에 또다시 17일 동안 출장을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 사이 집에 있는 파트너가 다섯 가지 돌봄 선택지를 알아보고 밤에 아이들을 재우려고 하면 아이들은 "난 슬퍼. 엄마, 슬퍼. 왜 나 사랑 안 해줘"라고 울부짖겠지. 망할. 나는 그 집에 있는 배우자가 되고 싶지 않아. 내게도 그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그 아내인 게 싫고 우리 인
- 벌집과 꿀그 연극은 더 이상 목수가 아니게 된 목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도 오랫동안 오직 집 짓는 일만 하고 살아온 나머지, 그 일이 더 이상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되자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지요. 온갖 곳으로 여행을 하며 자신에게 또 다른 삶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저 계속 떠나고 또 떠납니다. 연극은 그렇게 끝납니다. 그 사람이 떠나고 또 떠나는 장면으로요. “그래요, 우린 비명을 지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잠을 못 자고요. 그럼에도 내일이란 게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들에게 유령이 나오는 장소는 떠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고, 기꺼이 다른 땅을 물색해보겠다고 제안하고, 그들 모두 과거에 다른 어딘가를 떠나 성공해본 사람들 아니냐고 묻습니다. 제가 이 모든 걸 물을 때면, 그들은 하나같이 삼백 년 전 일본이 침략해 온 일을, 그리고 사찰들과 선교사들과 유럽에서 온 배들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유령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 도둑맞은 자부심자부심과 수치심은 언제나 개인적인 감정처럼 느껴지지만 그 뿌리는 더 넓은 사회적 환경 속에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다양한 자부심의 기반을 발견했다. 지역적 자부심, 직업윤리에 대한 자부심, 아웃사이더로서의 자부심, 회복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한 공동체의 주요한 자부심의 원천인 고임금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또는 오래된 기술이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이 쓸모없어지고 가치가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 문제에 대한 실질적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서 상실감과 수치심이 정치인들이 캐내려는 '광석'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렇게 해서 미국 전역에서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가슴 아픈 자부심의 역설이 탄생했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두 개의 경제권, 두 개의 문화로 갈라졌다. 하나는 붉은 주, 또 하나는 파란 주다. 붉은 주들은 더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정부 지원도, 계층적 특혜도, 인종적 이점도 없이 오직 개인의 노력만으로 운명이 결정되는 더욱 엄격한 전통적 개인주의에 직면했다. 반면 파란 주의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더 나은 경제 환경과 개인의 실패를 덜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흥미롭게도 공화당 지지자는 정부의 지원이나 규제를 배제한 자본주의, 즉 원시 자본주의에 대해 민주당 지지자보다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장악한 주에서는 규제 없는 자본주의가 더 험난한 시련을 초래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유시장은 인위적 통제 없이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을 때 다소 부침은 있겠지만 가장 잘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은 정작 그 손을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가혹하게 작동한 반면, 적극적인 복지 정책을 포함하는 경제 시스템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더 관대하게 작동했다. 그래서 양질의 석탄이 고갈되거나 천연가스가 석탄보다 저렴해지면 많은 공화당 지지자가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 결과라고 믿고는 개인은 그저 열심히 일하며 변화에 적응하면 된다고 여긴다. 데이비드는 좌파와 우파 정치인 모두에게 자신은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느꼈다. "민주당원이 신경 쓰는 건 인종 정체성, 성별, 그리고 성적 정체성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아요. 공화당원이 신경 쓰는 건 애국심과 세금뿐이에요. 그중 상당수가 인종주의자이거나 부자이고 사회계층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혼자 힘으로 일어서라는 말만 하죠. 그러니 저는 거기에도 맞지 않아요." 미국은 오랫동안 국민의 수명을 연장하는 일에 앞장서왔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백인이 인생의 절정기인 45~54세에 조기 사망하는 비율이 예기치 않게 증가하고 있다. 주요 원인은 약물 과다복용, 자살, 알코올성 간 질환으로, 1999년 부터 2017년까지 6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집단은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블루칼라 백인 남성이었다. 그들은 영웅적인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것도, 바다에서 거친 폭풍우와 싸우다가 스러진 것도, 탄광에서 고된 노동을 하다가 죽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나둘씩 홀로 수치심 속에서 죽어갔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만약 제가 열네 살 때 뒷골목에서 대마초를 피우고 있는데 한 남자가 제게 관심을 보였다면 어땠을까요?" 토미가 자문하듯 말했다. "그 사람이 위장복 차림에 야구 모자를 거꾸로 쓰고 저를 데려갔다면? 제가 부모님 집에서 나오기 위해 그 사람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면? 그리고 그때 아버지가 저를 심하게 때리고, 부모님 두 분이 술을 마시고, 그분들이 나를 제대로 알아봐주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고 느꼈다면?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자문해봤어요. 머슬카를 탄 그 남자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준다고 느낄 수 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남자가 '너희 아버지가 제재소에서 일자리를 잃은 건 이민자들 때문이야. 아니면 유대인이 제재소 문을 닫았기 때문이지'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저는 '아, 그렇군요......' 라고 대답했을지도 몰라요." (...) 토미는 극단주의자가 신규 회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과학적 지식과 소위 비과학적이라 여겨지는 앎. 이 중에서 무엇이 더 우월한지를 가리는 것은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사람들이 받아들인 앎의 체계가 그 집단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혹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경험하게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며,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과학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이 일찍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지적했듯 서로 다른 두 개의 앎의 체계는 상호 공약 불가능하며, 하나의 앎의 체계에서 다른 삶의 체계로 넘어가는 과정은 종교적 개종에 가까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과학자 사회 내에서 일어나는 과학 이론의 전환도 이러할진대 정치적 종교적, 관점의 전환은 오죽할까. 무엇이 진실인가? 이것은 내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은 끝없이 탁상공론하게 만든다. 어째서 어떤 진실은 그토록 진실된 느낌을 주는가? 이것이 내 질문이다. 어떤 진실은 어째서 그토록 강렬하게, '진리'라는 느낌을 주는가. 인지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보이고 들리게까지 만드는가. 어떻게 개인의 경험을 넘어 집단의 경험으로도 나타나는가. 그 인식은 어떻게 눈앞의 인간을 적으로 만들거나 가해자로 만들거나 악마로 보게 만드는가? 어떻게 정의 혹은 평화를 위해 그를 죽여도 된다고까지 밀고 나가게 만드는가? 청년 문제가 실력주의의 얼굴을 하고 탈정치화되고 또 다른 약자를 혐오하는 방식으로 표출될 때 변화는 더디게 올 것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 싸울수록 우리는 더 가난해지고 오래 불행할 것이다. 마법사는 자연을 "그저 자신에게 이용당하기 위해 가만히 놓여 있는 무한한 자원"으로 "기계에 들어갈 원재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고 하고요. 예언가는 "어머니 자연이 죽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거의 열광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하며 "헐떡이는 자연의 몸 옆에 비극적인 기사처럼 앉아 자연의 수동적인 아름다움을 칭송"한다고 표현해요. 한쪽은 자연을 정복 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다른 한쪽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굉장히 다른 태도이지만, 사실은 둘 다 나와 자연을 분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지요. 그런데 개입할 여지가 많아지는 건 자연과 내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여길 때거든요. (...) 기술 역시 기술결정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 곧 어떤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막을 수 없는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실행으로 발전의 방향과 속도가 결정된다고 볼 때 개입의 여지가 생기죠. 남성적인 것, 착취적인 것, 경제 발전 중심적인 것만이 기술이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는 돌봄을 위한 기술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지금의 지구에선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마법사도 예언가도 아닌 존재, 현장에서 손을 더럽히면서 생생한 행위자로 존재하는 마녀가 우리 미래에 필요하다는 결론이 무척 좋았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염된 것들뿐입니다. 나는 여성적인 게 뭔지 몰라요. 내가 진짜 뭔지도 모르고요. 세상에 가짜 여성에 대한 이야기만 엄청나게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짜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더 진실된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저에게는 글쓰기입니다. 나를 갈라 나를 꺼낸다는 것은 아주 많은 소음과 뜬 소문 사이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말 그대로 나를 갈라서 나를 꺼내는 과정입니다. 어떤 점에서, 모르겠어요, 저에게 하강의 이미지가 있거든요. 저는 이게 계속 내려가는 일이라고 느껴요. 이 일이 여성에게 더 유리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진실한 글을 쓴다는 것이 더러움으로 취급받았던 사람들에게 훨씬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분열과 혼란을 겪기 때문에. 그 분열과 혼란이 힌트를 주기 때문에. (...) 진실은 글쓰기가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전적으로 저 아래에 아주 아득하게 멀리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이들, 제가 언급한 작가들은 모두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노고를 쏟아 자신의 글을 구부려 저 멀리 있는 진실 쪽으로
- 날개 환상통세 꿈마다 네가 비명을 지르는 정도야 길을 오래도록 걸어 네 해마다 살림을 차리고 꿈마다 그리고 네 숲의 다리들을 건너 세 갈래 길에서 작은 고마에 붙어사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짐승 너는 내 이야긴 너무 작아서 언제나 매릴 수 있다고 하고 네 이야긴 네가 만든다 정도라고 하지만 내 작은 이야긴 네 속의 다리들을 건너 세 갈래 길에서 그 정도야 작은 이야긴 너무 작아서 우체국 여자의 책상 위에 먼지처럼 쌓여만 가고 내가 보낸 이야기를 읽으려면 먼지보다 더 작은 사진이 필요한 정도야 영하의 철판 위에 소금을 뿌려놓으면 새벽에 멘데지기 와서 그걸 핥아 먹다가 그만 혀가 철판에 철컥 달라붙는 그 정도 이야기야 그 어미 밑에서 새끼 두 마리가 젖을 빨아먹고 있는 정도야 전 세계에서 모여온 시인들이 각자 모국어를 버리고 곧 멸종할 언어를 배워서 연락하자 공평하게 그러자 그래보듯이 당신이 알아볼까 봐 내가 얼른 우리 비밀을 두 시간짜리 어떤 영화 속에 감춰두듯이 깜깜한 밤 한 보자기 펼치고 그 위에다 그 영화를 조용히 돌려보듯이 그리고 비밀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리듯이 영화 속에는 우체통이 서 있고 늘 다시 살아 나오는 아이처럼 비밀이 맺혀 있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다시 돌아오느라 영화 속에서 우리는 발을 땅에 두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다는 듯이 10초간 꽉 껴안고 난 다음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돌아설 수 있다는 느낌이 아물어가던 상처가 한쪽 눈알처럼 떠지고 피 한 방울 어둠 속에 조용히 솟아오르듯이 도대체 이 포에트리 페스티벌은 눈물을 어디다 숨겼는지
- 사람, 장소, 환대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모욕하는 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개새끼야. '나는 개새끼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복창해. 이제 개처럼 엎드려서 내 발을 핥아). 하지만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우리는 모두 낯선 존재로 이 세상에 도착하여, 환대를 통해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사회 안에 자리/장소가 없는 사람,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서줄 제삼자를 갖지 못했기에, 사적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자리/장소를 지킬 수 없다. 절대적 환대가 사적 공간의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개방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데리다가 그랬듯이 최악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그러한 환대가 과연 가능한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 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 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환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아동학대방지법을 만드는 일,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하는 일, 집 없는 사람에게 주거수당을 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실업 수당을 주는 일은 모두 환대의 다양한 형식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현대적 이상은, 생산력이든 자본주의의 모순이든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떤 자동적인 힘에 의해 앞으로 굴러감에 따 라서가 아니라, 이러한 공공의 노력을 통해 실현된다. 그러므로 환대란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 현상하고 있음을 몸짓과 말로써 확인해주는 행위라고 말하기로 하자. 그 경우 데리다가 제시하는 절대적 환대의 세번째 조건을 수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환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환대란 타자를 도덕적 공동체로 초대하는 행위이다. 환대에 의하여 타자는 비로소 도덕적인 것 안으로 들어오며, 도덕적인 언어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바로 환대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푸코의 비판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는 사회 안에서 어떻게 끊임없이 전쟁이 작동해왔는가를 보여주면서, 전쟁을 국경으로 몰아내는 것만으로는 사회를 절대적 환대의 공간으로 만들 수 없음을 암시한다. 전쟁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아직 도래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대비하고 또 준비해야 하는 사건으로 남아 있는 한, 사람들은 그들의 자리의 안정성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그들은 언제라도 인민의 적으로 규정되어 성원권을 박탈당할 수 있다. 환대는 그러므로 전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환대에 관한 논의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칸트의 유명한 텍스트에 '영구평화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칸트는 보편적인 환대를 영구평화의 조건으로 제시한 셈이지만, 우리는 그 역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구평화야말로 절대적 환대의 조건이라고 말이다. 여성은 자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환대의 권리 - 환대 받을 권리와 환대할 권리 -는 그러므로 당분간 우리의 아젠다를 구성할 것이다.
- 세상 끝의 기록현실에서 우리는 결코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다만 한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 페르세폴리스살다보면 형편없는 인간을 많이 많나게 될 게다. 그들이 네게 상처를 주더라도, 이렇게 생각하렴. ‘내게 해코지하는 건 그들이 어리석어서‘라고. 그래야 그 못된 짓들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단다. 세상에서 원한과 복수보다 나쁜 건 없거든. 늘 품위를 잃지 말고, 네 스스로에게 정직하도록 해라. "아들이 학교에서 금색 플라스틱 열쇠를 받아왔지 뭐예요. 전쟁에 나가 운 좋게 죽는다면, 이 열쇠가 천국으로 이끌 거라고 그랬대요. 다섯 아이들을 눈물 속에서 키웠는데, 놈들은 이깟 열쇠와 내 큰아들을 바꾸려고 하고 있어요. 그놈들이 천국에는 음식과 여자, 황금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집들이 넘쳐난다고 그랬대요." (...) 천국의 열쇠는 결국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더 나은 삶을 약속받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천국의 열쇠를 목에 건 채, 지뢰밭에서 폭사해갔다. 나의 불행은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이란에서는 서양 여자였고, 서양에서는 이란 여자였다. 내겐 정체성이 없었다. 내가 왜 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트라피 양, 서류를 보니 오스트리아에서 살았던 적이 있군요. 거기서도 히잡을 썼었나요?" "아뇨, 전 여성의 머리카락이 그렇게 문제라면, 하느님은 분명 우리를 대머리로 창조했을 거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 고통을 다스리는 민주주의>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 권위주의, 전체주의, 파시즘의 전형적인 전략이라는 점입니다. 누구와도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만들어 사회적 관계를 분열시키는 것이죠. 우리가 믿는 것, 우리의 가장 선한 생각들을 공적으로 나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이런 대화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이 나라 사람들이 사용한 가장 효과적인 접근법 중 하나는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 그 여정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마음을 열고 들으면, 그런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정치적 입장이 달라도 아주 깊은 수준에서 우리가 개인적인 경험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요. 결국 우리가 다르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대화할 때 삶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면 우리는 적어도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차츰 정치적 견해와 같은 더 복잡하고 논쟁적인 주제들로 나아갈 수 있게 되거든요. 하지만 대화를 정치적 의견이나 관점으로 시작한다면, 의견이 다른 사람과는 대화를 오래 이어가기 어려울 확률이 높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신념을 관계 맺고 싶은 사람들 앞에서 표현할 수 없다면, 진정성 있는 관계로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계속해서 자신의 진실을 증언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대로의 진실을 계속해서 말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화에 초대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정신이 한국 사람들의 최선의 모습 속에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특히 모두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지켜가고자 하는 분들 안에서요. (...) 제가 마음에 간직하는 희망에 대한 정의가 하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희망이란 지금, 이 현실과 더 나은 가능성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자각하면서, 현실과 가능성 사이에 서서,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날마다 무언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희망은 행동입니다. 희망은 동사입니다. *-- 파커 J.파머 대담*
- 사실은 의견일 뿐이다우리는 때때로 그곳에서 열쇠를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단지 다른 곳이 어둡기 때문에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만 아파트 열쇠를 찾는 취객이 되곤 한다. 모델 의존적 실재론 개념은 우리에게 한 가지 깨우침을 준다. 모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는 우리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의 말을 떠올려보자. "물리학이 자연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분야라는 것은 착각입니다. 물리학은 자연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에 관한 학문입니다." 물리학 및 심리학 연구자라면 이 말에 분명 동의할 것이다. 호킹은 이 개념에 대해 극단적으로 말한다. "모델과 독립된 현실에 대한 고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기대 없이 관찰할 수 없다. 어떤 진술이 사실로 간주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과학적 합의는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다. 따라서 가능한 한 개방적이면서도 필요한 만큼 엄격한 절충안을 도입해야 한다. 즉, 새롭고 특별한 진술은 누가 제기했는지에 관계없이 일단 수용한 다음,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사실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 책을 덮고 삶을 열다어떤 장소는 한 사람이 특별한 방식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특별해진다.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이야기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우리 몸이 여행지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사람의 삶이 흘러들어 온 복작대는 항구이면서 여행지에서 해독하고 싶은 단 하나의 아스라한 불빛인 순간이 있다. 진정한 풍경은 우리 마음속에서 펼쳐진다. 우리 인생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이야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야기하는 방식이 바뀌면 삶도 바뀐다. ‘삶은 삶에 관련된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삶은 삶에 대한 이야기다’, ‘삶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면 삶도 없다’, 이것은 내 생각이면서 또 많은 작가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이야기하는 동물로서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의 이야기를 찾는 것, 우리의 이야기를 남이 대신하게 하지 않는 것, 우리의 가장 멋진 점을 이야기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어느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 앞날이 두려운 사람이, 상실감에 젖어 있는 사람이, 낙담한 사람이, 어두운 예감에 사로잡힌 사람이 문장 안에 있는 힘을 발견하고 문장을 붉은 실 삼아 가슴의 상처를 꿰매려고 할 때, 문장을 유일한 친구 삼아 스스로 다짐을 할 때, 이렇게 문장을 삶으로 옮기려고 할 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존 버거의 표현을 빌리면 “다른 사람이 뭔가를 먹고 있는 모습을 굶주린 사람이 볼 때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이 과정에 내 나름대로 이름을 붙였다. ‘이야기 이어 붙이기’. 독자는 자신이 이어 붙인 이야기를 닮는다. 독자는 자신이 누구였는지가 아니라 누구이고 싶은지 알 수 있다.
- 남극
- 일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이런 노동은 심각하게 성별화되어 있다. 여자들은 직장이 아니어도 타인의 감정을 책임져야 하고, 그런 감정 관리는 직장에서도 일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 노동의 성 배분은 전반적인 사회 불평등을 반영한다. 타인에게 내 감정을 강요하는 일을 피하려고 내 감정을 관리하는 일은 스스로 종속적인 관계를 자처하는 격이다. 온종일 타인의 감정을 어루만져야 한다면 정작 자기감정과 개인적 요구사항은 삼켜버리도록 길들여진다. 서비스 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은 힘 없는 삶에서 습득한 능력이고, 결국 천부적인 권리로서 존경을 기대하는 힘 있는 자들이 그런 능력을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도움을 제공하는 일은 원래의 자선 개념에 부합하기 때문에 자금 지원을 얻어내기가 쉽다. 반면 "소외된 사람들이 연대하여 힘을 얻는 일에 자금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면 이미 힘을 가진 이들이 질색할 제안이 되어버린다. 비영리 단체들이 아직도 겪고 있는 갈등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자본주의 체제의 수익금으로 지원받고 있지만, 그 체제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 주고, 돌봐주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없이는 존립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돌봄 활동으로 비영리 조직들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가 잘 작동될 수 있도록 기름을 쳐준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을 멈추길 원한다면 자본주의 체제가 부드럽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 일을 그만해야 한다 는 뜻이다. 하지만 그 기름칠이 사람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선택은 더더욱 힘들어진다. (...) 비영리단체 자금 지원을 받아내는 사람들이 창업 지원을 받아 내는 사람들과 꽤 닮았다는 점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펀딩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어쨌거나 사회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인데다가, 요즘 대부분의 투자나 기부를 하는 사람들은 기술•금융 분야의 부호들이고 투자와 기부를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다. 후원자들의 이러한 결과지향적 소비주의는 노동자들에게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야만 하는 압박이 된다. 그 결과는 후원자들에게는 괜찮은 '사업'이 되지만, 그 '사업'은 사회가 앓고 있는 나날이 곪아가는 상처에 반창고를 붙인 정도다. 여자들의 컴퓨터공학 과정 등록률은 1980년대 40퍼센트에서 현재 2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고, 초창기에는 주로 컴퓨터 게임에 알맞게 제조된 개인용 컴퓨터는 어린 남자아이들에게 광고되고 판매되며 미래의 프그래머들은 남자들이라는 개념을 더 굳게 다져갔다. 대중문화도 이러한 흐름을 알아채고 백인 남자 컴퓨터 괴짜들을 영웅시했다. 개인용 컴퓨터가 없다면 누구든 컴퓨터 능력이 뒤처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성별 장벽과 함께 계층 장벽이 세워졌다. 과학기술 연구원 자넷 아바트에 따르면, 학교와 기업들은 '고등학교 컴퓨터 동아리 활동을 하는 10대 남자아이'라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컴퓨터적 인간상'에 맞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거나 채용했다. 컴퓨터도 예술처럼 재능을 타고나야 하는 분야라는 사고는 여전했다. 여자들은 남을 돌보는 일에 재능이 있고 남자들은 고립되고 사회에서 동떨어진 천재성이 필요한 일들을 잘한다고들 믿었다. 이 두 종류의 사랑 노동자들 간의 균열은 더 명확해졌지만, 어느 쪽이라고 할 것도 없이 똑같이 장시간 일하고 변덕스러운 회사를 견뎌내야 했다. 이러한 성 역할이 타고난 특성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고정관념이라는 사실을 그 어떤 똑똑하다는 남자들도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쭈뼛쭈뼛 건네는 인사, 휴게실에서 나누는 잡담, 일과 관련 없는 이메일 주소로 온 다정한 편지와 같은 것들이 우리가 함께 얻는 이익이 명확해지고 우리가 함께 누릴 힘을 쌓아가는 방법이다. 노동계 금언인 '한 사람이 받은 상처는 모두의 상처다'를 굳게 믿을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공예가 윌리엄 모리스가 주장했듯, 우리는 철 지나면 버려지는 소모품보다 간직되고 소중히 여겨질 선물 같은 것들을 만들고, 사용하고, 뽐내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일터 너머의 세상에서도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
- 뭐 사랑도 있겠고, 인간 고유의 특성드론과 결혼하기 바닥을 모르잖아 / 그게 유일한 흠일지는 몰라도 / 그의 모터 소리는 우주를 범접하게 해 / 별에 스쳐 생긴 어깨 상처로부터 / 날개가 돋아나길 기대하게 해 그와 접속한 이후로 나는 나를 추월할 수 있게 되었지 / 추락을 일삼으며 더 높게 흩어지는데 /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어쩌겠어? 약속했었지 리튬으로 재구성된 맹세를 / 전속력으로 지나가는 거야 / 박수갈채 따윈 들리지 않는 행진으로써 / 눈물방울 모두 말려버리도록 바람을 가르며 / 축복 없이도 사랑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함정과 복수를 꿈꾸며 성실하게 지은 미로를 / 까마득하게 내려다보는 그이는 / 이 세계가 누군가의 신발 밑창이라고 여길 뿐 / 그 업신여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가 가볼 수 없는 곳의 파노라마를 보여주곤 했지 / 미안 나는 심장이 유일한 약점이야 / 그는 무아지경으로 나를 맴돌며 행성 취급하고 / 이 바닥의 약속을 미물로 보게 만들지 내게 남은 마지막 약속을 위해 / 이제 그를 깨워서 결혼식장으로 가야 해 / 천장은 없고 이별하는 축하만 남아 있는 세계로 / 그는 결혼을 약속한 순간부터 고요히 잠들어 있어 / 망가지는 것을 지켜보았지 / 서로 맞지 않은 부품을 억지로 끼워 맞추며 / 충전이 끝나기 전까지 어쩌면 / 나는 내 삶을 다 흘려보내게 될지도 모르지만 한 세기를 날갯짓하는 벌떼들처럼 / 공중에도 넘어질 곳이 많다는 것을 알려준 / 그이와 남김없이 살아갈게 검은 개에 대한 잡문 어느새 개 한 마리가 나를 따라 걷고 있다 / 내가 / 내가 아님을 들킨 것일까 아니면 여자를 닮기라도 한 걸까 나는 부두를 천천히 걸으며 / 개에게 보이지 않았다가 / 다시 보이기도 했다 / 개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 보일 때에도 계속 나를 따라 걷고 있다 멀리 본 도시의 풍경이 뿌옇다 / 중국인 거리에서 / 누군가 오래된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고 / 물 위로 사람들이 노를 저었고 검은 개는 그저 걸을 뿐이다 / 네게도 고스트$*$가 있나 *$*$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Chost in the Shell>에서는 영혼이란 단어를 '고스트'라고 부른다.* 개는 대답이 없다 / 잠시 멈춰 서서 개를 쓰다듬자 / 개가 내 무릎을 핥는다 부두에 버린 시신을 발견한다 / 나의 얼굴을 한 여자다 / 개가 가까이 가서 / 여자의 뺨을 핥는다 / 나는 머리칼을 쥔다 / 으스러진다 / 녹는다 부두의 풍경은 그러하다 / 개가 짖는다 먼발치에는 물이 있다 / 개가 물을 본다 / 물 위에는 그림자가 있다 / 여자는 잠수를 즐겼던 모양이다 / 내가 물 위로 뛰어든다 / 깊이 빠진다 호랑지빠귀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 검은 개가 내 뺨을 핥는다 / 누군가 비파를 연주한다 / 어느새 나는 개에게 보인다 / 인식으로서 그러하다 / 다시 걸을 때도 개는 검은 개다 / 개는 사후적이다 / 내가 뒤늦게 나를 따라 걷는다 작은보호탑해파리 (...) 나는 각주 없이 이 시를 시작한다. 작은보호탑해파리 혹은 베니크라게라고 분류되는 이름으로 쓰는 초연(初演)의 시를. 박사는 나를 애지중지 아꼈다. 태어났던 때로 돌아갈 때마다 이름을 지어주었고 나는 122개의 이름이 있다. 언어를 알려주었고 나는 물을 흐릿하게 비틀며 퍼져나가는 포자로 성실하게 움직였다. 그의 사랑에 화답하듯이. 박사가 죽고 나는 그가 나처럼 복제되어 돌아올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무능한 사랑의 절실함이 나였구나. 나는 그런 인간의 불능에 중독되었다. 수조는 더러워지기 시작했고, 나는 움직이고 싶지 않아 자주 뜰채에 건져졌으며, 나에 대한 연구는 그것으로 종결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박사에게 커다란 명예를 가져다주었으며 반려동물로도 큰 인기몰이를 했다. 거짓말. 우리보다 먼저 죽는 주인들로 유기되는 삶을 어찌 사랑할 수 있겠느냐만은. 우리는 하수구에서 자주 만났다. 영생의 믿음으로 화로 위에 서기도 했다. 입을 쩍쩍 벌리는 백합찜과 소라 속에서 시가로 매겨졌다. 박사는 그곳에서 나를 데려왔지. 다시 돌아오는 일은 인간사의 숙명이로구나. 번데기로 돌아가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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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소한의 삼국지
- 모순진모의 삶은 진모의 것이었고 진진이의 삶은 진진이의 것이었다.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삶의 공식인가 말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이었다. 누군가 내게 그런 실례의 발언을 하는 것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과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상처 받은 내 자존심이 용서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 저소비 생활
- 멋진 실리콘 세계
- 칸트의 동물원
- 몸을 두고 왔나 봐
- 절창
- 정확한 사랑의 실험쓰네오가 끝내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결여를 알리는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발견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영화가 알려주듯이 인간의 손가락뼈는 몸의 다른 뼈와는 달리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그의 손은 앞으로도 계속 그에게 통증을 느끼게 할 것이고, 더 거대한 결여의 가능성을 상기하게 할 것이고, 스테파니에게 매번 다시 응답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은유를 이렇게 정리하려고 한다. '성장은 살인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먹어치우고, 그것으로 내 안의 타자를 일깨운 다음,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을 (실제적으로건 심리적으로건) 떠난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의 몇몇 고비들을 특정한 어떤 사람을 상징적으로 살해하면서 통과한다. (자신의 성장 과정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억조차 죽여버리기도 한다. 지금 나의 내면에도 누군가의 벨트, 누군가의 블라우스, 누군가의 구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잊었다. 잊지 않으면 그 미성숙의 시공간을 떠나올 수 없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왜 인디아는 고향을 떠날 때 과속 운전으로 보안관을 유인해서 굳이 죽여야 했나. 기억을 봉인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살인자이고 자발적 기억상실증자다. "꽃이 제 색깔을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는 지금의 자신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어." 인디아의 이 말은 언뜻 무책임하게 느껴지지만, 이것이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충고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책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꼬집는 문장이라면 틀렸다고 말할 수가 없다.
- 세계 끝의 버섯생산자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상품이 팔리면서 공장 노동자가 자신이 만드는 사물로부터 소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도 그것을 만들고 교환하는 사람에게서 소외된다. 사물은 홀로 존재하는 물건이 되어 이용되고 교환된다. 그 사물은 그것을 생산하고 배치한 사람들의 관계망과 어떤 관련도 맺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일상적인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쿨라를 공부하고 나면 이상하게 보이게 된다. 쿨라에서 사물과 사람은 함께 형성되는데, 선물을 통해 사물은 사람의 연장extension이 되고 사람은 사물의 연장이 되기 때문이다. 쿨라환의 귀중품들은 그것들이 형성하는 개인 간의 관계를 통해 알려진다. 유명인들 또한 자신들이 주고받은 쿨라 선물을 통해 알려진다. 그리하여 사물은 사용되거나 상품으로 교환될 때만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사물은 그것들이 일부를 담당하는 사회관계와 명성을 통해 가치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교란인지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관점의 문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개미집을 무너뜨리는 교란은 인간의 도시를 날려버리는 교란과 크게 다르다. 개미의 입장에서는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관점은 생물종 다양하다. 로절린드 쇼는 어떻게 남성과 여성, 도시인과 시골 주민,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방글라데시의 홍수를 서로 다르게 개념화하는지 보여준다. 이는 그들이 수위 상승에서 받는 영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위 상승이 견딜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서 홍수로 변하는 시점은 각 집단마다 다르다. 교란을 산정하는 단일 기준은 불가능하다. 교란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관련되는 문제다. "기온이 낮아지면 모든 것들이 남쪽으로 이동합니다. 다시 따뜻해지면 고도가 높은 지역으로 올라갑니다. (...) 개체군들은 그 지방의 레지아에서 증가할 것이지만, 그것들은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는 연어가 아닙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갈 이유가 없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생태계입니다. 곰팡이가 이동하는것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것은 생태계다. 인간이 매우 많은 다른 생물종을 의도하지 않고 이동시킨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생태계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물을 바꾸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단위를 계속 사용하려면 그 연구 단위를 끊임없이 의심해야만 하는 틀로 다루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스즈키 박사는 생물종을 다루고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류들kinds은 지식만들기와 세계 사이의 끊어지기 쉬운 연결 지점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종류들은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그것들을 연구하기 때문에 항상 과정 중에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것들이 덜 실재하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진보 이야기를 빼면 세상은 무서운 곳이 된다. 폐허는 버려졌다는 공포를 담아 우리를 노려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지구를 파괴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렵다. 다행히 여전히 인간과 비인간의 일행이 함께 있다. 파괴된 우리 풍경들의 제멋대로 자란 변두리를 자본주의적 규율, 확장성, 그리고 자원을 생산하는 방치된 플랜테이션 대농장의 가장자리를 여전히 탐험할 수 있다. 우리는 잠복해 있는 공유지의 냄새를 - 그리고 찾기 힘든 가을 향기를 여전히 붙잡을 수 있다. 어슐러 K. 르 귄은 「소설의 운반 가방 이론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에서 독자들은 사냥과 살해에 관한 이야기 때문에 개인의 영웅적인 행위가 이야기의 요점이라고 상상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르 귄은 이러한 이야기 대신에 큰 사냥감을 죽이기 위해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이야기를 전개하기보다는 오히려 채집인이 하는 것처럼 다양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들을 포착해 함께 모으는 스토리텔링을 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종류의 스토리텔링에서는 이야기들이 결코 끝나지 않아야 하고 더 많은 이야기로 이끌어야 한다. 내가 용기를 북돋으려고 노력해온 지적인 숲에서 모험은 더 많은 모험으로 이끌고 보물은 더 많은 보물로 이끌었 다. 버섯을 채집할
- 안녕이라 그랬어그리고 이제 나는 헌수도 없고, 엄마도 없고. 다음 단계를 꿈꾸던 젊은 나도 없는 이 방에서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란 가사의 노래를 듣는다. 보다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너의 부재로부터 무언가 배웠다고. 그런데 여전히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지금은 그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쪽에서 먼저 원곡 위에 '안녕'이란 한국어를 덧씌워 부른다고. 우리 삶에는 그렇게 틀린 방식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고 아마 나는 그걸 네게서 배운 것 같다고.
-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삶은 당신의 선택과 당신의 통제를 벗어난 환경 및 결정에서 나오는 입력값으로 정교하게 균형을 이룬다는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열역학적인 면에서 당신이 내리는 결정 중에 온전히 독립적이거나 비용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위해, 어떻게 에너지를 사용할지 선택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시소 위에 올려진 다른 모든 것들을 다루는 당신의 능력에 영향을 줄 것이다. 모든 것이 일시에 전체적으로 평형을 이루는 일은 절대, 혹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관련된 요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스티븐 호킹의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A Brief Hisory of Time》에서 내가 좋아하는 문장 "쉬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와 비슷하다. 나는 온 세상이 나와 함께 잠들기를 기다렸고, 그 기대 때문에 수많은 밤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시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수록 더 의식적인 결정을 내려서 최소한의 균형과 질서를 만들 수 있다. 완벽한 질서는 아니지만, 전면적인 통제도 아니지만, 당신이 갖출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다. 삶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질서의 한계를 인정하면 자유로워진다. 완벽하게 계획한 삶을 살 수는 없으며 모래성이 파도에 저항하는 셈이라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비현실적인 기대를 버리면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다. 그런 것들을 모두 해결한 뒤에는 어떤 질서를 어떻게 창조할 수 있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첫 단계는 자신과 타협하는 것이다. 당신의 비전이 더 정밀할수록 그 비전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더 커진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러니 확실히 할 것. 만약 힘든 일을 자발적으로 한다면 노력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당신이나 다른 사람의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방을 정돈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지만, 가장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것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시간이나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아 할 수 없는 일에 미련을 두지 않도록 자신을 설득하는 편이 낫다. (...) 열역학적으로 선호되는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올바른 타협에 관한 문제다. 자신만의 질서 감각을 이해해야 하며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 뒤에 거기서 기꺼이 벗어나야 한다. 타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공감해야 하며, 당신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지 않은 채 타협해야 한다. 또한 무질서를 수용해야 하며, 이는 무질서에 항복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당신은 완벽함이 얼마나 불리한지 깨달아야 한다. 내 말을 한번 믿어보라. 융통성 없이 구는 것은 가장 진이 빠지는 일 중 하나다. 이와 반대로, 당신이 정해진 날이나 주에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의식적으로 결정하고, 이에 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가장 힘이 되는 일 중 하나다. 무질서를 수용하고 즐기는 것이 곧 살아있음의 정의다. 그렇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지 않으면 삶은 지루하고 침체할 것이며, 에너지 측면에서도 인간의 진화에 불리할 것이다. 에르고딕성은 외로움, 다름, 고립감, 비정상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을 위한 수학 이론이다. 통계학은 당신의 개성이 타인의 개성만큼 중요하다고 말해준다. 인류가 하나의 종으로서 진화하고 생존하는 데 필요한 괴이하고도 경이로운 다양성의 일부다. 우리의 삶에서 개성과 순응은 대등한, 때로는 정반대의 힘을 행사한다. 주목받고 싶은 욕망과 소속되고 싶은 욕구는 우리 모두에게 공존하는 충동이다. 우리는 집단이라는 맥락에서만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개인이다. (...).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 속으로 후퇴하더라도 세상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자신만의 섬에서 살려고 노력해도 완벽하게 독립적인 삶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집단을 통해서만 충족할 수 있는 감정적이며 실질적인 욕구가 있다. 어느 시점에는 고독을 수용한 사람조차도 자신의 해변을 떠나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고독한 노력과 비교할 대상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면, 오히려 목적지를 즐길 가능성이
- 과학산문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취약함을 드러내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본능적인 시도일 수도, 성장으로 향하는 용감한 발걸음일 수도 있습니다. 과학자에게는 기존의 체계에 도전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하는 순간입니다. 아주아주 미세하게. 너무 좁은 보폭이라 보잘것없어 보인다면 미시 세계의 척도로 보면 됩니다. 양자역학의 규모에서 본다면 얼마나 거대한 도약이겠습니까. 매양 같은 자리여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는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좋아질 겁니다.
-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모든 논의가 성장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든 데 대해 경제학자들은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다. 경제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론과 데이터 중 어느 것도 1인당 GDP를 최대한으로 높이는 게 반드시 바람직하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 경제학자들은 자원이 재분배될 수 있으며 재분배되리라고 믿고서 전체적인 파이를 키우는 데만 온 관심을 집중하는 덫에 빠져 있다. 이것은 최근 몇십 년간 이루어진 연구와 경험이 말해 주는 바와 상충한다. 궁극적으로 핵심은 GDP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님을 잊지 않는 것이다. 물론 GDP는 유용한 수단이다. 특히 GDP를 높이는 것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임금을 올리고, 정부 재정을 풍부하게 해서 정부가 재분배 정책을 잘 펼 수 있게 해 준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GDP 자체 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 특히 가장 열악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삶의 질은 물질적인 소 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 장에서 보았듯이 인간 대부분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이며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실패작이라고 여겨지면, 또 가족이 자신을 실패작으로 여긴다고 느껴지면 괴로워한다. '더 나은 삶'이 어느 정도까지는 '더 많은 소비'를 의 미하긴 하지만,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해도 부모의 건강, 자녀의 교육,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 꿈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 등을 원한 다. GDP의 증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해 주는 수단일 수는 있지만, 이는 많은 수단 중 하나일 뿐이며 늘 가장 좋은 수단인 것도 아니다. 사실 같은 중위소득국 사이에서도 삶의 질은 막대하게 차이가 난다. 이를테면 스리랑카는 1인당 GDP가 과테말라 수준이지만 모성 사망률, 영아 사망률, 유아 사망률이 훨씬 낮다. (...) 교육, 숙련, 기업가 정신, 건강 등 빈곤과 싸우는 데 지렛대가 되는 다른 영역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핵심적인 문제들에 집중해야 하고, 그 문제들을 다루는 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여기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돈을 쓰는 것 자체만으로 교육이나 건강의 진정한 향상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한 가지 좋은 소식은, 우리가 경제 성장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이 부분에서는 어떻게 하면 향상을 일굴 수 있을지를 꽤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규정된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의 커다란 장점은 측정 가능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고, 따라서 정책을 직접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정책들을 가지고 실험을 해 봄으로써, 우리는 잘 작동하지 않는 정책을 버리고 잠재력이 있는 정책을 향상시킬 수 있다.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전환은 세율의 변화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다. 자신이 받는 돈이 노력을 들여 획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부유한 사람들은 아무런 사회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채로 스스로에게 막대한 돈을 지급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인센티브' 개념 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이러한 서사를 퍼트리고 정당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경제학자 상당수가 (전체적으로 세율을 더 높이는 데는 반대하지 않더라도) CEO들이 받는 엄청나게 높은 보수에 우호적인 태 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서사는 계속 확산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미국과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상황에 명백히 분노하면서도 자원이 꼭대기 쪽으로 점점 더 많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비난하기보다 이민자와 자유 무역을 비난한다. (...) 종합하면, 매우 높은 소득 구간에만 적용되는 최고소득 세율을 크게 높이는 것은 꼭대기 쪽에서 불평등이 폭발적 으로 증가하는 것을 억제하는 방법으로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그리고 그 세율이 터무니없이 높은 것도 아닐 것이다. 어차피 최고소득세율의 적용을 받게 될 사람은 매우 소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CEO의 보수가 줄면 그들은 더 이상 최고세율의 적용 대상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본
-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파인더를 보지 않고는 찍지 않죠? 그래요, 그건 기하학이에요. 위치를 일 밀리미터만 옮겨도 그 배열은 달라져 버려요. 지금 말하는 기하학은 일종의 미학을 말하나요? 전혀 다르다오. 내가 말하는 기하학은 하나의 이론을 논할 때의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적확함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거예요. 적확하게 접근할수록 더욱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지요. 그런데 왜 기하학인가요? 황금분할 때문에 기하학을 말하는 거지요. 하지만 계산은 필요 없어요. 세잔이 말했듯,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되지요." 사진에서 고려되는 건 충일함과 간결함이라오. 테이블 위, 그의 손이 쉽게 미칠 자리에 작은 사진기가 놓여있다. 그림으로, 특히 데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진은 이십 년 전에 접었어요. 그가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사진에 대해 물어 와요. '사진가로서의 창의적 경력' 에 내린 상을 몇 주 전에도 하나 받았지요. 그 사람들에게 말했죠, 나는 그런 경력을 믿지 않는다고. 사진은 적확한 순간에 방아쇠를 당기는 일, 손가락을 누르는 일일 뿐이에요. (...) 하나의 사진을 찍는 순간, 당신의 이른바 '결정적 순간' 은 계산될 수도, 예고될 수도, 사고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란 쉽게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물론이죠. 늘 사라져 버리지요. 그가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일 초의 몇 분의 일인 그 순간을 어떻게 압니까. 데생에 대해 말하고 싶군요. 데생은 명상의 한 형태입니다. 데생하는 동안 우리는 선과 점을 하나하나 그려 나가지만 완성된 전체 모습이 어떤 것일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데생이란 언제나 전체의 모습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의 여행이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사진 찍는 것은 그와는 반대가 아닐까요. 사진은, 찍는 순간, 설혹 그 사진이 어떤 부분들로 이루어지는지조차 모르는 경우에라도, 하나의 전체로서의 순간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렇습니다. 그 순간의 느낌은 선생 자신의 모든 감각이 최대한으로 예민하게 가동된 상태, 다시 말해 일종의 제육의 감각 —제삼의 눈이라고 그가 거들었다— 으로부터 오나요, 아니면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오는 메시지인가요? 그는 낄낄 웃으며 —마치 동화 속 토끼가 웃는 것처럼— 무언가를 찾으러 몸을 옮기더니 복사된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이게 바로 내 답이요.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지요. 거기에는 자신이 손으로 베껴 쓴 글이 적혀 있었다. 받아서 읽어 보았다. 1944년 10월,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자 막스 보른의 아내에게 부친 편지에서 인용한 글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연대감은 너무도 커서, 한 개인이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죽는가는 내게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 그는 자신의 모성적 글씨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사진은 끝없는 응시로부터 나오는 무의식적인 영감이다.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붙든다. 육체는 여기서는, 유일한 부드러움이다. 애무를 생각나게 하는 유일한 재료다. 눈에 보이는 다른 모든 것은 날카로운 광물질로, 부서져 있고 비틀려 있다. 육제는 여기서, 조작된 단단한 금속으로 죄다 덮인 성상에서 겨우 드러나 있는 작은 채색 부분과도 같다. (성당마다 이런 성상을 볼 수 있다) 육체는 상처이며 동시에 치유다. 여기를 보게! 우리를 좀 봐! 늙은 여인은 선원에게 말했었다. 그리하여 원래 잔혹한 존재인 육체는, 미처 쾌락을 알기도 전에 잔혹함을 먼저 알아 버리는 것이다. 해서, 신학자나 철학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은 끊임없이 육체로부터 형이상학으로 기울어 간다. 이런 기울어짐에는 말이 필요치 않다. 그저 흘끗 한번 보는 것만으로 족하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이 동경(憧憬)의 전문가 들이다. 조금이라도 잔혹함이 덜한 삶, 그런 한 조각의 삶에 대한 기나긴 바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묘하게도 이런 것들은 아름다움과 공존하면서 아름다움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에서 약탈되어 지금 세계의 여러 박물관에 있는 조각들은 이상하리만치 비관능적이며, 바로 이런 사실에 의해 그 조각들
-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이제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 자신을 불편하게 하지 않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안락하게 지낸다. 모르는 것, 미지의 것, 낯선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과 어긋나는 것을 만나는 일은 스트레스를 준다.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이런 것들을 완전히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감당하고 처리할 방법을 찾게 된다. 모르는 것과 낯선 것을 알아가고,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바를 수정하거나 확장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신념이 더 단단해지고 구체화되기도 한다. 모든 생각은 반론에 자주 부딪혀야 해상도를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온라인 세상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헛소리'를 눈앞에서 치우고 다시는 보이지 않도록 차단하는 일은 너무나 손쉽다. 기술이 구현한 개인화된 안전지대에는 바깥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다른 의견, 다른 존재에 대한 면역력은 극도로 약해지고, 각각의 의견이 위치한 맥락과 역사를 들을 기회는 점점 사라진다. 맞다. 세상엔 '다른 선택'이 아니라 '틀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양비론은 언제나 정답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점점 더 그 '틀림'을 몰아세우고 조롱하는 방식만을 발달시켜 가는 것 같다. 사람은 본래 스스로의 오류를 쉽게 인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류를 몰아 세울수록 악에 받쳐 극단적인 선택을 향해 움직이는데, 문제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결국에는 그러한 선택이 만드는 세상을 모두가 공유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틀린 사람'이 극소수라면 적당히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가 틀렸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져 비슷한 규모가 된다면, 우리는 극단의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최악의 세상을 떠안아야 한다. 지금 '틀린 사람'이란 표현 안에 계속해서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다면 잠시만 멈춰보자. 그 안에 나와 당신이 포함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옳을 수는 없다. 그리고 현실이 늘 훌륭한 철학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과 종교는 아름다운 당위를 제시하고 그 자체로 부응할 것을 요구하지만, 정치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정치의 언어는 사람들 안에 이미 존재하는 입장과 감정에 호소하고 설득하며, 사람들이 거기 반응하기 시작하면 그 때 비로소 청유하고 명령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당위와 별개로 움직이는 현실을 전제로 말하자면, 철학적 상상력은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발판으로서 필요하다. 우리의 입장과 이해관 계가 서로 다를 때, 상상력은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된다. 정치의 언어가 사람들 안에 이미 존재하는 입장과 감정을 건드려야 한다면, 그 안에 무엇이 있고 그것이 어떤 모양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상상력이 필요하다. 비록 거기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라는 표현은 과장이지만, 아예 모르고 덤비는 것보다야 당연히 낫다. 설득과 대화가 도무지 불가능한 저 먼 곳의 사람들에게는 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스펙트럼상의 어딘가에 서성이는 이들과 마주할 때는 더욱 지피지기가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상상력은 희소한 재능이다. 내가 있는 힘껏 상상해 본다고 한들, 나와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이 품고 있는 진실에 얼마나 가까이 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결국은 직접 들어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듣고 있으면 열불이 뻗치고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말이라도 말이다. 우리가 서로의 고유한 삶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이야기와 예술이 존재한다.
- 악마와 함께 춤을이러한 긍정적 사고의 근간에는 삶의 어떤 것도 우리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는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메시지다. 긍정적 사고는 아무런 이유 없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하기보다는 모든 힘이 내 손안에 있다는 확신을 주려 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태도를 바꾸는 것뿐이다. 나는 마음챙김 열풍과 신스토아주의의 매력 중 일부는 사실 변장한 긍정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인간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삶에 완전히 얽매여 있고 그것에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 통제형 성인과 요새 유행하는 현대판 성인은 인간사의 혼란스러움에 휘말리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그 혼란이 바로 당신의 삶이다. 그 혼란을 없애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성을 버리려고 힘쓰는 것이다. 긍정 심리학은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홍보됐다. 따라서 긍정적인 감정은 가치 있는 통화가 됐다. 즉 긍정적 감정이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도 같은 종류의 통화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이런 사고방식을 영속화할 뿐이다. 감정을 행복과 성공을 달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취급하거나 행복과 성공을 방해하는 요소로 취급하는 건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하는 짓이다. 감정은 도구가 아니다. 감정은 에너지를 주는 연료가 아니다. 감정은 당신을 섬겨야 하는 머릿속의 작은 집사가 아니다. 감정은 마음의 벽장에서 치워야 할 잡동사니가 아니다. 지렁이가 정원의 일부인 것처럼 감정은 내 삶의 일부다. 몽테뉴 작품의 큰 주제 중 하나는 인간 본성의 불완전함이다. 우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일관성이 없으며 의지가 약하고 자신의 결점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몽테뉴는 이 모든 걸 인정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결점이 있음에도 삶과 자신, 인간을 사랑한다. 니체는 이런 마음가짐에 감탄했다. 그는 몽테뉴가 "정말로 기분을 좋게 해주는 명랑함"을 지녔다고 썼다. 그것은 자신이 보고 싸워야 할 고통과 괴물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거짓된 명랑함이 아니라 자신이 싸워 온 모든 괴물에게 승리한 신의 명랑함이었다. 다시 말해 몽테뉴는 인간이나 삶에 대해 잘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과 삶이 얼마나 우리를 위협하고 미치게 만들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들을 사랑했다. 니체는 이런 태도가 결국 우리의 심리를 산산조각낸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일부를 신으로 숭배하려면 나머지 부분을 악마로 여겨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만약 정말로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그냥 삶을 끝내게 될 것이다. 그는 인간다운 삶을 산다는 건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고, 소유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다는 건 단순히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살아 있음을 느끼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니체에게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허무주의다. 허무주의자는 어떤 것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모든 걸 무의미하게 여긴다. 우리는 삶이 중요하지 않게 될 때 살기를 그만둔다. 하지만 삶과 자아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하고 그에 따라 정체성도 변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인생을 바꿔 놓는 질병, 사랑과 출산 같은 인생의 비극과 황홀경이 닥치면, 자아는 산산이 부서지고 우리는 자아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항상 유동적이다. 때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모래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절망 할 필요는 없다. 자아에 대한 인식은 약간 불안정한 편이 낫다. 인생을 살아가는 줄곧 자신이 누구인지 항상 정확히 안다면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당신은 평생에 걸쳐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고 또 알아가야 한다. 자아를 솔직하게 사랑한다는 건 자아가 연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자아가 연약함을 느낄 때, 나쁜 감정이
- 치유의 빛
- 어떤 동사의 멸종무엇보다도 이 "수고하셨습니다" 한마디 속에는 인간으로서 갈구하게 되는 질문의 대답이 일정 부분 담겨 있었다. 여러분과 내가 심장 박동수만큼 묻게 되는 질문. "나는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인간을 망망대해에서 날개를 다친 채 헤엄치는 바닷새라고 상상하곤 한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지만, 그 가능성은 저마다의 이유로 꺾여버렸고 이제는 방정맞다 싶을 정도로 발을 놀리지 않으면 익사하고 마는 바다 위의 하얀 점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새는 오직 바로 저 질문들의 답을 얻을 수 있을 때만 발길질을 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대답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가라앉는다. 끝도 없이 가라앉는다. 그날 작은 도서관의 가장 인기 없는 코너 구석에서 느꼈던 것은 내가 여전히 유의미하게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강조하지 않아도 되겠다. 이 감각이 결핍되면 사람들은 곧잘 세상을 떠나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곤 한다. 그 순간 내가 도서관에서 느꼈던 감정과 주방에서 요리를 만들면서 느꼈던 감정이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내가 통하였다는 느낌, 그들과 내가 교감을 이루었다는 충만감이었다. 나는 좋은 일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을 덜 외롭게 만든다고 믿는다. 요리가 그렇다. 홀로 주방을 지키는 날에도 정신없이 음식을 만들다 보면 누군가와 만족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는 기분이 든다. 서울 변두리 지하 주방에 처박혀 있어도 세상의 한복관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 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어울리고 있는 것 같다. 논픽션은 공동체의 투병기여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육체의 상처와 고통뿐 아니라 세대와 시대가 앓고 있는 병을 고백하는 글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작가의 역할은 고름이 질질 흐르는 환부가 되는 것이다. 그가 쓸모없다고 확신하는 종류의 책은 끝까지 읽고 나서 작가의 결점을(글의 결점이 아니라) 하나도 발견할 수 없는 책이었다. 그런 책이라면 차리리 쓰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 자신의 못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서 작가로서 정확해질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글로 세상을 상관있게 만들고 싶었다. 그는 한국어에서 가장 공격적인 단어가 바로 '상관없어'라고 믿었다. 칼이나 총은 사람을 죽이지만 '나랑 상관없어'는 관계를 죽이고 환경을 죽이고 세상을 죽인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과 닭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람과 돼지도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고시생과 선원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장과 직원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인간과 자연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관있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었다.
- 유물멍
- 위건 부두로 가는 길그렇다고 브루커 부부 같은 사람들은 역겨우니 잊어버리면 그만이라고 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그들 같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며, 그들 역시 근대 세계 특유의 부산물인 것이다. 그들을 만들어낸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 역시 산업화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 가운데 일부이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하고, 최초의 증기 엔진이 돌아가고, 워털루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의 총포를 견뎌내고, 19세기의 애꾸눈 악당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제 호주머니를 채우는 것, 이 모든 일의 결과로 그런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 때문에 미로 같은 슬럼가가, 나이 들고 병든 사람들이 바퀴벌레처럼 빙글빙글 기어다니는 컴컴한 부엌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이따금 그런 곳들을 찾아가 냄새를 맡아볼(냄새를 맡는 게 특히 중요하다) 의무 같은 게 있다. 가서 너무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 게 낫겠지만 말이다. 나는 "우리가 느끼는 것하고 똑같이 그들이 느끼는 건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리고 슬럼에서 자란 사람들은 슬럼밖에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의 오산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때 내가 그녀의 얼굴에서 본 것은, 까닭 모르고 당하는 어느 짐승의 무지한 수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모진 추위 속에, 슬럼가 뒤뜰의 미끌미끌한 돌바닥에 꿇어앉아 더러운 배수관을 꼬챙이로 찌르고 있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운명인지를, 내가 알듯 그녀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25만 명의 광부가 실업을 당한다고 할 때, 뉴캐슬 뒷골목에 사는 광부 앨프 스미스라는 사람이 일자리를 잃는 것은 일종의 순리라 볼 수 있다. 앨프 스미스는 단지 25만이란 숫자 가운데 하나, 말하자면 하나의 통계단위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을 하나의 통계단위로 보기는 쉽지 않다. 길 건너 사는 버트 존스가 아직 일을 하고 있는 한, 앨프 스미스는 스스로를 불명예스러운 실패자로 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실업의 가장 큰 해악이랄 수 있는 무력감과 절망감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이다. 이 해악은 어떤 고생살이보다 훨씬 해롭고, 강요된 무위도식 탓에 기가 꺾이는 것보다도 해로우며, 앨프 스미스가 실업수당 생활을 하는 동안 태어난 아이들의 신체 발육이 떨어지는 것보다만 덜 해롭다. 그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자신이 사회주의에 대해 진정으로 호의적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작금의 상황이 과연 용인할 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며, 계급이라는 지독히도 까다로운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 나는 5년 동안 압제의 일원으로 복무했고, 그만큼 양심의 가책이 컸다. 잊히지 않는 숱한 얼굴들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법정에 선 피고들, 사형수 감방에서 최후를 기다리는 죄수들, 나에게 윽박질당하던 부하와 냉대당하던 늙은 농부들, 화가 난 나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은 하인과 쿨리들의 얼굴을 나는 지워버릴 수 없었다. 내가 느낀 죄책감은 너무 엄청나서 속죄를 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장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을 5년 동안이나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번민 끝에 결국 얻은 결론은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었다. 잘못된 이론일지 모르나 압제자가 되어본 사람으로서 얻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압제에 맞서고 싶어졌다. 모든 걸 혼자서만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압제에 대한 증오심을 유난히 길게 끌고 갈 수 있었다. 당시에는 실패만이 유일한 미덕처럼 보였다. 조금이라도 자기 발전을 생각한다면, 심지어 한 해 몇백 파운드를 버
- 아이들의 집
- 일하는 사람을 위한 철학스토아 철학은 행복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선하고 이성적인 정신 상태를 함양하고 외부 사건에 차분하고 무심한 태도를 취하는 데 달려 있다고 보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참된 이성을 따르는 방식으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자기 앞에 놓인 일을 근면하고 활기차게, 절제하며 해내야 한다. 정신을 흩트리는 것을 쫓지 않고 내 안에 존재하는 순수한 신성을 유지한다면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하면 온 세상이 나서서 방해한다고 해도 소용 없다." > (명상록) 한마디로 행복은 이성의 기능, 정당한 욕망, 미덕의 실천에 달려 있다. > (명상록) "그렇다면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박수를 받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혀로 치는 박수에 불과한 군중의 과한 칭찬도 귀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가? 우리 자신의 고유한 움직임을 다스리고 자연의 의도에 따라 자기 재를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직업과 기술이 추구해야 할 목표기도 하다." > (명상록) "냉소주의 철학자 모니모스는 모든 것은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말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면 그 효용도 명백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납작한 말들'공정'이란 말이 어느 날부터 방향을 바꿔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공정은, 어감부터가 단호하다.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세상에서 약자들을 지켜주는 방패다. 역사에선 그랬다. 사람들이 공 정이란 말을 많이 할수록 그 사회는 조금이라도 살 만한 세상으 로 변해갔다. 지금은 아니다. 차별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단어 가 '차별하는 것이 공정이다'라는 문장으로 소비된다. 차별을 옹호하는 이들은 불평등의 이유를 개인의 노력에 따른 공정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면 정규직을 준비하는 나는 무엇이냐면서 이는 공정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 공정이 앞에 있고 우롱과 조롱이 뒤를 따랐다. 능력주의가 과잉될 때, 민주주의가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짚어보자는 내 말에 한 학생의 평은 이랬다. "능력주의가 민주주의 아닌가요? 그게 공정한 세상이죠." '자유' 또한 말할 것도 없다. 장애인 권리 지켜준다고 비장애인이 힘들단다. 동성애자의 존엄성을 인정하면 이성애자가 불편하 단다. 임대 아파트 때문에 자기 집값 오르지 않으면 책임질 거냐고 화를 낸다. 그러면서 싫어할 자유, 혐오할 자유도 있는 거 아니냐고 한다. 자유가 멋대로 사용되면, 이토록 빈약한 단어가 된다. 이와 관련된 사례를 찾는 과제를 냈는데 엉망으로 한 학생이 있어서 따끔한 코멘트를 했다. 그 학생은 학교 게시판에 "강사의 의견에 반대할 자유를 침해당했다"는 글을 남겼다. '인권'도 뒤틀렸다. 인권은, 어감부터가 진중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세상에 인권이란 말은 '짓밟히는 사람들'의 살려달라는 소리로 등장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건 거대한 무엇으로부터 '밟혔기' 때문이다. 내이 튀어나오는데 가만있을 생명체는 없다. 사람도 몸과 마음이 찌그러지면 저항한다. 목숨을 건다. 인권이란 키워드가 태생적으로 거친 이유다. 생존 투쟁이어서다. 그러니 인권 교육은 착하게 살자가 아니다.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악독했는지를 짚지 않고선 그다음 이야기를 할 수 없 다. 절대 밝은 분위기에서 전개될 수 없다. 숙연해지는 건 당연하다. 이를 싫어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긍정은 이런 거다. 박정희 정권 때 경제가 성장하지 않았느냐, 전두환 정권 때 좋은 점도 많았다 등. (...) 누구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고, 공정을 들먹일 수 있고, 인권에 예민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방향이 공동체가 좋아지는 것과 무관하다면? 그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 공정은 차별의 다른 말이다. 그 인권은 비겁한 기계적 중립일 뿐이다. 현대 사회에 이런 오용은 너무 흔하다. 자본주의라는, 능력주의라는, 성별에 따른 차이라는 '원래 그렇다'는 식의 생각이 누군가의 삶을 푹 꺼지게 한다. 이걸 다시 들어 올리는 일이 어찌 잔잔하게 이루어지겠는가. 누군가는 눈에 불을 켜고 일상을 헤집고 다녀야 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들어줄 때까지 시위하겠다는 용기를 지닌 이들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람들을 격려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 과정은 때론 시끄럽고 거칠다. 아니, '항상' 시끄럽고 거칠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는 인간답게 살지 못하기에.
- 궤도넬은 가끔 숀에게 묻고 싶다. 우주비행사이면서 어떻게 신을, 그것도 천지를 창조한 신을 믿을 수 있느냐고. 하지만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알고 있다. 숀은 넬에게 우주비행사이면서 어떻게 신을 믿지 않을 수 있냐고 되물을 것이다. 결론은 나지 않는다. 넬은 끝없는 어둠이 맹렬하게 깔린 양쪽 창문을 가리킨다. 태양계들과 은하계들이 마구 흩어진 세계. 시공간의 왜곡이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시야가 깊고 다차원적인 세계. 이것 봐, 어떤 아름다운 힘이 아무런 의도 없이 내던져 놓은 게 아니면 이런 게 어떻게 만들어지는데? 숀도 끝없는 어둠이 맹렬하게 깔린 양쪽 창문을 가리킨다. 태양계들과 은하계들이 마구 흩어진 바로 그 세계, 시공간이 왜곡된 바로 그 깊고 다차원적인 시야를.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힘이 충만한 의도를 가지고 내던진 게 아니면 이런 게 만들어질까? (...) 순간 숀은 생각한다. 진공 우주 속 깡통에서 나 지금 뭐하는 거지? 깡통에 든 깡통 인간. 4인치 두께의 티타늄 밖에 죽음이 있다. 그냥 죽음도 아니다. 존재의 말살이다. 왜 이러고 있지? 절대 번영할 수 없는 세상에서 바득 바득 살아 보려고 하는 이유는 대체? 완벽한 지구가 저기 있는데 굳이 우주가 원치 않는 곳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갈망은 호기심일까 아니면 배은망덕함일까. 숀은 절대 알 길이 없다. 이 기묘하고 뜨거운 열망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까 아니면 바보로 만들까. 딱히 어느 쪽에도 못 미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 기운 차려, 아내는 이렇게 말했었다. 저 위에서 소멸하더라도 당신은 수백만 개 파편이 되어서 지구 궤도를 돌게 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좋지 않아? 그리고 비밀을 모의하듯 웃는다. 습관처럼 그의 귓불을 어루만지며. 떠나기 전 10대 딸이 이런 말을 했었다. 진보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럼, 아름답지, 그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정말 아름답고말고. 그러면 원자폭탄은요, 기업 로고 모양으로 빛나게 우주에 쏘아 올리겠다는 위성은요, 프린팅 기술로 달의 먼지 표면에 세우겠다는 건물은요? 꼭 달에 건물을 세워야 하는 거예요? 나는 그냥 지금 이대로의 달이 좋은데. 그래, 그래 그는 대답했다. 아빠도 그래, 하지만 그 모든 게 아름다워. 왜냐면 아름다움은 선함에서 오지 않거든. 너는 진보가 선하냐고 물은 게 아니였지. 인간도 선해서 아름다운 게 아니란다. 살아 있으니 아름다운 거야. 어린애처럼. 살아 숨 쉬며 세상을 궁금해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선한지는 상관없어. 눈에 빛이 감돌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 가끔은 파괴적이고 상처를 입히고 또 가끔은 이기적이지만, 살아 있기에 아름다워. 살아 숨 쉰다는 점에서 진보도 그렇단다. (...) 하지만 그가 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그리고 돌아가게 되면 해 줄 말은 따로 있다. 진보는 어떠한 실체가 아니라 느낌이라는 것. 배에서 꿈틀대기 시작해 가슴으로 북받쳐 올라오는 모험과 팽창의 느낌. 피에트로는 이곳에서 크고 작은 순간마다 거의 끊임없이 그걸 느낀다. 세상의 심오한 아름다움을, 빽뺵한 별들이 무성한 이곳까지 그를 쏘아 올린 믿기 힘든 은총을, 그는 배와 가슴으로 느낀다. 제어 패널과 환기구를 청소할 떄, 따로 점심을 먹고 함께 모여 저녁을 먹을 때, 지구로 발사되어 대기권에서 연소되며 사라질 쓰레기를 화물 모듈에 적재할 때, 분광계가 지구를 측정할 떄, 낮이 밤이 되고 또 빠르게 낮이 될 떄, 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질 때, 저 아래 총천연색 대륙이 지나갈 때, 공중에 떠다니는 치약 덩어리를 잡아 칫솔에 얹을 때, 머리를 빗고 일과를 다 마친 뒤 피곤한 몸을 끌고 끈이 풀린 침낭에 쏙 들어가, 이곳에서는 똑바른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떤 반발도 없이 머리가 받아들인 사실로 인해 똑바로도 거꾸로도 아닌 자세로 떠서, 밖에서 태양이 떠올랐다가 졌다가 하는 동안 인위적으로 정해진 밤에 지상 250마일 우주에서 잠을 청할 떄, 그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윤이 나는 구슬 행성은 잠깐이지만 아주 달콤한 노래를 부른다. 지구의 빛이 합창한다. 그 빛
- 비효율의 사랑
- 정치 성향은 어떻게 결정되는가갈림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갈라진 사람들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순진한 발상일 뿐이다. 이러한 논의가 정치적으로 확고한 입장을 가진 사람 사이에서 마침내 통하리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 정치적 관점이 성향에 따라 형성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제대로 활용한다면, 정치적 반대자를 이해하고 최적의 정치 체제를 설계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정치 심리의 본질과 깊이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유익한 이유는 이 행성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와 다른 제2의 정치 성향을 배우는 일은 본래의 정치 성향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깊이 통찰하도록 돕는다. (...) 정치적 설득력을 유지하고 더욱 다듬어야 하는 주된 이유는, 정치 성향이 반대인 사람을 설득하 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 보는 것도 유익하겠지만 말이다. 그보다는 정치 성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합리적인 주장과 새로운 증거에 실제로 반응할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다. 그리고 당신과 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귀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를 권한다. 설득이 불가능한 사람을 바꾸려는 시도를 통해 왜곡된 만족감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노력은 부질없을 뿐 아니라 전반적인 정치 분위기를 오염시키는 경향이 있다. ✦ 💬 유전성이 얼마나 강력한가에 촛점을 맞춘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고(그걸 누가 모르나🤷) 정치 성향의 유전성에 대한 연구는 그에 비해 빈약함. 이렇게 많은 텍스트를 읽고도 저 간단한 명제가 안 받아들여진 건 또 오랜만임. 그리고 현 세대의 정치성향의 생성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결국은 정체성 정치인데 그냥 진보다 보수다 가지고 모든 걸 이해하려는 게 말이 되나 싶음. 10년 전쯤 처음 나온 책인데 이렇게 옛날 책 같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극화가 되어버린 걸 그냥 받아들이자, 그게 해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자 라는 결론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함. 문제는 (약간 동성애 후천성 논쟁이랑 똑같은 건데 나는 유전이냐 환경이냐를 아예 벗어나야 한다 라는 입장이라서) 개인 단위의 정치성향이 어떻게 형성되었냐 라는 질문이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고 해결책에 대한 힌트도 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임. 그래서 아종이라 할 만큼 달라져버린 너와 내가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할 건데? 라는 질문이 가장 중요하고 아무도 답을 모르는 "그" 질문 아닌가.
-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진지하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요." 운전사가 말했다. "인생이 진지한 것인지 알기 전까지는 저도 답을 모를 겁니다." 트라우트가 말했다. "인생이 위험하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인생은 큰 상처를 주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꼭 진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제 저의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건대, 여러분의 도시가 소유한 그 그림은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동물의 의식에 대한 그림입니다. 그것은 모든 동물의 비물질적인 핵심 -- 모든 메시지를 수신하는 '나 자신'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살아 있는 모든 것입니다. 쥐와 사슴과 칵테일 웨이트리스의 내면에도 말이죠. 그것은 우리에게 그 어떤 터무니없는 모험이 닥쳐오든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것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성스러운 그림은 수직으로 된, 흔들림 없는 하나의 빛줄기입니다. 만일 바퀴벌레나 칵테일 웨이트리스가 그의 옆에 있었다면 그 그림은 두 개의 빛줄기를 보여줬을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이며 어쩌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성스러움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기계에 불과합니다. 저는 방금 여기 있는 이 칵테일 웨이트리스, 이 수직으로 된 빛줄기로부터 그녀의 남편과 셰퍼즈타운에서 처형당할 참이었던 바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좋습니다 -- 다섯 살짜리 아이가 그 만남을 성스럽게 해석한 그림을 그리게 해봅시다. 그 다섯 살짜리 아이가 저능함, 철창, 기다리는 전기의자, 교도관의 유니폼, 교도관의 총, 교도관의 뼈와 살을 벗겨내게 해봅시다. 다섯 살짜리 아이라면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완벽한 그림이란 무엇일까요? 두 개의 흔들림 없는 빛줄기입니다." 라보 카라베키안의 야만적인 얼굴에 황홀감이 꽃피었다. "미들랜드시티 시민 여러분, 저는 여러분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는 말했다. "여러분은 걸작의 거처를 마련해주셨습니다!"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 드디어 만나는 해부학 수업
- 제7의 인간모든 사진들은 수송의 한 형태이며, 부재(不在)의 한 표현이다. 자본주의의 윤리에 따르면, 가난이란 개인이든 사회든 기업에 의해서 구제될 수 있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기업은 생산성이라는 척도에 의해서 판단되며, 이 생산성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가치가 된다. 그래서 도망칠 수도 없는 감겨진 빈곤 상태로서의 저개발이란, 자본주의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는 세계의 거의 절반을 그러한 상태에 묶어 두고 있다. 이론과 실제의 사이에 있는 이 같은 모순이야말로 왜 자본주의내 자본주의적인 문화제도가 이제는 더 이상 그들 자신이나 세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이다. (...) 저개발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강탈과 착취를 당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인위적인 울혈 증상에 걸린 채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저개발은 그냥 죽일 뿐만이 아니다. 그 치명적인 정체(停滯)는 삶을 부정하며 죽음을 닮아 있다. 그 이민은 살고 싶어한다. 그를 이민을 떠나도록 강요한 것은 빈곤 하나만은 아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서, 그는 애초에 자기가 태어났던 환경 속에는 결여되어 있는 역동성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을 제공하러 온다. 그들의 노동력은 기성품이다. 이제부터 그 노동력 덕분에 생산에 이익을 얻게 될 공업화된 국가들은 그 노동력을 생성시키는 비용은 전혀 부담을 해본 적이 없다. 그뿐 아니라 중병에 걸린 이민노동자나 너무 늙어서 일할 수 없게 된 이민노동자를 부양하는 경비 역시 부담하지 않는다. 도시화된 국가의 경제에 관한 한 이민노동자들은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양육되지도 않으며, 나이 먹지도 않으며, 지치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 하나의 기능 - 일하는 것을 가질 뿐이다. 그들의 삶의 다른 모든 기능들은 그들의 출신 국가의 책임이다. (...) 다경제학자들은 가끔 '자본 수출로서의 이민' 이 생산의 다른 요소들의 수출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집계된 바로는, 한 이민노동자들의 양육, 그가 스무 살에 이르기까지 생존을 유지하는 데 그의 조국의 국민경제가 부담하는 액수가 약 2천 파운드에 이른다. 한 명 한 명의 이민이 도착할 때마다, 저개발된 경제권에서 개발된 경제권에 대해 그만한 액수를 희사하는 셈이다. 게다가 공업화된 나라가 차지하는 저축액은 또 훨씬 막대하다. 그곳의 좀더 높은 생활 수준으로 계산해 본다면 그의 조국에서 열여덟 살짜리 노동자를 생산해 내는 비용은 1인당 8천 파운드에서 1만6천 파운드는 된다. 이미 다른 곳에서 생산되어서 온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은 도시화된 국가가 매년 8백억 파운드 이상을 저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를 가진 자들에게, 인간들이 주어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어떤 세계의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 세계의 모습을 해체하여 자기 시각으로 재조립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행한 일정한 선택을 이해하려면, 그가 부닥쳤거나 거절당했던 다른 선택들의 결핍 상태를 상상 속에서 직시해 보아야 한다. 잘 먹는 사람들은 못 먹는 사람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서툴게나마 남의 경험을 파악할 수 있으려면 그 세계를 분해해서 재조립해 봐야만 하는 것이다. 남들의 주관 속에 들어가느니 하는 얘기는 오해에 이를 여지가 있다. 남들의 주관이란 똑같은 외부적 사실들에 대해서 단순히 내부적인 태도만이 다른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 중심부에 놓여져 있는 사실들의 별자리 자체가 다른 것이다. 노동 조건과 생활 환경의 개선, 사회복지, 의회민주주의, 현대 기술문명의 이기 같은 것들은 과거의 비인간적인 것들이 우발적인 것이었을 뿐이라는 주장에 핵심적으로 인용되는 말들이다. 도시 중심지역에서는 그런 주장이 일반적으로 신봉되고 있다. 거기서는 착취의 가장 적나라한 형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은 지구 반대쪽 끝의 제3세계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지구 반대쪽'이라는 개념은 지리학상으로뿐 아
- 죽은 다음임신부들은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노인들은 요양 시설 병실에 누워 자신의 것이 아니면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몸에 절망한다. 장례에는 ‘엔딩 플래너’가 등장하게 되었다. A 패키지, B 패키지, C 패키지를 내밀며 세트 상품을 고르듯 장례를 준비하라고 한다. 소비자가 된 사별자가 그 순간에 해야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울음과 회한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별자가 해야 하는 일이 상품 선택과 문상객 맞이뿐이라는 것도 쉽게 수긍되진 않는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생산품(노동)에서만 소외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소외되고 있다. 나는 내 죽음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았다. 여자 상주는 일탈이 아니다. 살아가는 일이다. 관을 멜 필요가 어디서 오는지, 상주의 자리에 설 필요가 어디서 오는지. 필요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모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성별이 아니라, 내가 어떤 공동체에서 살아 가고 있는지다. 아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싶은지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세계를 만든다. 다만 그 시작이 "요즘은 그렇게도 해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거드는 장례지도사의 조언일 수도, "저는 여자가 아닌데요"라는 단호한 도발일 수도. 내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 순간에도 사회가 나를 잊지 않고 장례를 치러줄 거라는 믿음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연대감이죠. 위패 하나 드는 게 큰일은 아니지만, 사회적 메시지를 계속 내는 거죠. 당신의 장례를 함께 책임지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혼자가 아니고 당신 혼자가 아니고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인기척을 끊임없이 내는 거예요. 그 인기척이 저에겐 위패를 드는 거고요. 하지만 죽음 역시 사회적인 것이라, 애도는 사회의 규율과 질서 안에 존재한다. 누구에게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 국가적으로는 공적 지원 제도가 작동하는 문제다. 누구를 죽일 것인가도 통치의 기술이고, 누구를 살릴 것인가도 권력이 행하는 일이다. 이 분류는 '죽음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말을 뒤집고 죽음의 위계를 만든다. 사회가 애도(의 비용)를 감수하지 않는 죽음이 생겨난다.* 가난한 이의 죽음, 시설에서 사는 이의 죽음, 사회가 '온전하다'고 보지 않는 몸을 지닌 이들의 죽음, 그리고 연고 없는 자의 죽음. 정례와 애도 절차가 생략되어도 괜찮다고 용인하는 죽음들이다.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없는 사람은 없다.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던 사람"만 있을 뿐이다. "어떤 주체는 애도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다른 주체들은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결정하는 애도 가능성의 차등적 배분은, 누가 규범에 맞는 인간인가에 대해 특정한 배타적 관념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작용을 한다. 살아갈 수 있는 삶, 애도할 수 있는 죽음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주디스 버틀러, 윤조원 옮김,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 13쪽.* (...) 앞서 언급한 민속학자 이도정은 비정상적으로 취급되는 죽음의 의미를 재해석했다. 그 죽음들은 '일탈'이 아닌 "일생 의례의 궤적에서 이탈할 수 있는 인간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내게 있어 죽은 자의 존엄은 그가 살아온 삶이 부정당하지 않았을 때 가능하다. 살았을 때나 죽었을 떄나 정상과 비정상, 쓸모와 무용, 질서와 이탈이라는 이분법 속에 삶이 익명화되거나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한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니 죽음 앞에서 자신이 설명될 수 없다면, 그것은 존엄과는 무관한 일이다. 국가는 끊임없이 '가족생활'에 관여해왔다. 정확히는 가족 구성원들의 노동과 재생산(노동)을 통제했다. 돈을 버는 '가장 아버지'와 재생산과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어머니'라는 환상과 그 실질적 수행이 자본주의 '시장'을 떠받들고 있다. 그 시장은 비정형 노동에 종사하는 딸과 아내를 만들어 왔고, 프리랜서-플랫폼 노동에 종사하는 오늘날의 '자녀 세대'를 낳았다. 우리는 그 '가족'에 갇혔고, 그리하여 지하에 자리한
-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문득 우리 네 사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였다. 마치 우리가 공통점이 아주 많은 것처럼, 그리고 한 가족인 것처럼. 나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본질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아이디어도 내놓지 않으며, 필요한 물건이나 식량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땅을 경작하지도 않고, 경제 활성화에 보탬이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자손을 번성시킨 것도 아니다. 검정 코트를 아들로 둔 괴짜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지금껏 우리는 세상에 유용한 뭔가를 제공한 적이 없다. 그 어떤 발명품도 고안해 내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권력도 없고 보잘것없는 재산 말고는 다른 자원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고 있지만 남들은 그것을 조금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진대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 아무도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 나는 또한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결국 나도 저들과 비슷한 부류 아닌가. 내가 인생에서 거둬들인 수확물은 건축 자재가 아니다. 나의 시대에도, 또 다른 시대에도 그것은 별 쓸모가 없다. 하지만 왜 우리는 꼭 유용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가? 엉겅퀴에게는 생명권이 없는가? 창고의 곡식을 훔쳐 먹는 쥐는 또 어떤가? 꿀벌과 말벌, 잡초와 장미는?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더 못한지 과연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까? 구멍이 많고 휘어진 거목은 사람에게 베이지 않고 수세기 동안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그 나무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유용한 것으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이익은 누구나 알지만, 쓸모없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세 시대의 수도사이자 점성가가 자신의 천궁도를 보다가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었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멩이에 맞아서 죽을 운명이었대. 그때부터 그는 수도사용 후드 아래에 항상 철모를 쓰고 다녔어. 어느 해 성금요일에 그는 모처럼 후드와 함께 철모를 벗었어. 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성당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지. 바로 그때 그의 맨 머리에 작은 조약돌이 떨어져서 가벼운 생채기를 냈어. 하지만 수도사는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확신했어. 그래서 주변을 말끔히 정리했고, 한 달 후 세상을 떠났어. 모든 건 이렇게 작동하는 거야, 디지오. 하지만 난 알고 있어, 아직 내게 시간이 꽤 많이 남았다는 걸. > 욕심, 자연을 존중할 줄 모르는 태도, 이기주의, 상상력의 결핍, 끝없는 분쟁, 책임 의식의 부재가 세상을 분열시켰고, 함부로 남용했고, 파괴했다. (······) 세상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심지어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다. > 다정함이란 다른 존재, 그들의 연약함과 고유한 특성, 그리고 물리적인 고통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그 존재들의 나약한 속성에 대해 정서적으로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다. 다정함은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유대의 끈을 인식하고, 상대와의 유사성 및 동질성을 깨닫게 한다. 이 세상이 살아 움직이면서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고, 더불어 협력하고, 상호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 문학이란 우리와 다른, 모든 개별적 존재에 대한 다정한 마음에 기반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기본적인 심리학적 메커니즘이다. *- 토카르추크, 노벨상 수상 이후*
- 면역에 관하여「백신은 다수 집단을 동원해서 소수 집단을 보호함으로써 효과를 발휘하지.」 아버지의 설명이다. 이때 아버지가 말한 소수 집단이란 해당 질병에 특히 취약한 사람들이다. 인플루엔자의 경우, 노인들이다. 백일해의 경우, 신생아들이다. 풍진의 경우, 임신부들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부유한 백인 여성들이 제 자식에게 백신을 맞히는 건, 독신인 어머니가 최근에 이사를 했기 때문에 선택에 따라서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미처 아이를 완전 접종시키지 못한 일부 가난한 흑인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 동참하는 일일 수 있다. 이것은 한때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육체적 예속을 끌어내는 행위였던 백신 접종의 옛 적용 방식을 완전히 뒤집는 셈이다. 적어도 오늘날은, 공중 보건이 전적으로 나 같은 사람만을 위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오히려 어떤 공중 보건 조치들이 우리를 통해서, 말 그대로 우리 몸을 통해서 구현된다는 생각이 조금쯤 진실이다. 나중에 나는 같은 교수가 학교에서 하는 강의를 들었다. 선천 면역과 후천 면역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고 난무하는 두문자어 들을(NLR이니 PAMPLI APC니) 외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나는 면역계 세포들의 삶이 서로 키스하고, 순진해지고, 먹고, 배설하고, 표현하고, 켜지고, 지시받고, 제시하고, 성숙해지고, 기억하는 삶이란 걸 알았다. 「내 학생들하고 똑같네.」 시를 가르치는 교수인 친구가 말했다. 그 강의에서 떠오른 하나의 서사란 게 있다면, 그것은 면역계와 그것이 공진화하는 병원체들이 상호 작용을 벌이는 드라마 였다. 이 드라마는 가끔 진행 중인 싸움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그렇더라도 아파치 헬리콥터와 무인 드론이 동원되는 싸움은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 재치를 겨루는 싸움이다. 「그러자 바이러스는 그보다 더 똑똑해져서, 천재적인 꾀를 냈습니다. 우리 전략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맞선 겁니다.」 교수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 몸과 바이러스는 치명적인 체스 게임에 푹 빠져서 서로 겨루는 두 지성이었다. 냉소주의는 타당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슬픈 것이다. 전 세계의 연구자들, 보건 관료들, 의사들로 이루어진 방대한 네트워크가 돈 때문에 아이들에게 부러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발상이 아주 그럴싸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는 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서 실제로 무엇을 빼앗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다. 자본주의는 이미 남들을 위해서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또 시장성 없는 예술의 가치를 박탈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자본주의의 압박을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본질적 법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모든 사람은 다 소유된 상태라고 믿기 시작할 때, 그때야말로 우리는 진정 가난해질 것이다. 세상을 주유하기 시작했던 때, 젊은 캉디드는 낙관주의를 쉽게 포용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그가 살았던 삶은 안락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행하면서 전쟁, 자연재해, 강간, 교수형을 목격한다. 한 손과 한 다리가 없는 노예를 만난다. 노예는 그에게 <이것은 당신들이 유럽에서 먹는 설탕에 대해서 우리가 치르는 대가죠>라고 말한다. 캉디드는 의문하기 시작한다. <만일 이것이 가능한 최선의 세상이라면, 다른 세상들은 대체 어떻단 말인가?> 그러나 책은 해피엔드로 끝맺는다. 캉디드와 친구들은 - 투옥과 매춘을 겪고 매독과 흑사병에 시달렸던 이들이다 - 함께 작은 텃밭을 일구어 자신들의 정원에서 난 열매를 즐긴다. 플로베르는 『캉디드』의 결말이 훌륭하다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인생 그 자체처럼 한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동생과 나는 둘다 『캉디드』를 처음 읽었던 순간을 기억하지만, 그 결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는 둘 다 잘 모른다. 최소한 동생은 자정에는, 그러니까 내가 동생에게 『캉디드』를 해석해 달라고 요구했던 그 시각에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말해야 해.」 동생은 졸린 목소리로 내게 조언했다. 나는 그 결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더 이상 낙관적이지 않을 때 가꾸는 정원이 세상으로부터의
- 검은 머리 짐승 사전떨어지면 무조건 깨지는 거라고 / 화분은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잘못 없이 넘어진 흙을 알고 있으니까 / 흙은 깨진 적 없지만 처음부터 터진 모양이었으니 소리 낸 적도 없을 것이지만 오래 갈리고 젖어 고와진 흙 진흙으로 검어진 발가락 아슬아슬하게 쫓아오는 나를 미워하면 목구멍까지 흙이 차오르게 돼 심장이 또 뿌리를 흔들어 입 밖으로, 무엇이 뱉어질 것 같은 // 식물이 나에게 있는 것이 버거웠고 / 나에게 없는 식물이 너무 버거워서 // 알지 못하겠어 이 비행기가 어디로 갈지 가지 않을지 알지 못하겠어 추락할지 도착하기는 하는지 잠을 자면 꿈이 계속되었어 잠 안의 꿈 꿈 안의 나 나는 계속해서 잠을 시도했어 그런 식으로 화분이 흙과 동일해 왔어 그러나 아무도 여기에서 까맣게 젖은 나의 일부에서 무엇이 시작되리라고 여기지 않아 아직도 이 진흙의 이름을 모르고 있어 고양이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넌 날 몰라 네가 뭘 안다고 너는 아무것도 몰라 가끔 고양이는 두 발로 걸었고 세 발로도 걸었고 걷지 않고 움직이기도 했다 정말로 고양이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피투성이 이마로 눈을 뜨면 난 되뇌어야만 했네 고양이다 고양이야 내가 쫓아간 고양이 그러니까 어젯밤 그건 일종의 애정 표현······ 입맞춤······ 내가 모르는 세상에는 부리와 날개와 단지 독특한 사랑법을 가졌을 뿐인 고양이가 있는 것이다 침대 아래에는 모서리 많은 파편이 자갈처럼 깔려 있으며 / 고양이는 이것을 본인이라 말한다 자 걸어 봐 내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 걸어 봐 / 네가 선택한 아픔을 / 염치없이, 고양이에게 이해를 바랄 수 없는 아픔을 / 불안 굉음 적목 현상 의기소침 연민 안으면 흘러내리는 부드럽고 연약한 몸 그 안에 무수한 칼날 / 모두 고양이였다고 생각해? / 쏟아지는 옷 더미와 젖은 바닥과 사방에 널린 날카로운 조각 꿈의 조각 / 어지러이 // 나는 얼마간 분실되었다 /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 / 알 수 없는 동물이 되어 (...) 봄에 나는 우연한 계기로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강아지를 만나 게 되었다 안녕, 반가워요 그의 첫 마디를 들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는데 한 번에 반하는 것처럼 깨달았다 당신이다 당신이 고양이에게 말을 가르쳤다 조용한 당신 예의가 바르고 빈틈없는 당신 오늘 처음 만났지만 내가 열렬하게 좋아해 본 적 있는 당신 외에도 중요한 여러 당신을 도둑맞은 당신이다 나는 당신이 보여 주지 않은 빈틈을 본다 그 빈틈에 들어맞는 조각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서리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안다 고양이는 사라졌고 당신은 강아지도 고양이도 아니다 그러나 당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나 이 여름이 지나기 전에 당신을 이해한다
- 로드마크
- 마이너 필링스
- 못해 그리고 안 할 거야세 번째 암소는 수소에게 데려가는 트럭에 올라타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송아지를 넣을 수가 없었다. 몇 후 사람들은 그 암소를 도살장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녀석은 도살장으로 데려가는 트럭에 올라타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녀석은 아직 거기 있다. 인생이 너무 심각해서 글을 계속 쓸 수 없다. 한때 인생은 더 쉬웠고, 종종 즐거웠고, 그래서 글쓰기 역시 심각해 보이기는 했지만 즐거웠다. 지금 인생은 쉽지 않고, 너무 심각해졌으며, 그에 비해 글쓰기가 조금 우습게 보인다. 글쓰기는 현실을 주제로 하지 않을 때가 많고, 현실을 주제로 하더라도 동시에 현실의 일부를 대체할 때가 많다. 또한 글쓰기는 삶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기도 한데, 지금은 내가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나는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러니 나는 삶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 관해 글을 쓰는 대신 그냥 글쓰기를 중단하고 삶을 감당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인생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아야 더 똑똑해질 것이다. 대신 해야 할 다른 일들이 있다. 집 앞 계단 햇볕 아래 내 어린 친구와 나란히 앉아 / 나는 블랑쇼를 읽고 / 친구는 제 다리를 핥는다.
- 즐거운 어른
- 치치새가 사는 숲세상은 인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요. 그때 내가 피부과 의사의 말을 기억할 리는 없었다. 열네 살이었으니까. 나는 20년 후에 보라매병원 진료실에서 그 말을 듣게 된다. 그렇지만 이미 그 말을 들은 듯했다. 듣고 기억하는 듯했다. 미래를 기억하는 게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원인이 결과를 빚는 게 아니라 결과가 원인을 반추하게 하므로. 미래가 과거를 구성하므로. 결과가 원인에 앞서므로.
- 아연 소년들나는 사건이 아니라 감정의 발자취를 좇는다. 사건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감정의 변화들을 주시한다. 내가 하는 이 일은 어쩌면 역사가의 작업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흔적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의 발자취를 좇는 역사가다. 거대한 사건들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거대한 사건들은 역사 속으로 계속 전진해들어간다. 하지만 여기 이 작은 사건들, 그러나 작지만 작은 사람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이 사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오늘 한 소년(가냘프고 병약한 모습 때문에 병사처럼 보이지 않는다)이 동료들과 함께 적을 살해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낯설고 어색했지만 흥분도 되더란다. 적을 향해 얼마나 무섭게 총을 쏘아댔는지 모른단다. 과연 이런 사건이 역사의 한자리를 차지 할 수 있을까? 내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일은 늘 그렇듯 딱 한 가지다. 나는 (책에서 책으로 넘어다니며) 필사적으로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린다. 역사를 사람의 크기로 작게 만드는 일. (...) 규모가 작은 전쟁을 책으로 써내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견지의 윤리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접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건 반드시 작고, 개인적인, 그리고 개별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건 바로 단 한 사람,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존재인 그 한 사람이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 중 어느 한 명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소중한 그 한 사람. 아이에게도. 어떻게 해야 우리는 정상적인 시각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내가 공포를 느꼈다고 해서 부끄럽지는 않아요. 공포심이 용맹함보다 더 인간적이니까요. 아서 케스틀러가 했던 말, 기억들 하세요? "우리가 진실을 말할 때 그 진실은 왜 언제나 거짓처럼 들리는가? 새로운 삶을 천명하면서 우리는 왜 온 땅을 시신들로 뒤덮는가? 빛나는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왜 우리는 늘 협박을 일삼는가?" 재판은 이 대립에서 벗어나는 적법한 돌파구를 마련해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인간적인 돌파구여야 합니다. 어머니들은 언제나 아들에 대한 사랑 안에서 옳고, 작가들은 진실을 말할 때 옳으며, 병사들은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보호할 때 옳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가치가 이곳 민사소송에서 충돌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제 눈에 비치는 대로 세상을 바라볼 작가로서의 권리입니다. 그리고 제가 전쟁을 증오한다는 사실이고요. 또한 저는 진실과 유사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고, 예술에서의 기록문은 군정치위원회의 증명서도, 노면전차 승차권도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제가 쓰는 책들은 기록문이면서 동시에 제가 시대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으로부터, 그리고 시대의 공기로부터, 공간으로부터, 목소리들로부터 하나하나 세세한 것들과 감정들을 수집합니다. 나는 이야기를 꾸며내지도 추측하지도 않습니다. 현실 자체로부터 책을 모으지요. 기록 문서, 그것은 사람들이 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며, 저는 이 기록문서의 일부입니다. 저 자신만의 세계관과 감각을 지닌 예술가로서 말이지요. 저는 이 시대, 지금 이 순간의 역사를 쓰고 녹음합니다. 살아 있는 목소리들, 살아 있는 운명들을요. 역사가 되기 전의 목소리와 운명은 아직은 누군가의 고통이고, 누군가의 비명이고, 누군가의 희생이거나 범죄입니다. 저는 자신에게 수없이 묻고 또 묻습니다. '그 기운이 우주에 미칠 정도로 악의 규모가 커져버린 이때, 세상에 악을 확장시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악의 한가운데를 통과해 지나가지?' 매번 새로운 책을 내기에 앞서 저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이는 저에게 큰 짐입니다. 그리고 저의 운명입니다.
- 성냥과 버섯구름
- 블랙케이크바이런, 네가 해야 하는 일은 언제든 네가 누구고 어디에 있는지 아는 거야. 그건 네가 너의 중심을 찾아내고 지켜 내야 한다는 뜻이야. 파도는 그렇게 대하는 거야. 그런 다음에는 연습을 더 해야겠다든지, 폭풍 같은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든지, 파도가 너한테는 그냥 너무 벅차다든지, 그런 것들을 알게 되지. 너 스스로가 아예 서핑에는 안 맞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네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바다에 나가지 않으면 이것들 중에 뭐가 사실일지 알 수가 없는 거야.
-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학생들에게 이 예를 들어주었을 때 한 학생이 TT1(DeepL)이 더 문학적이지 않냐고 질문했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했다. 나는 첫 번째 문장이 어색한 번역 투라고 느끼지만, 그 질문을 한 학 생은 딱히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계 번역이 만연하면서 언어 감각이 변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언어 감각의 변화가 출판 번역을 하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기계 번역의 발전보다 더 큰 위협일지도 모른다. 인공지능 번역 엔진은 현대의 바벨탑이다. 번역 엔진은 하나의 통합 언어를 향해, 다시 바벨탑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분투한다. 자동 번역 엔진은 이제 번역가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될 것이고, 웹상에서, 일상에서 언어 간 경계가 사라질 것이고, 언어는 결국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자동 번역과 대형 언어 모델이 보편화되면서 언어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문체는 표준화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탁월한 언어는 그 과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표준화할 수도 없는 변칙, 아노말리(anomaly) 일 뿐이다. (...) 바벨탑 때문에 같은 것을 말하는 수만 가지 다른 방식이 생겼다. 우리는 그전으로 거슬러 가서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게 되고 싶은가. 서로 다른 말들의 부딪힘과 어울림, 언어를 가지고 노는 다양한 방법, 날마다 우리가 느끼고 겪는 언어의 신비한 변화,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버리고 싶은가. 살아 있는 풍부하고 섬세한 언어 없이 문화가 발전할 수 있을까. 흐릿하고 개성 없는 공용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섬밀하고 정교한 언어의 세계가 있다. 단테가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속어가 아니라 공용어이지만 죽은 언어인 라틴어로 글을 썼다면 『신곡』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번역이든 창작이든 우리가 쓰는 글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더 평범해지는 쪽이 아니라 더 탁월해지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렇게 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알고리즘으로는 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출근길 지하철이게 지하철행동을 통해서 드러난 이 사회의 본질이에요. 쓸모 있는 사람만 시민권 열차에 태워 가지고 열심히 운반하고, 쓸모없는 사람들 앞에서는 아예 무정차하고서 내버려두고 떠나는 거. 그리고 출근길 지하철은 이 사회의 본질을 아주 압축적으로 담아놓은 곳이죠. 누가 사회 바깥으로 쫓겨나건 말건, 쓸모 있는 사람들끼리만 지지고 볶으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정시에 맞춰 운행 되어야 하는 장소니까. 오세훈 시장이 그렇게 표현을 했는데요, 전장연은 '사회적 테러'를 저지르고 있는데도 장애인이라는 약자 지위를 이용해서 처벌도 제대로 안 받는다고요. 오세훈 시장에게 분명하게 말을 하고 싶어요. 누군가의 일상을 방해하고 그러는 게 테러라면요, 여태껏 이 국가가 장애인들에게 해온 역사는 그럼 장애인들한테 매 순간 테러였어요. 정말로요, 장애인들에게는 이 사회가 테러 그 자체예요. 우리가 불법을 저질렀으니 처벌해야 한다고요? 그럼 이 국가가, 이 사회가 장애인들에게 가해온 테러는 왜 아무도 처벌하려 하지를 않나? 억압과 차별이란 게 대부분 그래요. 딱 마음을 나쁘게 먹고서 저놈의 자식들 쓸모도 없고, 꼴 보기도 싫으니까 혐오하고 차별해야지! 이러는 경우도 물론 있긴 하죠. 그런데 대부분은요, 그냥 옆에서 벌어지는 폭력들을 방치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동조해버리면서 억압과 차별을 재생산하는 데 복무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기가 이 사회의 차별을 묵인하고서, 큰 관심 안 두고 그냥 살아가는 게 별일이 아닌 거 같죠? 절대 그렇지 않아요. 나쁜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그런 태도가 다 누구한테는 엄청난 재앙이 되어버리는 거야. 그리고 그런 태도들이 지속되면서 세상은 계속 나아지지가 않는 거지. (...) 우리가 단기적으로는 우리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할지도 몰라요. 아주 처절하게 패배를 할지도 모르죠. 그런데요, 이런 생각이 발아할 수 있는 씨앗을 이 사회 컨베이어 벨트 한복판에 심어둔 것만으로도 저희는 이미 이 사회에 희망을 심는 데 성공한 거라고 봐요. 그리고 그 희망이란 거는 정말로 모두에게 선물이 될 거야. 장애인들의 존엄이 인정되는 세상은요, 결국 모두의 존엄을 위한 토대가 될 거니까요. 진짜 사회가 바뀌려면요, 이런 시스템을 멈춰 세워야죠. 특히 지하철은요, 이 폭력적인 사회를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니까, 여기를 멈추는 건 우리에게만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몰라요. 우리를 지지해서 지하철에 나와줘도 참 고맙고 좋은데요, 그렇다고 거기에만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각자의 의제를 가지고서 이 시스템과 싸우기 위해 지하철에 모였으면 좋겠어요. 거기서 우리의 억압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싸워야 함께 해방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이미 이 체제의 피해자가 된 모든 사람들이 단 하루만 이 시스템을 다 같이 멈춰 세울 수가 있다면, 그렇게 할 수 만 있다면 정말로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이 생기게 될 거야. 다시 한번 말을 할게요. 이 세상을 바꿀 힘은 우리 자신에게 있어요. 지하철에서 단 하루라도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당하고 있는 억압에 대해서, 이 공간에 와서 함께 이야기해주세요. 저는 이게 출발이 될 거라 고 봐요. 인간의 존엄과 권리가 돈 논리보다도, 소수만의 성장 논리보다도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사회로 나아가는 희망의 물리적 기반을 위한. 억압의 컨베이어 벨트를 멈추고 누구나 꿈을 꾸고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한. 저는 우리가 그렇게 이 사회에 모습을 드러낼수록 사회적 관계가 이미 조금씩 바뀌고 있는 거라고 봐요. 생각해봐요. 우리가 나타나기만 해도 출근길 지하철의 풍경이 바뀌잖아요. 버스의 풍경이 바뀌고, 거리의 풍경이 바뀌잖아요. 거기에서 이미 관계의 변화를 저희는 만들어낸 거예요. 원하던 사회를 단숨에 만들지는 못했더라도, 그 씨앗을 여기서 뿌리고 있는 거죠. 보이지도 않던 사람들의 존재감이 이렇게 세졌다는 거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변화가 찾아온 건가요? 기껏해야 불쌍하기만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깡패가 되고. 그
- 한국이란 무엇인가이 지점에 이르자 억압에 저항하여 주체적인 참사랑을 성취했다는 자리의 낭만적 서사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서사가 무너지자 해변에서 실종된 사람이 실제 남편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비로소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아야겠다는 결심과 함 께 자리는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지도 않고 해변을 떠난다. 야반도주할 때도 되지 못했던 주체적 개인이 이제야 되어 떠난다. 그다지 낭만적이지도 않은 데다 매사가 복잡하고 흐릿하기만 한 현실을, 완전한 동지도 없고 완전한 적도 없는 뒤죽박죽인 세상을, 이제 주체적 개인이 되어 꾸역꾸역 살아갈 것이다. 사랑과 혁명의 의미마저 오롯이 재정의해가면서. 촛불 시위는 정말 '혁명'이었을까? 그것이 정말 혁명이었다면, 촛불혁명이 약속한 세상은 정녕 도래했을까? 혁명은 일어났으나 혁명이 약속한 세상이 오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외친다.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혁명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를 모르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외칠 뿐이라고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말한 적이 있다. 이제 선거일이 되면, 해변에서 실종된 사람이 혁명가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주체적 개인이 되어 투표장을 떠나야 한다.
-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항암식단은 병자를 부양하는 사람에게 버거운 미션이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도 않는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돌봄의 수요가 '딸이 살림 밑천'이라는 말이라든가 '딸 바보'를 불러냈듯이, 먹이고 돌보기 위해서 집에 붙박이로 상주하는 사람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아마 내가 잘못된다면 어머니는 옆집 엄마의 친구가 그랬듯이 당신을 탓하며 괴로워할 테다. 지금도 암환자들이 모이는 카페의 항암식단 인증 사진 댓글창에는 엄마들과 딸들의 칭찬과 자책이 줄줄이 달린다. 정성과 헌신의 이 지독한 성별성. 밤낮을 끓이고 기름을 걷어 다시 끓인 곰탕이 병을 낫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걸 과학적 지식이 증명해 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다. 우리에게는 병원에서 나눠 준 <면역 저하 환자를 위한 식품 섭취 지침> 못지않게 비전이 필요하다. 각개전투하듯 해다 먹이는 항암식단이 아니리 제도와 관계망을 통해서 건강해질 수 있다는 저마다의 이야기와 상상력 말이다. 생존에 거창한 이유는 없지만, 100여 일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 부대끼며 살았던 구체적인 일상이 그들을 안심시켰다.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출산을 앞둔 지인은 제대혈을 기증하겠다는 결심을 들려주었다. 조혈모세포 기증 희망자 등록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여자를 찾기까지의 과정을 전해 듣고 함께 떨면서,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들 곁으로 돌려보내 준 익명의 사람에게 고마움을 전달하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타인의 선의가 또 다른 사람들의 선의로 번져가는 풍경들. 그래서 수많은 우연과 인과의 총합이 또 누군가를 요행처럼 찾아가 기적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 순간들. 근본적으로 삶도 세계도 무의미하다는 공허한 불안감은 이렇게 어떤 의미에 기댄 다른 의미들의 연쇄로 채워진다. 조금 더 공들여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그나마 나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말이다. 모(冒)는 복면을 쓴 얼굴에 눈을 내놓고 있는 모양이라고 한다. "사람은 얼굴만 가리면 어떤 일이든지 감행할 수 있다는 의미"라는 해설이 붙어 있었지만, 나는 유일하게 감추지 않고 열려 있는 눈 목(目) 자를 오래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며 길을 나선다. 늘 용맹할 수는 없고 두려움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마주하며 흔들리기 일쑤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으면 더 오래 견딜 수 있다. 한편 모든 사람이 부조리에 맞서야 하는 것은 아니며, 삶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안팎을 따질 수 없는 일들로 험난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도 견디고 다만 눈 앞을 응시할 뿐이다. (...) 그렇게 남게 된 장면을 우리는 더러 증언이라고 부른다. 나 같은 사람의 증언도 모험가가 될 수 있을까. 매일매일이 종래와 다른 성격의 험난함과 예측 불가능성으로 채워지면서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무릅씀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 했다. 저절로 안부가 묻고 싶어졌다. 아무도 모험이라고 불러주지 않을 저마다의 일상을 향해, 서간문의 형식을 빌려서. *여기는 잠시 구름이 갰습니다. 저는 고단하지만 그 역시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무릅쓰며 오늘을 살고 있나요*. 앞서 <병자를 위한 올바른 대화 매뉴얼> 같은 것을 만들지는 못할 거라고 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이웃들은 나를 살피고 돌보는 과정을 통해 항암 정보가 난무하는 건강 중심 사회에서 혈액암 병자가 사는 법을 배우고 함께 수다 떠는 법을 익혀갔다. 나는 1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손톱 마디를 길러내는 동안 폐를 끼치고 뻔뻔해지기도 하면서 내 방식대로 이들에게 갚을 방법을 배웠다. 숨길 것도 없었고, 과장할 것도 없었다. 엉망으로 나온 손톱처럼 불규칙적으로 도착하는 사건 앞에 말끔히 잘린 손톱과 함께 거실의 초록색 단지 아래에 넣어두었다.
-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그런 여정들은 내게, 자신의 테두리가 어떤 관계에 의해 흐릿해지고 침범당하면, 되돌리는 일이 늘 가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줬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전에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자율적인 존재로 되돌아갈 수 없는 거죠. 우리의 일부는 이제 밖에 있고, 외부의 일부가 이제 우리 안에 있는 거죠.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 공격의 희생자들을 생각한 게 아니에요. 텔레비전에서는 어떤 허구 인물이 죽으면 마음이 많이 움직이죠. 여러 일화를 통해 내게 친숙해진 인물이 죽으니까 그런 거죠. 그런데 그 순간은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그 모든 것의 상징성에 빠져들었던 거죠. 누군가가 그렇게 가시적으로 미국의 무릎을 꿇렸다는 사실에 그랬던 거죠. 아, 내가 당신을 더 불쾌하게 하는 모양이군요. 물론 이해합니다. 자기 나라의 불행에 다른 사람이 흡족해하는 걸 보는 건 가증스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당신도 그런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거예요. 당신은 미국 무기가 적의 건축물을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최근에 상당히 유행하는 비디오클럽을 보면 즐겁지 않나요?
- 이상한 날씨
- 멜라닌"차별은 그 시스템의 피해자만 인지할 수 있는 독가스 같은 거니까. 수십 번의 경험이 필요한 게 아니야. 몇 번, 어쩌면 딱 한 번의 끔찍한 경험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폐에 남기는 거야. 그리고 숨을 쉴 때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거지. 사람들은 그걸 몰라. 차별이 강물처럼 흘러야지만 차별인 줄 안단 말이야. 사실 차별은 곳곳에 놓인 지뢰밭 같은 거야. 딱 한 번의 폭발에도 우린 불구가 된다고."
-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몽테뉴Montaigne의 주장처럼 "철학을 한다는 것이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면,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철학적인 시대에 진입했다. 왜냐하면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인류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개인이 아니라 문명으로서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기후변화인민행진은 목적이 없었고 산만하고 피상적이고 어리석었다. 하지만 기후변화인민행진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유엔의 정치가들은 무지하고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썩었다. 하지만 유엔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은 적절한 법을 통과시킨다거나 정확한 탄소 가격을 찾아낸다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인식을 제고한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문제는 기후변화 문제가 너무 거대하다는 데 있다. 문제는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인간 떼에서의 철학자의 역할을 정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리듬에 따라 수벌과 반대되는 춤을 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단적 비트에 맞춘 춤도 아니고 기계적으로, 독단적으로, 의무론적으로 움직이는 춤도 아니고 자신과 집단 생활 간의 연결을 영구적으로 방해함으로써 우리 가 살아가고 있는 장인 사회적 에너지의 파동으로부터 계속해서 스스로를 면역시키는 춤을 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스트레스-의미론적 연쇄 속의 전달자'가 되도록 허용하는 한, 우리는 내용과 무관하게 재전송의 채널을 강화하고 대중사회의 자동 반사적 결합 조직을 강력하게 만들고 우리 모두를 민족주의, 희생양 만들기, 공황, 전쟁열 같은 바이럴 현상에 빠져들기 쉽게 만든다. 저 사회적 생산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모든 훌륭한 철학이 그렇듯이 무정부주의적이고 반생산적이다. 만일 방해가 성공하면, 우리는 멈춰 서서 우리의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만일 방해가 실패하면 -많은 경우에 실패하며, 심지어 늘 실패하지만- 방해자는 편입되거나 미친 듯이 분노하게 되거나 무시당하게 되거나 파괴된다. (...) 슬로터다이크는 사회적 자극에 대한 자율적 대응은 자극에 대한 반응도 아니고 자극을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자극을 방해해 사그라들게 만들거나 아니면 자극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 미래는 생성되지 않는다
- 당근밭 걷기가방은 필요 이상으로 무겁고 / 미래는 망가진 장난감이라는 듯 굴었지만 // 각자의 우산이 있었음에도 하나를 나눠 쓰자 청했어 // 그렇게라도 새로 산 우산의 쓸모를 구하다보면 / 걸음이 나란해지고 / 서로의 몸속에서 피가 도는 박자를 알아봐주면 // 단 한 사람 / 멀리서 구하지 않아도 이미 도착한 것일지 모른다고 // 그때 알았네 /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 / 한 사람 안에 포개진 두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는 거 / 계속 계속 우산을 사는 사람은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거 한 사람은 어떻게 물결이 되는가 / 물속에서 흔들리는 나무와 물 밖에서 흔들리는 나무는 어떻게 포개지는가 // 내 안에 든 것이 누구의 심장인지는 몰라도 / 삶은 내가 그 안에 속해 있기를 원한다 / 내가 있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우리는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이 우리가 추구하는 세계 자체인 양 그곳에서 이런저런 이상향을 그려갔다. 서점을 처음 시작한 다비드도, 그의 주위를 지키던 친구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젊은 우리는 각자 마음속 서점의 모습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외곬으로 나아가려고만 했다. 우리의 차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궁극적으로 지니고 살아야 하는 고독과 이웃하고 있으며, 각자 자신의 고독을 확립해야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나는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젊은 날 마음속에 그린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을 서서히 잃어감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고독이 한때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황야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 같다.
- 비폭력 대화인간관계에서 공감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진 선입견과 판단에서 벗어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러한 '현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매 순간은 항상 새로 태어난 아기와 같이 이전에도 없었고, 절대로 다시 올 수도 없는 새로운 얼굴을 가진다. 그래서 삶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순간순간의 반응은 미리 준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과거의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 바로 당신의 존재 그 자체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 느낌의 원인은 다른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그 순간의 우리 욕구이다. 상대방의 관심이든 효율성이든 혹은 혼자만의 시간이든 간에, 자신의 욕구와 연결될 때 우리는 삶의 활력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강한 느낌을 가질 수는 있어도 분노하지는 않는다. 분노란 자신의 욕구에서 단절된, 삶을 소외시키는 사고방식의 결과이다. 분노는 우리가 마음 안에서 충족되지 않은 자신의 욕구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머리로 올라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분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
-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정치적 함의는 이렇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발생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잘못이며, 이스라엘에게 도덕적 책임뿐 아니라 법적 책임도 있다. 법적 함의는 이러하다. 비인간적인 범죄에 비록 법적 소멸 시효가 있다고 해도, 그토록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 행위 자체는 여전히 아무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은 범죄라는 점이다. 도덕적 함의는 유대 국가가 죄악에서 탄생했고(물론 많은 국가가 그렇다), 그 죄, 범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나쁜 점은 이스라엘의 특정 집단이 이를 인정했지만, 동시에 과거를 돌이켜 볼 때나 미래의 팔레스타인인 정책을 펼칠 때는 자신들의 범죄를 완전히 정당화한다는 사실이다. 그 범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저질러지고 있다. 이전의 모든 정착 식민 운동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학살과 비인간화라는 쌍둥이 논리였다. 정착민의 토지 소유권을 7퍼센트 이상으로 확대하고, 배타적으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려면 원주민을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시온주의는 정착 식민주의 프로젝트이자 아직 완성되지 않은 프로젝트다. 팔레스타인은 인구학적으로 완전한 유대 국가가 아니며, 이스라엘이 다양한 수단으로 정치적으로 통제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식민지화가 진행 중이다. 갈릴리, 네게브, 서안에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여 유대인 인구를 늘리고, 팔레스타인인을 쫓아내며, 원주민의 고국에 대한 권리를 부인하고 있다. '두 국가 해법'은 동그라미를 네모로 만들려는 이스라엘의 발명품이다. 서안에 사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서안을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둘 방법으로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서안 일부를 자치 지역, 준 국가로 만든다는 제안이 나왔다. 그 대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귀환이나, 이스라엘 내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평등한 권리, 예루살렘의 운명, 고향에서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희망 모두를 포기해야 한다. 이 신화를 비판하면 반유대주의로 낙인찍힐 때가 많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그 반대가 사실이다. 이 신화 자체가 새로운 반유대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두 국가 해법'은 유대 국가가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즉, 유대인은 다른 곳이 아닌 팔레스타인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 개념은 반유대주의의 핵심에 가깝다. 간접적으로 말하자면, '두 국가 해법'은 이스라엘과 유대교가 같다는 가정에 기반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유대교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라 고집하고, 그것이 세계 각국에서 거부당 하면 이스라엘뿐 아니라 유대교를 향한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영국 노동당 제러미 코빈 대표는 네타냐후의 정책 때문에 유대교를 비판하는 것은 이슬람 국가가 하는 일 때문에 이슬람을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해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내 생각에는 코빈이 옳다.
- 쓰는 생각 사는 핑계
- 보여주기
- 매직 필
- 설자은, 불꽃을 쫓다
-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끝, 같은 건 상상 속에만 있고 우리의 상상 때문에 / 우주가 우리를 떠나지 못했으면 좋겠어 오래전 나는 핑크 뮬리가 영원히 흔들리는 정원에 나를 가둔 적이 있어 그곳으로 통하는 문의 열쇠를 연수에게 주었고 연수는 내가 행복하다고 믿었다
- 한낮의 어둠
- 그렇게 나는 다시 삶을 선택했다바다를 보고 있으니 분명해졌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예전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 내가 걸어야 할 길은 그 누구도 걸어본 적이 없는 길이다. 데이터도 없고, 정답도 없고, 지도도 없다. 영구 궤도 이탈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지만, 괜찮다. 돌아갈 수 없으면 그냥 앞으로 나아가면 되니까. 오랜 시간 만들어진 내 궤도의 관성을 뿌리 치고, 새로운 궤도를 만들어가면 될 뿐이다. 계획했던 대로, 상상했던 대로, 염원했던 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았다고, 궤도를 이탈했다고 절망하고 슬퍼할 이유도 없고 시간도 없다. 돌아갈 곳이 없어졌으면 그냥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단순하다. 죽을 거면 하고 싶은 일을 모두 다 하고 죽고 싶어서,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뭐든 해본다. 고민하고 분석하고 걱정할 시간에, 무조건 지르고 본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지금 내 앞에 닥친 과제를 충실하게 해결해야 한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차피 죽을 거라 잃을 것이 하나도 없다. 뭐,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내 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평생의 군더더기들이 사라지고 알맹이만 남았다. 그렇게 가장 중요한 것들만 내 곁에 남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살고 있는 거라고.
- 연루됨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나는 다양한 기본소득 실험이 우리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싶은가(혹은 살 수밖에 없 는가)를 질문하는 과정이 되길 바란다.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은 기본소득을 (토지에서 데이터까지) 지구의 공유부에 대해 모두가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몫으로 인식하고, 국민의 자격을 묻는 성원권이 아닌 현존presence에서 이 몫의 근거를 찾는다. 그들이 우리에 속하기 때문(one of us)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among us), 적극적 환대보다 사회적 의무감에서 이뤄지는 분배는 인류학자들의 현장연구에서 곧잘 발견된다. 사회적 의무란 "'인류애'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의 문제"이며, 공동의 생존을 위해서는 짜증이 나더라도 타인에게 곁을 내어줄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퍼거슨,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 토머스 위들록에 따르면 이 의무감은 물리적 존재와 연결된 특정한 취약성,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통렬한 인정을 기초로 한다. 인간이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존재라면, 기본소득은 이런 인간들 사이에서 개인적 자율과 상호의존을 배양하는 공유적 실천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기본소득을 '공생배당'이라 불러도 좋겠다. '우리'와 그들'을 필사적으로 구분하는 대신, 곁에 왔으니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공생의 숙명을 인정하는 것. 이런 풍광은 사실 드문 게 아니라 매일의 일상에서 흔하게 펼쳐진다. 자극적이지도, 거창하지도 않아서 연구자나 기자의 시선이 가닿지 않을 뿐.
-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인간의 생각은 악보이고, 인간의 삶은 재즈처럼 비딱한 음악이다. "만약에 각각의 결정이 그 반대 상황을 동반한다면......" 그가 말한다. "그건 결정이 아니야. 자유 의지에 대한 너의 논증이 뭔지 알아? 개자식처럼 행동할 면허야." (...) "단 하나의 우주." 오스카가 말한다. "도주 가능성이 없는 우주. 너는 그걸 연구해야 해. 그 속에서 살아야 하고. 그리고 너의 결정들에 책임을 져야 해."
- 퀸즐랜드 자매로드
- 고기로 태어나서나는 여기서 채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어떤 목표를 꿈꿔볼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맛있는 먹을거리뿐 아니라 동물의 살점으로서의 고기 역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회식 자리에서 육즙이 흐르는 삼겹살 한 점을 집어 들었을 때 당신과 고기 사이에 어떠한 환상도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삐약 소리는 농장장이 사무실로 돌아간 다음에도, 우리가 발효기 주변을 청소하고 떨어진 병아리들을 주워 모아 집어넣은 다음에도, 계사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근무가 끝나고 식당으로 내려갈 때도 계속 들려왔다. 빌어먹을 삐약 소리는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마냥 도무지 멈추지를 않았는데 믿을지 모르겠지만 다음 날 새벽 계사로 올라갈 때도 발효기 안에서 울리는 병아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찰스 부코스키는 어디엔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있다고 썼다. 오히려 사람을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건 연달아 구두끈이 끊어지는 식의 '사소한' 불행의 연속 때문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날 밤 나는 수만 개의 구두끈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닭이나 돼지는 얼마든지 먹어도 좋지만 개만큼은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뭔가 하나만 특별히 여기는 것은 위선 아니냐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역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이라도 관여할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당장 모두가 채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식량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고 생물학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인간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부터 고기가 되는 운명에서 구제하자는 주장이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이런저런 윤리나 논리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잔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루에도 수십 톤의 음식 쓰레기를 쏟아내는 시대가 소비하는 고기의 양과 종류는 느는 게 아니라 줄어야 한다. 그것이 동물과 환경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합리적인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만일 인간이 계 속해서 동물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암이나 교통사고가 우리의 육체를 죽이기 전에 소화불량이 먼저 우리의 양심을 죽일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 동물을 죽일 때는 대상과 나 사이에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닭의 목이 끊어지는 순간 내 안에서도 뭔가가 죽는다. 그 닭은 깔짚 위가 아니라 내 몸속에서 몸부림을 친다. 날개를 흔들어 혈관과 내장을 들쑤셔놓고 발톱으로 뼈를 긁어댄다. 그것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작업이 계속되면 펄떡대는 닭이 점점 내 안에서 빠져나온다. 마침내 걸레를 쥐어짜는 정도의 부담감만을 지닌 채 닭 목을 비틀 때쯤 되면 닭은 내 발치에서 벌레처럼 꿈틀댄다. 내가 느끼는 닭의 죽음과 물질적인 닭의 죽음이 비로소 일치하게 된다. 그렇게 죽음은 닭 혼자만의 것이 된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였다. 병아리의 고통도, 돼지의 고통도, 개의 고통도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왜 내가 이걸 문제 삼았는지조차 기억하기 어려웠다. 그게 정상이고 그게 당연한거다. 물건은 그렇게 다루는 거다. 작업이 끝나고 내가 신경 썼던 것은 오직 얼얼한 팔의 피로뿐이었다. 마주 보고 있는 철창의 틈으로 개의 코와 앞발이 불쑥불쑥 삐져나와 있었다. 그런 케이지들이 산기슭까지, 내 눈에는 세상 끝까지라도 이어질 것처럼 늘어서 있었다.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 그 형태의 질서정연함 때문에 내가 시비를 걸고 있는 대상이 얼마나 견고한지가 피부에 와 닿았다. 그래서? 이 녀석한테 고기를 먹여서 기분이 나아지면 그다음엔 어떻게 하지? 또 그 옆에 있는 개는? 그 앞에 있는 개는? 사방에서 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터져 나왔다. 그 혼돈의 오케스트라 한가운데서 나는 개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돌아서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자유죽은 아기들은 숫자를 받지 못했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축하할 삶이 있었다. 「우리는 몇십 년 동안 슬픔에 빠져 살았어. 네가 태어나자 희망이 생겼지. 희망은 싸워야만 얻게 되는 거야. 하지만 희망이 환상으로 변하는 시점이 온단다. 그때가 아주 위험해. 그 모든 것이 사실을 어떻 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지.」 나중에 할머니가 말해 주었다. <471>은 우리 가족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아주 조금 주었을 뿐이다. (...) 나는 내 삶을 기적적인 모험담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니니는 그것이 기적이라고 인정하는 법이 없었다.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을 가능성을 항상 부정했다. 할머니는 내 존재의 처음 몇 달을 매우 정확한 인과 관계를 따져 가며 회상했고, 따라서 그 이야기는 마치 과학 이론에 대한 분석처럼 들렸다. 그것은 다른 경로를 밟을 수도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묘사라기보다 자연법칙의 재구성이었다. 성공은 항상, 올바른 사람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고, 희망이 정당해 보일 때 희망을 위해 싸우고, 희망과 환상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사실을 해석한 덕분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결국 할머니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운명에 책임 이 있어. 〈약력〉은 네가 사는 세계의 한계를 아는 데에는 매우 중요하지만, 일단 그 한계를 알고 나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네 결정에 책임을 지게 되지.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을 거야. 승리에 우쭐 해지지 말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해. 네 엄마가 자주 설명했던 체스 말의 움직임처럼, 네가 규칙을 익혔다면 그 게임은 네가 하는 거야.」 우리가 정치관을 물려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해야 한다고, 그때 가장 편리한 것이나 이해에 가장 잘 맞는 것이 아니라 옳게 느껴지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지. 하지만 우리 자신을 잃지는 않았다. 우리의 품위를 잃지는 않았어. 왜냐하면 품위는 돈이나 명예, 직함과는 아무 관계가 없거든. 나는 예전의 나와 똑같은 사람이야. 그리고 여전히 위스키를 좋아하고.」 할머니는 이 모든 것을 차분히 말했다. 삶의 각 단계를 다음 단계와 뚜렷이 분리하고, 그것들을 구별하기 위해 무척 애썼다. 내가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지 가끔 확인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내가 당신의 궤적을 기억하기를 원했고, 당신이 당신 삶의 저자임을 이해해 주기를 원했다. 도중에 맞닥뜨렸던 그 모든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당신의 운명을 통제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할머니는 책임지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자유란, 필연을 의식하는 거란다.」 어떤 면에서 나는 완전한 사이클을 돈 셈이다. 하나의 시스템이 한 번 바뀌는 것을 본 사람은 그것이 다시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어렵지 않다. 냉소주의와 정치적 무관심과의 싸움은 일부에서 도덕적 의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바뀐다. 나에게 그것은 내가 빚졌다고 느끼는 과거의 모든 이에 대한 부채감에 가깝다. 그들은 무관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냉소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상황이 흘러 가도록 그냥 내버려둔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된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했다. 만약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들의 노력은 헛수고가 될 것이며 그들의 삶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나의 세계는 부모님이 탈출하려고 애썼던 세계만큼이나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두 세계 모두 그 이상(理想)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두 세계의 실패는 독특한 형태를 띠었다.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분리된 채 남을 것이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쓴 이유는 그 투쟁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투쟁과 화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다.
- 무정형의 삶. 마침내 나는, 나의 고독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얼마나 이곳에 도착하고 싶었던가. 모든 시선을 지우고, 나와 함께 고요히 있는 것. 그냥 있는 것. 가만히 바라보며 그저 있는 것. 밖이 아무리 빛나도 나만의 어둠 속에 고요히 안착하는 것. 내게 필요한 건 그게 전부였다. 몸을 웅크리고, 바깥 자극을 최소화하고, 나와 잠깐이라도 가만히 있을 수 있으면 금방 행복이 차오르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아서 나는 나의 행복에 쉽게 도착하는 어른이 되었다.
-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바라건대 현명해질수록) 나는 잠시 멈춰 서고 싶어진다. 무얼 느끼는지, 왜 그렇게 느끼는지 찬찬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다. 남들이 소비할 수 있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내가 전혀 모르는 문제에 관해 전문가 행세를 하고 싶진 않다. 활용 가능한 수단, 주로는 SNS에서 만인의 반응을 요구하는 행위 가 증가하는 까닭은 그만큼 우리가 일상에서 무력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 말고 가능성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싶다. 희망을 품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두고 주도권을 가질 수 없다. 그때 는 우리가 가진 모든 믿음과 에너지를 변덕스러운 운명에 쏟아붓게 된다.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 스스로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자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무력감을 느끼기는 쉽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상상함으로써 스스로를 불편 하게 하는 편이 훨씬 더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할 수 있다. (...) "이제 어떡하지?" 이 질문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중요하다. 나는 졸업생들에게 "행운을 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행운은 희망과도 같다. 통제할 수 없고 지극히 덧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가 진정 서로에게 빌어줘야 할 것은 희망을 넘어선 실천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질 모든 것의 힘이다. 모리슨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의 작품이 흑인 여성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비춰내면서도 그것을 훌쩍 넘어선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장대한 위엄과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안이한 선택은 하지 않고, 용감하고도 담대하며, 자신의 기술을 능란하게 구사하는 작가를 보았다. 뉴요커에 실릴 작가 소개를 위해 힐튼 앨스와 나눈 대화에서 모리슨은 이렇게 말했다. "흑인 여성 작가라는 건 글을 쓰기에 결코 얕지 않은, 풍요로운 공간입니다. 그러니 기꺼이 그 수식어를 받아들입니다. 흑인 여성이라는 수식어는 내 상상력을 제한하는 게 아니라 확장해줍니다. 백인 남성 작가인 것보다 풍요롭지요. 내가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경험했으니까요." 모리슨은 나를 비롯해 모든 세대의 흑인 작가들에게 우리가 풍요로운 위치에서 글을 쓴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우리가 타인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려면 먼저 우리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창작인 동시에 필수적인 정치적 행위인 글쓰기에서는 부끄러울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주었다. 당신이 편지에 쓴 건 무심함이 아니에요. 당신은 지금의 세상이 처한 상태에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욕구들과 세상에 좋은 일을 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는 인간적인, 한 명의 여성일 뿐이에요. 지금 당장은 당신의 욕구 쪽이 더 우세한 상황인 거죠. 충분히 시간을 가지세요. 감정 저장고가 차올랐을 때 다시금 공감을 확장하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는 한, 이 상태에 수치심을 느낄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 간소한 삶을 위한 작은 책
- 불확실한 걸 못 견디는 사람들종결 욕구가 높은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려고 읽었지만 내가 생각한 방향과는 아주 달랐음. 심리학 연구들 나열 연속인데 그냥 너무 뻔한 내용들 모 교수님이 보면 아 그래서 어쩌라고 하실 것 같은. 게다가 종결 욕구를 다양성에 대한 포용이나 정치적 극단주의와 연결시키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주 너무 간 게 아닌가 싶은데 특히 정치 성향에 대해서는 내가 미칠 듯이 종결 욕구가 높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에 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음. 스스로를 이해하려고 책을 읽으면 안되는 건가 싶었고 애초에 그렇게 넓은 스펙트럼의 문제들을 종결 욕구 하나로 설명하기 너무 어려워서 대부분의 논지가 비약처럼 느껴짐.
-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가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하고 그가 분명 내 책을 읽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 인물을 그리고, 희망 없이도 포기하지 않는 능력에 대한 철학을 펼칠 수 있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책이 포기하지 않는 독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혹은 용감한 독자와 용감한 책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릴케의 시구처럼 우리는 책에서 자신의 그림자로 흠뻑 젖은 것들을 읽는다. 올랜도 역시 자기만의 인생을 찾아 여러 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은 소중하지만 자신이 짜 넣을 인생의 무늬들이 모두 관계로만 환원된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랜도는 고독을 사랑하는 실존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전기작가는 그가 굼뜬 것이 그가 종종 고독을 사랑하는 성향과 짝을 이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서랍 상자 따위에 걸려 넘어지는 올랜도는 당연히 고독한 장소나 광활한 전망들을 좋아했고, 자기가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혼자라고 느끼기를 좋아했다." 1970년 첼란이 추격 망상에 시달리다 센강에 몸을 던져 죽은 1년 뒤, 그녀는 소설 「말리나」 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썼다. "내 삶은 끝났다. 압송 도중 그가 그만 강에 빠져 죽었으니까. 그가 내 삶이었으니까. 나는 그를 내 삶보다 더 사랑했다." 이것은 개인적 고백인 동시에 문학적 고백이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위로할 길 없는 슬픔을 한 사람에게서 감지하고 그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바로 문학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안간힘이 사라질 때 문학은 끝난다. 그래서 문학은 한없이 다정한 일이지만, 또 비명이 나올 만큼 끔찍한 일이다. "달이 터진 쓸개를 담은 항아리를 들고서 찾아온다 / 그러나 그대의 몫을 마시어라. 쓰디쓴 밤이 내린다."(「진실한 것은」) 시인이 선택한 하나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관심의 밸브를 잠가버리라고 썼지만 사실 그 선택을 통해서 더 중요한 것들로 향하는 관심의 밸브를 열어놓은 셈이다. 그녀는 반려견 카를로와 산책하면서 발견한 버섯과 꽃들과 민트색의 알을 낳는 로빈새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는 뭐든 카를로와 얘기해"라고 썼다. 그러곤 보고 느낀 것들을 시로 써서 친구들에게 보냈고 받는 이를 위해 시들을 조금씩 바꾸기도 했다. 에밀리는 시가 다른 사람들과 삶을 나누는 방식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출판의 형식을 빌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알았다. 그녀의 시는 대시dash로 가득하다. 시어들이 구슬처럼 대시에 꿰어져 있다. 한 단어는 다른 단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대시 안에서 충분히 쉬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속도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의 속도로 단어에 머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대낮에는 별들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가치들을 대낮처럼 환한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별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결과로 생겨나는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제 안에서 춤추는 별을 찾게 된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라. 심지어 행복을 원하는 마음까지도. 니체는 춤추는 별을 언급한 다음, 행복을 찾아다니는 것은 비천한 인간의 일이라고 덧붙인다. 행복이 현대인을 지배하는 새로운 신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에서 우리가 행복이라는 관념 아래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당한다고 말한다. 행복이 지배의 기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 개와 나개는 실망이 뒤따르지 않는 환상이다. 나는 루실이 이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모른 채로 지내는 것이 좋다. 개와 함께 사는 이런 미스터리가 좋다. 녀석과 내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순간,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을 넘어서 상대와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순간, 상대가 무얼 원하고 느끼는지 이해하는 그 순간은 우리 영혼을 밝히는 소중한 순간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순간을 존중하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우리 영혼을 밝히는 것이 아닐까? 녀석은 내게 고독과 고립 의 차이를 깨우쳐주고 또 그 차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해준다. 루실과 함께 밖에 나가면 남들에게 향하는 길이 열린다. 녀석과 함께 집에 있으면 고통 없이 혼자 지내는 길이 다가온다. 개를 대체물로 보는 것은, 세상을 사는 방법이 사람과 함께 살거나 사람 없이 사는 두 가지뿐이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때로 두 가지가 다 필요하고, 때로는 둘 사이의 안전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개는 안전 공간을 만들고 채워준다. 개가 그렇게 해준다.
-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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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하는 책들
- 파친코
- 복수의 여신그리고 또다시, 어른 여성이 되어서 아무리 착한 여자가 되려고 노력해도 그들의 선함을 내 진실과 결합시킬 수 없었다. 결국 노력에 지친 나는 한계에 다다랐고 더 이상 속박될 수 없었다. 내가 입을 벌리자 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울려 나왔다. 그리고 진실은 선이었다. 그것이 상처를 되돌릴 순 없었지만 나는 더 이상 착함을 추구하지 않으며, 진실보다 착함을 선호하는 문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나는 그 상처와 비늘들을 비교해보았고, 비늘 한 조각 한 조각을, 상실 하나하나를 모두 떠나보냈다. 나의 피부에는 새 녹황색 비늘들이 자라났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그것들이 흔들리고 반들거린다. 비늘들이 내 몸 위에 잘 자리 잡았다. 부담스럽지 않다. 가볍다. 빛난다. 당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길, 그리고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떨어져나감을 느끼기를. 우리는 우리 이야기 자체이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지금 우리에게 맞는 것을 유지하자. 새로운 가능성에 여지를 남겨두자. 달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달은 여전히 나의 상승과 추락을 받아 적으며, 이지러졌을 때 쉬고, 차올랐을 때 날아오른다. 내가 당신에게도 가서 당신의 삶에 동승해보겠다고 제안할지도 모른다. 내 연락을 기다려보길. 두 번 이상 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녹황빛을 느껴보자. 당신 안에 받아들이자. 당신의 것으로 삼자. 그래. 그거다. 잘하고 있다.
- 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시골이 순환하는 공간이자 대안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단절된 것들을 연결해야 한다. 지금 시골은 오히려 단절되고 고립되기 쉬운 공간이다. 이동권을 보장해야 하는 이유다. 또한 임금노동이나 판매농이 아니어도 먹고살 수 있어야 한다. 시골에서야말로 임금노동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시간만 들이고 자급농을 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가능해야 한다. 돈이 없어도 거주할 수 있는 집이 있어야 한다. 홀로 고립되어 아프거나 죽지 않도록 돌봄 체계를 만들어야 하고, 아이들과 청년들이 시골에서 살아가는 데 자긍심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대안은 돈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돈에 대한 집착과 의존을 낮추고, 가급적 먹거리와 생필품을 자급할 수 있다면 각자(사람과 동물을 포함한 생태계의 모든 존재)의 몸과 삶에 더 많은 자유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즉, 소비와 생산에 대한 자율권을 자본이 아니라 개인이 가져올 수 있는 사회생태계, 큰 기업형 생산 체계 대신 작고 분산된 생산 체계와 자급 구조의 보장은 어떨까?
-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너의 말이 공기 중에서 부서지고, 얼어붙고, 농담에도 주파수가 있어서, 우리는 실없이 웃으며, 온몸을 흔들며, 산소와 언어를 잃고 지구에서 퇴장한 생물들과 눈을 맞추고 // 뒤뚱거리는 생물이 우리를 본다 / 마주 본다 // 멸종한 생물의 흔적은, 빙하를 깊게 파면 찾을 수 있대, 사라진 동물의 몸짓처럼 수신호로 말을 걸어줘, 우리가 정확한 도피의 공범이 될 수 있도록 // 새끼손가락을 펼친 손이 만난다 / 코끼리 뿔 같은 그림자 // 언어 이전에 손으로 추는 춤이 있었다는 거 / 알고 있지? // 얼음을 핥으면 혀가 달라붙겠지, 말을 잃은 우리가, 어설픈 손짓을 하면, 전혀 모르던 단어가 생길 거야, 글씨가 아닌, 열 손가락으로 만드는 새로운 기호들이 // 약속으로 거듭나고 / 우리가 팔을 휘휘 저어 농담을 시작하면 / 웃고 구르고 서로의 어깨를 치고 손뼉을 맞추면 // 하늘에서는 댄스처럼 보일 거야 // 그리고 무리를 지어 춤을 추는 생물들 / 주머니사자 스테고든 털매머드 털코뿔소 아시아곧은엄니코끼리 오싹하다, 하이든 씨는 이야기의 끝을 직감한다. / 그는 어쩌면 굴로 태어나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 존재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원히 존재할 수도, / 영겁의 시간 동안 위아래가 없는 물속을 부유하며 / 오직 그를 감싼 액체의 온도만을 느낄 수도 있었다. // 어느 것이든 오싹하군, 이내 졸음이 밀려오고 그리하여 하이든 씨는 생각한다. / 인생은 천사에게 강요당한 차악이자 / 고통이 아닌 삶은 원래부터 선택지에 없었다고.
- 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
-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훨씬 사소한 이야기도 있다. 영국인 포로 어쿼트는 회고록에서 짐짝처럼 열차에 갇혀 질식할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이송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인지 떠올린다. 그렇게 또 이송되던 어느 날, 포로들이 조선인 포로감시원에게 제발 문을 닫지 말아 달라고, 탈출하지 않겠다고, 도착하면 문을 닫겠다고 애원한다. 놀랍게도 그는 문을 닫지 않았다. “우리가 움직일 때 쾌적한 바람이 불었다. … 나는 감시원이 문을 열어두는 걸 허락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었고, 감시원 중 한 명에게 받은 첫 번째 친절과 동정심을 잊을 수 없었다.” 아무도 탈출하지 않았다. 탈출은커녕 도착하자마자 문을 닫음으로써 호의를 베푼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의심받지 않도록 보답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작은 호의를 베푼 이들이 있었다. 참담한 비극 앞에 이토록 작은 호의가 도무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묻게도 된다. 다만 어쿼트는 이를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래서 우리가 알게 됐다. 희망은 어쩌면 여기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님 웨일스와의 인터뷰 말미에 장지락은 강경하기만 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이 아닐까? ...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기가 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신념과 오류를 지닌 채 행복하게 죽도록 내버려두어라. 근본적인 질문으로 타인의 영혼을 괴롭히지 말라." 적과의 싸움에 목숨 건 혁명가들이 동지가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의혹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렸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독립혁명의 길에서 증오가 자랐다. 미움이 서로를, 스스로를 파괴하기 일쑤였다. 사방이 캄캄한데 어쨌든 나아가야 했다. 싸우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반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별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상처 입은 채 서로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그 걸음을 생각하다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 동물의 자리“저희는 동물을 사육하는 분들에 비해 동물에 대해 모르는 게 많고, 소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분들은 소를 키우는 분들인 거예요. 갈등 구도로만보면 길을 만들 수 없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보금자리가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목표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살림을 어떻게 전환할 수 있을지, 그러니까 동물살림과 마을살림, 지구살림이 같이 연결되는 살림을 보여주고 싶고, 또 축산업 종사자들과 어떻게 협력해야 할지까지 생각하게 됐어요. 세상을 바꾸는 건 결국 사랑이고요. 어떻게 보면 꽃풀소들이 저희한테 선물을 준 것 같아요.” 사람에게 길들여지고, 온순하고, 무해하고, 더 나아가 사람을 닮아가는 동물이 늘어날수록 인간과 완전히 별개의 삶을 살아가는 야생동물의 위치를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다. 예컨대 어떤 야생동물은 그가 살아가는 서식지가 살 만한 곳인지를 말해주는 '깃대종'이 된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동물들이 '동물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준이 된다. 그들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렇게 '인간과 닮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모든 생명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대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다른 존재에 대한 경외심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정말, 허밍의 수염이 내 뺨에 닿는 게 느껴졌고 허밍의 커다란 눈동자 안에 내가 보였다. 나의 눈이 허밍의 눈동자에 또렷하게 비치고, 허밍의 목을 쓰다듬을 때 천천히 규칙적으로 뛰는 맥박이 손바닥에 닿는다. 허밍과 눈을 마주치고 그의 뺨을 쓰다듬은 30분, 시간이 또 한 번 멈춘다. 이 마주침이 내가 살아온 시간, 내 소비 습관부터 오래 묵은 편견들을 무너뜨릴 거라는 걸 알았다. 이 순간, 그러니까 다른 존재와 마주하면서 내가 살던 세계가 무너지는 걸 확인하는 순간들이 좋았다. 개, 고양이와 한집에 살게 됐을 때,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돼지를 봤을 때, 바퀴벌레를 보고 벌레가 아니라 작은 동물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랬다. 아마 나는 개에게 '말 육포'라 적힌 간식을 절대 주지 못할 것이며, '마유'가 들어간 화장품 광고를 볼 때마다 허밍과 마주한 순간을 떠올릴 게 분명했다.
- 괴물들그동안 침묵하여 보이지 않던 피해자를 생각하면 할수록 '괴물'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잘못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이란 단어는 계속 괴물 당사자들에게 조명을 비춘다. 이 카리스마 넘치는 매머드 같은 동물은 주변 모든 것은 물론 공기까지 빨아들일 것만 같다. 이 괴물의 이름을 열거하고 그들이 저지른 악행을 나열하는 것은 쉽고 간단하다. 하지만 그 목적이 뭘까? 우리는 어디로 갈까? 혹시 이들을 괴물이라 부르고 이들의 괴물성에 대해 글을 쓰고 이들의 괴물 범죄를 묘사하면서 이 괴물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있지는 않을까? > 분노는 우리 시대 여성의 질병이었다. 나는 이 병을 여자들의 얼굴에서, 목소리에서, 사무실로 날아오는 편지에서 본다. 여자가 느끼는 감정은 부당한 현실을 향한 원망이고 이 독성 어린 분노는 비개인적이다. 이 병이 비개인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운 나쁜 사람들은 분노를 남편이나 연인에게 돌린다. 나처럼 운 좋은 여자는 이에 맞서 싸운다. 다른 사람이 부적절하게 소비한다는 말은 적절한 소비가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가 "이 괴물 남자들의 예술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정된 소비자의 역할로 밀어 넣는다. (...) 문제를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소비자는 언제나 윤리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일련의 결정이 내려진 다음부터 어떻게 대응하고 무엇이 올바르고 윤리적인 행동인지 스스로 해석해야만 한다. 마이클 잭슨의 행동이 점점 더 이상해질 때도 여전히 마이클 잭슨은 이용당하고 포장되고 공급되고 충족되고 구미에 맞춰지고 있었다. 음악 산업은 음악 종사자와 관련된 윤리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일은 우리에게 떠넘겨진다. (...)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소비를 윤리적 선택의 장으로 바라보지만 사실 정답은 이 안에 있지 않다. 우리의 판단은 우리를 더 나은 소비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광경에 갇히게 만든다. 그래서 피셔가 후기 자본주의의 공기라 부르는 이 분위기에 더 연루되고 만다. 그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났을 때, 당신이 특별한 종류의 공감을 받았을 때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 공감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호혜로서가 아니라, 공평성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착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나쁜 점이 평범하다는 것을 듣고, 그 평범함에 대한 이해를 다른 사람들에게 확장하는 것이 계속 술을 마시지 않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작품을 소비하거나 소비하지 않는 것은 윤리적 행위로서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다. 결국 우리에게는 감정이 남는다. 사랑이 남는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세계를 환히 밝히고 넓게 확장한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랑한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얼룩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카버를 강박적으로 읽었다. 나 자신의 경험은 그 독서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나의 역사, 나의 지리적 배경, 나의 음주, 나의 문학적 열망이 카버에 대한 사랑을 형성했다. 또한 카버의 인생에 의해 독서 경험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 모든 복잡한 역사와 흐름에서 평범하고 복잡하지 않은 것이 흘러나온다. 사랑이다.
- 잠수 한계 시간그가 나를 구해주어야 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스벤이 나에게 초현실적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종이로 만들어진 납작한 인물. 마치 내가 그를 만들어낸 것처럼. 어떻게 자기 자신이 만든 인물을 통해 구원된단 말인가! 왜 내가 십사 년 동안 '개입하지 않다'는 개념을 그토록 매력적이라 여겼는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추한 개념이었다.
- 정치는 왜 실패하는가막스 베버는 정치를 “딱딱한 판에 서서히 구멍을 뚫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에 구축한 제도와 규범은 현재에 잘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새로운 정치적 약속을 계속 반복해서 만들어나가야 한다.
- 적당한 실례제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모범적이고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제 삶과 마찬가지로요. 저는 배움이나 교훈을 읽으며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것이 글이라면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아주 이상한 사람들의 이상한 글들이저를 쓰도록 떠밀었습니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던, 나의 가장 이상한 점을 세 줄만 써주세요. 아직 깨어 있다면, 5분 동안 아무거나 써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쩌면 아무도 쓰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쓰이지 않아도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묻는다. “엄마는 어떤 기억이 살아남을 것 같아?” 노인과 대화를 하다 보면 깨닫는 사실이 있다. 이 이야기를 열 번 정도 더 들은 적이 있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노인의 얼굴은 생생하기만 하다. 영화처럼, 돌림노래처럼 정해진 레퍼토리와 멜로디가 반복되는 동안, 나는 훗날 내가 어떤 이야기를 돌려 부르게 될까 상상해 보고는 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과거는 지나가는 것일 뿐이고, 어떤 것이 특별히 크거나 작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어떤 시기를 그토록 강렬하게 기억하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 금빛 종소리워튼은 자신에게 부여된 감옥 같은 삶의 벽을 탈옥수처럼 매일 조금씩 펜으로 긁어 내듯이 글을 썼다. (...) "삶은 죽음 다음으로 가장 슬픈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가 볼 새로운 나라, 읽을 새로운 책(나의 경우, 바라건대 쓸 책), 놀라고 기뻐할 수천 가지 매일의 경이가 있다.” 그는 날마다 글을 쓰면서 조금씩 더 살아갈 용기를 얻었고 삶의 단계마다 마주한,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질문들에 스스로 답하는 작품들을 써 나갔다. 자유와 복종은 언뜻 모순되는 가치처럼 보이나, 사실상 서로의 테두리를 긋고 또 지워 버리는 한 몸과도 같다. 복종이라는 울타리가 없이 자유는 성립하지 못하며, 그 울타리를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또한 자유의 일이다. 자유와 복종의 관계는 제 꼬리를 문 뱀과도 같다. (...) 나는 책에 대해서 더 자유롭고도 동시에 더 복종적이기를 원한다. 내 멋대로 읽고, 다독을 그리 예찬하지 않고, 마음에 안 들면 함부로 던져 버리고, 책과 다른 미디어를 구분 짓지 않고, 즐거움만을 취하고 싶어 하는 동시에, 책만이 주는 안도감과 신비를 굳게 믿고, 더 많은 책으로 내 삶을 물들이기를 원하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어쩔 줄 몰라 책을 꼭 끌어안았던 기억을 깊이 간직하고, 인생의 많은 시간을 바쳐 재미없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 책들을 수행자처럼 묵묵히 읽어나가는 내가 공존한다.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그러하듯, 이 자유와 복종의 순환이야말로 성장의 토대다. '멍에를 스스로 만들어 걸치는' 행위는 자신에게 과제를 부여하고 그것을 이행하며 자신을 단련해 나가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그가 떠나온 수많은 배역들 - 에스파냐의 정원에서 뛰놀던 튼튼한 어린아이, 어깨에서 눈송이를 흔들어 떨어뜨리며 천막 안으로 들어서는 야심찬 사관, 한 주검의 가슴 위에서 울부 짖고 있던 남자 -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안에 남아 있기도 하다. 또한 지칠 줄 모르는 여행자로서의 배역도 움직일 수 없는 병자의 내부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는 죽음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죽음은 하나의 출발이므로.
- 화이트블러드
-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그리고 잊지 마세요. 전기나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에서도 어떤 인물이 형용사 세 개로 줄어들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보이면 그런 묘사는 늘 불신하세요.”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들을 하면 그 성격상 자유롭고 방해가 없고 막힘이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을 하면 익숙해지고 속박되고 방해받는다.
- 페넬로피아드물은 저항하지 않아. 물은 그냥 흐르지. 물속에 손을 담가도 그저 그 손을 쓰다듬으며 지나갈 뿐이야. 물은 딱딱한 벽이 아니라서 아무도 가로막지 못해. 그렇지만 물은 언제나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야 말지. 물을 끝까지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그리고 물은 참을성이 많아.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닳아 없어지게 하지. 그걸 잊지 마라, 내 딸아. 너도 절반은 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장애물을 뚫고 갈 수 없다면 에둘러 가는 거야. 물이 그리하듯이.
- 당신은 화성으로 떠날 수 없다지구상에 복잡하고 중대한 문제가 가득하다고 해서 우주 탐사에 자원과 에너지를 투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다른 행성의 환경을 이해하는 것 이 지구를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 그러니 핵심은 "우주는 뒤로하고 지구에 집중하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지구 안에 가둬놓고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이해를 포기한다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주 탐사와 동시에 지구의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 그러나 화성, 달, 또는 우주 거주구를 단순히 위기 탈출구로 보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결국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머스크의 구상에는 사람들을 화성에 보내는 방법만 있을 뿐, 그 외 모든 것이 빠져 있다. (...) 머스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진지하다. 문제는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도움이 되는지 여부다. 공상과학 소설은 종종 우주선을 타고 다른 세계에 착륙해 완벽하게 탐험하는 인간 승무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지구의 이국적인 곳에서 탐험하고 정착할 준비가 돼 있는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의 잔재일 뿐이다. 왜 다른 행성이 인간에게 적합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지구에 적합하게 발전한 종이 며, 우리를 만든 정확한 조건이 다른 곳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인류를 위해 준비된 집이 다른 곳에도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우리가 새로운 외계 행성을 발견하려는 이유는 그곳에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을 연구하고 우리가 아직 모르는 사실들, 예를 들어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우주에 퍼져 있는 생명의 분포가 어떠한지, 어떻게 지구를 더 생명이 살기 좋은 행성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또한 한 행성을 불모지로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다. 따라서 모든 새로 발견된 거주 가능한 행성을 지구의 쌍둥이로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헛된 일이다. 거대한 규모의 자연은 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다양한 해법을 찾았을 수 있으며, 우리의 지구가 다른 행성과 어떻게 다른지 탐색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추구한 우리의 노력은 진화적 함정, 즉 진보의 덫에 갇혔다. 최선의 의도로 움직였음에도,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을 수 있다. 우리가 의지하는 지구가 더는 우리를 감당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매우 두렵다. 그러나 지구에서 해온 확장과 착취를 지구 밖에서 반복하는 것이 이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다행성 종이 되는 방식으로는 우리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환상일 뿐 아니라, 우리가 겪어야 했던 문제의 길을 계속 반복 해야 하기 때문이다. 페르미의 역설은 우리 종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으로 작용해, 무한한 확장과 멸종 사이의 제3의 길을 제시한 것일 수 있다. 우주를 식민화하고 다른 세계로 확장하며 점점 더 많은 자원을 획득하는 모든 행위가 고도로 발전된 문명의 필연적인 운명이 아닐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성숙한 종은 자신의 생물학적 유산에 새겨진 탐욕적 야망을 절제하고,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이 혜택을 누리면서도 공동의 터전을 보호하고 환경 파괴를 최소화하는 지속 가능한 길을 찾는 종일지 모른다. 그리고 우주의 특별한 침묵은 기술 문명의 이른 멸종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타는 장작이 더 오래 탄다는 지혜를 일깨우는 증거일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더 적게 소란을 피우며 잘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일 수 있다. 결국, 가장 현명한 사람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지구의 운명과 인류의 운명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데 확신하며, 개인적으로 종의 불멸을 추구하는 것은 합리적인 목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지구가 끝나는 날에 우리의 후손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호기심과 상황을 개선하고 싶은 욕구 외에 우리와의 공통점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시점에는 우리와 거리가 먼 새로운 종이 우주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고 별들을 향해 여행을 떠날 수도
-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나는 경제발전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제발전은 현실주의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경제발전에 대한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측면이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나 민족주의자나 파시스트 나치나 레닌주의자나 스탈린주의자 등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중 어느 것이 경제발전을 가장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경제발전이 필요하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20세기의 이들 주요한 이데올로기 간에 의견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제발전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적 성질은 불투명하여 알아채기 매우 어렵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 혹은 객관적인 필요성이라는 식으로 경제발전을 생각해왔던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거꾸로 그만큼 이데올로기로서 성공했다, 사상으로서 패권을 쥐고 있었다는 실증이기도 합니다. 경제제도를 민주화하는 과정의 첫 걸음은, 경제적인 결정이라고 말해지는 정책결정의 대부분이 실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이 결정, 이 정책은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경우, 즉 그것은 전문가의 결정사항이 아니라 보통의 시민, 인민이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변함없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어오고 있다는 역사적 결정론이 아니라, 선택은 가능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전문가에게 위임해서 해결될 기술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가치판단을 동반한 선택이며, 살아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정치적인 선택이라는 것은 그러한 선택을 말합니다. 경제의 반민주적인 측면의 하나는 이 점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논의해서 결정해야 할 선택을 선택할 수 없게 합니다. 결정론적인 역사과정의 결과이기 때문에 아무도 선택할 수 없다, 이것은 운명이다, 하는 것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공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전문가가 의논해서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객관적인 과학'에 의해 결정하고, 그것을 실현시킨다. 그러한 반민주적인 힘이 경제에는 있습니다. 본래 선택해야 하는 것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힘 말입니다. (...) 비행장을 만드느냐 만들지 않느냐, 산호초를 파괴하느냐 파괴하지 않느냐, 도로를 넓혀서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을 파괴해서 자동차사회로 만드느냐 않느냐. 자동차사회로 된다는 것은 운명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게 아닙니다. 자동차사회가 되지 않게 한다는 선택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경제의 민주화라는 것은 그러한 것을 결정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좀더 큰 문제를 말한다면, 이제 경제성장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자연환경을 파괴하더라도 어쨌든 경제성장을 계속할 것인가, 혹은 제로성장으로 경제성장을 멈추고 이제부터는 자연환경을 지키거나 자연을 돌보는 정책을 할 것인가 어쩔 것인가. 그것은 미리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논하면서 생활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결정하는 것 - 그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 우리가 두고 온 100가지 유실물
- 휘말린 날들공포는 전염된다. 그러나 용기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친족에 대한 방대한 인류학적 연구들은 사회마다 각기 다른 친족 구조를 관통하는 보편적 공통성이 있다면 그것은 혈연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게 되는, 그래서 서로의 존재에 관여할 수밖에 없는 상호성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친족으로 인간은 서로의 삶 속에서 살고, 서로의 죽음 속에서 죽는다. 삶과 죽음을 공유하는 것이 친족 관계의 핵심이라고 할 때, 퀴어 존재가 경험하는 가장 큰 폭력은 이 공통의 영역에서 삶과 죽음을 맞을 자격을 박당하는 것이다. 심각한 손상을 경험한 HIV 감염인의 몸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죽은 듯이 여겨지는 것은 실상 그들의 생명력이 다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일부를 공유하는 타자들이 그의 삶과 죽음에 연루되기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몇몇 사람들이 감염으로 인해 견뎌내고 있는 이 삶·죽음이라는 기이한 조합은 생명권력의 장치들이 생산하는 폭력의 속성을 알려준다. 동시에 이 시간의 응축을 버텨내고 있는, 끝끝내 자취 없이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여외의 생명력을 발하고 있다. 이 난국에서도 자기 자 신과 타인을 돌보고자 하는 이들의 실천은 강요된 수치와 오명을 부수는 소수자의 힘을 증거한다. 박탈된 존재들 간의 보살핌과 친족 만들기는 존엄한 존재로 살고 죽는 일이 정상성의 특권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상성의 경계를 교란하고 뛰어넘는 실천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인간을 인간으로 살아 있게 하는 힘이 도대체 어디서 흘러나오는지를 가늘지만 긴 숨으로 가리키고 있다. 내재적 낙인이라는 표현에는 큰 오류가 있었다. 낙인의 힘, 낙인을 찍는 힘은 이를 느끼는 개개인에게서 연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후천성면역결핍중 예방법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 법의 제 19조 '전파매개행위의 금지'가 설정한 바에 따르면, 감염인은 마땅히 무얼 하는 게 죄가 되는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수치심, 죄책감, 자책, 벌을 받아야 한다는 느낌은 이 법과 법이 반영하는 사회 질서가 그것의 생성을 정확히 목표하고 있는 감정의 양식이다. (...) 이 법에 따르면 감염이라는 나쁜 사태와 그에 따른 공중 보건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마땅히 감염한 사람들에게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든 심문받을 수 있는 자리에 놓일 때, 수치심과 부끄러움, 자기혐오는 이를 느끼는 주체,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놓여날 수 없는 나를 덮쳐 오는 것이다. 생각이 언어를 오염시킨다면, 언어도 생각을 오염시킬 수 있다. - *조지 오웰, 「정치와 영어Poltics and the English Language」(1946*). 개념과 개념의 연결을 이루는 말의 매듭을 되짚어보면 감염병의 유행이 공동체라는 형식에 내재적이라는 점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감염병의 유행은 공동체를 이룰 때 반드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취약성의 한 속성이며, 따라서 이 취약성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이다. 이는 각 개인이 어떤 실천을 하느냐와 무관하게 질병의 유행은 일어나고야 말 거라는 책임 무용론이 아니다. 감염병 유행이라는 현상의 속성에 부합하는 책임의 속성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보다 면밀히 사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능동태와 수동태의 대립을 기반으로, 개인을 단위로 두고 감염병 유행에 대한 책임을 구성할 때, 실제 그 작용의 원인과 과정, 효과에 응당한 대책을 적절히 구성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각 개인은 감염병 유행에 응답할 능력으로서 책임성을 홀로 발휘할 수 없다. 문제를 일으켰다고 가상적으로 규정하고, 그에 따라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결함을 찾아내고, 처벌하고, 쫓아내고, 고립시키고, 권리를 박탈하고, 오래 고통받게 할 수는 있지만, 이 모든 일은 유행이라는 공동체적 작용을 멈추게 하지도, 그 작용이 야기하는 위해를 줄이거나 없애지도 못한다. 감염병 유행에서 책임의 단위는 공동체이다. 함께 겪어내 서로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유행이 요구하는 책임의 요체이다.
- 내일 또 내일 또 내일내일 또 내일 또 내일 이 좁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하루하루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한 음절까지, 그리고 우리의 과거는 모두 바보들이 죽음으로 가는 길을 비춰줬을 뿐. 꺼져간다, 꺼져간다, 짧은 촛불이여! 인생은 단지 걸어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 나와서 뽐내며 걷고 안달하며 시간을 보내다 사라지는 서툰 배우: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음과 분노로 가득찬 백치의 이야기*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일 뿐」, 『생일 그리고 축복』, 장영희, 비채, 2017, p. 357.* "암울하네." 세이디가 말했다. "게임회사를 뭐하러 시작해? 그냥 우리끼리 다 죽자." 샘이 농담했다. "아니 저게 도대체 게임하고 무슨 상관이야?" "명확하지 않아?" 마크스가 말했다. 샘에게도 세이디에게도 명확하지 않았다. "게임이 뭐겠어?" 마크스가 말했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잖아. 무한한 부활과 무한한 구원의 가능성. 계속 플레이하다보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개념. 그 어떤 죽음도 영원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좋은 시도였어, 멋지네." 세이디가 말했다. "자, 다음."
- 일요일의 역사가『바카이』는 그리스 세계의 위대성을 말하지 않는다. 이 복잡한 극은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의 극에서는 신앙과 회의, 이성과 비합리성, 그리스와 외국, 남성과 여성, 문명과 야만 같은 대립적인 힘들이 명확하게 양분되지 않다가 어느새 합쳐져 카오스로 회귀한다. 에우리피데스는 누구도 묻지 않고 보려 하지 않았던 우리 내면의 어둠, 모순에 가득 찬 문명의 하층, 미분리의 혼돈과 불확실성이 그득한 세계로 우리를 이 끌고 가서 공포에 찬 체험을 하도록 만든다. 여느 다른 고대 문명과도 구분되는 그리스 문명의 특질은 우리가 누구이며, 이 우주는 어떻게 돌아가며, 국가와 사회는 어떻 게 운영되어야 마땅한지를 캐묻는 데에 있다. 그렇게 묻고 답을 구하는 방식으로 하나씩 쌓아 올려 만들어낸 그 문명은 이제 어디에 와 있는가? 기원전 5세기 말, 그리스 제계가 전성기를 지나 쇠막의 길로 접어들 무렵, 작가들은 또다시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는 노을처럼 쇠락기의 문화가 발하는 찬란한 빛은 때로 두려운 정도로 아름답다. 그것은 시대를 넘어 오늘에까지 영감의 빛을 비추고 있다. 거시사는 세계의 큰 흐름을 짚어주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망원경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 세상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의 삶은 통계분석과 거대서사 속에 편입될 정도로 기계적이지 않으며, 이 세상은 법칙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불확실하다. (...) 그러니 차라리 생각을 바꿔 우리가 바라보는 역사의 틀을 확 좁혀서 정밀하게 읽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누이의 수틀을 보듯 그렇게 앵글을 좁히고 보면 거기에 또 다른 종류의 미세한 우주가 나타난다. 이제 하나의 작은 사건, 괴팍한 한 인간, 조그마한 어느 마을처럼 복합적이고 다면적이고도 심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떠오를 것이다.
- 유인원과의 산책좀 더 땅과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는 우리 문화보다 더 오래된 다른 문화권에서는 사람들이 자기네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뒤계의 꼭대기에서 다른 동물을 낮추어 보는 짓 따위를 결코 저지르지 않는다. 생명은 동물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으로 나뉠 수 없다. 생명은 연속적이고 상호작용하며 상호의존적이다. 인간과 동물은 삶이라는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는 동료 연기자인 것이다. 동물의 삶, 그들의 동기, 사고, 감정은 인간의 주목을 끌고 인간에게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따라서 그들의 중요성을 묵살하는 태도는 중대한 잘못으로 마치 ‘원죄‘라는 근대 서양식 개념과 유사한 어떤 것이 된다. 이들 성지에서 세 여성은 유인원의 발자국을 따라 걷거나 그들이 서식하는 숲 차양부의 아랫길을 따라 걸었다. 유인원들이 먹는 음식을 표집하기도 했다. 이따금 숲에서 그 동물과 함께 잠을 청하기도 했다. 제인은 ‘제인 봉우리‘에서, 다이앤은 텐트에서, 비루테는 오랑우탄이 꼭대기에 보금자리를 튼 나무 아래에 해먹을 치고서. 그들은 매일 동물 세계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조사나 기록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하나되기 위해서. 표명된 것이었든, 무의식적인 것이었든, 끝까지 고수한 것이었든, 중도에 포기한 것이었든 그 여성들은 모두 자신의 동물과 하나되기를 끈질기게 소망했다.
- 알고리즘에 갇힌 자기계발그러는 사이 기업의 데이터 감시자들은 자신들의 이윤을 헤아린다. 만족할 줄 모르는 소비자(불교 교리에 따르면 절대적 공포)는 광고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표적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자기애의 형태로 자기 관리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데이터 경제에서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데이터를 생산하고 개인 맞춤화된 광고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런 맞춤형 광고는 사람들이 수천 명의 ‘친구들‘에게 공유한 마음속 비밀을 수집하고 그들의 취향을 앞다투어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 내고 이미 부자인 최신 기술 및 미디어 기업 소유주들의 배를 더 불린다. 그러는 동안 이런 도착적 형태의 후기 기독교식 고백과 신인문주의식 커뮤니케이션은 괴로움에 찌든 육체와 정신이 마침내 포기를 선언할 때까지 끊임없이 실패하고 패배하는 피지배자를 생산해 낸다. 자기 계발 문화와 개인적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의 결합은 파괴적이다. 언젠가는 포기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설명한 대로 "성과 주체는 더 이상 유능할 수 없다." 그러나 신스토아주의나 후기 프로테스탄티즘, 신자유주의 문화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과는 반대로 실패가 우리 잘못인 것만은 아니다. 무언가를 개선하는 일이 개인의 책임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강박적이고 영원히 불행한 자기 계발 실천가로 만드는 사회 문화적 환경, 즉 이 현대 사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선택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 문화적 환경, 기술 환경, 자연환경 등에 의해 만들어져 왔다. 인간은 뼛속까지 관계적이고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다. 그러므로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기 인식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며 타인을 기꺼이 수용하고 주위 환경에 건설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면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인정하는 자기애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런 자기애가 있다면 집착적인 자기 계발을 할 필요가 없다. 진정으로 자신을 발전시키고 싶다면 자기 계발 행동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성장을 시작해야 한다. 성장을 위해서는 주고받을 수 있는 타인과 환경이 필요하다.
- 수능 해킹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나는 거북이처럼 흐르는 파수꾼의 시간에 굴복한 것 같다. 나는 이 시간을 소비할 수 없다. 그것을 채울 수도, 죽일 수도, 더 작은 조각들로 쪼갤 수도 없다. 이상하게 한두 시간 동안이라면 고통스러울 일도 아주 다량으로 겪다보면 견디기가 수월해진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일이 끝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사치스러운 초연함으로 시간이 한가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구식의, 어쩌면 귀족적이기까지 할 삶에 적용해버렸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전시실 안의 낯선 사람들이 엄청나게 아름다워 보인다. 선한 얼굴, 매끄러운 걸음걸이, 감정의 높낮이, 생생한 표정들. 그들은 어머니의 과거를 닮은 딸이고, 아들의 미래를 닮은 아버지다. 그들은 어리고, 늙고, 청춘이고, 시들어가고, 모든 면에서 실존한다. 나는 눈을 관찰 도구로 삼기 위해 부릅뜬다. 눈이 연필이고 마음은 공책이다. 이런 일에 그다지 능숙하지 않다는 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사람들이 입고 돌아다니는 옷과,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와 손을 잡거나 혹은 잡지 않는 몸짓에서, 머리를 다듬고, 면도를 하고, 내 눈을 마주하거나 피하고, 얼굴과 자세에서 기쁨이나 조급함, 지루함이나 산만함을 보이는 방식들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내가 보는 대부분의 것에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확실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저 이 장면에 깃든 눈부심과 반짝임을 바라보며 기쁨을 만끽한다. 하루가 끝난 후 86번가에서 지하철을 탄 나는 우물처럼 샘솟는 연민의 마음으로 동승자들을 둘러본다. 평범한 날이면 낯선 사람들을 힐끗 보며 그들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들이 나만큼이나 실존적이고 승리하고 또 고통받았으며 나처럼 힘들고 풍요롭고 짧은 삶에 몰두해 있다는 사실을. 입원해 있는 톰을 방문한 후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던 때를 기억한다. 누구라도 심술을 부리거나, 실수로 부딪힌 다른 승객에게 쏘아붙이면 그게 그렇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편협하고 무지해 보였다. 우리 모두 그럴 때가 있는데도 말이다. 오늘 밤은 운이 좋다. 낯선 사람들의 피곤하거나 어떤 생각에 빠져 있는 얼굴들을 애정을 갖고 바라볼 수 있다. 혼자 생각에 잠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처럼 세계적으로 장대한 곳에서 얻는 깨달음치고는 좀 우습긴 하지만, 바로 의미라는 것은 늘 지역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상황에 갇힌 사람들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진실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조각 노력을 이어 붙여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교훈까지 말이다. 미켈란젤로 시대의 피렌체, 심지어 미켈란젤로 시대의 로마마저 이런 면에서는 로레타 페트웨이가 살던 시절의 지스 밴드와 다르지 않다. 이제 더 이상 전성기 르네상스와 같은 개념을 빌어 생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새로 만든 회반죽을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그리고, 회반죽을 조금 더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조금 더 그리는 한 사람을 생각할 것이다.
- 가벼운 고백과학을 혐오하는 최적의 방법은 과학을 욕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비과학적인 걸 늘어놓고 그걸 과학이라 하는 것이다. 삶을 혐오하는 최적의 방법은 삶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미얀마에 다녀왔다. 그곳 사람들(중 일부)은 이번 생이 망했으면 다음 생을 기다려보고, 이번 생의 문제는 지난 생의 업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품위가 발생하는 것 같았다. 비판적인 것과 시니컬한 것은 다르다. 얼마든지 삶을 비판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노예가 족쇄를 사랑하듯 삶을 사랑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뛰어난 예술은 술 퍼먹고 기행을 일삼는 이들에게서 나오기보다는, 명징한 정신을 유지하고 지적 정확함을 추구하는 자기 단련의 족속들에게서 나온다. 예술도 그러할진대, 학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야수가 이미 공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홈으로 뛰어야만 하는 주자는 얼마나 비극적인가?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는 자신의 아웃을 향해 달려야 한다. 야구 경기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결혼으로 한꺼번에 번식공동체, 대화공동체, 육아공동체, 일상공동체, 농담공동체, 생존공동체 그리고 스파링 파트너를 만들고자 한다. 그 많은 것이 한 방에 다 성공할 리 있겠는가. "에콰도르의 수산시장에는 줄을 서서 생선을 구매하는 바다사자가 있어. 그곳에서는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생선 가게 아저씨들 역시 무심하게 바다사자 차례가 되면 생선을 잘라준대”라고 옛 친구가 그랬지. "이곳에서는 최대한 '살고 있는 척하다가' 나중에 중남미의 해변에서 '살자'”라며.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혹자는 도덕의 무가치함을 보고, 혹자는 생명의 무가치함을 본다.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는 "내가 가진 것은 세계다. 커리어가 아니다"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 그래서 학문과 예술을 향유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커리어로 환원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가꾸어온 세계와 더불어 살고 더불어 죽기 위해서.
- 핑커 씨 사실인가요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된다는 신낙관주의의 주장은 안일하다. 어떤 데이터도 스스로 혼자 말하지는 않는다. 빈곤, 평화,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신낙관주의가 주장하는 팩트에는 항상 신낙관주의자들의 해석의 층위가 있었다. 신낙관주의 혹은 핑커의 기대와는 달리, 어떤 사실도 사람들의 이해관심 바깥에서 개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해석의 층위에서 팩트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실관계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겠다는 신낙관주의의 팩트도 복잡하게 펼쳐진 사실관계 가운데 선별된 것일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신낙관주의의 팩트가 강력한 힘을 갖는 것도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의 제약하에 (종종 정치적인) 의미 를 갖기 때문임을 무시할 수 없다. 신낙관주의자들은 이런 의미관계를 물신화해, 마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자신들의 팩트에는 주관적 이해와는 무관한 자기완결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이 부여하는 의미의 힘은 취하는 정치적 효과를 누리고 있다. 신낙관주의의 팩트물신주의가 정치 커 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문제적인 까닭이 여기 있다. 우리가 빈곤과 건강, 수명, 교육, 행복, 평화와 민주주의 등 사회 지표의 진보에 관심이 있다면, 신낙관주의 일각의 팩트물신주의가 질식시킨 사실관계의 함의를 복원하고, 신낙관주의의 정치적 귀결을 제대로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작업은 곧 사실관계에 기초한 합리적 정치 커뮤니케이션을 모색하는 진보적 실천이기도 하다. 그러나 로슬링의 대중 강연과 <팩트풀니스>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침팬지보다 못했던 대중의 정답률을 다 몇 분만에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팩트 그 자체보다 그것에 관한 관점을 그들에게 첫방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낱개 의 단편적 토막 정보, 팩트를 하나로 엮어 주는 과정 말이다. 건강, 부, 삶의 질, 행복, 불평등, 환경, 평화, 민주주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인류는 계속 진보해 왔다는 핑커의 팩트들도 그의 관점 아래에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배치되고 있다. 그 많은 팩트들 배후에 "일관된 현상"으로서 도사리고 있는 진보가 있다고 말하는 그에게 저 팩트들은 '진보의 승리'라는 스토리로 엮이고 있다. 그리고 그 진보의 정체란 대략 그가 좋아하는 거의 모든 것에 가깝다. 그것은 "계몽"이며, 즉 세속주의적 휴머니즘이고 열린 사회이며, 코스모폴리타니즘이고, 이성과 과학인가 하면, 고전적 자유주의, 자유시장, 자본주의다. (...) 하지만 건강 증진에 분명한 기여를 하는 부문의 경제 활동올 향상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경제성장을 추구하며 그 부산물로 복지의 증진을 기대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개혁개방 이전 중국처럼 1인당 GDP에 큰 향상이 없었는데도 수명이 크게 증가한 사례는 있어도, 큰 폭의 GDP 향상이 항상 큰 폭의 수명 증가로 직결된 것은 아니라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 보자. 경제성장이 건강의 증진에 기여하는 긍정적 효과는 그 이득이 분명한 구체적 경제 활동의 효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경제활동이 건강의 증진 등 사회 진보에 기여하도록 조율하는 최종 심급은 결국 정치다. <지금 다시 계몽>에서 핑커는 사회지출이 사회주의의 원칙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자유시장 자본주의 역시 어느 정도의 사회복지 지출과 양립 가능하며,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 이전 사회에 비해 점점 더 큰 몫을 사회지출에 할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 사민주의 정책들이 수립되고 사회지출이 증가한 바로 그 시점에 사회운동과 정치의 역사적 역할이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사회복지 차원의 변화를 이끌어 낸 핵심에 자본주의에 도전해 온 정치가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옹호론을 읽는 순간 입에 물고 있는 음료를 바지에 쏟"을 정도로 자본주의를 싫어한다고 핑커가 비꼬았던 이들의 역사적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에스핑-안데르센의 복지국가 유형론은 물론이고, 피터 홀과 데이비드 소스키스가 발굴한 '자본주의 다양성' 개념에 기초한 연구들이 모두 정치의 심급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이론적으로 개념
- 아무튼, SF게임하지만 나는 엔딩 이후의 세계를 생각한다. 개인은 도저히 바꿀 수 없어 보이는, 체념과 무력감으로 가득한 세계에서도 누군가는 불가능한 이상을 좇아간다. 그러다 그것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희미한 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을 목격한 이들이 있다면 이후의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후의 세계는 오지 않아서 열려 있다. 그리고 이 세계 속에서, 플레이어는 아주 미약한 자유의지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선택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을 믿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마치 모든 이야기 매체에 건네는 위로처럼 들리기도 했다. 우리는 허구를 만들고 있다고. 어차피 이 모든 것은 다 거짓말이라고. 그래도 이 세계는 선명하게 아름답고, 우리가 초대한 이들이 여기서 행복했다면, 이것은 가치 있다고. 마치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 았다. 물론 그 허구 속 행복은 짧고 허망하다. 언젠가 덧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어차피 삶도 그런 것 아닌가.
- 스톤 매트리스
- 아이가 없는 집
- 미래를 먼저 경험했습니다개인적으로 울산 동구에서 확인한 것은 갈등의 ‘쓸모’다. 오랫동안 다문화 갈등은 악덕 업주와 무력한 이주민 또는 법무부와 이주 인권 단체의 대립 구도로 인식되었다. 매번 날 선 갈등만 부각되고 해결은 요원해 보였다. 그런데 울산에서 만난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반발이 거센 만큼 지역사회의 공적 에너지가 효율적으로 모일 수 있었다. 또한 고 노옥희 교육감의 포용적 리더십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가 보여 준 정치를 통해 나는 다문화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피하거나 침묵하지 않는 태도가 왜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각 주체가 제구실을 다하면, 다문화 사회의 불화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울산의 시도가 보여 준다.
- 일간 이슬아 수필집
- 고통 구경하는 사회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통계는 이 기사 저 기사에 인용되며 산업재해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기도 하지만, 잘 정리된 숫자 속으로 진짜 이야기들을 빨아들여 감춰버리기도 한다. (...)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 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 개인을 잠시 내려두고 보편이라는 관점을 택하는, 그리고 닮음이라는 틀에서 훌쩍 벗어나 저 멀리의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상상한다. 나 이상의 테두리를 감각하고, 나의 가족이나 친구보 다 더욱 큰 사회가 있음을 인지하고, 지구 공동체 안의 시민으로서, 인류의 일부로서 어떤 고통과 어떤 뉴스를 더 큰 '우리'의 우선순위로 놓고 해결해 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것. 알고리즘과 구독에 갇힌 나의 타임라인 밖으로 빠져나와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 모든 연민에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을 매달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대로를 아는 것. '나'를 중심으로 뉴스를 떠먹이려는 뉴스의 매개자들이 의도치 않게 왜곡하고 있을지도 모를, 나와 연관되지 않은 일 역시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인류의 상상력과 지성을 믿어본다면, 오늘날 여전히 뉴스를 보는 사람들은 뉴스를 통해 세계와 타인을 배우고 싶어 하는 호기심과 욕망을 갖춘, 퍽 유연한 공동체다. 뉴스를 보는 일이 행동으로 반드시 변환되지는 않지만, 행동에 대한 가능성 역시 이 공동체 안에 있다. 어쩌면 오늘날의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건, 나와 닮지 않은 것들, 나와 전혀 닮지 않은 것들을 향한, 닮음을 넘어 다름과 접속하는 공감이 가능하다는 믿음 아닐까. 자신의 자리로 끌어와서 비슷한지 아닌지 재보고 맞춰보는, 다가와 주길 기다리는 공감을 넘어 온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자리로 다가서는 공감 역시 가능하다는 믿음. 자기와 남을 포갤 때 생기는 낙차는 그 믿음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에야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시인이자 활동가였던 오드리 로드는 "내 말 좀 들어 달라고 울부짖는 곳에서, 우리는 이들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찾아내 함께 읽고 서로 나누며, 그 말이 우리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고 말했다. 이 문장의 주어는 여성들이었지만, 어떠한 다른 고통받는 타인으로 바꾼다 해도 그 의미는 통할 것이며, '우리 삶과의 관련'은 닮음이라는 단순한 공통점 너머에도 분명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론의 독해를 다시 독해하여 어떻게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것은 공동체의 몫이다. 독자에게 윤리적 책임을 떠넘기려는 게 아니라, 그들 손에 달려있는 행동의 가능성에 간절한 희망을 걸어보는 것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타인의 고통》을 쓴 비평가 수전 손택의 날카로운 분석을 떠올린다.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과 더불어 무고함을 증명하기에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이며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는 손택의 말은 행동을 촉구한다.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 제공할 뿐"이기 때문이다. 손택은 이로써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을 하려 했다. 이 오래된 지적에 몇 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난무하는 폭력의 이미지
-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 내가 선택한 취업의 게임
- 악어의 눈이 두 우주를 연결하는 통로는 없습니다. 두 우주는 근 본적으로 다른 체계이고, 각 체계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결코 비교될 수 없습니다. 개체적 정의 세계에서 벗어나 먹이사슬 세계로 나아가는 멋지고 질서정연하며 차분한 방법은 없습니다. 아니 헤라클레이토스적 우주에 들어가려면 당신은 사력을 다해서 용맹하게 도약해야만 합니다. 저는 황금 테가 빛나는 악어의 눈을 통해 뛰어올랐습니다. 악어의 눈은 우리 모두가 먹이인 세상이 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악어가 저를 보통의 우주에서 끌어내어 물이 흐르는 평행우주로 내려보냈을 때, 저는 그곳에서 이 세계가 끔찍한 부당함과 무관심, 그리고 암울한 필연성의 일면을 드러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 일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았습니 다. 저는 먹이사슬 세계가 놀랍도록 급진적 평등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계는 만물을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에스키모 무속인에 따르면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영혼들로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딜레마는 다른 존재를 먹이로 보면서 동시에 영혼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점이 혼란스러운 부분이며, 균형 잡힌 바위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이 두 세계를 모두 보아야 합니다. 균형 잡힌 바위의 지혜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이 두 세계를 모두 살아가고 두 세계 모두에 거주지를 가졌다는 점을 깨우치게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는 점을 모른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우리와 접촉이 끊겨버린 먹이/죽음에 대한 상상이 더 큰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근본적 평등과 상호 양육, 상호 지지를 나누는 구성원으로서 우리 자신을 생태학적으로 다시 상상해보는 열쇠라고 제안합니다. 이는 통합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겸손과 자제라는 구체적 실천 측면에서 우리를 다시 상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관점을 상실한 것은 우리 자신과 세계, 앎에 대한 겸손하지만 매우 중요한 측면을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연속성과 위안, 그리고 의미와 희망을 찾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더불어 지구 행성과 협업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움은 지구 행성에 맞춰 적응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종종 좌절시키는 위계적이고 예외적인 문화 체계를 대체할 것입니다.
-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살다와 떠나다를 구별할 수 없다면, 내가 여기 살고 싶다고 말할 때 너는 내가 떠나고 싶어 한다고 이해하겠지. 이젠 떠나고 싶다고 말하면 여기서 살고 싶다는 뜻으 로 이해하겠지. 그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아름다운 걸까. 그건 어두운 밤, 강을 건너는 새끼 오리 같은 것이거나 내 가 좋아하는 들판의 나무들처럼 슬프겠지. 살고 싶다는 말은 떠나고 싶다는 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아이오와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두 단어는 내게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단어였지만 이제 이 단어는 아주 가깝고 유사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요? 이 질문은 아이오와에 온 날부터 내 마음 한편에 씨앗처럼 심어졌고 이제는 싹을 틔워버렸다. 웬디는 잘 모르겠으면 'live'는 짧게 내뱉어버리고 'leave'는 길게 발음한 뒤 약간의 여운을 남기라고 했다. 아아 알겠어. 삶은 짧은 거고 떠남은 긴 거구나. 일기를 다시 읽는 건 좋은 신호다. 적어도 당신이 당 신의 삶을 버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요즘 일기를 아주 아주 많이 쓴다. 내가 깨달은 건 난 행복해도 된다는 것이다. 난 행복해도 슬픈 시를 쓸 수 있고, 행복해도 행복한 시를 쓸 수 있고, 행복해도 별로인 시를 쓸 수 있고, 행복해도 멋진 시를 쓸 수 있다. 사랑이 많으면 나는 더 많은 것을, 그리고 더 좋은 것을 쓸 수 있다. 행복할수록 나의 영혼은 더 세분화될 수 있음을, 시인이지만 나도 행복해도 된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난 사랑받아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
- 나, 블루칼라 여자
-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플랫폼은 이미 옷으로 돈을 벌고 있지 않다. 대신 셀러들에게 좋은 구좌를 비싼 가격에 판매해 수익을 낸다. 비싸고 잘 보이는 자리에 걸린 옷 광고를 본 소비자들은 또다시 소비하는 굴레에 빠진다. 소비자를 모아 판매자를 모으고, 판매자를 모아 소비하게 하는 플 랫폼. 그 안에서 수요와 공급은 시작과 끝의 구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영원히 순환한다. 또 다시 물건이 존재해서 소비하는 게 아니라 소비를 해야 물건이 존재하는 구조가 갖춰지는 것이다. 80억 인구가 매년 옷 800억 벌을 구매하는 기이한 현상을 멈추지 못하면 우리는 지구에서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 인류가 건강한 상태로 지속되지 않으면 패션산업도 건재할 수 없다. 인류와 패션산업이 살아남으려면 새 옷의 공급량과 판매량을 줄여야 한다. 기업이 판매한 섬유 쓰레기를 수거해 새로운 옷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기술적 고민이 병행돼야 한다. 결국 폐기물을 근본적으로 줄이려면 생산량을 보수적으로 조절하고, 재고 또한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옷으로 옷을 만들고 전체 공급량도 줄이게 된다면 지금껏 패스트패션이 만들어낸 문제점이 조금씩 해결될지도 모른다. 산업이 망하고 모두가 일자리를 잃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속가능한 순환경제 방식을 향해 나아갈 때, 예를 들어 헌 옷을 수거하고 처리하는 등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직군이 새롭게 탄생해 고용을 창출해낼 수 도 있다. 패스트패션 기업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태는 사람들이 고용 축소 등을 우려해 소비를 멈추는 것일 텐데, 더 늦기 전에 업계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패러다임을 새로이 만들어내야 할 때다.
- 연금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그분들은 이렇게 반박해요. 기업에게 세금을 거두자거나 국가재정을 투입하면 된다고요. 다시 강조하지만 이 역시 미래세대의 부담입니다. 소득대체율을 올리자고 주장하고 싶다면 적어도 우리 세대가 받을 액수에 부합하는 보험료를 내고서 말을 꺼내야 합니다. 그게 없는 소득대체율 인상론은 현세대의 몰염치이고 이기주의예요. 나만, 우리 세대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거죠. 소득이 많고 오래 가입한 사람일수록 순혜택이 커요. 낸 돈 에 비해서 더 많이 가져간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받는 돈뿐만 아니라 '내는 돈'을 함께 보기 때문이에요. 국민 연금은 재분배 구조(고소득자에게 상대적으로 낮은 소득대체율을 적용)로 설계되었지만, 내는 돈(보험료+가입기간)을 감안하면 노동시장 중심부 가입자에게 더 큰 혜택이 돌아가는 역진성이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국민연금은 은퇴 후 받을 연금액을 보험료율과 무관하게 정합니다(확정급여), 따라서 보험료율 수준이 낮으면 노동시장 중심부에 자리한 장기 가입자일수록 납부하는 절대 액수에서 부담이 줄고, 그만큼 더 큰 순혜택을 가져가는 겁니다. 결국 이런 역진성은 낮은 보험료율과 가입기간 차이가 만든 국민연금의 역설이에요. 다만 저는 그런 항변이 국민연금에 대한 시민의 불신을 집약한다고 여겨요. 이건 해소해줘야 합니다. 연금개혁의 성패도 여기 달려 있다고 봐요. 원래 국민연금 같은 소득비례 연금이 기여한 만큼 받아가는 원리로 설계된 건 맞아요. 노동시장 참여 여부에 따라 연금을 받을 수 있느냐가 갈리죠. 그렇다 보니 사회가 인정하는 경제활동을 하지 못한 여성 등 노동시장 외부자들이 연금을 받을 권리에서 배제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들이 빈곤 노인으로 전락하면서, 서구에서는 보험료를 꼬박꼬박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노동 시장 참여 여부와 무관하게 연금 수급권을 확대하거나 세금을 지원하는 조치를 해왔어요. 이를 '재조준화recalibration'라고 하고, 그 방법 중 하나가 기초연금이에요. 이와 함께 우리로 치면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직, 저소득자영업자 등 연금의 사각지대에 있는 불안정 노동자를 위한 지원도 확대해왔는데, 이틀 '표적화targeting'라고 불러요. '다층연금체계'란 우리 노후의 대안을 국민연금으로 한정 하지 말자는 이야기예요. 기초연금은 지출액이 20조 원으로 국민연금(34조 원)과 비교해서도 작은 덩치가 아니에요.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대로 연금액이 오른다면 위상이 더 커질 테고요. 퇴직연금도 기업이 노동자를 위해 내는 기 여액이 57조 원으로 국민연금(56조 원)보다 많습니다(모두 2022년 기준). 이 차이는 더 커질 전망이고요. 이 '연금 삼총사'로 공적연금의 보장성을 키워야 합니다. 비로소 제대로 된 한국인의 노후보장 설계가 가능하도록요. 하위계층 노인은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으로 최저소득을 보장받습니다. 중간계층은 세 연금을 적절히 조합해 누릴 수 있어요. 중상위계층 이상은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으로 노후를 준비하고요. 정치의 부재죠. 보험료를 인상하고, 연금액을 조정하고, 지급 대상을 축소하고, 퇴직금을 연금화하는 건 모두 정치의 영역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모두가 연금개혁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누구도 행동하지 않았어요. 정치가 시민들에게 고통 분담을 설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공동체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판단을 미뤄온 대가가 눈앞의 연금재정 위기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정치겠죠. 연금문제에서 무엇이 진짜 진보인지 대의를 세우고, 그 전선에 함께할 광범위한 지지세력을 규합해야 해요. 고양이 목에 방을 달기라지만 그걸 성취해온 유럽 복지국가들이 있고, 우리에게도 그런 역사가 있어요. 이제 저출생-고령화-저성장이라는 삼중고를 감안하면 연금 제도 개혁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여러 사회경제적 혁신이 필요한데, 이 또한 정치의 문제예요. <동아일보>가 2022년 9월 서울 서대문구 신촌 현대백화점 정문 앞에서 국민연금 관련 즉석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10만 원 더 내자'는 팻말을 내걸자 100명 중 63명이 반대했어요.
- 바캉스 소설
-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세상은 대단히 복잡하고 풍요롭고 이상한 곳인데, 그렇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경이로운 곳이죠. 이런 복잡성이 단순함에서 초래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놀랍고 비범한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는 건 대단히 근사한 일입니다. 녀석의 행동에 혐오감을 느끼는 건 인간 세상에나 어울리는 잣대를 적용하는 우를 범하는 짓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자리를 잡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에게 성공적인 것이 도마뱀에게는 그렇지 않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종에 대해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 건 우리가 선이라고 부르는 것과 악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분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한 것의 이미지를 우리 밖에서,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동물들에게서 찾아내곤 역겨워하고, 그런 반면 자기 자신은 선하게 여긴다. 그 동물들이 적당히 역겹게 굴지 않으면 염소를 던져 준다. 그 동물들은 염소를 원치도 않고, 그게 필요하지도 않다. 만약 그걸 원했다면 스스로 구했을 것이다. 염소에게 일어난 유일하고도 철저하게 역겨운 일은, 사실상 우리가 저지른 짓이다. 우리가 그 한계에 얼마나 근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야가 어두워질수록 우리는 더 빨리 내달린다.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는데, 나는 이것 말고 더 필요한 이유는 없다고 믿는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코뿔소와 앵무새와 카카포와 돌고래를 지키는 데 인생을 거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그들이 없으면 이 세상은 더 가난하고 더 암울하고 더 쓸쓸한 곳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철학의 쓸모는 아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어떤 전제를 깔고 있는지 발견하고 다른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더 크게 확장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는 구호는 상식처럼 들리지만, 그 배후에는 수많은 정치적 입장을 떠받치는 모종의 형이상이 도사리고 있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지, 무엇이 가능한 일이고 무엇이 상상 속에나 있는 일인지 등에 대한 한 묶음의 전제가 이미 깔려 있는 것이다. 이 조언이 사실 뜻하는 바는 아주 쉬운 말로 번역할 수 있다. "기대 수준을 낮추어라"이다. 이런 조언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현실에 대해 어떤 전제를 깔고 있는가? 노예를 가축과 마찬가지의 재산으로 보는 재산 노예제chattel slavery가 폐지되었을 때,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을 때, 동성애자 부부에게 다른 시민들과 동등한 권리가 부여되었을 때, 바로 그 순간 무수한 사람들의 현실이 바뀌었다. 그러한 변화가 아직 찾아오지 않은 곳의 현실 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면 모리타니나 인도의 재산 노예제를, 사우디아라비아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여성 권리를, 이란이나 우간다에서 행해지는 동성애 범죄화를 보라. 하지만 다른 사상과 생각이 울려 퍼지는 다른 곳에서는 유색인종, 여성, 성소수자 공동체 등이 전혀 다른 현실을 살고 있다. 생각이 현실을 이미 뒤집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낸 생각들이 계몽주의 사상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나는 앞서 주장했다. 특정한 생각이 규범으로 확고히 뿌리내리면 세상은 변한다. 진보의 현실성을 부인하는 것은 현실 자체를 부인하는 일이다. 진보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한다면, 현실을 들어 퇴보가 벌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여러 논리도 어리석기는 매한가지이다. (...) 아마도 진보라는 생각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은 진보라는 개념 자체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정의상 진보란 본래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이미 성취된 것은 진보라고 하지 않으며, 오로지 미래에(내일 아침이라면 제일 좋겠다) 성취되어야 할 어떤 것만이 진보가 된다. 앞의 세대가 이루어 놓은 일을 진보라고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토록 힘들게 싸워 이루어 놓은 것들이라는 게 조금만 지나면 원래부터 당연히 그랬어야 할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종 분리라는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자라난 세대는 그게 없어졌다는 게 어떤 성취인지를 알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런 게 옛날에 존재했다는 것에 놀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데 이러한 망각이야말로 바로 인종 분리를 뒤엎기 위해 싸워온 이들의 목표였다. 즉 인종 분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이 누가 이토록 야만적이고 우스꽝스러운 것을 받아들였는지를 의아하게 여기는 세상이 오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오늘날이라면, "창자를 뽑고 몸을 네 조각으로 자르기"라는 처형 방식을 폐지하자는 데 모두 찬성하도록 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인종 분리의 폐지 또한 마찬가지의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오늘 우리가 겪는 문제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 진보란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더욱 교묘한 형태의 여러 정의롭지 못한 일을 종식시키는 작업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진보가 작동하는 방식이며, 진보가 왜 이렇게 더딘가에 대한 분노는 아마도 우리가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어깨를 밟고 서 있는지를 이따금 내려다보는 것도 힘을 내는 한 방법이다. 과거에 진정한 진보가 이루어졌음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미래에 더 많은 진보를 이루자는 희망을 결코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정의로운 사회라는 게 아직 얼마나 요원한지를 알게 된다면 과거에 이룬 진보만으로는 우리를 지탱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정의를 위해 몸부림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지금 유행하는 최신 권위주의 선동가들에 비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란의 여성들, 토지를 빼앗긴 브라질의 노동자들, 콩고 혹은 미얀마의 민주주의 활동가들, 이들
- 소심한 사람들만 남았다
- 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한 얼굴을 오래 쳐다보고 있는 것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얼굴에서 마침내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발견은 언제나 절단의 경험을 동반한다. 불가해해야 할 타인이라는 존재는 어떤 계기로 초라하고 시시한 껍데기로 전락한다. 얼굴의 동물적인 면, 야만적인 장면들은 갑자기 고쳐 써야 할 비문처럼 내 앞에 들이밀어진다. 나는 당혹스러워지는데 이 얼굴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음에도 이미 뭔가를 판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얼굴이 언어의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다. 방안의 낯선 자처럼 그렇게 태연하게 언어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판단은 언제나 유예되어 있었을 뿐이다. 하나의 얼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의 인간일 뿐이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열하고 뻔뻔한, 우글거리는 말들의 소굴의 나락으로 우리는 추락한다. (...) 내가 타인에게 폭력적일 수 있는 만큼 나도 그에게 종속된다. 얼굴끼리 맞댄다는 것은 무지막지한 폭력에 서로를 제물로 내어주는 엄청난 호혜를 베푸는 행위나 다름없다. 쳐다보고 있기. 그리고 판단하기. 나로서는 이 판단을 멈출 방법이 없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러나 견뎌야 한다는 진실만은 명백하다. 타인 역시 내 얼굴을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을 내놓고 다님으로써 인간들은 각자를 견디고 산다. 죽이지 않고 잘 견딘다. 그럴 수 있으려면 얼굴은 비참할 정도로 계속해서 읽혀져야만 한다. 우리를 이끌고 내동댕이치는 단 하나의 매개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 요즘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전쟁사
-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 버자이너이 책 첫 장을 펼쳤을 때부터 여성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모두 짐작했을 것이다. 여성의 몸에 관한 탐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여성의 몸을 정의하는 일도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 꾸준히 수정되고 확장될 것이다. 여성의 몸을 정의하는 경계는 그 어느 때보다 모호하다. 과학이 성별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 개개인은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성별은 범위가 넓으며 호르몬과 염색체, 생식기는 다윈의 표현을 빌리면 "무한한 조합으로 제각기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이룬다. 그러므로 여성의 몸을 정의한다면 변화의 매개체, 경계를 무너뜨리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몸은 우리를 눈뜬장님으로 만들 수도 있고 다른 시각으로 보는 자유를 선사할 수도 있다. 또한 몸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과 몸, 관점이 외면당하는지 스스로 목격할 수 있다. 여성의 몸에 관한 과학적 탐구는 단절된 부분보다는 연결된 부분을, 차이점보다는 같은 점을 볼 때 비로소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몸을 더욱 정확하게, 더욱 충실하게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파견자들
- 여자에게 어울리는 장르, 추리소설
- 단순한 열망이 예술가 그룹은 동질화된 스타일을 공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특정한 도약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혁명적이었다. 그들의 작품은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하거나 현실을 기록하려 하지 않았다. 예술가의 개성을 전달하려고 할 필요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 존재감을 드러냈고 세계의 일부가 되기에 충분했다. 관람자는 그 자체를 감상해야 했다. 감각이 해석을 대체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미니멀리즘이 실내장식이 아니라 예술의 한 장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보며 강렬한 감정에 휩싸인 채 가르침을 얻고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핵심이 아니다. 어느 공간에 놓인 저드의 상자와 마주한 사람들은 이 작품을 시간과 맥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바라본다. 그 사물이 고유하지 않더라도 사물에 대한 경험이나 인식은 고유하다. 그러므로 갤러리에 놓인 믹서가 모나리자만큼 매력적일 수 있다. 미니멀리스트의 오브제들은 발터 베냐민이 말했듯 산업 화 이전의 고유한 예술 작품이 지녔던 "아우라"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은 우리의 "기술 복제 시대"와 완벽하게 어울린다. 개성 없이 똑같은 형태가 고유한 힘을 잃지 않고 반복적으로 제작될 수 있는 이유는 예술 작품의 의미란 제작자가 아니라 관람자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사막은 언제나처럼 비어 있었지만 푸르고 아름다웠다. 그러다 이 땅과 토끼, 메추라기, 도마뱀, 벌레는 사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저드는 썼다. "관찰은 우리의 기준일 뿐이다. 도마뱀이 벌레를 보며 품는 생각과 다를 것이 없다. 관찰은 타당성도 없고 객관성도 없기에 이 땅은 아름답지 않다.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땅은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이것이 미니멀리즘의 강력하고 무서운 통찰이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각종 상품과 인테리어, 패션 등에서 연상되는 미적 단서와 아무 관련 없다. 미니멀리즘은 좋아 보일 필요가 없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예술적 미의식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그리 필연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인위적 창조물임을, 미니멀리즘은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미니멀리즘은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요구한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순간순간의 본질적인 경이, 사물의 존재감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고상함을 지향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저드는 그해 겨울 어느 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마침내 예술의 정의가 떠올랐다. 예술은 바로 지금의 모든 것이다." 그는 철학의 구조에서, 사랑하는 사람 의 팔 위에 있는 보잘것없는 천 조각처럼 평범한 것에서, 시선의 언저리에 있기에 더 낭만적인 사물에 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시간은 인간이 만든 온갖 상징을 마모시킨다. 시간이 흐르며 뿌리가 드러나고, 그것이 상류 문화든 하류 문화든, 추상적이든 사실적이든 모두 똑같이 근원적 정신의 소산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구키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그 감정을 수집해 마치 봄꽃처럼 책장 사이에 끼워 넣 었다. 그 덕에 약 1세기가 흐른 뒤 내가 그 감정에 접근해 감동할 수 있었다. 우연히 그것이 내게 와닿은 것처럼 미래의 독자들에게도 가닿을 것이며,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분석되고, 특정한 누군가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면 누구든 이용할 수 있는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완전하게 전달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오직 불완전함 속에서만, 남겨진 틈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유행하는 미니멀리즘 미학은 해결책이 되기보다는 불안의 증상에 가깝다. 위태로운 시대에 조금 더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불안을 달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미술, 음악, 건축, 철학의 예는 완벽한 깨끗함이나 특정한 스타일과 아무 관련이 없다. 매개되지 않는 체험을 추구하며, 강요하기보다는 통제를 포기하고, 스스로 방어벽을 치는 대신 주위에 관심을 기울이고, 모호함을 수용하고, 반대편의 존재가 결국 서로 같은 전체의 일부분임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처럼 더 깊은 형태의 미니멀리즘은 해시태그로 분류하거나 티셔츠로 판매할 수 없다.
-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조차 기어이 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동네가 있었다. 품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인을 대접하는 사람, 나의 상처가 아픈 만큼 남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품위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가진 것 없는 자가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방어선이었다. 나는 매사에 '내 돈을 써야 하는 일인가'만 생각하는 사람, 폭력적인 시선으로 남을 쳐다보는 사람, 남의 차에 가래침을 뱉는 사람, 욕설을 퍼붓고 악을 쓰는 사람이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누구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어떤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품위와 교양과 인격이 다른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태도였다.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끝내 화만 남은 이들에게는 인간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이웃들을 좋아할 수 없었지만 차마 미워할 수도 없었다. 에이드리언 리치가 디킨슨에 대해 쓴 에세이의 제목은 '집 안의 활화산'이다. 나는 디킨슨이 자신이 바라던 대로 방 안에서 자유로웠으리라고, 적막하지만 활화산처럼 폭발적인 시간을 보냈으리라고 짐작한다. 누군가는 집 안에 길이 있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집 밖에 길이 있다고 하지만 나에게 두 문장은 다르지 않다. 몸을 집 안에 두고도 세계를 유랑하는 이들이 있다. 디킨슨처럼 아무데도 가지 않는 여행자를, 먼 곳을 떠도는 은둔자를 나는 흠모한다. 나의 방-작업실-서재가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이자 외부로 나가는 길이기를 바란다.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디킨슨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이제 자유야."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 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
-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우리의 오래된 착각과 달리 이성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주지 않지만, 함께, 나름의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 종 스스로가 더 저열한 생명체가 되는 것을 기어코 막아낼 수 있다. 이성이 세상을 망쳤다면, 그 이성의 쓰임을 바로잡아야 한다. 생태조사단은 사람들에게 수라를 보여줘야 한다고, 경험하게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보지 않으면 쉽게 끝을 말하지만, 몸을 움직여 그곳에 가본 사람은 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까. 그야말로 습지의 생명력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생명력은 지구와 달, 물과 흙의 힘이 서로에게 작동한 오랜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렇게 쌓인 흙 속에서 수많은 생명이 나고, 자라고, 죽고, 썩어서,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힘이 거대한 잠재성으로 여전히 습지 속에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정확하게 쑬루세라는 말이 함의하는 바일 것이다. 쑬루세는 그저 순진한 희망 회로가 아니라 함께 탄생하고, 함께 생산하고, 함께 썩어지고, 함께 순환하는, 그런 의미에서 공(共)-생산적이고 공(共)-지하적인 존재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명명이다. 해러웨이는 "지구의 생물 다양성의 힘을 회복하는 것은 이 쑬루세의 공-산적인 일이고 놀이" 라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 인류세나 자본세와 달리, 세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직은 하늘이 무너지지 않은 불안정한 시대에, 이 쑬루세는 여전히 위태로운 시대 안에서 진행 중인 복수 종의 함께 되기 이야기와 실천들로 구성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하다. 인류세와 자본세 담론의 지배적인 각본들과 달리 인간은 쑬루세에서 단지 반응할 수 있을 뿐인 다른 모든 존재와 구별되는 유일하게 중요한 행위자가 아니다. 질서는 다시 만들어진다. 인간은 지구와 함께 있고 지구의 존재이며, 이 지구의 생물적이고 비생물적인 힘들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다. *(해러웨이 2021, 99)* 그는 생태 시대에 '우리'라는 대명사는 인식론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난제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존재를 취합하는가? 그들은 모두 인간인가? 나는 차이의 정치, 그리고 그것을 곡해하는 정체성 정치를 철저히 염두에 두면서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내가 우리라는 말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지구온난화에 책임이 있는 존재가 해마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하려는 것이다. 책임을 져야 할 것은 인간이다. 나 같은 존재다. 우리가 우리라고 말하는 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찾아낼 것이다." *(티머시 모튼, 「생태적 삶」, 김태한 옮김, 앨피, 2023, 15쪽)* '공주'는 자라서 '여왕'이 된다. 이 두 단어는 이미 성별화된 명칭으로 여성이 '보편 인간'이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분투를 내포한다. 디즈니 페미니즘이 '퀸의 형상'에 기대고 그것이 큰 반향을 얻는 건 '여성 서사'가 계속해서 '주류 서사'로부터 배제되어온 역사 때문이다. 하지만 모험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왕의 딸'이어야만 한다는 신(新)신분제적 상상력,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서 전쟁을 치르고, 역사를 바로잡고, 어떻게든 왕좌에 올라야만 한다는 강박,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퀸-여왕'이라는 이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현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간-남성-문명'과 '정령-여성-자연'의 이분법 안에서 펼쳐진다는 재현상의 한계. 우리가 대결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이토록 진부한 관습 아닐까? 자연 착취적이고 여성 배제적이었던 근대적 세계관을 뒤집지 않고서는 해방의 상상력은 피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테일러는 이런 자립성과 자율성에 대한 자유주의적 환상을 비판하면서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태어났고, 우리 대부분이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삶을 끝낼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비장애인과 장애인 모두 똑같이 의존적이라는 점이 아니라, 자립과 의존의 이분법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자립과 자율이 중요한 가치로 논해지는 사회에서 돌봄은 그래도 주목을 받아왔지만 돌봄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의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 화성과 나
- 서사의 위기수집된 데이터는 그래픽과 다이어그램으로 보기 좋게 요약된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자기는 양이 아닌 질이기 때문이다. '숫자를 통한 자기 이해'는 신화 속 키마이라와 같다. 이야기만이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나 자신이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숫자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수치적 서사'라는 표현은 모순이다. 삶은 정량화가 가능한 사건들로는 이야기될 수 없다. (...) 경험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재생할 수 있다면 엄밀히 말해 더 이상 기억은 불가능하다. 기억은 체험한 것의 기계적 반복이 아닌, 언제나 새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서사다. 기억에는 필연적으로 틈이 존재한다. 기억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전제한다. 경험한 모든 것이 간격 없이 현재로 존재한다면, 즉 가용한 상태라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체험한 것의 빠짐없는 재현은 이야기가 아니라 보고서나 프로토콜에 불과하다. 이야기하거나 기억하려는 사람은 많은 것을 잊어버리거나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 투명사회는 이야기와 기억의 종말을 의미한다. 어떤 이야기도 투명하지 않다. 투명한 것은 정보와 데이터 뿐이다.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 정보와 반대된다. 이야기는 완결성이 특징이다. 즉 종결형식이다. 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야기는 결말, 완결, 결론을 지향하고 정보는 본질적으로 항상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파편적이라는 점이다. 한계가 없는 세계에는 신비로움도, 마법도 없다. 한계, 과정, 역치가 신비로움을 펼쳐낸다. 이에 대해 수전 손택은 이렇게 썼다. "완결성, 통일성, 맥락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다. 모든 것은 우리가 이러한 한계 안에서 나아가는 여정과 관련 있다. 이야기의 끝이란, 그 이야기가 변화하고 잠정적인 관점들이 하나로 모이는 마법적인 지점, 즉 독자가 처음에는 이질적으로 보이던 사물이 종국에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고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빅데이터에서는 사물들 사이의 상관관계만이 파악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관관계는 지식의 가장 원시적인 형식이다. 상관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없다. (...) 이야기로서의 이론은 사물들을 관계성 안에 집어넣은 후에도 왜 그렇게 관계되어 있는지 설명하는 질서가 있다. 이론은 사물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적 맥락을 발전시킨다. 빅데이터와 반대로 이러한 질서는 우리에게 지식의 가장 고차원적 형식, 즉 이해를 제공한다. 이는 사물을 개념화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종결 형식이다. 반면 빅데이터는 완전히 열려 있다. 종결 형식을 띤 이론은 사물을 개념적 틀에 담은 후 그것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이론의 종말은 결국 정신적 개념과의 작별을 뜻한다. 인공지능은 개념 없이도 작동한다. 지능은 정신이 아니다. 사물의 새로운 질서, 새로운 이야기는 정신만이 할 수 있다. 지능은 계산하고 센다. 정신은 이야기한다. 데이터 기반 정신과학은 정신을 탐구하는 과학이 아니라 데이터과학이다. 데이터는 정신을 몰아낸다.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영점에 해당한다. 데이터와 정보로 가득한 세상은 이야기할 능력을 위축시킨다. 그 결과로 이론은 잘 구축되지 않으며 매우 모험적이기까지 하다. 이야기는 사회적 응집성을 만든다. 이야기는 의미를 제공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가치를 전달한다. 이들은 체제를 만드는 서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기초가 되는 서사는 공동체 형성 자체를 방해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 서사는 모든 사람을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게 한다. 모두가 다른 사람과의 경쟁 속에 존재한다. 성과 서사는 사회적 응집성, 즉 우리를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연대뿐 아니라 공감까지 해체한다. 자기 최적화, 자기실현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서사 또는 진정성은 사람들을 고립시킴으로써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에 대한 숭배를 좋아하고 스스로가 지도자인 곳, 모두가 스스로를 생산하고 스스로를 공연하는 곳에는 안정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 이제는 서사가 상업에 의해 본격적으로 독점되고 있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 어떤 나무들은참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결코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시인이, 난생 처음 가보는 먼 나라에서 적어내린 일기장의 면면이 이런 기분을 들게 한다는 게. 그래서 내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쓰지는 않는다, 내가 쓴 것이 무슨 ‘이즘’이나 무슨 이데올로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이즘이나 이데올로기라면 내 시를 이용하는 것은 양해할 수 있지만 내게 무슨 이즘이나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쓰라고 한다면 나는 쓰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아이오와에서 단 한 편의 시도, 아니 단 한 줄의 시구도 얻지 못했다. 모든 게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내 감수성이 문 꽉 닫아버리고 있는 걸까. 그렇긴 하지만 안타깝지는 않다. 내가 체험하는 것들 모두가 착실하게 내 내부로 가라앉고 있을 거다. 그리고 어느 날 시로 나오겠지. 나는 왜 쓰지도 않고 나는 무엇을 쓰지도 않는다. 나는 나를 쓸 뿐이다. 그게 왜가 되고 무엇이 된다면 좋고, 안 돼도 할 수 없다. 아무튼 이런 질문들은 나를 귀찮게 만든다. 내가 원고에서 쓴 요지는 나는 이런 질문을 이미 살아 넘긴suvive 한 사람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이런 질문을 넌더리나게 들어왔는데 왜 여기서도 내가 이런 질문에 마주쳐야 하는가로 시작해서, 나의 체험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쓰고 싶어서 쓸 때 거기에 이미 왜와 무엇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무슨 일이든지, 무슨 분야든지, 시 쓰는 일, 번역하는 일, 하다못해 삯바느질하는 일에서까지도 결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생각된다. 자기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 자기에게 속아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어쩌면 작가들은 더 많이, 외부로만 자신을 투사할 뿐 내부로 자신을 투사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행복한 삶이다. 공연히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함께 대열을 이루어 따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편안한 삶이겠는가. 이 사람들은 항상 나로부터 전체로 나아가고,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나아간다. 우리와는 반대이다. 내 시의 영어 번역에서도 그런 점이 드러났는데 내 시점은 항상 큰 것으로부터 나를 향해 좁아져 들어오는데 비해, 내가 영역한 시를 읽고서 자기 나름대로 번안한 한 학생의 시를 읽어보면 그는 시점을 완전히 뒤집어버려서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지점으로부터 자기 외부로 확대되어나가도록 만들어놓았다. 그건 내가 무의식적・집단적으로 프로그램화된 사회에 살고 있었고 그런 사회에서 잠시나마 다른 사회로 이식되었을 때 나의 온몸의 세포들이 느꼈던 어떤 본능적인 공황 감각, 말하자면 난생처음 겪는 현상들에 대한 공포감, 거부감을 느꼈지만, 그러나 점차로 내 몸의 세포들이 그 이식된 사회에 적응해가면서 그 공포감, 거부감은 천천히 바스러 져나갔고, 이제는 다른 공포감과 거부감, 즉 이 이식된 현실에 적응해가면서 새로 뿌리내리게 된 것들 때문에 완전히 옛것들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감정과 동시에 그 옛것들에게로 다시 돌아가기 싫다는 혹은 그것과 다시 마주쳐야 한다는 강한 두려움의 감정 때문에 생겨난 증세였다는 거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것들을 되돌아보게 된, 그러니까 이미 나의 것이 아니게 된 것들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보았을 때의, 그러니까 사후의 추체험을 통해 다시 느껴보려 할 때의 공포감, 아 내가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았었구나(그 안에서 살 때는 오히려 그걸 느끼지 않았었는데)하는 공포감과, 이제 다시는 그것을 몰랐을 때의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그리고 되돌아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는 공포감을 내 세포들이 느꼈고 그 세포들의 집합인 내 육체가 그 증세를 앓았고, 그 두려움의 감정을 내 세포들은 내 무의식에 부지런히 타전했고, 내 무의식은 그 것들을 하나씩 접수하면서 아직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불안감을 느꼈고, 내 무의식은 그것을 부지런히 내 의식에 타전했고, 내 세포들과 내 무의식이 타전해준 그 정보들을, 그 감정들을 하나씩 접수하여 차곡차곡 쌓아놓았다가, 오늘 새벽 내가 깨어
- 정신머리> 파이드로스, 글에는 그림처럼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네.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보이지. 하지만 자네가 어떠한 질문을 해도 그들은 무겁게 침묵만 지킨다네. 글도 마찬가지야. 자네는 글이 지성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자네가 그 내용이 알고 싶어 물어보면, 글은 매번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들려줄 뿐이지. (*플라톤, 「파이드로스」*) 너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집이 결여되어 있다는, 그 감각뿐이다. 너에게 유일한 것은 집을 갈망하는 욕망뿐이다. 너는 집이 필요하다. 너는 집이 갖고 싶다. 너는 하지만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없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그 가능성- 동시에 불가능성 - 이 유일한 재산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있는 이곳은 광활한 동시에 협소하고, 구체적이면서도 모호하여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네가 자리한 이곳은 발이 닿을 것 같다가도 한 발 한 발 내디딜수록 그 깊이가 더욱 깊어져 허우적대기 십상이고, 도움 구할 주변도 없어서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너는 혼자가 아니지만 절대로 같이일 수는 없으며,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은 있지만 그것을 경험한 적은 없다. 너는 이 사건들의 모든 총체이며, 과거이자 기억인 이 시간들은 너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너는 집에서 살 것이다. 너는 집을 짓게 될 것이다. 네가 가진 유일한 재료이자 소재인 것으로. 너에게는 말이 있다. 오로지 언어일 뿐인, 너에게만 머무를 뿐인, 그저 그뿐인, 동시에 전부라 버릴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때로는 연결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면서 단절을 초래하는 단 하나의 종말이기도 한, 오로지 말. 그리하여 너는 말로써 지은, 말의 집에서, 살 것이다. 너는 너만의 말로 지은 말의 집에서 홀로 살 것이다. 너는 갇히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상태로, 탈출도 방생도 못한 채로, 이동도 거주도 불편한 상황을 자초하며, 아름다우며 기괴한 말의 집에서, 그것에 의지하고 외면당하며, 그곳에서, 홀로 살 것이다. 너는 홀로 살며 늙을 것이고 끝을 볼 때까지 늙을 것이고 이따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서 발버둥칠 것이다. 네게 주어진 유일한 집을 저주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너는 극단적이라고 느끼는 일은 단 하나도, 시도해 보지도 성취해 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 집에 있는 너는 그 집에 있을 뿐이며 영원히 그 안에서만 머물게 될 것이다. 네가 오로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유일한 작업은 그 집을 더욱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다. 너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때로는 선택하고 떠넘기며 이 집을 지었다. 너는 집을 갖고 싶었다. 너는 집을 가졌다. 너는 매일 매일 보수한다. 너는 오늘도 새로이 짓는다. 이제 너에게는 집이 있다. 너는 꿈을 꿀 수 있다, 반복되는 장면 속에서, 무수한 인물이 등장하는 곳에서, 종료됨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마음 편안히, 집에서, 자면서, 꿈을 꿀 수 있다.
- 보통 이하의 것들역사적인 것, 중요한 것, 시사적인 것을 파악하는 데 급급하느라 본질적인 것을 제쳐두어선 안 된다. 진정으로 참을 수 없는 것, 진정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 말이다. 진짜 스캔들은 갱 내 가스폭발이 아니라, 광산에서 행해지는 노동이다. 진짜 '사회적인 불편함'은 파업 기간 동안의 '시급한 사항들'이 아니라, 견디기 힘든 하루 스물네 시간,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이다. (...) 익숙한 것에 대해 질문해 보자.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미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게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익숙한 것 또한 우리에게 질문하지 않으며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지도 않다. 마치 익숙한 것은 어떤 질문이나 답도 전하지 않고 아무런 정보도 지니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그것과 함께 살아 간다. 그것은 더 이상 삶의 조건조차 되지 못하며, 일종의 무감각 상태 같은 것이 된다. 우리는 생애 동안 꿈도 없는 잠을 자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생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에 우리의 육체가 있을까? 어디에 우리의 공간이 있을까? 어떻게 '평범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어떻게 그것들을 더 잘 추적하고 수풀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들을 끈끈하게 감싸고 있는 외피에서 떼어내고, 그것들에 하나의 의미, 하나의 언어를 부여할 수 있을까. 마침내 그 평범한 것들이 자신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인류학을 구축하는 일일 것이다. 동일한 인물이 동일한 장소와 위치에서 묘사하지만, 시간대에 따라 똑같은 대상을 전혀 다른 것으 로 파악하거나 다른 형태 혹은 색상으로 기술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시선의 근본적인 한계와 불완전한 지각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그 어떤 객관적 묘사도 모종의 주관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아울러, 이 글은 페렉이 즐겨 시도했던 '계열적 글쓰기'의 한 유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페렉은 모든 글쓰기는 결국 이전 글쓰기에 대한 반복이자 차이라고 간주하면서, 일탈과 모순의 요소들을 통해 끝없이 글쓰기를 이어가고 증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텍스트 안의 텍스트 형식인 이 글은 작가가 원한다면 매번 '그래프용지' 또는 '모눈종이'에서 다시 묘사를 시작하면서 작은 차이들과 함께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그가 보기에, 현대인들은 모두 일종의 '일상적 실명cecite quotidienne' 상태에 빠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고, 우리의 삶을 이루는 진짜 요소들을 지각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페렉에 의하면, 일상적 실명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쓰기를 통해 '현재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있는 것, 거기에 정박되어 있는 것, 지속적인 것, 저항하는 것, 거주하는 것"이 되고, "사물과 그 사물에 대한 기억이, 존재와 그 존재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열두 개의 삐딱한 시선>). 장소의 상실은 그곳에 기반을 둔 '삶의 상실'을 야기하고, 냉혹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결국 '기억의 상실'로 이어진다. 페렉의 끈질기고 세밀한 기록들은 바로 이 기억의 상실을 지연시키기 위한, 혹은 망각에 맞서기 위한 안타까우면서도 비장한 노력이다. 다시 말해, 페렉의 글쓰기는 그 자체로 '애도'의 행위다.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묘사가 무덤덤하면 할수록, 장소를 바라보는 그의 복잡한 심정이, 숱한 기억과 감정이 뒤섞인 내면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 전달된다. 또 단조롭게 나열되는 문장들의 형태가 불완전하면 할수록, 파괴되고 사라져가는 어느 거리의 쓸쓸한 풍경이 더 생생하게 부각되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다.
- 개의 설계사
- 나의 미국 인문 기행> 아름다움은 쟁취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벤 샨은 모든 이의 평안을 바랐기에 자신은 그렇게도 격렬하고 힘겨운 싸움을 이어갈 수 있었으리라. 항상 자신을 그런 위치에 두고자 했기에 도리어 그가 그린 연인은 서로를 그렇게도 따뜻이 위로하고, 아이들은 기뻐하며, 노동자는 평온한 한때를 보낼 수 있음이 틀림없다. 예술가는 항상 오만함에 맞서는 기개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한 모멸의 태도를 갖춘 자라고 벤 샨은 이야기했다.(<동거인 벤 샨>, 『현대미술 제1권 벤 샨』, 고단샤, 1992년)
-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데이터센터의 순환경제는 절대적으로 필요할 텐데 현재로는 충분하지 않은 상태"라고 필리프 뤼스는 한결 절제된 투로 말한다. "언젠가 간소함이라고 불리는 끔찍한 세계 속으로 진입해야 할 순간이 올 겁니다." 이는 기업가들이 데이터 축적에 답변하기 위해 제시한 우선순위의 전복을 전제로 한다. 이들이 제시한 우선순위를 순서대로 보자면 먼저 '녹색' 전기의 원천으로 옮겨가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저장 기술을 향상시키고, 그런 다음에 우리의 데이터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먼저 우리의 디지털 비만의 뿌리를 공격하고, 그다음에 저장과 전기 네트워크를 최적화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업가들은 언제까지고, 완전히 정신분열증적인 증세를 드러내 보이면서 데이터의 폭발과 환경에 대한 책임, 대폭 강화된 연산 능력과 강물에서 끌어 올린 탈탄소 전기 같은 이율배반적인 말들을 한 문장 안에 늘어놓는 말이 안 되는 말을 계속할 것이다. 우리가 걷게 될 미래의 길은 십중팔구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이처럼 광범위한 해결책들의 혼합이 될 것이다. 그 길을 어깨에 짊어진 우리 인간들이 각자가 가진 관점의 차이를 넘어서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탄탄한 목표를 중심으로 뭉칠 수 있으리라고 믿어 보자. 우선 스스로를 능가하겠다는 야심 하나만을 추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 생태계의 탄생을 목표로 삼고 시작해보자. 그 생태계는 이상화되고 불확실한 미래를 약속하기에 앞서 실질적으로 체험되는 현재를 염려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세계이며, 우리가 만들어 내고 살아가는 시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될 것이다. 독일 철학자이자 문필가인 한병철이 말했듯, "이 새로운 미디어는 우리가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급진적인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프로그래밍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일 도출해내기 어려운 합의는 아마도 미래에 기술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차지하게 될 입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디지털을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온 메시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실은 이보다 훨씬 세속적임을, 디지털이 실제로는 우리를 본떠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합의에 의해서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기술은 더도 덜도 아니고 딱 우리가 하는 만큼만 친환경적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식량 자원과 에너지 자원을 낭비하기 좋아한다면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이러한 경향을 한층 심화시킬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한계를 넘어 지속 가능한 지구를 생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원자 군단을 모을 수 있을 것 이다. 그때 그 도구는 우리의 일상적 솔선수범(그것이 고귀한 것이든 명예롭지 못한 것이든)에 불을 붙이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미래 세대에 물려줄 유산을 증대시킬 것이다. 디지털은 이제 조물주가 되어버린 우리에게,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측량할 길 없는 막강한 힘을 거의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마하트마 간디의 강력한 명령을 두고두고 숙고하라고 권한다. "여러분 자신이 이 세계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변화가 되십시오."
- 후회 없음WRAP 프로세스의 목표는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의사결정에 관한 온갖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선택지 넓히기, 가정 검증하기 등)을 걷어내고 나면 핵심에는 "감정"이 남는다. 이런 감정을 질문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어떤 동기로 움직이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장기 관점에서 우리 가족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라고 믿는가?" 기업의 리더라면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나는 어떤 조직을 운영하고 싶은가?" "장기 관점에서 우리 팀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열정, 가치, 신념 등의 감정을 기반으로 한다. 답 역시 마찬가지다. 답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나의 됨됨이와 바람이다. 즉 문제는 “감정”이다. 그런데 실제로 프로세스를 사용하면 정말 큰 힘이 생긴다. 그 힘은 바로 "확신"이다. 편향된 정보를 수집하고 불확실성을 무시하는 데서 비롯되는, 자만심 가득한 과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확신은 최선의 결정을 내렸음을 알 때 생긴다. 물론 의사결정에 프 로세스를 사용한다고 해서 항상 선택이 수월해지거나 탁월해진다고 할 수는 없다. 대신 프로세스는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힌다. "내가 뭘 빠트렸지?"라는 질문은 내려놓아도 된다. 괴로움의 악순환을 멈출 수 있다. 또한 프로세스를 믿으면 위험을 무릅써도 괜찮다는 확신이 생긴다. 프로세스는 마치 암벽을 등반하는 사람이 의지하는 안전대나 안전 로프와 같다. 덕분에 끊임없이 위험을 걱정하지 않고 탐험할 자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프로세스를 쓴다고 장애나 제약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안심하고 더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다. (...) 과감해지는 것은 그 자체가 선택이다. 과감함은 타고나는 특성이 아니라 일종의 행동 방식이다. 우리는 과감해질 때 용기 있고 자신 있게 선택할 수 있다. 옳은 선택을 분명히 알아서가 아니라, 미루고 후회하기보다 시도하고 실패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정은 절대 완벽할 수 없다. 그러나 더 나아질 수 있으며, 더 대담하고 더 현명해질 수 있다. 옳은 프로세스를 따를 때 우리는 옳은 선택을 해낼 수 있다. 그리고 옳은 시점에 내리는 옳은 선택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 과부하 인간언젠가부터 자기계발서는 정말 실체적이고 실용적인 조언을 제공하지 않으면 잘 안 읽게 됐다. 물론 읽어보기 전까지는 그런지 안 그런지 알 수가 없다. 이 책도 새해에 좀 충동적으로 샀는데 아이고 역시나다. 남들 시선에 집착하지 말고 너 자신을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라는 건 이젠 그렇게 신선한 메시지도 아니고 솔직히 몰라서 못하는 것도 아니지, 라는 느낌. 러브유어셀프도 강박이 되면 그건 그대로 소위 ‘갓생’만큼 빡세지 않나? 나는 남들 말하는 대로 열심히 살려고 이것저것 하다가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기 싫고 실패한 기분이 든다. 나는 역시 남들 말하는 대로 나 스스로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다가 어떤 날은 그냥 객관적으로, 혹은 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싫은 부분을 발견해 버린다. 나는 그 두 가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냥 삶이 그런 날과 저런 날의 반복이라고도 생각한다. 그걸 좋아한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냥 마음가짐의 문제인 것이다. 어쨌거나 공감 가는 문장 몇 개 메모 - 자격은 결과에서 오지 않는다. 시작에서 온다. 오로지 시작하는 데에서 온다. -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 이유는 구체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한다. - 인생의 모든 결과를 통제하려는 욕구가 우리의 가능성을 제약한다. - 자신을 돌보는 일이 부드럽고 말랑말랑할 수도 있다. 그런 자기 돌봄이야 누구나 좋아한다. 하지만 나를 진정으로 변화시킨 건 반짝이고 섹시한 물건들이 아니었다. 나를 변화시킨 건 빚을 갚고, 억지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운동 습관을 들이고, 내 몸을 벌주지 않는 방식으로 식사하고,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습관과 의식을 만들고 따르는 것이었다. 마스크팩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이다. 자신을 돌보는 일은, 마스크팩을 붙이고 짧은 만족감에 빠지는 것보다 훨씬 깊고 고요하다. - 자기 신뢰는 다른 모든 신뢰와 같은 방식으로 생겨난다. 즉, 노력해 얻어내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기를 그만두고, 오히려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세상의 소음을 잠재우고 내직관이 들려주는 고요하고도 가만한 속삭임을 찾아내야 한다. - 시끄럽고 정신없고 한없이 불만족스럽고 모든 것이 과한 이 세상에서 필요한 건, 평가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분별이다. (...) 분별력은 머리에 들어오는 정보의 양을 줄인다. 분별력이 중요한 도구인 이유다. 무엇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지 아는 건, 무엇이 자신에게 맞는지 아는 것만큼 중요하다. 신경 쓸 대상이 줄어든다. '쟁취하려고' 애쓰는 일이 줄어든다. 분별력은 당신이 진정으로 마음을 쓰고 싶은 것에 열렬히 마음을 쏟을 수 있도록 해준다.
-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당신이 어떤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에서 당신의 유전자가 무엇을 하는지로 초점을 옮기는 것은 아주 작은 변화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건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는 일이다. 우리가 현재의 우리인 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유전자들 때문이라는 관념은 최소한 우리의 표현형 중 일부는 우리가 수정될 때 이미 결정되었다는 생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후성유전적 과정들이 유전자의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은 경험과 DNA가 함께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들었으므로, 우리가 지닌 특징이 미리 정해진 것일 수 없음을 뜻한다. 성숙한 상태에서 우리가 지니는 특징들을 유전이 결정하는 게 아니듯 후성유전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후성유전적 표지, 영양 요인, DNA 염기 서열 정보, 특정한 경험을 포함해 우리의 표현형에 원인을 제공하는 모든 발달 자원은 그중 어느 하나만으로 발달 결과가 결정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이렇듯 후성유전적 결정론, 다시 말해 한 유기체의 후성유전적 상태가 반드시 어느 특정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또 하나의 결정론이며, 유전자 결정론보다 아주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위험한 생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유전자 결정론의 종말이 인간 본성에 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꿔놓으리라는 것은 이미 한동안 명백한 사실로 여겨졌으며, 후성유전학의 여러 발견은 그 생각을 뒷받침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발달하는 동안 속해 있는 맥락에서 심층적인 영향을 받으며, 어느 정도는 그 맥락을 통제할 힘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줄 알고 깨어 있으며 성취하는 개인으로 성장하도록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후성유전학의 위상이 높아지면 모든 이에게 이런 메시지가 전해질 것이다. 당신이 생물학의 올가미에 걸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분투하라. 아이들을 주의 깊게 보살피고 돌보아라. 환경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구축하며, 지속적인 건강과 발달을 증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라. 중요한건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부터 분별 있는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지니고 있었고, 경험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이 지혜로운 생각이 바뀔 이유는 없다. 전 세계의 후성유전학 연구실들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비약적으로 새로운 통찰을 아직 내놓지 못했다고 해도, 21세기 초에 그들은 흥미진진한 데이터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우리는 그리 머지않은 미래 어느 시점에 그 새로운 정보로부터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 이처럼 사소한 것들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 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 >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가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의 암시를 의식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저는 좋은 이야기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독자가 이야기를 다 읽고 첫 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도입 부분이 전체 서사의 일부로 느껴지고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독자가 처음에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 것일지라도 도입 부분에서 어떤 것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전체 이야기를 알고 나면 첫 문단이 적절하게 느껴지고 이어질 이야기를 암시한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저는 두 번 읽어서 결말 부분이 앞으로 밀려와 다시 서사가 한 바퀴 돌아가기 전에는 이야기를 다 읽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과학적 탐구란 무엇일까? 언젠가 한국의 트랜스젠더를 대표하는 인구 집단에 대한 데이터가 만들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데이터를 분석하는 다음 세대의 연구자들은 우리가 쓴 논문들의 대표성이 부족했다고 정확하게 비판할 것이고, 그때에는 2016년 연구비를 구할 수 없어 시민들의 돈을 모아 진행했던 347명 트랜스젠더가 참여한 우리의 연구는 과거의 유물처럼 서문에 인용될 것이다. 연구자로서 그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그렇게 우리를 디딤돌 삼아 더 깊고 풍성한 연구가 세상에 나올 테니까. 과학이 절대적으로 옳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한 시대의 가용한 자원을 활용한 최선의 설명이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말하건대 우리의 연구는 과학적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당사자들의 투쟁을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연구자는 이미 존재하는 사실관계에 따라서, 그 데이터에 기반해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 합리성은 종종 보수적인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역사는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에 도전하며 판에 균열을 만들어 낸 이들이 열어왔다. 많은 경우, 연구자의 언어는 그 변화를 사후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제 학문에서도 거리를 두고 시스템을 관찰하고 보다 냉정하게 분석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세상을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려면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내놓는 과정이 과학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생산되지 않은 지식을 생산하는 일은 누군가가 매우 의도적으로 준비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나와 내 동료들이 변화가 시급하다고 생각하며 당장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현실이 변화할 가능성은 요원합니다. 일반화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과학의 자정능력도 실은 그 구체적인 과정을 바라보면 누군가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안간힘을 쓰며 노력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정치적으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순간, 이 책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에 맞는 사실들만 모아 말하며 상대 진영을 비난할 수 있는 길을 찾고 끝내면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이 나아가는 건 답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질문을 잃지 않아서 나아가는 거예요. 중요한 질문들을 놓지 않고 있어서, 삶에 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갖고 있어서 그 긴장으로 나아가는 거거든요. 자신의 정치적 진영을 옹호하는 수준에서 천안함 사건을 이해하면 그 긴장이 '정리'가 되어버려요. 안심이 되고 편안해지거든요. 그럼 이 책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질문이 되지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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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썬킴의 세계사 완전정복
- 붉은 궁
- 철학자와 늑대일화 기억은 날갯짓에 불과하며 항상 우리를 배반한다. 우리의 일화 기억은 수십 년에 걸친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밝혀졌듯이 가장 좋았던 시간에는 특히나 신뢰성이 떨어지며, 우리 뇌 기능이 약화되면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기억이다. 이것은 마치 멀리 갈수록 사라지는 새의 날갯짓과 같다. 그러나 누구도 이름을 불러 준 적 없는 훨씬 심오하고 중요한 기억의 방식이 있다. 각자의 개성에, 그리고 그 개성이 발현된 삶 속에 깊이 새겨진 과거의 기억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러한 기억을 모른다. 보통 의식할 수 있는 종류의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억들은 우리 자신을 형성한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 취하는 행동, 그 결과 살아가는 삶 속에 드러난다. 우리 곁을 머물렀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우리의 의식은 변덕스럽고 기억이라는 임무를 행할 만한 자격이 없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영장류는 어둠의 복수를 계획하기 위해 황급히 달아날 것이고, 자신보다 강하고 자신을 모욕한 자들을 약화시킬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그 작업이 끝나면 악은 실행될 수 있다. 나는 우연히 태어난 영장류다. 그러나 나는 자기를 땅바닥에 메다 꽂은 불독에게 저항하며 낮은 신음 소리를 내는 새끼 늑대에게서 최고의 나를 발견 한다. 신음은 고통이 다가옴을 예견하는 것이며, 고통은 삶의 본질이다. 그것은 내가 새끼 늑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고 삶이라는 불독이 언제든지 나뭇가지처럼 나를 부러뜨릴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그러나 동시에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신념이 강하다는 면에서 보통과는 다른 독특한 철학자 동료가 있었다. 그는 항상 학생들에게 '오물이 튀어 봐야 믿는다'고 말하곤 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사고가 터져 봐야 사람들은 신을 찾는다. 사고가 터질 때 나는 작은 새끼 늑대를 생각한다. 이렇게 다양하며 이질적이고 분열된 감정은 모두 필리아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곧 사랑은 아니다. 필리아는 상황에 따라 너무나 다양한 감정이 동반되기 때문에, 그 어느 일면에 동일시될 수 없다. 더 나아가 필리아는 그러한 감정들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사랑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사랑한다면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한다. 본질적으로 필리아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가혹하고 잔인하기에. 필리아의 꼭 한 가지 필요조건은 감정이 아닌 의지이리라. 동료에게 느끼는 사랑인 필리아는 그에게 무언가를 해 주려는 의지이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로 인해 소름 끼치고 메스꺼워져도, 결국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대가를 치를지라도 그렇게 하려는 의지 말이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에게 최선이자 나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경험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항상 준비해야 한다. 사랑은 때때로 아프다. 사랑 때문에 영원히 저주받을 수도 있다. 사랑은 당신을 지옥에 떨어뜨릴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으면, 정말 행운을 만난다면 사랑은 당신을 지옥에서 건져내 줄 것이다. 인간에게 순간만으로 완전한 그런 순간이란 없다. 인간의 모든 순간들은 불순물이 첨가되어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순간들은 혼탁해져 있다. 우리 삶의 매 순간마다 시간의 화살은 우리를 창백하게 하고 죽게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우리가 다른 동물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는 것이다. (...) 하지만 만약에 시간이 직선이 아니라 둥근 원이라면, 그리고 우리의 삶이 끝없이 반복된다면 삶의 의미는 직선 위의 결정적 지점을 향해 진행한다고 볼 수 없다. 결정적 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 상응하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간들은 흘러가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 순간의 의미는 직선 상의 지점에 있지 않으며, 전후에 오는 사건들과 연관되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에는 과거의 얼룩도 없고 미래의 유령도
- 해적의 시대를 건너는 법조직 구성원으로 일하는 이상 우리의 위치는 조직 안에서나 밖에서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 안팎에서 부는 바람과 물살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아요. 결국 그 모든 흐름과 요소들을 살피면서 자기 위치를 정확히 판단해야 앞으로 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바다에 들어섰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바다는 매우 새로운 세계입니다. 해류도 예상할 수 없고 날씨의 영향도 어느 때보다 심하게 받습니다. 이 바다의 해역에서 만난 선원들도 새롭고 낯선 사람들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 우리는 아주 신비로운 영역에 들어선 셈입니다. 보통 배에는 여러 지역에서 온, 다양한 나이와 연차의 선원들이 타고 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해역 출신의 선원도 있을 겁니다. 이 배의 특성, 강점과 약점을 잘 아는 사람들은 기존의 선원일 것이고, 새로운 바다를 잘 아는 것은 새 해역 출신의 선원일 겁니다. 결국 이 낯선 바다 위에서 배가 지속적으로 안전하게 항해해 나가려면 배 안의 모든 사람이 필요하고, 이 구성원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제 역할을 잘 해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이 바다 위에 들어섰고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무조건 이 바다를 건너가야 합니다. 결국 조직은 배가 위치한 바다를 파악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배 위에 올라탄 구성원들도 주목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구성원 모두가 같은 배의 일원임을 인식하고 각자 이 항해에 어떻게 일조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죠. 낯설고 새로운 바다에서 낯선 구성원들이 모여 항해를 해야 하는 만큼, 배 안팎의 상태를 점검하고 재정비해야 할 겁니다. 그 과정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바꿀 것은 바꿔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 끝내주는 인생나에게 사랑은 기꺼이 귀찮고 싶은 마음이야. 나에게 사랑은 여러 얼굴을 보는 일이야. 사랑한다면 그 모든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부지런해지고 강해져야 해. 아프게 배운 건 잘 잊히지 않아. 늑대와 고양이의 죽음에서 배운 것들. 이 배움은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게 해. 동물들의 각별한 형제인 너. 강하고 약한 너. 결점투성이인 너. 절대로 영원하지 않을 너...... 너무나 유한한 너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지. 나중에 아프더라도 지금은 힘껏 그래야지. 그게 바로 내가 되고 싶은 최고의 나야. 고통과 환희가 하나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는 듯이, 비와 천둥의 소리를 이기며 춤추듯이, 무덤가에 새로운 꽃을 또 심듯이, 생을 살고 싶어. 고작 오 분간의 사바아사나지만 나는 매번 멀리 다녀온다. 과거로도 가고 미래로도 간다. 가보지 않은 대륙으로도 가고 아직 쓰지 않은 글도 상상한다. 그러다 울음이 날 때도 있다. 생이 끝난다는 것을 생각하다가 그렇게 된다. 지금 누워 있는 자세처럼 언젠가 송장이 될 나를 생각하고 마찬가지로 유한하고 허망한, 사랑하는 이들의 몸을 생각한다. 함께 살았던 고양이 탐이도 생각한다. 죽은 탐이의 몸이 얼마나 빨리 딱딱해졌는지도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너무 모른다. 그저 나중에 꼭 그렇게 된다는 것만 안다. 송장 자세로 누워 그 사실을 기억한다. 사바아사나 속에서 죽음에 대한 상상력에 속절없이 끌려가고 사로잡힌다. 그러다 요가 선생님이 작게 징을 치는 소리가 들리면 다시 생의 시간으로 돌아오곤 했다. "요즘 '유래'라는 말을 계속 곱씹고 있어요. 예를 들어 제 아이들인 예지와 예서의 유래는 당연히 진형과 순일이라 생각해왔는데 요. 오히려 저의 유래야말로 예지와 예서가 아닐까, 저의 유래는 제 아내인 순일이 아닐까 싶은 거예요. 이런 세상 살아 무엇 하나 하는 사춘기적 우울을 여태 앓고 있는 저에게, 삶의 지속가능성은 예지와 예서 그리고 순일로부터 유래하거든요. 유래는 존재의 기원일 텐데요. 제가 순남씨를 알게 된 건 슬아 작가님 덕분이므로 적어도 저의 세계에서 순남씨는 슬아 작가님으로부터 유래하죠. 고양이 탐이도 작가님으로부터 유래하고요. 여성의 계보도 그렇습니다. 작가님이 만들어가는 세상에서 잊힌 여자의 계보가 복원되죠. 우리는 분명 누군가로부터 유래한 사람들인데요. 그가 저를 낳은 사람일수도 있겠으나 저를 기억하게 만드는 사람 들일 수도 있겠어요." 그러자 이 책이 끝나도 끝나지 않으리란 걸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삶이 끝났어도 나를 통해 선생님의 마음속에 살아있듯이, 책이 내 손을 떠난 후에도 누군가에게는 이제 막 시작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 공정감각이렇듯 대학교가 정부와 대통령의 반노동적 정책 기조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지식의 '생산자'가 아니라 친자본, 반노동이라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내고 정권이 지지하는 지식의 '소비자' 역할만을 이행할 때 대학생들 역시도 노동권을 폄하하고, 결과적으로 자본과 기업에 유리한 사고방식을 갖게 될 것이다. 대학교가 인문•사회과학을 통해 학생들에게 철학적, 비판적 사유 능력을 길러주지 않는 것은 결국 친자본, 반노동의 틀 속에 '산업 인재'를 수급하는 공간으로 전락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학이 진정 지식 생산자의 본래 기능을 하고자 한다면 현 정부의 교육정책 기조는 물론 한국 사회가 그동안 축적해온 교육의 '수단적' 기능, 즉 교육의 목표는 민주시민으로서 자질을 갖추도록 하 는 것이 아니라,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것이고, 좋은 대학으로 입학하는 것은 취업 후 높은 연봉이나 '능력' 있는 배우자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라는 '한국적 상식'에 대해 오래고 깊은 성찰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 때 많은 이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새치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 앞에 그들이 넘어올 수 없는 벽을 세워 정규직 노동자만 앞질러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새치기 아닌가요? 기업이 이 터무니 없는 새치기를 정당한 절차라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든 새치기할 수 있는 위치에 서려고 애쓰는 게 아닌가요? 우리는 이 불합리한 줄 세우기를 없앨 수 있습니다. 줄곧 주창해 온 '공정한 경쟁'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기업이 만든 반인권적 구조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공고한 차별 앞에서 무력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로 노동자에게 연대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줄곧 "상상력이 곧 지성"이라고 말해왔다. 지금처럼 다원화된 사회에서 누군가의 고된 삶, 부당한 경험, 어려운 상황, 모욕당한 기분 등을 일일이 묻고 책을 통해 확인해야만 비로소 이해하고 지식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 접하지 않아도, 직접 당해보지 않고도 자신의 경험 어딘가에 있을 그 어떤 것이 전장연의 치열한 시위 과정에서의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면, 즉 자기 경험에 대한 성찰성만 충분히 있다면 그 사람은 지성인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다, 라는 뜻의 사자성어 역지사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과 처지를 바꾸어볼 필요도 없이, 자기 경험 안에 다른 사람의 어떤 경험이 이미 분명하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경험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기만 해도(성찰)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의 경험과 만나고 그 사람에게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른 이들의 손에 자신의 권리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장애인은 어떻게 문명적으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투쟁의 '내용'이 아니라 투쟁 '방식'을 문제 삼으며 시위 참가자들을 비난하는 정치인들은 사실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야 할 만큼 절박했던 상황들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자격 없는 이들이다. 나와 다른 삶의 조건을 버티듯 견디는 이들에 대한 상상력 빈곤은 지금처럼 다원화되고 복잡한 사회에서는 그 자체로 폭력이며, 이준석의 '비문명' 발언에서처럼 듣는 사람에게는 폭언이 된다. 이처럼 상상력의 빈곤이 폭력이고 폭언이라면 타자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은 치유의 문학이며, 영화고, 곧 예술이 된다. 우리가 대학에서 배우고 익히는 것은 타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용기가 되고 힘이 되고, 그렇게 해서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내는 예술이 되어야 할까.
-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 처음 시작하는 돈 공부
- 갈대 속의 영원알렉산드리아는 그 출발점이었다. 그곳에선 왕의 돈과 학자들의 노력으로 엄청난 작품을 보호하고 지켜냈다. 아마도 그리스인들은 부서지기 쉬운 책의 내용이 후대의 자손들이 삶을 이해하는 데 필요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아주 허무한 것들도 미래 세대를 위해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그들은 고대의 역사와 전설과 이야기와 시는 죽음을 거부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증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현자들의 위대한 독창성은 과거에 대한 사랑에 있지 않다. 그들을 선각자로 만든 것은 잉크와 파피루스로 만들어진, 따라서 망각의 위협에 놓인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메데이아』가 수 세기에 걸쳐 여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야기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의 손에 이를 때까지. 그리하여 우리의 저항을 일으키고, 때로 어떤 진실은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일깨우고, 우리의 가장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 우리가 진보의 자녀라는 지위에 너무 오만해질 때마다 찬물을 끼얹어줄 수 있도록, 그 이야기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 있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들은 처음으로 미래의 권리, 즉 우리의 권리를 숙고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어둠을 몰아내고, 이야기를 통해 혼돈과 공생하는 법을 배우고, 언어의 공기로 모닥불을 부채질하며, 낯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리고 같은 이야기를 공유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수천 년 전에 태어난 픽션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는 놀라운 점이 있다. 누군가가 최초로 『일리아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후로 트로이 해변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결투는 결코 잊히지 않았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듯, 2만 년 전의 고대 사회학자라면 신화가 생존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란 무엇인가? 그건 말의 연속체이다. 폐를 떠나 후두를 통과하는 공기의 흐름이 성대에서 진동하고 혀가 입천장, 치아, 입술을 어루만지며 최종적인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깨지기 쉬운 것을 구해내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인류는 글과 책을 발명함으로써 절대적 파괴에 맞섰다. 그 발견 덕분에 타인과 만날 수 있는 거대한 공간이 생성됐고 사상의 기대 수명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책에 대한 사랑은 신비롭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사슬을 만들어냈으며, 세월을 따라 훌륭한 이야기와 꿈과 사유의 보물을 구해냈다. 이 글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음유시인, 발명가, 필사가, 도안가, 사서, 번역가, 서점 운영자, 노점상, 선생, 현자, 스파이, 반역자, 여행자, 수녀, 노예, 모험가, 인쇄업자가 만들어낸 놀라운 집단적 모험이자 신비로운 충성심으로 단결한 그들의 가려진 열정이다. 사교 클럽에서, 집에서, 요란한 바다에 인접한 산봉우리에서, 에너지가 집중된 도시에서, 혼돈의 시기에 지식의 피난처가 된 외딴 지역에서 책을 읽는 독자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잊힌 사람들. 익명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우리를 위해 그리고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투쟁했다.
- 액세스가 거부되었습니다가야 할 곳은 둘째 치고 지금 가고 있는 곳조차 모른다면 기술이 어떻게 인류의 도구일 수 있을까. 그건 오히려 재난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일수록 시선이 중요하다. 밀려나가는 것을 응시하는 행동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향방을 가늠하는 나침반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언제나 그랬듯, 세상을 바꾸는 건 기술이 아니라 관점이다. 대기업이 선진적인 기술력을 무기 삼아 돌격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건 중소기업뿐만이 아니라 그 아래 계약된 개별 노동자다. 플랫폼은 이용자에게는 일상의 편리를 돕는 순풍이지만, 해당 산업이나 생태계에는 파괴적으로 몰아치는 폭풍이다. '공동 성장'은 테크 업계가 아니라 그들이 침투한 생태계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플랫폼 노동자가 된 모든 이를 향한 단어여야 한다. 접근성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어떤 이는 접근성을 기존 기획에 더해야만 하는 플러스 알파처럼 여긴다. '그들'을 위해 할 도리를 했다는 식으로. 그러나 접근성은 특정한 소수 그룹을 향해 시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경계에 선 고통까지도 포괄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작업은 노안이나 약시를 가진 이를 위한 것이 되고,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은 청력이 약한 이에게도 도움이 된다. 장애인들이 이동권 투쟁을 벌여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가 생겼기에 유아를 데리고 이동해야 하는 사람도, 나이가 많아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 든 사람도 대중교통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접근성은 장애인만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한 것이다. 서비스 연속성을 위해 필요한 건 백업과 복구에 관한 실질적인 기술뿐만 아니라 매뉴얼과 프로세스 등 정책 일반이다. 그러나 정작 현업에서 서비스 연속성은 이 같은 기술이나 정책이 아니라 노동의 영역에만 오롯이 전가되고 있다. 야간작업과 휴일근무가 서비스 연속성의 필수조건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지보수 노동자는 서비스 연속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한밤 내내 푹 잠들 수 있는 숙면의 시간이나 노트북 없이도 떠날 수 있는 여행 같은 것을.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다가 만났던 사수 한 명은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시스템은 그릇이기 때문에 개발자는 이 그릇에 무엇이 어떻게 담기는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내가 만들 시스템에 담길 업무 혹은 콘텐츠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만들어야 그것에 가장 적합한 그릇을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그 이후로는 내가 만드는 게 어떤 그릇인지 오래 생각했다. 그릇은 기능과 미관뿐만 아니라 크기 역시 중요하다. 담아내는 것에 비해 크지도, 작지도 않아야 한다. 간혹 사람들은 하려는 것에 비해 너무 과한 시스템을 상상하거나, 주어진 조건에 맞춰 대강 해치워버리려고 한다. 대개 전자는 그럴 듯한 실적을 위해서, 후자는 예산과 시간의 제약을 이유로 나타난다. 둘 중 어느 쪽에도 쉽게 타협하지 않으려면 끈질기게 고민해야 한다. 오래 고심해서 시스템의 적정한 규모를 가늠하고 결국 구현해냈을 때 나는 이 노동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 저주토끼좋은 시간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으나 나쁜 시간을 소원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래는 없었다. 그와 내가 알았던 모든 삶의 유형들은 전부 과거에 갇혀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 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 순간은 짧지만,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생존을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확인하는 동안 좋은 시간도 나쁜 시간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과거에 고정되어 버린 사람들, 그도, 그의 할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나도, 살아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사실은 모두 과거의 유령에 불과했다.
- 설명하기 지친 사람을 위한 데이터💬 개인적으로 `'객관적'인 데이터가 '감수성이 다른' 사람들 간의 간극을 좁힐 수 있다`는 데 점점 회의적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 간극이 너무 심화되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어떤 데이터도 객관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커져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데이터는 언어라고들 하지만 ("데이터로 말해요!") 데이터가 언어가 된 세상을 떠올려보면 왜 나는 아직까지 바벨탑밖에 안 그려지는 거지, 물론 그것도 지금보다는 낫다고 누군가는 말할 테지만.
-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그런데 묘한 점은, 천국에 줄 선 사람들이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장난감 가격만큼의 돈으로 할 수 있는 기부와 생산과정에서의 환경 오염을 생각하는 삶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삶보다 즐거울 수는 없을 테니까. 결국 수레바퀴 이전의 세계는 '쓰레기를 침대 아래 숨긴 다음 방을 정리했다고 믿는' 식으로 운영되었고, 이 믿음의 유일한 보증서는 기술 발전과 가속주의에 기댄 낙관론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더욱 뛰어난 기술이 나타나 환경오염과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한꺼번에 해결해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낙관은 미래의 자신을 초월적인 구원자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종교보다도 더 종교 같은 것이며, 1950년대 이래로 기술 발전은 위기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양극화가 심화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토마스 네이글은 인간에게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행위자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네이글이 '영원의 관점'이라고 명명한 삼인칭적, 객관적, 이론가적, 관찰자적 입장이다. 네이글은 두 관점이 서로 구분된다는 사실보다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존재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 두 구분되는 관점을 동시에 취한다는 사실을, 그것이 인간성의 본성을 포착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 더티 워크문제의 진짜 원인은 플로리다주의 주민들이 딱 그 정도의 비용을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립 교도소를 가득 채우고 싸게 운영하다가 그로 인한 불쾌한 결과가 눈앞에 드러나면 분개하고 비난했다. "이곳의 진짜 문제는 일반 시민들이 죄수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비용을 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커티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인도적이고 관대한지 유창하게 떠들어대다가, 교도소 문제에 이르면 그럴 돈이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교도소의 더티 워커, 나아가 모든 더티 워커가 담당하는 또 하나의 필수 기능은, 그들로서는 결국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비인도적인 시스템에 대한 비난을 받아내는 것, 그럼으로써 그들보다 훨씬 더 힘센 사회적 행위자들이 관심의 초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힘센 행위자가 누구인가 하면, 그들의 윗사람만이 아니라 국민의 포괄적인 동의하에 일하는 판사와 검사, 선출직 공무원이다. 데이드의 교도관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교도소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회의 대리인이다. 갈런드는 일상적인 폭력과 고통은 은밀하게 수행되거나 위장되거나 어떤 식으로든 시야에서 제거되면 용인될 수 있다"고 말했다. 관건은 잔인성의 정도가 아니라 잔인성의 가시성과 형식이다.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플로리다 주립 교도소들의 외딴 위치는 우연이 아니다. 프래트에 따르면 서양 세계 전역에서 "문명화된 감옥은 보이지 않는 감옥"이다. 시스템의 폭력을 은폐함으로써 '선량한 사람들'이 담장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훨씬 더 쉽게 모르는 척하거나 잊을 수 있게 하는 감옥이 문명화된 감옥이다. 여기서 셰이는 호메로스의 전쟁 서사시 《일리아스》 를 재해석하여 베트남전 귀환병들을 괴롭히는 상처의 성격을 탐색한다. 저자에게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인격이 무너지는 이야기"다. 상관 아가멤논이 그가 생각하는 '옳음'을 배반하는 순간, 아킬레우스는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고 "자신의 기준에서 그른 일을 스스로 하겠다"는 욕망을 품는다. 이런 종류의 환멸은 총에 맞거나 전우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만큼 깊은 외상을 남기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셰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내가 베트남전 귀환병들과의 작업을 통해 굳게 믿게 된 바, 도덕적 외상은 모든 전쟁 외상의 핵심이다. 귀환병은 민간인 생활로 돌아오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옳음'이 위반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공포와 두려움, 비탄을 극복할 수 있다." (…) 2009년 《클리니컬 사이콜로지 리뷰Clinical Psychology Review》의 한 논문에 따르면, 새로운 세대의 연구자들은 이 개념의 초점을 확대하여 "근본까지 닿아 있는 도덕적 신념을 위배하는 행위를 스스로 행하거나, 막지 못하거나, 목격하는 일"에서 비롯되는 괴로움까지 '도덕적 외상'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병사들은 전쟁의 혼돈을 헤쳐나가는 와중에 제 손으로 잘못된 행동을 함으로써 혹은 타인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지켜봄으로써 자기 자신을 배반할 때 도덕적 외상을 입고 괴로워한다. (…) 내가 데이드 교도소에서 인터뷰한 모든 상담사가 자신이 목격했으나 막을 수 없었던 끔찍한 일 때문에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로비타 리처드슨은 재소 자가 의자에 묶인 채 곤봉질당하는 모습을 보고도 개입하여 그를 돕지 않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게 되었다"고 했다. (...) 그러므로 도덕적 외상은 "근본까지 닿아 있는 도덕적 신념을 위배하는 행위를 스스로 행하거나 막지 못하거나 목격하는 일"과 관계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산업재해다. 더티 워크를 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산업재해를 당한다. 분명히 드러낸 것은, 드론 부대의 '조이스틱 전사들'은 전쟁터에 직접 나가 죽음을 무릅쓰는 진짜 병사들보다 덜 명예롭고 덜 용감하다고 여기는 군부와 사회 전체의 시각이었다. 또한 드론 전투원의 열등한 지위는 다름 아니라 정치가와 대중이 드론 전투를 옹호하는 바로 그 이유(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무릅쓰지 않고도 외국 땅에서 치명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
- 있을 법한 모든 것사랑이나 미움의 감정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들 또한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닌 판단과 분석이 개입하여 나오는 결론인 경우가 많으므로, 그 감정을 확신하지 못하고 적절한 속도와 높낮이를 지닌 음성, 침묵과 호흡을 동반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동안, 존재의 기반이 흔들린다. 자신의 말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사고를 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여기에 이르고 나서야 사람들은 삶이,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앞서 인간의 몸이, 무엇으로 이루어졌으며 무엇을 통해 열리는 것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하지 않을 때는 그림자 속에 사람이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가 원할 때는 그림자 속 사람의 손목을 잡아당겨 끌어내야 속이 시원해진다. 사람을 사람으로 인지하고 파악하며 그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와, 소유 내지 임의 처분을 구별하지 못한다. 파악은 손으로 쥐는 것이지만 그것을 놓아야 할 때를 모르거나 그것을 손안에 쥔 그대로 잡아 터뜨릴 권리가 있다는 뜻이 아님을, 대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림자 사람에게는 얼굴을 감추고 싶어할 권리나 자격이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듯이. 이때 1은 자신을 꼭 닮은 또다른 1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투신하듯이 다가선다. 1은 마침내 그와 함께 11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둘이 마주쳐 막 11을 이루었다고 느끼는 순간, 1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됐음을 알아차린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데 단 하나 있음과 같아지며, 수많은 단 하나가 복제되어 더 큰 단 하나의 일부를 구성한다. 서로에게 닿는 순간 1의 눈앞에 무수한 없음의 갈림길이 거미줄처럼 펼쳐지다가 한데 뒤엉켜 미로를 닮아간다. 1은 지금까지 1이라고 생각한 자신의 모습이 실은 0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러나 다음 순간 또다시 0이 아니라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고 여기게 된다. 마주한 두 장의 거울 사이에 우연히 낙하한 1 또는 0이, 서로의 모습을 반사하며 그것을 자기라고 인식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던졌다가 떨어뜨린 동전이 두 손을 펼치기 전까지는 언제까지고 앞면인 동시에 뒷면인 것처럼, 0 또는 1은 0이자 1인 모습을 영원히 번복하고 변주한다. 이 우주에 물리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어떤 힘도, 이 손바닥을 비틀어 열 수 없을 것이다. 00 01 10 11은 예정된 계산이 아닌 즉흥과 충동으로 이루어져 광기를 품고 널뛴다. 우리는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고 죽으면서 살아가고 살면서 죽어가는 우주의 한 조각에 불과하여, 상상에서만 결합과 증식이 가능한 합성어와 파생어를 무한히 낳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이든 되도록 하자. 이 세상에 기입되는 단 하나의 문장, 그 종지부에 찍히는 부호라도 되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서로 같으면서 다른 모습으로 동시에 조우해야 한다. 이 조우의 중첩이야말로 우리의 존재 이유이며 설령 이유가 거세되더라도 존재 그 자체이자 전부이고, 무의미야말로 이 세상의 유일한 의미임을 증명하는 파동이다. 산산조각난 신의 찻잔이 우주에 흩어져 별이 된다. 1/들은 당신이 기다리는, 동시에 누구도 원치 않을 0의 총합이다.
- 미국이 불타오른다레너드는 최근 유행한 페미니즘, 그러니까 부유하고 유명하며 개인적인 야망을 숨기지 않는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즘이 사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야망 없는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잠을 줄이거나 육아휴직을 단축하는 방식으로 경쟁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이다. 일부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그 많은 일에 쉬지 않고 매달려서" 출세의 사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다수 여성은 이런 식의 '걸 보스Girl Goss 페미니즘'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레너드는 생각한다. 이런 페미니즘은 나아가 악독한 기업 행위자에게 보호막을 제공하거나 (성평등 현황을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를 앞에 두고 회사를 보호한 페이스북 COO 셰릴 샌드버그의 페미니즘), 외교 참사를 일으킨 사태(매들린 올브라이트,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로 이어질 수 있다고도 했다. <룩스>는 고인이 된 작가 벨 훅스가 제시한 광범위하고 더욱 단순하며 포용적인 페미니즘 개념을 차용한다. "성차별적 억압에 맞선 투쟁", 즉 정적인 정체성이라기보다 꾸준히 실천하는 페미니즘, 모두 참여할 수 있는 페미니즘이다. 이 가치의 핵심은 완전한 평등에 미치지 못하면 페미니즘으로 칠 수 없다는 데 있다. "부유한 여성이 부유한 남성과 동등해지는 것, 가난한 여성이 가난한 남성과 평등해지는 것을 여성주의의 승리라고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레너드의 설명이다. 이처럼 한층 더 총체적인 페미니즘이 실현되려면 샌드버그가 제안한 수위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사회, 정치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페미니즘은 개개인의 과제라기보다 집단 프로젝트가 되고, "사소하고 개인적인 선택" 영역을 벗어나 광범위한 사회변혁 단계로 나아간다. (...) 레너드가 잡지 <룩스>를 통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면 원래 의미대로 "정체성 정치"는 좋은 가치라는 것이다. "(정체성 정치라는 개념이) 지난 5년간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나쁜 정치의 대명사인양 여기저기서 두들겨 맞았죠." 레너드는 정체성 정치에 좌파를 확장하고 강화할 힘이 있다고 본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나의 정체성으로 일하다 보면 자신만의 관점이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이 보이기도 하고요." 레너드가 '컴바히강 공동체' 선언문을 풀어서 설명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정체성을 구성하는 부분 하나하나가 바로 그 지점을 공유하는 타인에게 가닿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정체성은 타인을 막아내는 해자가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죠." 진보의 주요 의제에서 노조와 노동계급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최선책이 무엇인가를 둘러싼 전략 논쟁은 좌파 내부의 대립을 보여주는 사례다. 대선 당시 샌더스 캠프를 다루던 언론보도도 이런 대립을 집중 조명했다. 특정 정책을 놓고 계급에 기반한 보편된 주장을 펼친다면 인종문제나 인종차별을 무시하는 처사인가? 전 국민 의료보험을 추진하기 위해 임신중지에 반대하고 단일 보험자 의료보험에 찬성하는 가톨릭 신자들과 손을 잡으려면 언제가 가장 좋은 타이밍인가? 만일 타협하면 여성 인권은 퇴보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인종 대 계급', '재생산권 대 전 국민 의료보험'과 같이 제로섬zero-sum 사안으 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 하려고 들면 불가능하므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따라서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생겨난다는 점이 기본 전제다. (...) 좌파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진보 정책을 요구하는 미국인들의 연합전선을 넓혀갈 필요성, 그리고 다양한 집단의 요구와 권리, 반감 사이에서 균형점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 마음도 운동이 필요해생각은 딱 보가트 같아요. 생각이 그저 생각일 뿐이라는 걸 알고, 미소를 띠고 바라보세요. 아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 거예요. 그 순간의 자유로움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예요. 그런 자유로이 있는데, 생각이 써 내려간 시나리오에 굳이 에너지를 쏟을 필요는 없죠. 마음이 지금 이 상태로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을 때, 그래도 '이 모두가 지나간다'는 걸 기억하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왈이의 마음단련장에서는 멍상 마지막에 "아닛짜"라고 인사합니다. 이 말은 인도어파 에 속한 팔리어로 '이것 또한 변한다This is also changing' 즉, '무상함impermanence'을 뜻해요. (...) 지붕 없이 탁 트인 자연에서 내가 하던 고민을 다 시 바라보세요. 곧 변할 것을 뭐 하러 일일이 붙들고 늘어진 건지 의문이 생길 거예요. 나는 그저 거대한 자연의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거든요. 이러면 생각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지죠. 좋은 것에 집착할 필요도, 싫은 것에 혐오를 일으킬 필요도 없이 그냥 좋을 때 좋으면 그만인걸요. 힘든 시간이 오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고 툭툭 털어내요. 곧 봄날이 올 거라는 걸 느끼면서요. 멍상의 룰은 삶의 룰과 비슷해요. 앞으로도 우리 인생에는 바라지 않는 일들이 계속 벌어질 거예요. 아무리 잘해보려 해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어요. 그렇게 크고 작은 실패를 겪을 때, 실패를 붙들고 늘 어지지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통에 마음을 여는 힘, '나 자신을 어떻게 도울까?'라고 묻는 자기 연민의 힘이 꼭 필요해요. 그렇게 다시 시작하면 실패는 더이상 실패가 아닙니다. 자기 연민은 실패를 다루는 유용한 기술이자 삶을 살아가는 현명한 태도랍니다. (...) 연민은 내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에 오는 실패와 고통에 마음을 여는 거예요. 연민이 자기객관화의 반대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그 반대랍니다.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조절하고 통제하려는 힘만 쓰면 마음이 한쪽만 비대해져요. 균형을 갖추려면 그 반대의 힘도 길러야지요. 그게 바로 '내버려두는 근육'입니다. 마음에 잔뜩 들어간 힘을 풀어보세요. 그러면 불편함도, 즐거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요. 사람들은 "명상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말을 오해하곤 하는데요. 불편함이 사라져서 편안한 것이 아니에요. 불편함을 예전처럼 내 입맛에 맞게 바꾸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데에서 편안함이 옵니 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작은 그릇에 담긴 물에 식 빵을 넣으면 물은 빵가루로 금방 탁해지겠죠. 그런데 바다에 식빵을 넣으면요? 바다는 여전히 그냥 바다일 뿐이잖아요. 내 안의 넓고 큰 공간을 느껴보세요. 나는 넓은 바다입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은 파도라고 상상해보세요. 나를 바다와 같다고 상상하는 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 객관화: 내가 지금 느낀 감정, 생각, 현실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차린다. - 전체성: 나라는 바다, 그 전체를 인식한다. - 수용: 지금 내가 환영하지 못하는 생각이나 이 감정 또한 내 안에 속한다는 것을, 그것들은 파도(혹은 식빵)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 상황, 감정, 생각을 밀어내지 않아도 돼요. 내 안의 넓디넓은 공간을 인식하고, 불편한 감정이라도 그 공간의 일부분임을 인정해보세요. 그러면 그 감정이 거기에 있어도 괜찮아집니다. 이 수용의 과정에서 '마음에 자리를 내어주다' 라는 표현을 사용해요. 틱낫한 스님은 '내버려두는 것Let go'은 '있도록 허락하는 것Let be'이라는 말을 자주 쓰셨어요.
- 연수(작가의 말) 소설을 쓰게 된 후로 소설을 ‘어떻게’ 쓰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친구들은 “머릿속에 이런 게 다 있었던 거야?” 간솔히 묻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설명해보려 하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소설이 ‘어떻게’ 쓰이는지 잘 모르겠다. 어떤 장면이나 인물, 혹은 그들이 내뱉는 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떠오른다. 왜 이렇게 자주 나타날까? 자꾸 생각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 다소 무모한 생각으로 큰 틀을 잡고 쓰기 시작한다. 뭔가가 있긴 있겠지, 없지는 않겠지. 흐릿하고 두루뭉술한 마음으로 써나간다. 정말 신기하게도 다 쓰고 나면 매번, 처음에는 생각지 못했던 무언가가 고여 있고 덧대어져 있다. 나는 나를 그저 조그맣고 단순한 기계라고 생각해보기로 한다. 메커니즘은 잘 모르지만, 그 성능만큼은 믿어보기로 한다. 무언가를 넣고 작동시켰더니 어쨌든 이런 것들이 출력되었다고. 돌아가는 원리를 모르니까 고장 나지 않게 하려면 꾸준히 기름칠해주면서 멈추지 않고 작동시키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게 무엇이든 계속 써보려고 한다.
- 우리의 상처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이주민들에게 K-방역이란 정보에서 소외되었다는 측면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고, 방역물품과 재난지원에서 배제됐다는 측면에서 차별이었으며, 전수검사의 대상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과학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인권침해였을 뿐이었다. 이주민들이 기대야 했던 것은 K-방역이 아니라 체류할 수는 있지만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던 나홀로 방역이었다. 팬데믹 기간 '국민'만의 K-방역이 지속된 것은 한국 정부나 한국 사회의 이주민에 대한 인식 수준이 그대로 나타난 결과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주민을 결코 한국인과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방역과 지원 정책에도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생존의 구호보다 우선한 코호트 격리 중심 집단 방역책은 재난 상황 시 거주시설 장애인의 존엄이 치안의 논리 아래 후순위로 밀려난다는 점을 보여준 명징한 사례였다. 국가는 거주시설 내 장애인을 감금 격리 대상으로 통제했고, 이들의 생명권과 자기 결정권 존중을 미뤄두었으며, 심지어는 죽음마저 회피할 수 없게끔 강제하는 참사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재난에 직면한 장애인은 시민성을 빼앗긴 채 이름 없는 타자로 취급됐다. 이들이 가진 삶에 대한 열망, 생존을 위한 의견은 집단 수용 방역 정책 앞에 무산되었다. 코호트 격리 앞 약자의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평등한 과정을 원리로 삼는 현대 정치와 공정한 결과를 추구하는 공공 정책의 목적은 온데간데없었다. 권력과 자원의 몫을 지니지 못한 거주시설 장애인들은 목소리를 빼앗겼고, 목숨을 잃었다. 모든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의지조차 차단한 잔혹한 팬데믹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어떤 정책 변화가 필요할까. 과연 한국의 팬데믹 대응은 "부는 상층에 축적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라는 울리히 벡의 통찰로부터 얼마만큼 자유로웠는가. (...) 지난 3년의 시간을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에 집중하여 '성공적인 방역'이라고만 기억하는 일은 위험하다. 그러한 방식의 기억은 지난 3년 동안 각자의 사회적 자리에서 팬데믹을 차별적으로 경험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고, 밑에서부터 차오르는 위험을 가장 먼저 자신의 몸으로 감당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지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한국 사회가 배우고 변화해야 하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 가족을 폐지하라국민국가라는 소우주가 그렇듯 가족은 국수주의와 경쟁의 산실이다. 가족은 마치 분사가 수억 개인 공장처럼 문화적 정체성과 민족 정체성과 이분법적인 젠더 정체성을 가진 "개인"을, 계급을, 인종 의식을 찍어낸다. 이는 무한히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처럼 시장을 위해 공짜 노동을 수행한다. 앤 매클린톡Anne McClintodk은 <제국의 가죽Imperial Leather> 에 가족은 마치 "역사적 진보의 유기적인 요소"처럼, 일반적인 "배제와 위계를 합리화하는 데 반드시 필요해진 통합체 내부의 위계를 보여주는 이미지로서 제국주의를 위해 복무했다"고 쓴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가족은 자본주의의 기본 단위로 기능한다. 마리오 미엘리Mario Mieli는 가족을 "사회적 조직의 세포" 라고 표현한다. 내가 다른 데서 한탄했듯이, 가족의 종말보다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꾸준히 이어진 유토피 아적인 실험들은 완전히 다른 사회적 조직의 실타래를 실제로 만들어내고 있다. 계급 없는 사회를 향한 운동이 가정을 자유롭게 형성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전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경우 규모를 확장시켜 적용할 수 있는 소집단 문화microculture를 비롯해, 누구도 노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음식과 쉴 곳, 돌봄을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같은 것들 말이다. 돌봄, 나눔, 사랑은 현재로서는 혈연관계 속에서만 추구하고, 의지하고, 기대하는 행위들이다. 이는 인위적이고 난해한 방식으로 불충분을 조장하는 비극으로 귀결되고, 유토피아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거의 무용지물로 형해화시켰다. 린다 고든은 "아이들이 누군가 또는 누군가들에게 속하지 않은 사회를 상상하는 건 아주 아주 힘들다. 아이들을 국가의 재산으로 만드는 건 전혀 개선책이 되지 못할 것이다. 국가가 운영하는 대규모 어린이집도 그 대답이 아니다"라고 썼다. 우리에게 대답이 있는가? 자본주의적 축적 바깥에 놓인 관계가 어떤 모습인지 알기는 하는가? 루 코넘은 "만일 지금 그 대답이 없다면 내일까지 조금 강구해보자"고 말한다. 내일까지 조금 찾아보면서 동시에 케이시 윅스의 말처럼 "가족 폐지론이 요구하는 급진적인 구조 변화라는 긴 게임에 복무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우리가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실현하는 데 일조하는 행위자 중 하나라도 그 세상을 완전히 욕망하는 주체가 아닐 것이고, 어쩌면 그렇게 될 수 없으리라는 의미는 아닐지" 곰곰이 들여다보자. 우리가 지금 자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비옥"하거나 "일탈적인" 몸은 현재로서는 난폭할 정도로 퀴어 혐오가 심한 가족주의의 표준이자 전쟁터이며, 이 기나긴 변화의 중심에는 이들이 서야 한다. 롤라 올루페미는 디아스포라적인 흑인 혁명 페미니즘에 대한 찬가<만일을 상상하는 실험Experiments in Imagining Otherwise>에서 "핵가족은 아이들을 재산으로 탈바꿈한다"고 적는다. 이를 절박한 문제로 마음에 새겨두면서 롤라가 말한 "가족과 우리가 사는 건물, 먹는 음식, 우리가 받는 교육의 방향을 전환하고 이런 것들을 공짜로 만들어서 희생이나 후회나 생물학적 충동이나 젠더화된 소외가 불가능한 방식으로 아이를 양육할 가능성"의 문을 열자.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특히 어린 사람들과 이들의 동반자가 지구상에 임의로 그어진 선을 넘도록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서로 찢어져서 수천 명씩 수용하는 닭장 같은 곳에 들어가게 되는 "가족의 분리"에 대해서는 저항하는 게 좋다. 강제적인 가족 재결합도 항상 좋 을 수는 없고 경우에 따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지만, 국경을 사이에 두고 생이별 시키는 기법들은 가족 제도의 심장과도 같다. 국경의 고문은 혈연관계를 짓밟고 심지어는 표적 삼는다. 국민국가의 인정을 받기만 하면 가족이라는 성역은 국가의 존중을 받는다는 환상에 부분적으로 일조하기 위해. 국경 수비대는 가족을 폐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족 제도의 주요 집행자들이다. 그러므로 가족 제도에 맞서는 싸움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가령 "외부인”의 "합법적인" 가족을 찍어 누르고 있는 국가의
-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프로이트가 그랬다죠. 정상적인 애도란 상실한 대상을 잊고 그 대상에 투사한 리비도를 거두어들여 다른 대상에 전이함으로써 애도를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일정시간이 지나도 소멸되지 않고 감정적 애착이 단절되지 않는 애도는 실패한 애도(우울증)라고요. 하지만 제게는 이런 프로이트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이 언제나 더 와닿습니다. 애도에 완성이나 종결은 없고 그것은 평생 지속되는 것이며, 애도는 실패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라는, 애도는 실패해야(그것도 잘 실패해야) 성공하는 것이라고 한 말을요. 프로이트의 애도가 고인의 타자성을 지워버리는 '망각의 애도'라면, 데리다의 애도는 고인의 타자성을 내 안에 기억으로 보존하는 '기억의 애도'일 텐데요. 몇 번의 죽음들을 겪으면서, 저는 데리다의 저 말은 '이해한다'의 영역이 아니라 ''(모르고 싶어도) 알아진다'의 영역에 들어가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슬픔은, 그리고 기억은, 아무리 없애고 싶어도 박혀 있는 것이니까요, 가시처럼. 물론 데리다는 애도의 개념을 '원초적 애도'로 까지 밀고 나가서, 애도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 "인간의 삶에 영속적으로 내재하는 본질적인 조건"이라고 하는데요, 그러면서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까지 선언합니다. 이 말을 제 식대로 속되고 쉬운 말로 바꿔보면 '애도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냐? 애도할 줄 모르는 게 사람이야?'일 텐데, 이 말 역시 '모르고 싶어도 알아진다'의 영역에 들어가는 말인 것 같아요. (부디 정부가 인간이기를.)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열어젖혀지는 이야기들이 계속되는 한, 귀담아 듣고, 똑똑히 기억하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목소리와 행동을 보태는 애도를 다짐합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애도를, "더더욱 진짜 애도를"요.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편지 저편 '혼비씨'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바람 이 불고 눈이 내리고 꽃이 피었다가 졌다. 시간이 사람에게 하는 일이 그사이 어김없이 우리에게도 일어났다. 풍경 사이로 끊임없이 일상의 피로를,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늙음과 죽음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흘려보내는 것 말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태풍을 안고서 잔잔하게 살아가듯 그 모두를 품고도 되도록 명랑한 소식을 전하려 애썼지만 실패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덜 검열하고 덜 재촉했던 건 모니터 저편에서 기다릴 수신인의 존재 덕분이었다. 무엇을 써 보내더라도 사려 깊게 읽어 줄 혼비씨가 있어서였다. 편지 쓰는 사람은,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을 떠올리면 더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다만 이 사람의 안부와 안녕을 묻는 일이야말로 편지의 처음이자 끝이고 전부라는 것을.
-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그와 함께 등장한 자유 시장, 자유 무역 경제학 이데올로기가 힘을 얻으면서 '자유'는 우리가 사회와 경제를 생각하는 방법의 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개념이 되었다.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생각은 모두 좋은 것으로 간주된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자유의 투사 등 모두. 그리고 이것들에 반하는 건 무엇이든 원시적이고 억압적이며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다양한 개념의 자유가 존재하는데, 그 모든 자유가 논란의 여지 없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인 양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2장 오크라 참조). 자유 무역에서 '자유'라는 개념은 국경을 넘어 이루어지는 거래가 해당 정부의 규제(예를 들어 수입 금지 조치)나 세금(예를 들어 관세)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자유 무역 1기(19세기와 20세기초)에 '자유' 무역은 거의 전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나라들, 다시 말해 식민주의와 불평등 조약 등으로 자국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를 박탈당한 나라들에서만 행해졌다. 국가들 사이에 형식적인 평등이 존재하는 상황인 현재의 자유 무역 2기에 서조차 자유 무역은 모든 당사자에게 평등하게 혜택을 주지 못한다. 국제 무역의 규칙이 강한 나라들에 의해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도록 만들어지고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 무역에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이해하고, '자유'라는 휘황찬란한 단어에 눈이 멀지 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 무역처럼 논란의 여지 없이 모든 이에게 좋은 거라고 여겨지는 것을 두고 왜 그토록 많은 논쟁과 갈등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기술적 가능성과 모든 생활 방식 변화를 실현하더라도 지방 정부, 중앙 정부, 국제기구가 지역적, 전국적인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국가 간 협력을 도모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시장을 통한 우대나 장려책, 개인적인 선택 등으로는 충분 하지 않다. 기술 개발의 경우 정부가 적극 개입해서 그린 테크놀로지green technology를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그냥 시장에 맡겨 두면 기후 변화와 싸우고 대처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기술이 개발되지 않고 말 것이다. 이는 민간 기업 들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단기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끊임없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고, 설상가상으로 이 압박은 금융 규제 완화로 더욱 심해지고 있다. (...) 가난한 나라들이 온실가스를 최소한으로 배 출하고 기후 변화로 인한 부작용에 대처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게 하는 공적 조치도 중요하다. 시장은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를 원칙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내버려 두면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원하는 쪽으로 투자가 몰리기 마련이다. 이 말은 가난한 나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술들 농산물과 공산품 생산에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나 기후 변화 적응 기술 등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돈이 투자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기술의 개발과 개발도상국으로의 이전(부유한 국가의 연구자와 기업이 개발했다면)을 보조금을 주거나 심지어 무료로 지원하기 위한 공적 조치가 필요하다. 개발도상국들은 기후 변화를 초래한 장본인이 아닌데도 기후 변화의 여파로 훨씬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모든 조치는 '기후 정의climate justice'를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음식을 먹거나 조리할 때와 마찬가지로 경제학을 '요리'할 때 사용하는 '재료'의 출처와 기원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전문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객관적 사실과 반론의 여지가 없는 추정에 근거한 과학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믿기를 바란다. 그러나 경제학적 분석은 신화(잘못된 믿음) 또는 기술적으로는 맞지만 왜곡된 방법으로 취합된 사실 또는 의문의 여지가 있거나 노골적으로 옳지 않은데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가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질 낮은 '재료'를 사용한 분석이라면 그 결과
- 일잘잘저는 그런 것을 '사소한 성공의 징검다리'라고 부릅니다. 원대한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아직 끓지 않고 단속적으로 부글거리기만 하는 상태로 기약도 없는 세월을 보내야 한다면 지향점에 이르지 못하고 부아가 먼저 끓어오르거나 제풀에 지쳐 놓아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말이죠, 넓은 개울을 한걸음에 건널 수는 없지만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면 그저 작은 걸음을 하나씩 떼는 것만으로도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다음 징검다리가 너무 먼 곳에 놓이지 않도록, 나 자신이 지쳐 쓰러지기 전에 스스로에게 다음 징검다리를 놓아주어야 합니다. (...) 때로는 다음 디딤돌을 만들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느라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제자리걸음도 걸음이니까요. 그렇게 크고 작고 번듯하고 울퉁불퉁한 돌들이 잔뜩 놓인 징검다리를 따라 걸으며, 성공으로 가는 사소한 징검다리를 끊임없이 놓으며, 우리는 개울도 진흙탕도 무사히 건널 겁니다.
- 에이징 솔로작가 캐럴라인 냅이 「명랑한 은둔자」에 쓴 것처럼 "고독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두고 즐길 때 가장 흡족하고 가장 유익"하기 때문이다. 남지원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혼자인 것을 즐기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 나는 이 세계에 소속돼 있어요. 필요한 만큼. 그리고 분리돼 있어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그는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이라서 생존을 위해서는 친밀감이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 수렵 채집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살아남으려면 이웃이 사냥하러 갈 때 나한테 같이 가자고 이야기할 사이가 돼야 하고, 사냥해 온 걸 같이 나눠 먹는 사이가 돼야 해요. 이런 게 전부 미래의 생존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요. 그래서 친밀감이 생존에 필수적인 거죠. 그 친밀감은 상대가 누가 됐든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혼인 관계가 친밀감을 독점하지는 않죠. 결혼은 낭만적 관계라기보다 정서적 친밀감과 성•자녀•경제가 모두 연루된, 삶이라고 하는 비즈니스의 파트너 관계예요. 동업자 같은 관계인데 끝까지 좋게 가기도 쉽지 않아요. 포유류가 젊었을 때 만나서 3~4년 지나면 로맨틱한 감정이 사라지기 마련이니까요. 비혼이 친밀감에 대한 욕망을 충족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건 오해죠. 인간의 관계는 다양합니다. (...) 에이징 솔로가 친밀감을 추구하는 방식은 "식욕이 사람마다 다르듯" 저마다 달랐다. 원가족과 긴밀한 사람도 있고, 친구, 공동체, 스스로 만든 모임 등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구성하며 친밀감을 충족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장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며 살아간다. 솔로도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 다만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인 관계를 원치 않을 뿐이다. (...)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보다 각기 다른 친밀한 관계를 여럿 갖는 것이 삶의 만족도를 더 높여준다는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있다. 슬퍼서 위로가 필요할 때, 행복한 일을 같이 나누고 싶을 때, 불안을 누그러뜨려야 할 때 등등 서로 다른 감정을 나눌 각각의 관계를 여러 개 가진 사람이 그 모든 감정을 아주 가까운 소수의 관계에서만 나누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특정한 감정을 다룰 특정한 관계를 그냥 관계(relationships) 대신 감정 관계(emotionships)라 불렀는데, 그런 감정 관계의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갖는 것이 삶의 질을 더 높여준다고 했다. 책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에서 공동 저자 이지은은 오랫동안 치매 돌봄의 현장을 연구해 온 학자들의 발견을 소개하며 "자아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어떤 것들은 치매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이전의 삶의 흔적들을 가진 몸의 사소한 행동들이 사실은 그 사람의 삶을 이어가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사람의 몸은 그저 손상된 뇌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에는 미국의 인류학자 저넬 테일러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겪으며 깨달은 통찰이 실려 있다. 딸을 알아보지 못해도 친근한 방문객으로 맞이하고 체화된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는 어머니를 대하며 테일러는 "앞뒤가 맞지 않지만 어떻게든 이어지는 어머니와의 대화 속에서 대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의사소통'이 아니라 서로 말을 '주고받는' 제스처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누군가를 하나의 인격 혹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인지능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그 사람에 대해, 그리고 그 사람과 내가 주고받는 제스처들에 대해 내가 기울이는 관심, 무의미해 보이는 그 사람의 몸짓들이 의미를 갖게 하는 관계와 돌봄의 제스처"라고 말한다. 존엄은 그렇게 이어지는 삶에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이전과 같은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졌지만 서로 어긋나는 문답으로라도, 끄덕이는 고갯짓이나 눈빛, 손을 잡고 살짝 힘을 주는 것으로도 '대화'가 가능하다. 아버지의 혼란에 맞추어 반응하고 뜬금없는 '아무 말'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아버지와 함께 웃거나 슬퍼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런 상호작용이 아버지의 현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야말로 엄청난 제도적 변화가 있어야 가
-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이런 일들을 마주할 때마다 피치를 딛는 발에 어쩐지 힘이 들어간다. 이렇게 세상이 일방적으로 나눈 구획들이 선명하게 보일 때면, 우리가 속한 팀과 거기서 하고 있는 취미 활동이 그 영역을 어지럽히고 경계를 흐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이 ‘운동‘이 되는 순간이다. 일상에서 개인이 편견에 맞서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건 결국 편견의 가짓수를 줄여 나가는 싸움 아닐까. ˝여자가 ㅇㅇ를 을 한다고?˝ 라는 문장에서 00에 들어갈 단어의 숫자를 줄이는 것 같은 나와 우리 팀과 수많은 여자 축구팀 동료들은 저기서 ‘축구‘라는 단어 하나를 빼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그저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인데 얼결에 운동이 된 거지만, 또 생각해 보면 모든 운동이 그런 식이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개념을 살짝 빌려 표현한다면, 어쩌다 보니 생긴 자연적인 연루‘가 참여적인 연루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축구가 좋아서 할 뿐인데, 개인적인 불쾌함을 견디지 못해 맞섰을 뿐인데, 체육 대회에 나가지 못해 속상해서 항의했을 뿐인데, 그냥 보이는 대로 엄마를 그려 갔을 뿐인데,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을 뿐인데, 사회가 욕망을 억눌러서 생겨나는 이런 작은 ‘뿐‘들이 모여 운동이 되고 파도처럼 밀려가며 선을 조금씩 지워 갈 것이다.
- 원온원원온원 대화 모델을 이해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진정성입니다. 리더가 원온원 대화를 팀원과 함께하는 이유를 팀원들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일을 잘하고 있는지 관리하거나 감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나의 성장과 성공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할까요? 원온원의 목적은 ‘구성원의 성장’입니다. 즉 구성원이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원온원 대화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가르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코칭 대화를 하며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인정과 칭찬 그리고 피드백을 통해 구성원이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과 개선해야 하는 부분을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하고, 가끔은 스트레스와 마음의 지침을 위로받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저 성과와 과업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 관점에서 그의 성장과 성공을 도와줘야 하는 것이죠.
- 돌봄과 작업 2나는 역설적으로 돌봄을 통해 인간의 돌봄 역량이 몹시 작고 하찮다는 점을 깨달았다.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돌본 이후에야 내 둘레에 명확히 경계선을 그을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존재들의 둘레에 있는 경계선도 명확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드러난 태도는 (내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다른 존재에 대한 외면이 아닌 존중이었다. 오히려 누군가 자신의 역량을 넘어 타인을 도우려고 할 때 그것이 타인의 경계를 침해하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허황되게 착각하는 (자아가 팽창된) 이들이 선의에서 출발해 다른 존재들에 해를 입히고 나아가 스스로에게도 해를 입히는 역동을 인지하게 되기도 했다. 이 책을 읽는 분들 중에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제도, 어떤 관습, 어떤 도덕, 어떤 강요 때문에 자신의 것이 아닌 돌봄을 짊어지게 된 분들이 있다면 과감히 떨쳐내기를 바란다. > 결혼을 한 것도, 소설을 쓰기로 한 것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도 모두 내 선택이었다. 모든 것은 내 선택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책임도 내 몫인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왕이면 내 선택이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기도 하다. 동시에 그 마음이, 내가 가지 않은 길을 폄하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다.(김유담) 한편 나는 우리가 인간성이 그 어느 때보다 고양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출산이나 양육을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고민하고 심사숙고해서 결정 할 수 있는 물적, 정치적, 심리적 토대를 갖추었다는 뜻이다. 여성들이 자기 몸과 관련해 갖는 선택권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물론 이 변화를 위해 무수한 희생과 저항이 있었으며 변화의 속도가 더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온 사회가 저출생이 큰 문제라고 떠들어대지만 사실 우리는 그 재앙의 긍정적인 뒷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얼마 전까지 여성들이 원하지 않는 임신과 출산, 위험하고 모욕적인 피임과 낙태, 정당한 대가와 존중 없는 돌봄에 얼마나 많이내 몰려왔는지 잠시 동안만 멈춰 서서 (우리 부모나 조부모의 삶을 떠올리며) 생각해보면, 이런 숙고야말로 인류의 정신이 한 단계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징후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몸과 재생산에 대해 더 고민하고, 더 자발적이고 책임감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만 선택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부연해야 할 필요는 있겠다. 우리가 돌봄에서 배운 '선택'의 의미는 우리가 학교와 사회에서 흔히 배워왔던 협소한 '선택'의 의미(무한한 시장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상품을 선택해 가장 합리적인 가격에 쇼핑하는 행위)와 다르다. 이 책에서 쓰인 맥락을 종합해보면, 선택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제약을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 해내는 행위이다. 선택은 가성비나 유불리를 따지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과 결심, 그리고 믿음의 행위이다. 자연스럽게 선택에는 그에 따르는 결과를 '수용'한다는 뜻이 포함된다. 선택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선택 이후의 수용 과정에서 완결된다.
- 위민 토킹마리케는 그렇다면 스스로 불행한 처지에 빠져들면 안 된다고, 용서와 영생 사이에서 억지로 선택하 는 처지에 놓여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 처지가 뭔데?" 오나 프리센이 물었다. "여기 남아서 싸우려는 거지. 그래봤자 우리는 남자들에게 질 것이고, 그러면 반항한 죄, 평화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깬 죄를 짓게 되고 결국 전보다 더 무력한 존재가 돼서 남자들에게 끝없이 복종하게 될 거야. 게다가 우리는 어쨌든 남자들을 용서해야만 해. 신께 용서를 구하고 천국에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으려면 말이야." 마리케가 말했다. "하지만 억지로 한 용서가 진정한 용서일까?" 오나 프리센이 물었다. 말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건 용서하지 않는 것보 다 더 큰 죄를 짓는 것 아닌가? 용서도 신만이 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있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가한 폭력에 대한 용서, 너무 잔인해서 부모들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신만이 지혜를 발휘해 용서할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그런 범주의 용서. “우리는 목소리 없는 여자들이야.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우리가 지내는 곳에서도 붕 뜬 존재이고, 심지어 우리가 사는 나라 말도 하지 못해. 우리는 고국이 없는 메노파 신자들이야. 우리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고, 몰로치나의 동물들조차 제 보금자리에서 우리 여자들보다는 안전하게 살고 있어. 우리 여자들이 가진 건 우리가 꾸는 꿈뿐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는 몽상가들이야.” “우리 모두 피해자야.” 마리케가 말했다.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해. 그 반응 중 어느 하나가 다른 반응보다 덜 적절하다고는 할 수 없어.” 살로메가 말했다. 그러자 살로메의 화가 폭발했다.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미프는 잠이 깼고 율리우스는 가죽을 씹던 걸 멈췄다. "우리는 타락하고 잔인한 남 자들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는 행위에 대해 신 의 뜻을 따르는 남자들의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어. 바로 그 나쁜 놈들이 신의 뜻을 따르는 남자들이기 도 하잖아. 만약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라면 우리를 직접 용서하실 거야. 만약 하느님이 복수심에 불타는 분이라면, 그래서 우리를 자신의 모습으로 만들어놓으신 거야. 만약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몰로치나 여자들과 소녀들을 보호하지 않으셨는데? 우리의 현명한 주교인 피터스 말대로라면 하느님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아이들을 내게 오게 하고, 그들이 내게 오는 걸 방해하지 마라.'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아이들이 당한 폭행을 이 대목에 반하는 방해로 여겨야 하는 것 아니야?
- 물건이 아니다> 더 나아가 동물 학대 행위를 방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으로나 생태적으로 가장 미약한 존 재에 대한 폭력적이고 잔인한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동물 학대 행위는 사회에서 가장 지위가 낮은 존재에 대한 혐오 내지 차별적 행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행동을 용인하거나 그 위법성을 낮게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 밖의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내지 차별적 행동, 폭력적 행동까지도 간과하거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동물에 대 한 학대를 막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생명을 가지고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에 대한 존중 이라는 관점과 연결되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단순히 동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존중과 보호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에 대한 보호와 학대 방지는 단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에서 가지고 있는 도덕적 의식과 의무감에서 필요한 것을 넘어서서 전체 사회 구성원의 존중과 배려 및 보호라는 관점에서 인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울산지방법원 2020. 5. 8. 선고 2019고단3906 판결, 유정우 판사 (진도견 학대에 대한 검찰 구형보다 더 엄중한 징역형 선고) 물론 동물 학대에 대한 모든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조금씩 그 심각성에 준하는 판결이 선고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판결은 ‘동물권 감수성이 뛰어난’ 일부 재판부에 의해서만 내려지고 있을 뿐이다. (…) 양형 기준을 확립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은 법에 따라 합리적인 처벌을 내리는 것이다. 동물 학대에 대한 처벌은(현재의 법정형을 고려하여) 범죄 억제 효과를 일으킬 만큼 강력해야 하며, 피해 동물의 수, 동물이 입은 고통 등 피해의 정도, 범행의 수법과 동기, 주도성・잔인성・반복성・보복성・계획성 여부, 동종 범죄 전력 유무, 피해 회복 여부 등도 선고에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 평일도 인생이니까스물다섯에 함께 살았던 룸메이트가 신세 한탄이나 하며 매일 글쓰기로부터 도망치던 내 책상 앞에 붙여 주었던 쪽지가 있다. "작가란 오늘 아침 글을 쓴 사람이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세계였다. 단지 오늘 아침 일어나 글을 쓰면 되므로. 물론 늦된 내가 그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달은 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의 일이었지만. 그리하여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최고의 작가가 되는 것은 어렵더라도, 매일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동네 수영장에서 제일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되긴 힘들겠지만, 일주일에 세 번 수영 수업을 빠지지 않고 가는 것, 그래서 자유형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 세계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오늘의 일을 마치고 만족감 속에 맥주 한잔을 마실 수 있었다. 대단한 성취를 좇거나 끊임 없이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나와 약속을 하고 조용히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되다'와 '하다'를 혼동하지 않으면 70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였다. 그러니 좋아하는 일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건 성공 여부가 아닐지 모른다. 되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하고 싶어서인가 하는 것.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은 되려는 욕심이지, 좋아하는 일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내게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다.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이미 읽은 책을 한 번 더 읽는 시간. 여러 곳에 가는 것보다 한 장소에 제대로 머무르는 일. 거기 좋았잖아, 또 가 보자,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좋다. 다시 가서 다시 좋아하는 일이 좋다. 읽었던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며 다른 곳에 밑줄을 긋고, 이전엔 발견하지 못했던 문장을 발견하는 일이 좋다. 그런 독서는 꼭 천천히 하는 식사 같다. 한 끼를 때우기 위해 밥을 물에 말아 급하게 넘기는 게 아니라, 한 숟갈을 제대로 뜨고 천천히 꼭꼭 씹어 삼키는 식사. 그럴 때에야 비로소 이 책에서 느낀 것들을 내 것으로 소화시키는 기분이 든다. 그동안 내가 효율이라고 믿어 온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디에 갈 때마다 지도 앱을 켜서 최단 거리, 최소 시간을 재어 보듯 인생을 살아야 하는 걸까? 경험에도 효율의 논리를 적용할 수 있을까? 한 권을 빠르게 읽어 갖게 된 여분의 시간으로 다음 책을 읽으면 만족할까? 묻다 보면 답은 늘 같은 곳을 가리킨다. 시간은, 경험은, 결코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 우리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닌데 마치 전부인 것처럼 오해 받고 있다고 속상해하면서, 상대에 대해서는 같은 오해를 반복하니. 나를 규정하듯 하는 말에는 나에 대해 뭘 아느냐고 불쾌해하면서 다른 이에게는 그런 말을 서슴지 않으니. (...) 누군가를 어떤 종류의 사람에 쉽게 분류해 넣을 때마다, "그 사람 원래 그렇잖아" 하고 누군가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싶어질 때마다 떠올린다. 모두가 '척'하며 살고 있을 어떤 부분에 대해. 스무 살 시절, 우리가 바라본 서로가 과연 서로였을까. 그게 서른이 넘은 지금이라고 과연 다를까 생 각한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이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척, 이대로도 괜찮은 척 옛날 얘기나 나눌 때마다 오늘 우리가 나눈 숱한 대화들과 그 대화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채 하지 못한 얘 기들이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한다. 언젠가 친구가 말해 준 '좋아 보이기만 하는 인생은 있어도 좋기만 한 인생은 없다'는 말을 떠올린다. 나는 그때 충분히 혼자였다. 충분히 외로웠고, 충분히 자유로웠다. 그래서 그 시간은 결국 의미가 있었던 것 아닐까. 충분히 외로웠기 때문에 가끔 함께하는 시간들, 사람들이 고마웠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보내는 시간만 귀하게 써야 하는 게 아니라, 나하고 있는 시간도 귀하게 써야 한다는 결 배웠다. 외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웠으므로 '나의 이 외로움을 소중히 여겨야지' 생각했다. 사람은 그렇게 혼자와 함께 사이를 건강하게 가로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배웠다. 너무 많은 것들로 연결된 세상에 살면서 나와 있을 시간을 점점
- 우주에서 기다릴게💬 사람들이 이소연에게 먹튀했다고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거 아직도 이해가 안 됐음. 책을 읽어도 (그건 사람들의 반응이랑 상관 없는 이 사람의 이야기이기때문에) 더 이해 안 됨. 그러면 이소연이 뭘 더 할 수 있었을까? 우주여행이란 대체 뭘까? 결국 아직까지는, 혹은 이소연이 우주에 갈 때까지는 국가적인 이익과 선전을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제대로된 연구나 후속적인 지원이 없었고 사람들이 이소연에게 바라는 것도 그냥 국가 마스코트였는데 이소연도 인간인데 그걸 평생 할 수는 없잖음..
- 일의 철학이렇듯 돈과 의미 문제에는 정답도 없고 오답도 없다.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일관성 있는 삶을 사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당신은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방향을 점검하고 나만의 나침반을 만들어라. 누구나 의미 있는 직무와 중요한 일을 맡길 원한다. 호기심을 가지고 더 훌륭하게 직무를 처리할 수 있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라. 회의적인 혼잣말을 긍정적인 스토리로 바꾸고 스토리를 전달하라. 내재적 동기부여 요인을 적절히 이용해 자신을 개발함으로써,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직원으로 거듭나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라. 자기 분야에서 대가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자신의 직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집중하라. 사람은 누구나 오래된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 과도기를 겪는다. 이때 중대한 심리적 재정비와 재구성이 일어난다. 이것이 변환 과정의 핵심이다. 오래된 현실과 정체성을 보내고, 새로운 현실과 정체성을 기다리는 시기인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프로세스를 창조하고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배운다. 유동적인 상태에 있기에 혼란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중립지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온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 홈 스위트 홈누군가에 관한 이야기에서 누군가를 지우고 이야기만을 남겨 유용한 만족감을 얻어내는 방식이, 누군가의 목소리에서 누군가를 지우고 소리만을 남겨 소음으로 치부해버리는 방식만큼이나 사람에게서 사람을 지우려는 기꺼운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있는 힘껏 소리를 내는 일은 그 의지들로 가득한 세계의 복판에서 어떻게 방법을, 의미를 찾아갈 수 있을까. 듣지 않고 보지 않으려는 무관함의 감각이 그려내는 무수한 수평선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닿을 곳 없이 길을 잃기만 한다면, 계속해서 여기에 사람이 있다고 사람의 소리를 내는 일은 과연 어떻게, 어떤 의미를 보존하며 계속되어갈 수 있는 것일까. '나'의 순서가 찾아와 카드를 뒤집을 때마다 타인이 내는 종소리에 눌려 '나'의 목숨이 순장되는 일이 “끊임없이 죽어도 죽지 못하고 살아나는”(<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게임처럼 반복되는 가운데, 이소호의 시는 카드를 뒤집는 일보다 앞서 결정되어 있는 게임의 룰을 따르듯 결국 “일렁일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계속 끊임없이 돌을 하나, 돌을 둘” (<Instant Poem>) 던지는 일에 관해 적는다. 그 계속되는 쓰기의 돌 던지기에서 그는 독자가 윤리적 당위가 아니라 외려 그것이 덜어 내어진 가벼운 문장들을 마주하기를, 그 텅 빔을 감각하기를 기대한다. > 이 시에 등장하는 문장, 연과 행과 단어는 '불펌'을 위해 태어난, 기시감이 드는, 그럴듯하고 쓸모없는 오브제들입니다. 아무렇게나 원하는 대로 잘라도 되고, 퍼가서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인테리어에 유용하게 써보세요. 당신의 생각에 감성을 조금 더할 수 있습니다.
- 시스템 에러새로운 기술이 사회에 유익을 가져다주도록 이끄는 것은 민주주의의 역할이다. 예측하기 힘들고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드러나는 부정적 외부성을 억제하는 규제 체계를 만드는 것도 민주주의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렇게 민주주의가 제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의 과제는 이 책에서 탐구한 사안에 대한 정책을 발전시키는 데 한정되지 않는다. 정부를 개혁해서 새로운 기술이 미래에 제기할 문제를 보다 잘 다룰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우리가 할 일이다. 여기에는 정책 결정 절차의 리부팅이 필요하다. 기술자들을 끌어들이고, 정책 결정권자는 물론 시민들에게도 기술에 대해 교육시키고, 규제에 대한 스마트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접근법을 재고해야 하는 것이다. (…) 하지만 기술자들의 최적화 사고방식은 그들이 정부에 들어왔을 때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들의 식견은 위태로운 것이 무엇이고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시각은 정책 입안자들이 결국은 반드시 균형을 유지해야 할 과정에 들어가는 하나의 인풋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의 두 번째 우선 사항은 정치인들이 기술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돈을 주고 그들에게 특정한 견해를 제시하게 하는 로비스트에 좌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우리에게는 규제에 대한 신선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기술 부문의 혁신은 파괴적이며 예측 불가능하다. 규제의 구조는 융통성이 없고 반응적이다 규제 개혁은 기술의 변화보다 몇 년씩 뒤처지는 경우가 많다. 의도하지 않았거나 유해한 결과의 증거가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누적되었을 때에야 겨우 따라잡기에 나서는 식이다. 규제의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기술기업들은 결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실험, 시험, 규모 확장의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규제에 대한 보다 반응적인 접근법, 장기적 전략에 정착하기 전에 새로운 정책 체계를 시도하고 그 효과를 알아볼 수 있는 접근법이다. (...) 정책 결정 절차를 재부팅하더라도 시민이 정치가들에게 규제 없는 기술의 악영향에 대한 책임을 묻 지 않는다면, 기술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민주적 제도들을 뒷전에 둘 것이다. 페이스북이 개인정보를 수집했다는 이유로 마크 저커버그를 비난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일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 그런 식으로 규칙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 민주주의의 힘은 우리 대부분이 피하고자 하는 결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데 있다. 수도꼭지에 서 마실 수 있는 물이 흘러나오게 해주고, 음식을 먹고 병에 걸리는 일이 없게 해주고, 도로에서 적절한 안전 의식을 갖고 차를 운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정부 규제의 덕분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자신의 자리가 걸려 있을 때에나 나설 것이다. 지금의 딜레마에서는 해커와 자본가의 결합이 중심 이야기이지만, 민주주의 제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개입하는 데 실패한 것 역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우리가 선출한 대표들이 지금 가장 중요한 기술적 문제에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하며,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투표소에서 그들을 벌할 준비를 해야 한다.
-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우리는 우리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내고, 우리의 결정으로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바로 그렇기에 미래에 대해 제한된 진술밖에 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일에 더 많이 관여하고 더 큰 영향을 끼칠수록 그 결과는 더욱더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을 임의로 계획할 수 없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대가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뇌는 미래를 내다보도록 만들어지지 않고, 프랑스 작가 폴 발레리의 말처럼 “미래를 만들어 나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과대평가 하는 반면 놀라운 것을 유익하게 활용하는 우리의 재능은 과소평가한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결국 인간을 다른 생물과 구별 짓는 것은 불확실한 환경에서 최상의 것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변화하는 세계에 직면하여 자신감을 가질 이유가 있다. 그리고 태연자약할 수 있다. 미지의 것을 다루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도구는 바로 집중력이다. 변화를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인지할수록 우리는 위험을 더 잘 평가하고 기회를 더 잘 인식할 수 있다. 일방적으로 계획에만 집중하면 그렇게 하지 못한 다. 계획이 너무 많은 집중력을 잡아먹기 때문 이다. 존 레논은 언젠가 삶은 결국 “우리가 다른 계획을 따르는 동안에 발생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우연은 우리에게 머릿속의 사상누각을 떠나 현실에 발을 딛도록 인도한다. 그러므로 예기치 않은 일에 더 많은 여지를 허용하는 것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모험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인식을 더 날카롭게 하고 시간에 대해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우연은 우리에게 신중함을 가르쳐준다. 이것이 바로 우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우연은 현재에 민감하게 만든다. 현재야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아니던가? 우연에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생동감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 라이어스정부의 오류 가능성을 맥락 이나 그 효과와 관계없이 거짓말과 허위사실을 허용하는 무적의 카드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질문해야 할 것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적절한 기준을 만들 수 있는지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해로운 허위사실의 유형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규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가 오류를 범할 위험을 용인할 수 있는 정도로 줄이는 안전 장치를 만들 수 있는지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일반원칙을 지지한다. 허위 사실이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위험이 있고, 표현의 자유를 좀 더 보장하면서도 그런 해악을 막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점을 정부가 증명할 수 없다면, 그 허위사실은 헌법적 보호를 받는다. 나는 또한 거짓말에 관해서는 의도성 없는 허위사실에 대해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것보다 해악의 입증이 약한 경우에도 정부가 규제를 부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개념을 구체적인 사례에 어떻게 적용할지는 합리적인 사람들 간에도 의견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앞의 일반원칙, 그리고 이에 따른 주장은 허위 진술에 대한 규제는 진실한 발언을 위축시킬 수 있으며, 아마도 그럴 것이다. 허위 진술에서도 배울 수 있다. 거짓을 접하며 우리의 이해를 더 깊게 할 수 있다. 남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진실이 아닌 경우에 도 말이다. 허위 진술을 금지하면 그것을 단순히 지하로 내몰아 허위 진술의 힘과 매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 반론이 금지보다 훨씬 더 낫고, 심지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공통의 사실적 현실 자체이며, 이것이야말로 실로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이 현실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가로막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 암컷들‘자연의 얼굴 전체를 덮는 이론의 가면이 있다……우리 대부분은 바깥 세계의 언어를 읽으면서 자신의 언어로 번역해서 읽는 영구적인 습관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 가면을 벗기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은 그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깊이 각인된 개인적 이해의 틀 안에서 세상을 문화적으로 해석하도록 적응되었다. 이런 확실성의 안전한 그물 밖으로 나오려면 먼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의 깜냥이 부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앞으로 계속 나아갈 만큼 용감해져야 한다. (…) 그럼에도 내게는 희망이 있다. 이 책의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은 희망의 경험이었다. 더는 나 자신이 비참한 부적합자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암컷은 수동적이거나 수줍어야 할 운명이 아니고 수컷의 지배를 기다리는 진화적 뒷생각도 아니며 신체적으로 열악한 조건으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다. (…) 실제로 생물학적 성은 하나의 스펙트럼상에 존재하며 모든 성은 기본 적으로 같은 유전자, 같은 호르몬, 같은 뇌의 산물임을 발견한 것이야말로 크나큰 깨달음이었다. 그로 인해 나 자신의 문화적 편견을 인지하고 성, 성 정체성, 성적 행동, 섹슈얼리티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지금까지 유지된 이성애 중심의 가정을 떨쳐버리는 관점의 변화를 강요했다. 생각의 자유는 유지하기 어렵지만 여성이 되는 것의 경험이 가지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인해 나는 힘을 얻었다. 이 지적 여행을 따라 나는 다양한 성과 젠더의 젊은 과학자들을 만났는데 그 또한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이 새로운 세대는 성에 대한 구태의연한 이분법적 가정에 도전하는 데 좀 더 익숙해 보였다. 그들은 마침내 이론의 마스크를 영원히 벗겨낼 다양성과 투명한 관행을 소리 높여 표현하고 있다. 물론 하룻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미국 작가이자 학자인 안네 파우스토 스털링이 말한 것처럼 ‘생물학은 수단만 다를 뿐인 정치’다. 오랜 성차별주의자 백인 남성에 의해 고안된 이론은 나이든 성차별주의적 백인 남성 정치가에게 가장 잘 맞는다. 생물학적 진실을 밝히는 싸움은 우리가 지구와 그 위에 사는 모든 것의 미래를 보호하기 위해 심할 수 있는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어나갈 때 반드시 필요하다.
- 스마트 브레비티1871년,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자네에게 짧은 편지를 쓸 시간이 없어 긴 편지를 보낸다네.”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있는 스타트업,악시오스Axios의 뉴스룸 벽에는 점심 식사 때 튄 기름이 묻 은 종이가 걸려 있다. 이렇게 쓰여 있다. “간결함은 자신감이다. 장황함은 두려움이다. *Brevity is confidence. Length is fear.*“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편없이 쓰고 모호하게 사고한다. 우리 모두는 그런 경험이 있다. 괜찮은 아이디어, 예를 들어 더 나은 전략이나 사람들을 엮을 방법, 획기적인 기획을 생각해 낸다. 하지만 그걸 글로 쓰기 시작하면... 마치 진흙 덩어리처럼 보인다. 그러다 다른 누군가가 똑같은 내용을 아주 훌륭하게 이 야기하고, 여러분은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스마트 브레비티를 끔찍한 커뮤니케이션 습관이나 본능을 막는 장치라고 생각하라. 이것은 우리의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해서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마이크와 짐은 폴리티코에서 승승장구하며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1,600단어 칼럼을 썼다. 그것은 “이 동네(워싱턴 DC)”에서 성배와도 같은 것이었다. 칼럼은 케이블 방송과 소셜 미디어를 달구는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어떤 글은 거의 백만 명의 사람들이 “읽었다”. 우리는 기분이 좋았고, 매우 만족했다. 데이터에 의해 우리의 자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 약 80%의 사람들이 첫 페이지에서 읽기를 멈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겼던 내용 중 기껏해야 90단어를 소비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이 정치와 미디어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들고 있는 이야기의 전부였다. 우리는 페이스북 같은 곳들에 전화를 걸어 그들의 데이터 역시 같은지 알아보았다. 그렇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 즉 일반 독자, 정치인, CEO 모두가 헤드라인과 몇 단락의 글만 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레이드 목사는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교훈을 멋지게 보여 줬다. 짧고, 스마트하고, 단순하고, 직설적이어야 모든 것을 뚫고 지속될 수 있다. 2021년 10월에 신도들을 위해 남긴 메모에서 그는 윌리엄 스트렁크Wiliam stunk의 <글쓰기의 요소Eements of Style>(1918)를 인용했다. “강력한 글은 간결하다. 문장에 불필요한 단어가 있어서는 안 되고, 단락에도 불필요한 문장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그림에 불필요한 선이 있거나 기계에 불필요한 부품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유다.” 마크 트웨인의 유명한 말에 따르면, “거의 정확한 단어와 정확한 단어의 차이는 반딧불이와 번갯불의 차이와 같다”. <이메일을 스마트 브레비티 하라> 1. 잘못 쓴 이메일은 제목부터 불친절하다. 우리는 짧고 직접적이며 긴급한 이메일을 원한다. 2. 우리는 첫 줄에서 새로운 사실이나 용건을 알고자 한다. 3. 받는 사람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맥락을 제공하라. 주제를 뒷받침하고 데이터를 제시하는 틀로 활용할 수 있다. 4. 불릿을 이용하라. 대강 읽는 사람과 정독하는 사람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지점과 이를 뒷받침하는 생각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5. 볼드체로 강조하고 싶은 수치나 이름을 처리하라. 이 역시 대강 읽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최고의 방법이다. 6. 깔끔하고 직관적인 시각 자료는 요점을 강조하거나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다. 가장 중요한 하나의 포인트나 교훈을 선명히 표현하라. (…)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신이 한 문장으로 요점을 알 수 없다면 청중도 모를 거라는 사실이다. 📝 스마트 브레비티 요약 글쓰기에서 스마트 브레비티는 네 가지의 핵심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주제와 상관없이 모든 과정을 스마트폰의 한 화면 안에 담길 수 있도록 수행해 보라. 1. 힘 있는 “도발” - 트위터, 헤드라인, 이메일 제목 등 무엇을 쓰고 있든 사람들의 관심을 틴더나 틱톡에서 끌어오기 위해선 여섯 개를 넘지 않는 강력한 단어들이 필요하다. 1. 강력한 첫 문장, “리드Lede” - 첫 문장은 가장 기억에
- 아무튼, 정리이제는 일과 틈틈이 시간을 쥐어짜 효율성을 곱절로 올리려던 나 자신이 딴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때의 나와 멀어졌다. 그 기준에 따르자면 난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지 꽤 됐다. 더 이상 외국어 공부도 하지 않는다. 점심시간에도, 주말에도 짬을 내어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대개 그냥 통으로 쉬는 쪽을 택한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조금 관대해졌다. 왜 시간을 낭비하느냐고 자책하거나 더 시간을 쪼개 쓰는 방법을 찾는 대신 조용히 되뇐다, 나는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다고. 나는 아침에 일어났고, 아이들을 깨웠고, 밥을 했고, 도시락을 쌌고, 출근을 했다. 출근길에는 호러 팟캐스트를 들었다. (…) 5분, 10분을 여기저기서 효율적으로 잘라내 완벽한 10에 가까이 가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목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아니다. 무언가 하기 위해 떼어내는 5분은 공짜가 아니다. 내 의지력에서 깎아 가져오는 일이다. 그 5분으로 인해 나는 저녁에 조금 더 피곤할 것이고, 아이들을 향한 인내심도 조금 더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점심을 먹고 남은 자투리 시간에 요가 매트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볼 것이다. 책상에 쌓인 서류는 나중에 때가 되면 한꺼번에 정리하겠다. 나의 작은 세상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한번 흐른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나는 내가 한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고 살아야 한다. 주변인들의 시선 역시 내가 어쩔 수 없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은 노력으로 어찌어찌 메꾼다 해도, 노력할 수 있는 역량조차 내가 타고난 것에 크게 좌우되는 느낌이다. 그렇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이 삶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공간뿐. 어질러진 것들을 줍고 한곳에 담아 빈 공간을 약간 넓히고, 같은 것들끼리 분류하고 모으고 정리하여 아주 조금이나마 질서를 찾아야 엔트로피에 쓸려 가지 않을 수 있다. 물론 내 공간을 방치하는 것 역시도 선택이다. 내 마음대로 흩트리고 부수고 망칠 수도 있다. 아무것도 정리하지 않고 몇 년 정도 지난다면 청소를 하든 별 상관 없어지는 상태가 될 것이다. 우주 안의 모든 것들이 무질서로 향한다.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나는 점점 그것에 쓸려 간다. '내 마음대로' 방치한다고 믿고 '내 의지대로' 망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저 자연적 엔트로피에 쓸려갈 뿐이다. 망치를 들고 때려부수는 것보다,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책들이라도 정리하는 것이 훨씬 더 엔트로피에 반항적이다. 우주 전체로 따지자면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육체 하나에 깃들어 있는 나와 그런 내가 살아가는 공간은 크게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나까지 스스로 의미가 없다고 동조할 필요는 없다. 내가 있으니 이 육체가 의미가 있고,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닿아야 하는 공간이므 로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그런 공간을 지배하고 엔트로피에 대항해 싸우는 방법은... 책상 정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저 좋은 밤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마세요, / 노년은 날이 저물수록 불타고 포효해야 하니, /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고, 분노하세요. // 지혜로운 자들은 마지막엔 어둠이 당연함을 알게 되어도, / 자기만의 언어로 번개 한번 못 찍어봤기에 / 저 좋은 밤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않아요. // (...) 꺼져가는 빛에 맞서 분노하고, 분노하세요. — 딜런 토머스, 「저 좋은 밤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마세요」 어차피 우리 모두 무(無)로 돌아가는 삶에서 고작 책상 하나 정리하는 일이란 아무 의미 없는 파닥거림으로 폄하될지 몰라도 나라는 개체가 있는 시공간에서 정리는 절대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무질서로 내달리는 세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우주에서 내 작은 공간은 내가 사수한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잊혀짐에 대항해 싸운다. 얌전히 가진 말자.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자. 반항하자. 엔트로피에 쓸려가지 않기 위하여.
- 콜카타의 세 사람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부조리극처럼 흘러가는데 그럼에도 마지막에 남는 게 쓴 맛보다는 참담함에 가까워서 좋았다. 지반의 삶에서 모든 진실도, 잠깐 마주쳤던 체육 선생의 선의와 러블리의 용기도 얼마나 작았으며 이 거대한 계급과 정치의 톱니바퀴에 쉽게 갈리는지. 그리고 이런 명료한 문체는 오랜만에 읽어서 그것도 좋았음.
- 차이에서 배워라제목 번역이 너무 납득불가한데(개즈비가 한 말이긴 하지만 이 책이 하려던 얘기의 중심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 원제는 Ten Steps to Nanette이고 나네트가 나오기까지 본인 인생의 흐름을 엮은 자서전(이라고 하기엔 너무 잘 쓴 글로 느껴짐 보통 자서전을 생각할 때는 그렇게까지 잘 쓴 글을 떠올리지 않기에). 그 안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서 동성애 혐오가 가장 심했던 테즈메이니아 시골이 있고, 자폐가 있고, 몸이 있고, 강간이 있고, 당연히 예술사와 코미디가 있다. 특이하게도 에필로그와 프롤로그가 뒤집힌 순서의 구성을 따라서 그 모든 것들을 훑고 다시 원점 같은 나네트로, 부서진 스스로를 다시 지어올린 여성보다 더 강한 존재는 없다는 그 문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예술은 복원이다. 예술은 삶이 가한 고통과 상처를 수선해주고,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해체되었던 무언가를 온전한 것으로 만들어낸다. ㅡ루이즈 부르주아 나에게는 풍부한 내면세계가 있었고, 할 수 있을 때마다 나는 내면을 헤엄치고 다녔다. 분명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풍부한 내면세계가 있었을 테지만 나의 세계와 그들의 세계를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도 다른 애들처럼 웃고 인사하고 해야 할 건 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나만 나머지 세계와 동떨어진 이상한 아이처럼 느껴졌다. 그때 내가 보지 않은 건(보지 못한 건) 다른 사람들은 서로를 잇는 통로를 직감적으로 찾아낸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책을 만났다. 현대미술에 관한 손바닥만 한 책이었다. 그때도 책을 신중히 고르는 척하면서 책장을 훑어보다가 표지가 마음에 드는 아무 책이나 꺼냈다. 당시에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지금은 아주 당당하게 인정하려고 한다. 나는 표지로 책을 판단한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사진이나 그림이 들어간 책이 좋다. 그때 난이 작은 미술사 책이 나에게 불러일으킨 기묘한 감동과 강렬한 인상이 이상했다. 작품 해설에 들어 있는 용어들은 당연히 이해 불가였다. '병치’라든가 '곡선적'이라든가 '강요된 관점’ 등이 뭇은 뜻인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책을 넘기는 순간부터 완전히 몰입했다. 그 세계 안에서 자아 감각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부분적으로 호기심이 커진 이유는 이 책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헐벗은 여성 신체 때문이라 확신하지만 의식적인 수준에서 나는 그림뿐만 아니라 글에도 매혹되었다고 맹세할 수 있다. (…) 나에게 직접 말을 건 것은 예술 자체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지와 글의 관계에 매료된 것 같았다. (…) 나에게도 사람과 세상을 열심히 관찰하여 나름대로의 맥락을 추론해내는 능력이 있기는 했다. 그래도 잃어버린 퍼즐 한조각이 있는 것 같았고, 그걸 꼭 찾고 싶었다. 책은 만물박사 아닌가. 잃어버린 조각이 책 어딘가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부터 도서관에 몇시간씩 눌러앉아 필요한 지식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더는 형광등 불빛도 거슬리지 않았다. 친구 문제도, 내 외모도 고민하지 않았으며 내가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고민까지 멈추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척하라는 말이 있지만 난 책벌레인 척하다가 진짜 책벌레가 되고 말았다. 천국에 온 줄 알았다. 1993년 이후로 경험한, 환희와 가장 근접한 감정이었다. 당시에는 아무데서나 과격한 동성애 혐오 표현이 후렴구처럼 러 나왔다. 나는 이 말들을 수집해서 기억하고 있다가 다시 떠올리는 걸 좋아했다. 물론 그것들을 소리 내어 말해본 적은 없었다. 그냥 머릿속으로 굴려보면서 사람들이 갖는 중오의 분쟁을 궁금해하고 그들을 감싸고 있는 공포의 실마리를 풀어보려고 했다. 마치 매혹되기라도 한 양 자주 생각했고, 나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니 단순히 호기심이라고 믿었다. 그 용어들을 몇년 동안 곰곰이 생각하고 곱씹고 난 뒤에야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무관한 것 같은 말들을 수집했던 이유가 그것들이 나에 관련된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은 그보다 몇년이 더 흘러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아마 이해는 하지 못했을지언정 그때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왜 그렇게 의사를 신뢰하지 않고 아프다는 말에 의심부터 하거나 화를 냈을까? 이
- 일의 격내가 깨달은 비교적 여유롭게 일하는 세 가지 비결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것은 다 동일하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에 에너지를 쏟고 그렇지 않은 일은 초스피드로 하거나 대충 하거나 타인에게 맡기거나(떠맡기는 게 아니라 대가를 주거나 역할로 맡김) 아예 하지 않는다. 리더라면 설계는 자신이 하고 구체화는 맡기는 방식을 쓸 수 있다. 2. 구성원들의 역량을 높인다. 내가 편할 수 있는 방법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실력을 높이는 것이다. 계속 잔소리하고 가르치고 코칭하고 자극을 주고 교육받게 하고 배우게 하여 역량을 키우게 한다. 3. 내가 할 일은 내가 빠르게 하고 남의 일을 대신 고민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할 일과 산하 구성원이 할 일을 명확히 한다. 정치적인 구성원들은 자기가 할 일을 위나 옆이나 아래에 미루곤 한다. 이에 나는 산하 임원에게 "그건 당신이 고민하고 답할 문제인데 왜 제게 떠넘기죠?"라는 말로 책임을 명확히 준다. 단, 그가 그것을 이루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계획은 준비한다. 바쁘지 않으면서도 성과를 내는 비결에 대해 자주 질문을 받는다. 바쁘지 않으면서 성과를 내는 비결은 이미 다 나와있다. '파레토의 법칙'을 실행하면 된다. 우리 일을 살펴보면 20의 핵심적인 일과 80의 비핵심적인 일이 있다. 앞의 20의 특징은 잘하면 비선형적인 성과를 내는 일이다. 핵심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거나 고객을 발굴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만드는 일, 새로운 고객 가치를 만드는 일, 아이디어를 내고 사업화 하는 일, 재테크 등일 것이다. 반면 뒤의 80은 못하면 욕을 먹지만 잘해야 본전인 일이 많다. 대개 사람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운영상 일들이다. 그러면 어떻게 일할 것인가? 1. 위의 20은 열심히 한다. 에너지를 쏟는다. 시간을 더 투입한다. 2. 위의 80은 무작정 열심히 하지 말고 '어떻게 편하게 할까?'에 초점을 둔다. 소위 뺀돌이가 되는 것이다. 허술하게 하라는 뜻은 아니다. 거절하거나 시스템화하거나 자동화하거나 아웃소싱하거나 협업을 하거나, 여하튼 편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3. 80중 아예 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지 않는다.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일을 안 했을 때 무슨 큰일이 일어나는가?”를 자문하면 된다. 큰일이 안 일어나는 일은 하지 않으면 된다.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도 바보짓이다. 코치면 코치지 무슨 초보 코치인가? 초보 코치가 아니라 코치이고, 신입사원이 아니라 사원이고, 초급 임원이 아니라 임원이다. 초보 원장이 아니라 원장이다. 초보 대표가 아니라 대표이다. '신입'이나 '초보' 라는 이름하에 숨을 이유가 없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다. 프로의 세계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프로인 것이고 프로답게 행동해야 한다. 세상의 획을 긋는 성취는 알량한 '머리'와 '효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우직한 '엉덩이'에서 나온다. 특정 분야에 대한 강렬한 관심, 강한 흥미, 인내와 끈기에서 나온다. <틀리지 않는 법>에서 저자인 수학교수 조던 앨런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학생들이 '천재성 신앙'으로 인해 망가지는 것이다. '천재성 신앙'은 학생들에 게 최고가 아니면 수학을 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많은 유망한 젊 은 수학자들이 자기 앞에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을 포기하는 모습을 매년 본다.” 나도 예전에는 '노력'이란 모욕이라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똑똑하다고 말해줄 수 없을 때 대신 말해주는 표현이라 여겼다. 그러나 '노력하는 능력', 하나의 문제에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또 고민하고 고민하고, 겉으로 뚜렷한 발전의 신호가 보이지 않는데도 계속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 없이 수학을 할 수 없다. 개인도 유사하다. 어떤 분들은 '처음부터 제대로' 할 것이 아니라면 아예 실행하지 않는다. ‘실수'하거나 '실패' 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지금까지 좋은 경력과 브랜드를 쌓아 왔을수록, 성공과 인정의 욕구가 강할수록 더더욱 그러하다. 나 자신
- 긴즈버그의 말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간단하면서도 본질을 포착하는 설명은, 말로 토머스가 노래한 <자유롭게 너와 내가 되자>가 아닐까 싶다. 여자아이라면 의사건 변호사건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이건 원하는 일은 무엇이건 자유롭게 하라. 남자아이라면, 그리고 그 아이가 가르치고 돌보는 일을 좋아하고 인형을 갖고 싶어 한다면 그것 역시 괜찮다. 페미니즘 개념은 우리 모두 어떤 재능이 있건 각자의 재능을 자유롭게 개발할 수 있어야 하고 인위적인 장애물 — 단연코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든 장애물—에 가로막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법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사회의 경험이 법에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다. 법이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관계없이 무미건조하게 논리적이라면, 그것은 성공적인 제도로 자리 잡지 못할 것이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우리 조상과 달리 기적적인 사건이 우리의 앞길을 열어줄 것 같지는 않다. 편견과 억압이라는 물을 빼내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수단 — 법률의 지혜, 제도의 품격, 이성적 사고, 공감적 배려 — 에 기대야 한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항구적 자극으로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할 악에 대한 우리의 생생한 기억에도 또한 기대야 한다.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기나긴 투쟁 속에서 우리의 기억은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다.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이 뒤집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하더라도 많은 주가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곧,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낙태가 합법인 주로 이동할 경제력이 있는 여성은 문제될 게 없다는 뜻이다. 연방의회나 주 의회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상관없다. 낙태술이 가능한 주들이 있고, 비용을 댈 수 있다면 어떤 여성이든 낙태술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판결이 뒤집힘으로써 영향을 받는 유일한 여성들은 비용을 마련할 수 없는 여성들뿐이다. 누가 가정과 일을 모두 가지는가? 남자? 여자?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는 그랬던 것 같다. 가정과 일을 모두 가지긴 했지만 한순간에 가능했던 일은 아니다. 마티가 젊은 변호사 시절 로펌의 파트너 변호 사가 되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 가정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주로 내 몫이었다. 1970년대에 내가 ACLU의 여성 인권 사업을 시작했을 때 마티는 변화의 가능성에 열렬히 호응했고 나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다. 그 후론 균형추가 반대로 옮겨갔다. 삶의 다른 시기에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 법원은 사회의 변화에 맞춰 “반응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문자 그대로 법전을 해석하면 안 된다는 “원전주의자” 긴즈버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역차별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차별은 근절해야 할 문제라는 것, 여성 역시 남성처럼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능동적 주체라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동성인지 이성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시대정신을 읽고 있기에 일관되게 추구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닐까 싶다. “편향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 나는 사람들을 세뇌하려고 애쓰지 않지만, 나 자신을 중립적인 사람으로 제시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생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중립적이라는, 그래서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은 아집과 독선을 낳게 마련이다. 상대 의견을 무시한 채 대립으로만 치닫는 우리 사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메시지다. 긴즈버그는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늘 되돌아보고 (더불어 자신의 생각이 편향되었음을 인정하면서)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기 위해 (물론 상대의 생각도 편향되었음을 인정하면서) 노력한다. 올바른 동시에 단단한 의견을 내는 길이다.
-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우리는 모두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이 고통은 우리 자신의 다른 경험들에 대한 부정을 뜻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당사자성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내부자의 시선, 현장의 카메라, 당사자성, 1인칭 시점은 본질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야기를 가장 적확하게 해낼 수 있는 출발점이 되며 그 누구도 더하지 못하는 진정성을 더한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읽어내며 사적 역사와 공적 역사를 엮어내는 작품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시점과 당사자성이 가지는 힘을 여전히 믿는다. 김옥영 작가는 “좋은 다큐멘터리는 좁은 창구멍을 통해 넓은 세계를 내다보는 것”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를 다룬다 하더라도 ‘나’의 현실이 얼마나 ‘우리 모두의 현실’을 환기할 수 있느냐, 얼마나 문제의식을 확장할 수 있느냐에 그 성취가 달려 있다”고 쓴다. 김소희 평론가는 사적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편견을 지적하며 ‘나의 작품은 사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여성 신진 감독들의 입장에 대해 사적 다큐멘터리 영화는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를 선취하는 데 매달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성이 생성되는 과정에 관해 면밀한 성찰이 수반된 작업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대한 범주나 담론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론을 개척하는 좋은 사적 다큐멘터리가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하다”고 말이다. 이제는 안다. '사적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형식적인 분류로 나의 영화의 가치를 폄훼할 수 없다는 것을. 애정하고 지지하는 사적 영화가 관습과 체제라는 어렵고 복잡하고 감히 건들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개념을 가장 거세게 흔들 수 있는 도구가 충분히 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 다이다이 서점에서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수만큼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직접 이야기를 듣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알고 싶으니까 읽는다. 입장이 다르면 풍경도 변하기 때문에 모든 입장에서 보고 싶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권력자의 눈과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의 눈은 서로 다른 것을 본다. 오오카 쇼헤이의 「들불(소화, 1998)」을 읽어보면,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해온 사람이 인육을 먹기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전쟁터가 어떻게 사람을 이상한 상황으로 몰아넣는지를 뇌리에 새길 수 있다. 린코 짱이 서점의 서가를 보고 “여전히 약자의 책만 가득하네. 그런 면에서 전혀 흔들림이 없네”라고 중얼거린 적이 있다. 나는, 그런가 하며 서가를 바라보고, 의식한 적은 없지만 확실히 약자들뿐이네, 하고 수긍했었다. 미나마타병 환자에 한센병 요양소 입소자, 전쟁의 무수한 피해자, 이런저런 이유로 차별당하는 사람들, 의지할 데 없는 사람……. 마음이 가는 책을 고른 것이다. 귀를 기울이고 싶은 것은 가냘픈 목소리로, 그 목소리는 사람을 억누르려고 하는 큰 목소리보다도 힘차고 매력적이다. 그런데 린코 짱은 훗날 첫 번째 책의 추천사에서 “약자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는 의미뿐 아니라 약해진 사람들을 위한 책이 놓여 있다는 의미도 있었다”고 했다. 서가를 보고 있을 때나 린코 짱의 사진을 보고 있을 때, 때때로 그 말들을 떠올리며, 지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을 수 있을지 생각한다. 이시무레 씨는 어린 시절 마을의 노파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음, 이 아이는..... 혼이 나가 있네. 다카자레키의 버릇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어.” 구마모토 사투리로 서성거리며 떠도는 것을 ‘사레쿠’라고 한다. 이시무레 씨는 자신의 고향에서는 영혼이 놀러나가 마냥 돌아오지 않는 자를 ‘다카자레키의 버릇이 들었다’라든가 ‘도오자레키가 들러붙었다’고 말한다고 썼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책만 읽고 있으니까, 다카자레키의 버릇이 붙었다. 어디에도 가지 않고 책에서 들리는 소리에 의지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이시무레 씨처럼 종횡무진은 아니지만, 비틀비틀 떠돌았다. 이시무레 씨의 책을 읽음으로써, 그 영혼과 함께한다. 아득하게 먼 저쪽에 계실 때는 멀리서 보는 것밖에 안 되지만, 적어도 같은 곳을 바라보려고 귀를 기울이고 응시한다. 평소에는 멀리 있는, 바다의 목소리, 산의 목소리. 그리고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게 된 산의,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새끼 여우가 된 이시무레 씨를 만날 수 는 없을까 두리번거린다.
- 완벽한 피해자자동차 사고가 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감수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 방화가 있었는지 알기 위해 감수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 피해자가 살해당했는지 판단하기 위해 감수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 피해 여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 범죄가 성립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이고 특별한 사정을 고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성폭력 범죄가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의사결정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의 자유가 침해되었는지는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밝힐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관계의 본질, 사회적 지위나 직장 내 권력 차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이고 특별한 사정을 정당한 이유 없이 함부로 배척하지 말라는 것이 성인지 감수성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인지 감수성은 피해자 말을 무조건 믿어주라는 것이 전혀 아니다. 수사관이 피해자 말만 믿고 추가 수사 없이 성폭력 사건을 기소의견으로 송치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빨리 기소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제대로 수사하여 증거를 확보한 후 기소하는 것이다. 피해자 진술이 맞는지 최대한 적극 수사해서 가능한 모든 증거를 확보해 주어야 한다. 전체 맥락을 확인하고 그 맥락 속에서 확보할 수 있는 증거들이 추려지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은 특히 초동 수사가 중요하다. 성인지 감수성은 어떤 면에서는 수사기관이 적극적으로 수사하여 추가 정황증거들을 확보하도록 하는 동력이 된다. 그렇게 확보한 증거가 피해자 진술과 얼마나 들어맞는지가 진술 신빙성 판단의 토대가 된다. ‘피해자라면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피해자다움’은 단언컨대 허상이다. 피해를 입은 후 가해자인 상사가 집들이한다고 직원들 초대하면 같이 갈 수 있다. 그 자리에서 동료들이 웃기는 농담을 하면 웃고 깔깔대기도 한다. 사무실에 출근해서 가해자에게 멀쩡한 척 배꼽 인사를 하며 근무할 수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은 아니어도 성폭력 피해 입었다고 일할 권리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성폭력 피해를 입었지만 친한 친구들 만나면 잠시나마 즐겁다. 그래서 SNS에 친구들과 놀아서 행복하다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피해는 피해인 것이고, 그 이후 삶은 피해자의 성향, 기질, 환경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이어진다. “판사님 감사합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 사건 소송에서 제가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판결이 안 나왔는데도 제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 이야기, 그러니까 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게 얼마나 제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제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판사님이 다 들어주셨고, 또한 법정에 가해자를 대신해서 나와 있는 가해자의 부인 역시 이 이야기를 다 들었기 때문에 저는 제가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왜 저항하지 않았냐?”고 추궁합니다. (…) 죽기 살기로 저항하면 성폭력은 발생할 수 없다고 쉽게 말합니다. 죽기 살기로 저항하면 강간에 성공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가해자의 추가 폭력으로 정말 피해자가 죽기도 합니다. 더러 그러다 가해자가 사망하기도 합니다. (…) 성적 자기결정권을 지키기 위해 몸과 생명까지 위험한 상황에 처하도록 할 이유는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면 차라리 피해자가 성폭력의 순간에 저항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하지 않기 위해 저항한 대가가 너무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가혹한 피해는 피해자 혼자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어렵사리 용기 내어 가해자를 고소한 이후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 자책하곤 합니다.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가해자의 잘못을 말하고 제대로 처벌해 달라는 것은 당신의 권리입니다. 그의 잘못된 행위를 당신이 계속 감내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가해자가 그 일로 처벌을 받고, 직장을
- 도덕을 왜 자연에서 찾는가?1. 자연화(naturalization)는 사실 비평가들이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약한 전략이다. 모든 규범을 지지하는(또는 전복시키는) 수많은 자연적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특정 규범들의 집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저런 자연적 질서를 사용하는 것에서 모든 규범의 모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특정 유형의 자연적 질서를 사용하는 것으로의 이동은 철학자들이 자연주의 오류의 특정 사례라고 반대해왔던 정치적 신랄함의 상당 부분을 무력화한다. 규범의 기초가 되는 자연의 유일한 질서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그러한 호소의 힘은 극적으로 약해진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규범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연사의 어떤 예를 생각해낼 수 있고, 당신은 매우 다른 규범을 지지하는 똑같이 자연스러운 은유로서 다른 많은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다. 벌의 모계제 대 개코원숭이의 가부장제가 그 예이다. 논쟁의 당사자 모두가 자연을 휘두를 수 있기에, 자연은 정치적 논쟁에서 더는 강력한 무기가 아니다. 2 . 자연에 대한 호소는 근본적으로 자연 질서와 규범성 그 자체의 연관성에 관한 것이지, 어떤 특정한 자연 질서와 어떤 특정한 집합 또는 규범 사이의 연관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내 두 번째 답변으로 인도한다. 도덕 질서에 대한 환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연 질서에 호소하는 움직임은 근본적으로 질서와 규범성 그 자체의 연관성에 대한 것이지, 어떤 특정한 질서와 어떤 특정한 규범들의 연관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자연에 대한 호소를 오류로 만드는 것은 질서로 추정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함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전통 외에도, 자연의 순수한 규모와 내구성이 대부분의 인류사에서 가장 인 상적인 유물의 규모와 내구성을 훌쩍 능가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연의 질서는 사실상 인간의 질서에 비해 더 질서정연하며, 이는 왜 자연의 질서가 인간의 질서를 뒷받침하기 위해 소환되었으며 그 반대는 아닌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3 . 인간의 몸에 딸린 이성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성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원칙적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 더 완벽하다고 추정되는 다른 유형의 이성에 대한 철학자들의 갈망은 공개적으로든 은밀하게든 신학에 얽매여 있다. (…) 그러나 그들 또한 우리 자신보다 더 완벽한, 몸과 감각이 전혀 다르거나 신체와 감각이 전혀 없는 천사나 신과 같은 지성적 존재에 대한 꿈과 우상숭배의 은유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했다. 인식론은 여전히 칸트의 불가사의한 비인간적인 이성적 존재나 화성인 또는 다른 가능한 세계의 거주자들에 대한 천사학의 사고실험을 마음껏 펼친다. 신학은 인식론을 계속 따라다니며, 우리 종족의 한계를 벗어나는 이성의 형태에 대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을 충족시킨다. 칸트는 그 한계를 초월하려는 이성의 야망에 대해 경고한 것으로 유명하다. 만약 우리가 구체적으로 인간 이성의 능력을 탐구한다면, 우리는 글자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정신적으로라도 칸트를 따를 수 있다.
- 연년세세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 픽사, 위대한 도약불안정한 재무상태와 비즈니스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픽사가 성공한 이유 (전 CFO의 회고록) - 그래픽개발,광고,하드웨어 개발 등 장기적인 비전 없는 곁다리를 쳐내고 엔터테인먼트(장편애니메이션)에만 집중한 사업적 결정 - 스토리가 픽사를 지탱하는 힘이다 = 스토리팀과 스토리팀을 초기부터 이끈 감독에 대한 최대한의 신뢰와 전권보장 - 토이스토리1이 대박치고 나서 디즈니랑 재계약시 안 될 뻔한 사유기도 했음. 그럼에도 그걸 받아냄 - `멋진 그래픽은 사람들을 몇 분 간만 즐겁게 할 뿐, 자리를 못 뜨게 하는 것은 이야기다` - 저자 본인을 미화시키는 일화일 수도 있지만 잡스와 맞서싸워 직원들 스톡옵션을 (직원도 불만족, 잡스도 불만족인 중간 어드메에서) 최대한 얻어냄 정답은 바로 ‘문화’와 관련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문화는 혁신을 좌우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우리는 혁신을 환경이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어 한다.누군가를 영웅화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하지만 혁신은 집단적인 프로젝트다. 특별한 재능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환경의 산물이기도 하다. 혁신에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마진가지로 픽사에서도 그 문화와 정신을 보존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했다. (…) 기업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매우 비슷하다. 기업도 개성, 감정, 습관이 있다. 제일 위에 있는 사람이 모든 상황을 지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사람도 어쩌지 못하는 기업 문화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기업이 성공을 거두면 보수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설립 당시 타오르던 창의력의 불꽃은 성과에 대한 압박이 상승 하면서 쉽사리 식어 버릴 수 있다. 성공과 함께 지켜야 할 무언가, 잃고 십지 않은 무언가가 생긴다. 두려움은 용기를 가볍게 억누를 수 있다.
- 로렘 입숨의 책바닷속 플라스틱처럼 분해도 안 되고 쌓여만 가는 문장의 공해 한가운데에서 그의 마음에는 한 자락의 평화가 찾아들었다. 어쩌면 그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있는 힘을 다해 무의미해지는 것이었다. 그 자신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작가가 제각기 싸지르거나 게워낸 모든 글은 로렘 입숨의 무한 변주 반복에 불과할지도 몰랐고, 글을 쓰면 쓸수록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 아무거나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어졌으며,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비로소 그 무엇도 쓰지 않음 — 세상에 어떤 글도 존재하지 않음이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궁극의 글쓰기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정적보다 완벽한 음악이 없듯이, 점 하나 찍지 않은 흰 도화지가 화려한 그림을 압도하듯이, 태어나지 않음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삶이듯이.
- 편견 없는 뇌
-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역시 마이클 슈어는 웃기고(이건 내가 당연히 기대한 부분이다) 이 책은 웃기면서도 실용적인 가이드다(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의무를 지고 있음을 기억하기. 윤리적 선을 그으려는 노력은 단연코 끊임없이 실패하겠지만 포기하지 않기. 나를 알고, 무엇이든 지나치지 말기(타투를 할 생각은 없다). 스캔론은 사람들에게 번영에 다다른 성인군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개인의 성격이나 종교, 정치 신념, 피자 토핑 선호도에 관계없이 모두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모두에게 정당한 삶의 기본 규칙을 만들어가길 바랄 뿐이다. 이것이 계약주의가 칸트의 의무론보다 내 마음을 더 끄는 이유 중 하나다. 칸트는 문제가 생기면 모든 것 을 내려놓고 명상을 위한 독방 같은 곳에 혼자 들어가 문제를 마주하고 순수이성으로 보편 준칙을 찾아 내 문제에 적용한 뒤 그 준칙을 따르려는 의무감에서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스캔론은 이 모든 것을 같이하라고 한다. 서로 마주 앉아 “이렇게 하는 데 동의하나요?”하고 묻는 것이다. 스캔론은 추상 추론을 믿지 않는 대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우선시한다. 물론 좀 위험해 보일 수도 있다. 자기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위험한 도박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규칙을 만드는 것 자체도 어려운데 스캔론은 사람에게 하듯 다람쥐에게 말을 거는 옆집의 신디나 꽁꽁 얼어붙은 수영장에서 다이빙해 꼬리뼈가 부러진 사촌 데렉이 와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2023년 상황에 비춰보자면 그 정도가 아니라 음모론을 퍼뜨리는 페이스북 요정들이나 인종차별주의자인 증조 삼촌처럼 당신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합리성'에 의존해야 할 수도 있다. 허용하는 행동에 관한 규칙을 제안했는데 이들이 거부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들이 반대하는 근거가 합리적이고 다른 사람들만큼 자기 이익을 위한 욕구를 억누른다면 가능하다. 물론 이상하고 신경에 거슬리며 예측 불가능한 사람 도 있지만 결국 그들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들을 배제하고 추상적 법칙을 정하는 것보다 그들과 협력해 세상의 도덕적 경계를 그리는 것이 낫다고 본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협력하는 것이 더 좋은 생각일 것이다. (…) 스캔론은 우리와 지구를 함께 쓰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하라고 한다. “당신이 저를 우리 시스템을 거부할 권한이 있는 중요한 사람으로 대한다는 걸 압니다. 저 역시 당신을 그렇게 대한다는 것을 아실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스캔론은 서로를 존중한다는 걸 서로 알고 있는 윤리체계를 확립하고자 한다. 도덕의 이러한 방향 전환은 우분투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내면의 이기주의에 제동을 걸고 주변 사람(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통틀어)과의 관계를 개인적 ‘선량함 계량기’의 중심에 두게 한다. 일단 이 입장을 받아들이면 음...적당한 단어가 없어서 쓰자면, 멍청한 채로 살기는 힘들어진다. 마침내 스캔론이 계약주의에 관한 초본을 데릭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팀, 이건 윤리 이론이 아니잖나. 이건 자네 성격을 기술한 거잖아.” (철학자는 가끔 재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 결정과 다른 사람의 결정에 보이는 내 반응을 비교해볼 때 계약주의는 윤리적 가이드로 의지할 만하다. 그래도 기억해야 할 것은 계약주의는 살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선만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 최소한의 기준선에 도달했을 때 자신과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자 좀 더 수고를 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내가 스캔론의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의무>에 그토록 크게 공감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제목 자체가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안내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무를 질까?'가 아니고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의무'이다. 이 책은 우리가 분명 서로에게 의무를 진다는 관점에서 출발하며 그 의무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스트레스와 고통, 불평등과 부당함, 윤리적 긴장과 피
-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나는 내 랜턴을 던져버렸고, 이제 어둠을 볼 수 있다. *-* *웬델 베리, 오래된 언덕* 이 책은 다시 장소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의 훌륭 한 사례로 생태지역주의(bioregionalism)를 제시한다. 환경운동가 피터 버그가 1970년대에 처음 개념을 설명했으며 원주민의 토지 관행에서 널리 나타 나는 생태지역주의는 각 장소에 뿌리내린 여러 삶의 형태뿐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을 인식한다. 생태지역주의적 사고는 서식지 복원과 지속 가능한 농업 등의 실천을 아우른다. 여기에는 문화적 요소도 있는데, 스스로를 국가만큼 이나 중요한 생태지역의 시민으로 여길 것을 요구하 기 때문이다. 생태지역에서 우리의 ‘시민의식’은 단지 그 지역의 생태에 친숙한 것을 넘어서 함께 생태를 헌신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관심경제에 대한 비판과 생태지역 인식의 가능성을 연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적 사고, 외로움, 환경에 대한 폭력적 태도가 전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경제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과 관심경제가 우리의 관심에 미치는 영향이 유사하다는 데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공격적인 단일 문화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문화에서는 ‘쓸모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벌목꾼이나 페이스북이) 활용할 수 없는 요소들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이러한 쓸모의 관점은 삶을 원자화, 최적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생태계를 모든 요소가 있어야 제 기능을 하는 살아 있는 전체로 인식하지 못한다. 벌목과 대규모 농업 같은 관행이 땅을 초토화하듯이, 성과에 집착하는 분위기는 한때 개인과 집단의 생각이 풍성하게 자라던 풍경을 더이상 아무것도 자랄 수 없을 때까지 천천히 땅을 파괴하는 몬산토 농장으로 바꾸어놓는다. 생각의 종류가 하나씩 멸종할수록 관심의 토양도 점점 더 침식된다. 현대적 생산성 개념이 결국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생산성을 파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장자의 쓸모없는 나무 이야기 속 모순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장자의 이야기는 다른 무엇보다 ‘쓸모’를 규정짓는 개념의 편협성을 비꼬는 농담이다. 나무는 목수의 꿈에 나타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위한 쓸모인가? 이 질문은 내가 자본주의적 논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곱씹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무엇을 낳는 생산성인가? 어떤 방식의, 누구를 위한 성공인가? 내가 삶에서 가장 큰 행복과 충족감을 느낀 때는 모든 필멸의 존재에 따르는 희망과 고통, 슬픔과 더불어 살아 있음을 온전히 인식한 순간이었다. 이러한 순간에 목적론적 목표로서의 성공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순간들은 그 자체로 중요했고, 어딘가로 향하는 사다리의 계단이 아니었다. 나는 장자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이 느낌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쓸모없는 나무 이야기 초반에는 중요한 정보가 나온다. 여러 판본에서 언급하길, 이 뒤틀린 나무가 뻗은 가지는 어마어마하게 폭이 넓어서 수천 마리의 소와 말들에게 그늘을 제공할 수 있었다. 쓸모없는 나무의 형태는 목수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데에만 유용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돌봄의 형태이기도 했다. 쉴 곳을 찾는 수천 마리 동물들 위로 가지를 뻗음으로써 다른 생명체를 돌보고 그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지가 빽빽하게 얽혀 새와 뱀, 도마뱀, 다람쥐, 곤 충, 버섯, 이끼에게 안전한 서식지를 제공하는 쓸모 없는 나무들이 즐비한 숲을 상상한다. 어느 날 쓸모만을 따지는 땅에서 온 지친 여행자가 이 너그럽고 시원하며 쓸모없는 환경에 도착할지 모른다. 그는 땅에 짐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채 잠시 돌아다니다 동물들을 따라서 나무 아래 자리를 잡는 다. 그리고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달콤한 낮잠을 잘 것이다. 이처럼 어떤 대상에 거의 마비에 가까울 만큼 매료되는 현상에 나는 ‘관찰의 에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통조림공장 골목』 도입부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스타인벡은
- 데이터를 엮는 사람들, 데이터 과학자데이터 분석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능력이라면 문제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능력, 논리적으로 적절한 도구를 사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논리적 사고 능력, 데이터에 대한 이해와 객관성, 지속적인 학습에 열려 있는 자세,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다. 결국 우리의 일은 ‘무언가를 데이터 기반(증거 기반) 으로 추론’하는 일이다. 어떤 상황을 주면, 이를 문제로 만들고 그 문제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고 이를 구멍 없이 차곡차곡 여러 방법으로 쌓아 올려 결과를 만든다. 추론 결과를 명확하게 만들려면, 일단 백지 상태에서 상황이 하나 던져졌을 때 이를 문제로 명확하게 정의하고 문제를 논리적으로 여러 단계로 재구성하며 각 단계에 필요한 데이터와 방법론을 모아서 쌓아 올릴 수 있어야 한다. 데이터 과학자의 전문성은 빠르고 제대로 된 문제 해결에 관한 모든 것이다. 그래서 데이터 과학자에게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문제 해석과 접근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도메인 지식이다. 도메인 지식은 문제의 배경 이해를 돕고 데이터에서 흥미로운 패턴을 더 빨리 파악하게 해주므로 데이터 과학자는 다른 전문가보다 더 도메인에 익숙해야 한다. 아무리 전문 지식이 있어도 도메인에 익숙하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어려워진다. 도메인 감각이 생기면, 데이터 분석 결과에서 수많은 잡음 사이 숨어 있는 의미를 찾고 반짝이지만 문제 해결에 도움은 안 되는 결과와 실제로 비즈니스에 필요한 결과를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잘 걸러내서 결과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만든다. 데이터 과학자가 이야기를 만들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데이터를 넘어서는 결과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데이터 과학자는 근거를 기반으로 결과를 전달하기 위해 문제부터 결과까지 물 흐르듯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가끔 비극이 발생한다. 많은 사람이 돋보이기 위해 데이터에서 이야기하는 것 이상으로 색칠을 하고 결과를 억지로 어림잡게 만든다. 이런 사람을 속칭 '약장사'라고 부른다. 불행히도 전문가는 상대적으로 적고 데이터 과학자를 자처하는 데이터 약장사들이 넘쳐난다. 데이터 약장사는 눈에 띄지 않게 중간중간에 거품을 불어넣어 데이터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데, 이 과정에서 데이터 과학자가 분명히 명시해야 하는 ‘불확실성’을 지워 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고 모두가 원하는 대로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만들 어 주는 마법 따위도 있을 리 없다. 멋있는 것, 아름다운 것을 찾는 것도 좋다. 하지만 너무 많은 기대만으로 멋진 모습을 보고 일을 고르기보다는 데이터를 보고 탐색하고 결과를 찾는 그런 과정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 일을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나마 이 일의 간극에 대해 실망이 덜할 것이다. 거품이 꺼지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꾸준히 자신이 해 온 일뿐이다. 그 일을 묵묵히 쌓아 갈 수 있는 사람이 어떤 급변하는 상황이 와도 결국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별 생각 없이 그냥 데이터 분석 일을 해 보는 것도 괜찮을 수 있다. 물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고 일을 하면서도 진지해야겠지만, 일단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는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모양으로든 삶은 자존감을 깎아 내리는 행위는 일단 멈추자. 그냥 하나하나 어떻게든 무언가를 해 나가는 그리고 그 '무언가'가 본인이 다른 것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일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밖에서 보는 멋진 모습에 매료된 것이 아니라 데이터 과학 일 자체가 본인에게 맞는 것 같아서 시작했다면, 기대와 조급함, 실망과 불만은 일단 조금 덜고 편안한 마음을 가져 보자. 주어진 일을 조금씩 천천히 해 나가다 보면, 결국 데이터 과학 일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다른 일과 본질적으로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냥 일 자체를 적당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다들 그런 편하고 적당히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 일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란다. '데이터 과학'이라고 불리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문제 정의부터 결과 반영까지 큰 사이클을 '과학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데이터 과학자 본인이 만들어 낸
-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때로 잘못된 믿음은 범주화할 수 없는 다양한 요인 때문에 유기적으로 발생하고, 마지막에는 새로이 정체성이나 이익집단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경우 어떤 이유로든 새로운 구성원들이 합류한다. 결국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팀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편에 서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든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냈을지도 모르는 냉소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추종자들과 대화함으로써 과학 부정론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편이 중 요하다. 허위 정보를 조직적으로 유포하는 행위를 폭로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과학 부정론을 극복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일단 거짓말이 떠돌고 나면 설사 거짓으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이미 피해는 돌이킬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믿는 사람들과 대화해야 한다. 누군가가 부패나 불법 행위를 밝혀낼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행위가 존재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여전히 대항할 수단이 필요하다. 그 거짓말들이 냉소적인 외부의 이해관계에 의해 생산되었든 우리 자신의 정신적 상처나 자아에 의해 만들어졌든 결국 도달하는 지점은 같다. 과학 부정론은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즉 더 많은 사실을 제공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과학 부정론자의 마음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그들을 증거에 대해 논증하는 법은 이미 알지만 데이터가 없는,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동료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많은 증거도 과학 부정론자의 마음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작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범위를 최대한 넓혀보면, 과학 부정론은 특정 과학 이론의 내용뿐 아니라 과학자들이 그 이론들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치와 방법들을 공격하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과학 부정론자들은 과학자들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실관계뿐 아니라 과학적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금처럼 증거를 가지고 부인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이 증거에 대해 논증하는 방식을 재고하도록 해야 한다.다른 가치들을 접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가도록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스티브는 전반적인 이슈에 대한 나의 관점을 바꿔놓은 심오한 이아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석탄 광부는 운명론적인 사람이라는 점을 이해하서야 해요. 이 일은 일종의 느린 죽음입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노동절 전 금요일에 워싱턴 카운티에서 사망한 25세 광산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데이비드와 에린을 통해 들은 터였다.(...) 나는 방금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잠시 침묵했다. 광부가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담보로 잡아놓고 매일 일하러 가기를 불사했다면, 지구나 타인의 건강이 위험에 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 아마도 먼 나라 이야기일 텐데? 이것을 냉정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들은 다른 직업을 구할 수 없었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다른 뭐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신념과 가치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 내가 처음 가졌던 의문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전에 원하지 않았던 것을 믿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맞닥뜨린 질문은 ‘어떻게 하면 누군가가 이전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이다. 기후변화와 관련해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살펴야 할 이슈는 부정론자들이 비합리적인 견해를 바꾸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런 견해가 어떻게 그들의 가치를 대변하는 기능을 하는지 이해할 때까지 더 깊이 탐구하는 일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이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무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촉구할 수 있을 것이다. 몰디브의 보트에서 대화했던 아이는 그 관심의 불꽃이 꺼져 있었다. 아마도 나는 그가 몰디브 바깥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죠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그곳까지 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몰
- 퇴근길의 마음경력이란, 업계에서 살아남은 자가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그려낸 선이다. 돌아보면 길이 생겨있지만, 걷는 순간에는 길이 아닌 곳을 헤쳐가며 발을 내딛다가 다시 뒤로 돌아가 원점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헤맨 순간들조차 돌아보면 그럴듯한 역사의 일부가 되어있다. 살아남는 데 성공해야 어디든 도달해있는 법이다. <로그 원>은 <스타워즈> 시리즈와 세계관은 같지만 내용상, 캐릭터상으로 독립되어 있고, 분위기로 따지면 다른 작품들보다 어두운 편이다. 주인공이 당연히 승리하겠지, 하는 막연하고 당연한 낙관은 없다. 승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 이번에 성공 못할지도 모르지만, 끝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 모두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완벽한 해피엔딩은 결단코 불가능하지만 중요한 단 한 가지만큼은 절대 성공해야 한다. 손 놓고 패배하지는 않겠다는 각오. 누군가의 눈에는 어리석은 그런 시도가 판세의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와 같은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일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역사 속 수많은 혁명가들로부터 배우는 절박하고 아름다운 일하기의 이야기. 성공으로 기억되지 못한다고 내가 해낸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나의 커리어 목표는 단순하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래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파도가 칠 땐 파도를 타고, 파도가 없을 땐 물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다음 파도를 기다린다. 어떤 파도는 너무 거세기 때문에 타기가 어려울 테고, 어떤 파도는 나를 위해 만들어진 듯 나를 사뿐히 들어 옮길 것이다. 그 모든 파도는 한 번뿐이고, 결국은 모두 지나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노력한다면, 잔잔한 바다에서도 높은 파도에서도 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팀은 성공도 실패도 공유한다. 어쩌면 팀 내부의 화합 여부가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팀이야말로 이상적인 프로페셔널의 조직일지도 모른다. 일을 위해 모인 이들의 목표는 제대로 일을 완수하고 성과 를 내는 쪽이지 친하게 지내거나 서로를 좋아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 성공은 당신 자신을 좋아하고, 당신이 하는 일과 그 일을 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것이다. 2014년에 세상을 떠난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의 작가 마야 안젤루가 말한 성공 이다. 나는 이 말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삶에서 성공이란 이런 가치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하지만 실무란, 적의 시체를 넘고 아군의 시체도 넘고 내 시체를 아군과 적군이 넘어, 모르는 사람 눈에 그럴듯한 꽃밭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원론은 그러하지만, 나는 일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결과는 예측불허지만 과정은 만들 수 있으며, 결과가 안 좋을수록 망한 팀웍이 개인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파괴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되고 싶은 자질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고, 존경하고, 나 자신을 바꾸고자 노 력한다. 노력해도 정신차려 보면 제자리로 돌아와 있곤 하지만, 시도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변화를 겪는다. 내일의 나를 오늘의 내가 만나면 질투할 만한 인간이었으면 한다. 건강한 생활습 관을 갖고, 차근차근 일하며, 새로운 관계에도 도전에도 적극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지의 나를 위해 연료를 때는 일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이 내게는 바로 ‘질투’다. 흥행에서든 비평에서든 성공한 작품에서든 실패한 작품에서든 그는 다르게 하지 않았다. 잘될 일만 열심히 하지 않았고, 안될 법한 일도 대충 하지 않았다. 최악의 시기도 최고의 시기도 그의 한결같은 노력의 결과였지만, 좋은 재능을 가진 다른 사람이 없었다면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30년 차 프로페셔널의 진지한 헌신은 그런 것이다. 이유를 따질 시간에 주어지는 일을 하기. 영광도 영원하지 않지만, 실패 역시 영원하지 않다. 그리고 진지한 헌신은 성공이나 실패와는 관계없다. 당신 자신이 남아있지 않으면 일은 없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신을 지지하는 건강한 인간관계 (언젠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인간관계 말고
-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동의를 내던져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동의는 너무나 중요하고, 또한 최소한의 기준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해방적 욕망의 무게를 전부 지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한계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동의, 즉 섹스에 합의한다는 것이 성적 욕망이나 즐거움, 열정과 등치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나쁜 섹스를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비참하기 짝이 없는 섹스를 너무나 많이 경험한다는 사실은 진정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며, 동의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앞으로 우리의 섹스가 다시, 혹은 처음으로 좋아지길 원한다면, 우리는 이 주장을 거부하고 다른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동의의 형식을 이리저리 뜯어고치며 거기에 윤리적 부담을 과도하게 쌓거나, 보다 안전한 세계를 만들고 자신들의 쾌락을 더욱 중시하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여성들의 시도를 비난하는 대신, 우리는 욕망의 불확실성을 부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않는 섹스의 윤리를 정확히 밝혀내야 한다. 성적 윤리라는 이름에 합당한 윤리가 되려면 모호함, 불투명함, 알지 못함을 허용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위험하고 복잡한 다음의 전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폭력에서 안전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자신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또 하나의 진단 기준은 '성적 활동에 대한 관심'(욕망이 아님)이 다. 장애진단편람에서 여성은 장애를 겪을 수 있는 성적 욕망이 랄 것이 아예 없는 듯하다. 물론 장애진단편람에 포함되는 것이 해방의 표시는 아니지만, 여성들은 이득과 동기를 가질 때 남성은 욕망을 가지고, 여성이 관심과 흥분에 관한 장애를 가질 때 남 은 욕망 장애를 가진다. 이 의미론적 차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성이 섹스에 기울이는 관심은 보다 인지적인 활동으로 여겨지고, 남성의 관심은 더 리비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은 섹스를 고려하지만 남성은 섹스를 원한다. 여성의 성에 대한 관심은 그러니까, 덜 성적이다. 우리는 욕망의 모델에 의문을 제기하고, 욕망을 활성화하거나 금지하는 맥락과 조건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욕망의 언어를 없애는 것이 도움이 될까? 이것이 그저 이미 문제적인 현상, 즉 여성에게 섹스는 주로 그들의 이해관계를 가능하여 판단할 문제이지만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근원적 필요로서 온전 히 남아 있다는 주장을 더욱 공고히 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사실은 사회적인 현상을 섹스의 모델이라고 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즉, 섹스가 남성에게는 본질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라는 가정과 더불어 여성이 마지못해 하는 섹스는 순전히 자신에게 중요한 다른 것을 위한 거래일 뿐이라는 가정은 사회적인 것이다. 섹스를 하면 연결감, 친밀성, 결속감 등 다른 가치 있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효과를 제공할 수 있는 섹스 자체를 배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 다. 서로에게 깊은 즐거움을 주는 행위로서 섹스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 모든 복잡함 속에서도 여성의 성적 쾌락을 포용하고 활성화하며, 남성 욕망의 복잡성 또한 인정 하는 문화를 목표로 삼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젠더를 떠나 경이롭고 보편적이며 민주적인 쾌락을 목표로 삼을 수는 없을까? 모두를 위한 쾌락주의, 소피 루이스가 말한 "경계를 풀고, 다형적인 실험"을 모두가 추구할 수는 없을까? 모든 섹슈얼리티는 반응적이다. 모든 성적 욕망은 그것을 차츰 형성해가는 문화 안에서 등장한다. 바손의 모델에서 중요한 부분, 즉 관계적이고 창발적인 욕망의 본성에 대한 강조를 남성과 여성의 섹스 충동은 다르다는 수사학에 너무 많이 이용하지 않으면서 수용할 수 있을까? 섹슈얼리티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특정한 맥락들 속에서 살아가고 배우고 발전한다. 이는 섹스가 우리에게 모종의 의미를 지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섹스는 결코 순전한 기능이 아니며, 언제나 풍부한 의미가 축적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섹스가 즐겁고 만족스럽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해방적 에너지를 집중시켜야 할 곳은 바로 섹스의 맥락이다. 여성들은
- 우리는 도시가 된다그러나 브롱카가 그만큼 분명하게 알고 있는 또 다른 게 있다. 그는 투사(鬪士)다. 날 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언젠가 크리스가 브롱카는 온화한 영혼을 가졌지만 날카롭고 뽀족한 철조망으로 둘둘 감싸여 있고, 그 뽀족하고 날카로운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브롱카에게 폭력을, 사나움을 가르친 건 이 세상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브롱카가 브롱카인 것을 증오했기에. 브롱카가 그를 침해하고 그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가장 본질적인 자아를 감염시켜 바람직해 보이는 일부만을 남기고자 하는 이들에게 포위당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거기 대항해 싸울 힘을 갖게 된 것도 처음이 아니다. 이건 그저, 빌어먹을 브롱크스가 된 후에 처음으로 일어난 일일 뿐이다. * 나는 이 도시를 싫어한다.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한다. 나는 이 도시가 나를 거부할 때까지 기꺼이 이곳을 위해 투쟁할 것이다. 이 작품은 뉴욕에 바치는 내 경의의 표시다.*
- 팀장의 탄생그가 우리 팀을 평가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성과였다. 우리 팀이 가치 있고 사용하기 쉽고 완성도 있는 디자인 작업물을 만들어내는가? 다른 하나는 우리 팀의 강점과 만족도였다. 내가 팀원을 잘 뽑아서 성장시키고 있는가? 우리 팀원들이 즐겁게 잘 협력하고 있는가? 첫 번째 기준은 우리의 현재 성과를, 두 번째 기준은 우리가 앞으로 뛰어난 성과를 낼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관리자의 중요한 역할 중 첫 번째는 '팀 전체가 무엇이 성공인지 알고 그것을 달성하고자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팀이 이루고자 하는 성공, 즉 목적은 ‘전화를 거는 모든 고객이 존중받는 느낌이 들게 한다’처럼 구체적인 형태일 수도 있고, '전세계인을 더 가깝게 연결한다'처럼 광범위한 형태일 수도 있다. 팀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구성원 모두가 그것을 알고, 실현 가능성을 믿으려면 먼저 관리자 자신이 그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메일을 쓸 때, 목표를 세울 때, 팀원과 일대일로 면담할 때, 회의를 진행할 때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목적을 설파해야 한다. 그다음으로 관리자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바구니는 '사람', 다른 말로 '누구'다. 팀원들이 성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뛰어난 성과를 낼 만큼 의욕적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팀원들이 업무를 처리할 능력이 안 되거나 능력 은 되는데 환경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긴다.(…) 사람을 잘 관리하려면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그들(그리고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누구에게 무슨 일을 맡길지(필요하다면 어떤 사람을 채용하고 해고할지에 관해서도) 현명하게 판단하고, 각 사람이 최고의 기량 을 발휘할 수 있도록 코칭해야 한다. 마지막 바구니는 '프로세스', 즉 팀이 '어떻게' 협력하느냐다. 팀원들이 아무리 날고 기는 능력자이고 팀의 최종 목표를 똑똑히 알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협력을 해야 하는지 모르거나 팀의 가치관이 명확하지 않다면 간단한 일도 무지막지하게 복잡해진다.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처리해야 하는가? 의사결정 시에는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가? 관리자는 아무리 실무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직접 실무를 보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그래서는 팀의 성과가 크게 향상되지 않는다. 모름지기 관리자라면 팀의 목적, 사람, 프로세스를 개선함으로써 팀의 전체적인 성과에 최대한 멀티플라이어 효과를 내야 한다. (…) 그러다가 내가 더는 개별기여자로 존재하면 안 되는데도 계속 그 일을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대부분의 수습생 관리자가 겪는 일이다). 우리 팀이 예닐곱 명으로 늘어났을 때로 기억하는데 나는 여전히 복잡한 프로젝트의 리드 디자이너 로서 일주일 중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그 와중에 관리자로서 책임져야 할 부분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 다. 그래서 어떤 팀원에게 각별히 더 신경을 써야 한다거나 그 주간에 여러 건의 검토 일정이 잡히는 등 특별한 일이 생기면 내가 맡은 프로젝트에 충분히 시간을 들일 수가 없었다. 당연히 작업물의 완성도가 떨어지면서 다른 사람들의 업무에 지장을 초래했고, 동시에 잡으려던 두 마리 토끼가 야속하게 자꾸만 더 멀어졌다. 결국에 가서는 매니저와 디자이너의 역할을 다 하려고 하면 이도 저도 안 되니까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교훈을 꼭 나처럼 직접 고생을 해가면서 배울 필요는 없다. 팀이 4~5명 규모가 되면 관리자로서 팀원들을 관리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개별기여자로서 처리하는 업무를 계획적으로 줄여나가야 한다. 그날의 대화에서 영감을 받아 나는 '작은 승리' 라는 제목의 일기장을 만들었다. 매일 거기에 아무리 사소해도 그날 내가 한 자랑스러운 일을 적었다. 어느날은 일대일 면담에서 유익한 조언을 한 것을 자축했고, 또 어떤 날은 회의를 생산적으로 진행한 것을 칭찬했다. 언젠가 너무 힘들었던 날에는 그런 상황에서도 몇 통의 메일에 신속하게 답한 것을 자랑스럽게 적었다. 매일 밤 감사한 것 다섯 가지를 적으면 더 행복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마찬가지로 자신감을 키우고
- 경험이 언어가 될 때권력과 영합한 지식은 어떤 이들을 배제한다. 그리고 배제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원하는 형상으로 주제를 주조한다. 자본주의의 지식은 어떤 면에서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동시에 일하는 것이 행복이라며 장시간 노동을 하도록 노동자들을 호명한다. 일하지 못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으로, 혹은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위치시킨다. 마찬가지로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지식은 특정한 삶의 방식대로 사는 여성들을 칭찬하면서 추앙하는 한편, 어떤 여성들은 마녀로 낙인찍으며 권력의 주변부로 몰아내고 배제한다. 나는 우리가 지식을 생각할 때, 그 지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는 그러한 지식이 어떠한 존재들을 없는 존재로 가려내어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는지에 대해서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찰이란 어떤 것이 옳고 그르냐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특정한 방식을 되돌아봄으로써, 내가 어떠한 맥락에서 권력자로서 지식과 영합하는지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뻔하지만 되돌아보고 되돌아보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외연이 넓어질 수 있다. 소수자의 숙명이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결국 나부터 바뀌어야 남이 바뀌는 법이다. 우리 모두가 돌봄을 해야만 한다면, 우리 모두가 누군가를 돌보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의 '느린‘ 시간성에 익숙해질 테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의 존하는 그 생명들을 떠올리며 타인의 느림에 조금 더 관대해 질 수 있다. 노동시간이 단축된다는 것은, 결국 지금보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의 양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는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출근시간이 조금 늦어지는 것에 더 이상 분노하지 않을 수 있다. 빨라져만 가는 현대사회에 제동을 걸 수 있다. 물론 노동시간을 단축한다 하여 모든 문제가 급속도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편적 노동자를 돌봄노동자로 설정할 때,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있다. 홀로 아이를 낳은 수많은 여성들은 국가의 보육 시스템에 기대어 아이를 돌보면서 임금노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들 또한 반려동물이나 자녀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하여 자신의 삶을 더욱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자신에 대해 더 잘 들여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미 노동자를 고용할 필요가 없도록 기술은 점점 더 발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실직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는 일부 일자리를 없애는 데 이 기술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나누고, 사람들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우리가 원하는 곳에 쓸 수 있도록 재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배를 불리는 데 기술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실직한 사람들을 구시대적이라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우 리는 그 누구도 고통받지 않는 삶을 위해 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감시해야만 한다. 페미니즘적 시각은 단순히 여성으로 태어난다고 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세상에 질문을 던지면서 훈련되고 학습된다. 그 지점 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어쩌면 내가 마주하기 싫었던 나 의 민낮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을, 나 자신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의 민낯들을 직시할 때, 우리는 성장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보기에 페미니즘은 나르시시즘과 양립할 수 없다. 페미니즘적 시각은 나를 향한 자기애를 덜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체현된다. (…) 앎에 수반되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편리한 방법으로는 불편함을 타인에게 전가하거나 무시하는 것 혹은 공감을 차단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생명이 젊어진 고통에 응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불편을,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을 묻고, 그 답을 찾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삶에 적용해야 사회는 달라질 수 있다. 타인에게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느끼는 고통에 내가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나의 삶을 먼저 변화시켜야 한다.
-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책의 결론:) 행복하려면 섭씨 26도의 화창한 날에, 아름다운 강이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장소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라. 마음이 안정된 사람들에게 더 주위를 기울여라. 연애를 시작했다면 상대와 함께 있을 때 당신이 얼마나 행복한지에만 신경을 쓰고, 당신과 상대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에 관해서는 괜히 걱정하거나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지 마라. 💬작가가 재간둥이스타일;이라 그렇지 사실 전반적인 인상은 랜덤한 fun fact 모음집 느낌이고, 또 의외로 gut feeling이랑 엄청 다른 발견은 없었다. 그리고 작가의 목표와는 달리 이 모음집이 과연 자기계발서로 기능할지도 잘 모르겠음.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 인간의 삶은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특수하니깐요(웃긴 건 맨 앞부분 - 이 책을 누군가에게 헌정하는 문장- 에서부터 그게 너무 드러나버림. 그 문장 v.s. 전체 책의 모든 내용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데이터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시각을 길러주느냐 하면 또 그 역할로서 아주 좋은 책도 아닌 듯하고. 아무튼 전작은 꽤 재밌게 읽었던 것 같은데 이건 그냥 그랬다는 소리..
- 인디펜던트 워커그런데 나는 주로 '왜'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요즘처럼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에 방법을 몰라서 못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왜'를 몰라서 어려움을 겪는다. 인스타그램을 어떤 주제로 운영할지 정한다고 해도, 내가 왜 그 주제를 다뤄야 하는지 모르면 절대 지속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효과가 안 나오면 흔들리기 일쑤니까. 좋아하는 걸 하면 이유가 명확하다. 좋아하니까. 다른 이유는 사실 필요 없다. 결국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한다. 대중이라는 개념은 점점 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취향은 점점 더 세분화되고 있다. 모두가 좋아하는 답을 찾을 필요가 없는 거다. 좋아하는 걸 하면, 그걸 좋아해 주는 다른 사람이 분명 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기 자신에 관한 질문이 정리된 사람. 내가 자신에게 뭘 물어봐야 할지를 알고 있고, 그 답을 확신하고 있고, 그 답이 변화하는 걸 지켜보고 있고, 그 답이 엇나가지 않도록 유의하는 사람이다.
- 내 일로 건너가는 법완전한 자아는 완벽한 자아가 아니다. 오직 자아실현을 위해 직업을 골랐다고 생각했다. 나의 관심사와 능력과 꿈에 꼭 맞는 직업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직업이 주는 단단한 보상이 나를 일어서게 했다. 부인할 수 없었다. 직업은 나의 현실적인 기반이자 매일의 환경이었다. 그렇다면 이 기반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이 환경을 나에게 더 쾌적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그 작업을 해야만 했다. 처음으로 뭔가를 오래 해보고 싶어졌다. 도대체 '안전하다는 감각'은 무엇일까? 그것은 적어도 이 팀에서는 당신이 안전하다는 확신이다. 어떤 의견을 내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어떤 어려움을 토로해도 같이 해결해줄 사람이 있다는 확신. 그게 꼭 팀장일 필요는 없다. 옆자리 선배가 될 수도, 앞자리 후배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이 당신의 의견에 반대하더라도 상처를 입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당신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팀의 결과물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한 의견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설사 틀렸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당신의 지위가 흔들릴 일은 없을 것이다. 팀 밖으로 내쳐질 일도 없을 것이다. 이 안에서는 안전한 것이다. 그러니 각자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공을 던지면 된다. 시선을 넓게, 더 높이, 더 멀리 둬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때론 시선을 더 좁게, 더 작게, 더 부분으로 가져가야만 할 때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두고 나머지를 다 소거해버리기. 어디에 시선을 고정시켜서 이 시기를 건너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나에게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 나는 그때 그게 일이었다. 여긴 회사니까. 우리는 패배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승리의 이유도 알지 못한다. 패배할 때와 마찬가지로 승리할 때에도 우리는 최선의 공을 던졌으니까. 다만 우리가 그 시간을 보내며 우리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만을, 단단히 결속된 우리 사이에 패배감이 앉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만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나의 물 이론에 따르면 당신은 그 모두가 될 수 있다. 당신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달리 반응할 테니. 물론 하루아침에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세하게 사람들의 모양이 바뀌어갈 것이다. 이제 당신에게 달려 있다. 당신이 일하고 싶은 팀 모양에 맞춰 당신의 모양을 정해라. 당신 주변 사람들이 당신의 그 모양에 맞춰질 것이다. 이 이론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 메모 -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옳게 만들기 - 회의의 원칙 - 지각은 없다.(서로의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 아이디어 없이 회의실에 들어오는 것은 무죄, 맑은 머리 없이 회의실에 들어오는 것은 유죄 - 모두의 아이디어에 마음을 활짝 열 것(직급 무관) - 말을 많이 할 것. 비판과 논쟁과 토론만이 회의를 회의답게 - 회의실 안의 모두는 평등하고 아무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팀장의 아이디어에 대해서 무자비해야만 한다. 누가 말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했느냐가 중요하다 - 아무리 긴 회의도 한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 들어올 땐 텅 빈 머리로 들어오더라도 나갈 때는 각자 할 일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 내 60대의 모습을 상상하기 ex. 햇살이 들어오고 나무가 보이는 창 앞에 20대부터 써온 원목 테이블을 두고 글을 쓰고 있음(남편은 옆방에 있음) *옆방에 있음의 포인트 =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각자의 방에서 하기, 하지만 나와서 밥은 같이 먹을 거임!
- 경제의 질문들💬 이해하긴 쉬운 내용들이었는데 수면부족 상태로 읽어서 그런지 머릿속에 남았는지는 모르겠음 다음에 이런 책 읽으면 메모 좀 하면서 읽어야지…
-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은 보통 짧게 끝나지 않는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우리가 매 순간 하는 선택들이 켜켜이 쌓여 기나긴 대답이 되기 때문이다. 그 선택 중 일부는 환경이 만든 것이고 일부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며 많은 경우 구분할 수 없는 회색 지대에 놓여 있다(“박사님이 저를 거기에 밀어넣지 않았더라면, 전 그 애를 안 죽였을 거예요.”). 이 소설이 애들을 경기장에 밀어넣고 싸우게 한다는, 이미 너무 익히 알려졌고 히트 친 설정의 디스토피아 소설의 프리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저 질문과 대답들은 당연하면서도 꽤 깊이 들어간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는 헝거 게임 시리즈를 매우 좋아했지만 독재자가 어떻게 독재자가 되었는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그의 존재를 빌려 들어간 여정은 꽤나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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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운 도시나는 고독에 머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라는 것을. 맨해튼처럼 엄격하고 논리적으로 구축된 도시라 할지라도, 도시에 머물게 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길을 잃는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좋아하는 장소와 선호하는 경로들이 집합된 정신적 지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복제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미궁이다. 그 시절 내가 만들었고 지금도 계속 만들고 있는 것은 내 경험과 타인들의 경험으로 채운 고독의 지도다. 나는 외롭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것이 삶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지 알고 싶었고, 고독과 예술 사이의 복잡한 관계의 지도를 그려보고 싶었다. 내가 어떤 모습인지는 알고 있었다. 호퍼의 그림 속 여자들 같은 모습. 아마 <오토매트Automat> 속 여자. 클로슈 모자에 녹색 코트를 입고, 검은 어둠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두 줄기 불빛들이 반사되는 창문을 뒤로 하고, 커피잔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 아니면 헝클어진 머리를 틀어 올리고 침대에 앉아 창문 너머로 펼쳐진 시내를 바라보고 있는 <아침 해Morning Sun> 속 여자. 아름다운 아침, 햇살이 벽을 씻어내리고 있지만, 그녀의 눈과 턱에는 뭔가 황량한 기운이 배어 있고 가느다란 손목은 다리 위에 교차되어 놓여 있다. 나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구겨진 침대 시트 위에서 표류하며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그저 계속해서 숨만 쉬려고 애쓰면서 앉아 있다. 가끔씩 어떤 경험을 정확히 표현하는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굳이 의식하거나 자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표현이 너무 예지적이고 강렬해서 그 경험과의 연관성이 지워지지 않는다. 호퍼는 자기 그림이 어떤 주제로 규정될 수 있다거나, 고독이 자신의 전문 분야 또는 중심 주제라는 생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고독이라는 건 남용되었어.” "호퍼가 그린 도시 풍경들은 고독의 핵심 체험을 복제한다. 벽에 에워싸여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동시에 거의 견딜 수 없을 만큼 노출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본질적인 형태의 고독은 그것을 겪는 사람이 알려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알려줄 수 없는 여느 감정 체험들과 달리 그것은 공감을 통해 공유될 수도 없다. 제1 인물의 고독이 밖으로 표출될 때 주위에 불안을 조성하는 성향 때문에 제2인물의 공감 능력이 저하될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만들었고, 받을 수 있는 온갖 비난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중화했다. 아무도 그를 '어설프게 모방'할 수 없었다. 그 자신이 벌써 다 모방해버렸으니까.” 비판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지만, 워홀이 자신의 결점을 강화한 열성과 철저함의 수준에는 도달하기 어렵다. <소, 소설>은 말이 연결되기 위한 최단 경로는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고독이 친밀함을 향한 욕구라고 정의된다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 말을 누가 들어주고, 생각과 경험과 감정을 공유해야 할 필요다. 친밀함은 관련된 자들이 자신을 알리고 싶다는, 드러내고 싶다는 의사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로 드러내야 할지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충분히 소통하지 않고 타인들에게 숨겨진 상태로 있거나, 아니면 너무 많이 드러냄으로써 거부당할 위협을 무릅쓰거나. 크고 작은 상처, 지루한 강박, 필요와 수치심과 갈망의 질병. 나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지만, 가끔은 누군가의 팔을 붙들고 모든 일을 불쑥 말해버리고 싶었다. <칼날 가까이>가 출판된 지 아직 얼마 안 된 때였으므로, 대화가 끝날 무렵 골딘은 워나로위츠에게 그의 작품에서 가장 이루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사람들이 소외감을 덜 느끼게 하고 싶어. 나에게 제일 의미 있는 건 그거야." 그가 말한다. "이 책 내용 가운데 일부는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고 믿으며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데서 느낀 고통이라고 생각해.” 1분 뒤 그는 덧붙인다. "우리는 서로가 소외감을 덜 느끼도록 충분히 열려 있음으로써 모두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 이 말
-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누구에게 권력을 위임해야 세상이 좋아질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 물어야 할 것은 ‘당신이 통치자가 된다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겠는가’다. 물론 제대로 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모두가 통치자에 준하는 정보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가능할까? 지금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 다시 질문은 ‘어떤 민주주의인가’로 수렴된다.
- 호러북클럽이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자신의 식욕을 제외하고 그 어떤 책임도 질 일이 없는 남자와 삶 전체가 끝없는 책임으로 점철된 여자들을 싸움 붙이고 싶었다. 드라큘라와 내 어머니를 싸움 붙이고 싶었다. 이제부터 보게 되겠지만, 그건 공평한 싸움이 아니다.
- 개는 천재다개, 늑대, 침팬지 그리고 여우를 통해서 이제 가축화의 초기 단계, 그리고 사회적 기술에 대한 가축화의 효과가 명확해졌다. 인간과 개의 놀라운 관계는 늑대 집단이 인간 근처의 식량원을 이용하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ed)된 동물과 마주치는 중에 인간은 이 원시개가 인간의 몸짓과 목소리에 반응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개들은 촌락 주변에 살면서, 낯선 사람이 접근하면 크게 짖어 조기경보시스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기근이 들었을 땐 결정적인 식량원이 되었을 것이다. 늑대 뒤를 쫓아다니면서 사냥한 먹이를 구하는 까마귀처럼, 이 원시개들은 인간 사냥꾼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면서 사냥 현장에서 짐승을 도살할 때 버려지는 찌꺼기를 주워 먹었을 것이다. 탄자니아에서 오늘날에도 하드자(Hadza) 수렵채집인이 꿀잡이새를 따라다니며 꿀이 찬 벌 둥지를 찾는 것처럼, 인간은 이 원시개가 먹이를 쫓거나 짖기 시작할 때 주의를 집중했을 것이다. 개들이 먹잇감을 구석에 몰았을 때 인간은 무기를 투사해서 사냥을 끝냈을 것이다. 그러는 내내 자연선택은 계속 인간에게 가장 우호적인 개를 선호했다. 실험 연구에서 개들은 실험군 여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개들과 함께 있기보다는 인간과 함께 있기를 더 좋아했다(인간의 손에서 자란 늑대는 인간보다 다른 늑대를 더 좋아한다). 이렇게 인간을 좋아한 덕분에 개는 촌락의 외곽에서 집 안으로 들어와 화롯가 깔개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합치자 훨씬 더 큰 질문이 떠올랐다. 다른 종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자연선택이 자기가축화를 낳을 수 있다면, 다른 야생종도 스스로를 가축화할 테고, 거기엔 인간도 포함될 것이다. 인간의 인지가 이토록 정교해진 것은 가장 영리한 사람들이 생존해서 다음 세대를 낳았기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이 말한다. 하지만 어쩌면 생존의 이점을 가진 사람은 더 친근한 사람들이었을지 모르고, 개와 여우처럼 이 사람들이 우연히 더 영리해졌을지 모른다. 개의 자기가축화는 인간 본성에 관한 어떤 진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까?
- 빅토리 노트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작지만 단단한 바위섬이 하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나는 ‘빅토리 노트‘를 펴볼 때마다 나의 태어남을 기뻐하고, 작고 연약한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보듬어준 누군가가 세상에 있었음을 문장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해마다 더욱 누렇게 바래어가는 종잇장 사이에서 인생의 비밀은 더욱 값지게 숙성되어 가는 듯하다. “쾌활하고, 적극적이고, 고집쟁이고, 귀엽고, 착하고, 예쁘다.” 위에 저렇게 패악질을 부리고 난장판을 만든 나의 만행을 다 서술한 뒤 ˝착하고, 예쁘다˝로 끝나다니? 누군가는 습관적으로 쓴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엄마는 습관적이고 인사치레 같은 말을 안하는 분이다. 종종 서운할 정도로 가차 없다. 오냐오냐 스타일과도 거리가 멀다. 이 일기에서도 엄마는 『난중일기』풍의 문체로 사실들만 간명하게 썼기 때문에 엄마가 실제로 저 모든 행패에도 불구하고 나를 착하고 예쁘게 보았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어른이 되면 단골바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지애호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깊고 넓은 세계가 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살펴야만 보이는 세계, 손으로 더듬어야만 느낄 수 있는 세밀한 결, 여러 번 곱씹고 음미해야만 알 수 있는 기쁨이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된 사람이 보는 세상은 이전과는 다르다고 믿는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아무리 계속해도 질리지 않는다. 온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좋아해 본 사람은 알지 않을까. 그 마음으로 인해 세상이 달라진다는 걸.
- 알고 있다는 착각새의 눈으로 조망하는 대신 벌레의 눈으로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고 이런 관점을 결합하려는 노력이 중요할 때가 있다. 이렇게 지역적이고 수평적인 집중 연구를 통해 상황을 3차원으로 탐색하고 개방형 질문을 던지고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고민하는 시도도 의미가 있다. 다른 사람의 세계를 ‘체화’하고 공감하는 것도 가치가 있다.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방식은 대개 깔끔한 파워포인트나 현란한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위에서 조망하거나 빅데이터로 바라보는 관점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 음 이 책 내용 전체가 왜 기업이 인류학자를 고용해야 하는가 라는 일종의 자기PR로 들리는데 뭐 그걸 인류학자만 할 수 있냐라고 생각하면 또다른 사회과학 전공자로서 잘 모르겠기도 하고 인류학이 그런 게 좀 필요한 학문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는 너무 절실해 보여서 좀 마음이 아플 지경이기도 하고(대충 당사자성 발언)
-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 비행기에서 괴로운 시간을 버티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 흔히 여성주의를 붙이고 나오는 앤솔로지는 그 기획만큼의 거창함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건 하나하나 다 재밌고 소설 개수에 비해 퀄이 일정하게 나쁘지 않아서 좋았다. 재밌었음.
- 불과 피
- 일을 잘한다는 것과거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해결책의 양을 크게 웃돌았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해결책이 과잉 상태가 돼가면서 해결책이 양적으로 많아지는 양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미‘를 만족시켜야 하는 오늘날에는 양적 문제보다는 질적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 핵심은 새로운 문제 설정이란 감각과 예술의 영역에 속한다는 겁니다.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보면 이미 해결 과잉 상태지만,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보이는 거죠. 전방위적으로 감각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 감각이 있는 사람은 그저 감각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을 발휘할 자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직감이 실로 뛰어나죠. 처음에 망설여진다면 일단 해보고,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하고 생각되는 분야에서는 손을 떼는 상황 판단력을 길러야 합니다. ... 물러날 때와 나서야 할 때를 아는 것, 이 또한 일을 잘하는 사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 공정 이후의 세계언젠가 주디스 버틀러는 발표를 하던 도중 지나가듯 말했다. “우리의 내면을 향하는 분노”와 “바깥세상을 향하는 폭력”의 에너지를 자기돌봄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그가 가끔씩 툭 던지는 여러 멋진 말들 중의 하나였겠지만, 나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를 놓고 몇달을 씨름했다. 그렇게 고심한 끝에 나는 구조적 부정의에 대항하는 비폭력적 실천의 하나로 급진적 자기돌봄의 원리들을 써내려갔다. 신자유주의적 자기 보전이 아닌, 휘발성 쾌락의 범주를 넘어서는, 그리고 모두의 생명을 구하는 자기돌봄은 결국 연대와 공동체를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하다. 나 자신과의 연대, 소수자와의 연대, 상처 입은 자들과의 연대, 곁에 있는 나의 공동체와의 연대를 통해 급진적 자기 돌봄을 서로 지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에게는 나 자신과 나의 공동체를 함께 돌보는 윤리가 필요하다. “시대와 불화하는 삶”이라는 좌우명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미래는 지금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의 한계를 느낄 때, 현재의 사회 시스템에 순응할 수 없을 때, 법이 제정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때, 그 때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그리며 미래를 이미 실천하는 정치를 꿈꾼다. 소수자들과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 비전에 대한 공통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협력, 목표를 위해 삶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실천을 모색한다. 더 나은 세계를 원한다면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고 믿어야 하고, 또한 그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혹시 여전히 손을 잡기가 망설여진다면, 나는 당신에게 미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뜬구름과 같은 그 무엇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조금씩 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구원자를 기다리며 미래를 영원히 지연시킬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하다.
- 나의 첫 ETF 포트폴리오
- 이제 나가서 사람 좀 만나려고요아무래도 나는 매번 대성공을 거두는 그런 코미디언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원래 웃기게 타고난 사람도 아닐뿐더러 매일 저녁 공연장을 찾아가 신인 코미디언들의 5분짜리 엉터리 개그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떤 날 밤에는 나도 꽃을 피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건 영적이고 우아한 변신과는 거리가 멀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나는 혹독하고도 공격적인 훈련 과정을 겪어야 할 테고, 거울을 보며 끊임없이 스스로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 하며, 몇 시간씩 연습도 해야 할 터였다. 아침에 일어나 베개에 대고 소리도 질러야 할 것이고, 남편을 향해 드롭킥을 날리고 싶은 욕구도 꾹 눌러 참아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핀 꽃도 꽃은 꽃이었다.
- 벌레를 사랑하는 기분💬 늦게 공부와 연구를 시작하면서 겪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게 만들었던 열정이 굳이 말로 서술하지 않아도 문장마다, 문단마다 묻어나서 좋았다. 이 사람이 곤충에게 느끼는 매혹과 경외감을 읽을 때, 아 이것은 감명받기 위해 공감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명징한 ‘기분’이구나 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이래서 나는 학자가 될 사람은 아니었다고 깨닫지만,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가 자신이 공부하는 대상에 대해 가진 사랑을 잠깐씩 엿보는 것은 즐거운 일인 것 같다.
- 헤어질 결심 각본
- 단정한 반복이 나를 살릴 거야내가 나를 지켜내는 방법은 단순했다.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것. 비록 오늘 하루가 별 볼 일 없었더라도, 돌이켜보면 삶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왔던 것 같다. 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누구를 사랑하는지. 그 대답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깃들어 있었다. 보송한 수건 한 장, 시원하게 들이키는 물 한 컵, 한 걸음 내딛는 산책, 한낮의 따사로운 햇볕, 마음을 밝히는 문장 한 줄 그리고 바로 지금의 나. 삶은 여전히 두렵지만 앞으로 이어질 뻔한 날들도 계속해서 살아보고 싶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하루를 생의 전부처럼.
- 계속 가봅시다 남는 게 체력인데💬 아 우리 엄마 같아서 약간 ptsd 아냐아냐 이런말을 하면 안되지..
- 나, 프랜 리보위츠예술이라는 주제를 두고 하는 가장 맥빠지는 말은, 아마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말일 것이다. 좀더 일관되게 현실에 들어맞았더라면 분명 의지가 되는 문장이었으리라. 삶의 예술성은, 가장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절정에 달한다는 걸 파헤쳐보면 금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삶이란 대개 기교를 모방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네 삶이 마크라메 화분걸이보다 쇠라의 작품과 더 닮아 있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예술에 관해서라면, 삶은 그 무엇보다 그 틀을 모방하는 데 발군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여기서 ‘것’이라는 단어 사용은 유달리 구체적이다. 이 표현에 이끌리는 사람들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실제로 것들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도자기 만들기는 ‘것’이고, 글쓰기는 일이다.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단어를 만든 시대라면 머지않아 ‘생각 스타일‘이라는 개념 또한 고안해내리란 건 안 봐도 뻔하다.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라이프‘와 ‘스타일‘ 둘 다 갖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 표현에는 총량이 일부의 합보다 적은 완벽한 예시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생각 스타일을 정의하는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삶이란 잠 못 이룰 때 하는 일이다.
-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의견을 형성할 때,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이 던지는 질문은 ‘이 정책이 나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가’이다. 하지만 정치 참여자들은 정체성을 내세워 반응한다. 정치 참여도가 높은 시민들이 던지는 질문은 ‘이 정책에 대한 지지는 나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이다.” 다시 말해 심리적 분류는 정체성 정치의 강력한 원동력이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핵심적인 심리적 전망과 결부시킬 정도로 충분히 정치에 신경을 쓴다면, 정치는 당신의 심리적 자기표현의 일부가 된다. (…) 이는 좌파 진영에서 오랫동안 고민해온 현상, 왜 노동자 계층 유권자들이 공화당을 지지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왜 노동자 계층이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삭감하고 빈곤층을 보호하는 노조를 무너뜨리는 정당에 투표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느냐는 것이다. 존스턴, 러빈, 페데리코가 발견한 것은 사람들이 정치에 더 많이 참여하고 투자함에 따라 만족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이익’이 바뀐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부가 정치적 행동에 있어서 유일하고 합리적인 동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실수다. 더 정치적이 될수록 자기표현과 집단 정체성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다. 존스턴, 러빈, 페데리코는 “시민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적 의견을 형성할 때 물질적인 관심사가 목표가 아닌 경우가 많다”라고 썼다. (…) 당연히 정치에는 실제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세금을 두고 일어나는 싸움, 전쟁을 할지 말지 여부, 동성결혼 인정 여부, 보편적인 의료보험 법안을 통과시킬지 여부 등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많은 생각과 논의가 필요한 이해관계들이다. 이것들은 우리 뇌에서 더 최근에 진화한 부분에 존재한다. 우리가 느끼기 위해서 노력을 따로 해야 하는 이해관계다. 우리가 본능적·정서적으로 감지하도록 진화한 이해관계는 내가 속한 집단이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외부 집단이 우리를 위협하는지 아니면 안전과 번영을 위해 우리가 힘을 모으고 있는지 같은 것이다. 누군가의 정체성을 활성화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협박하고,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위를 잃는 경험은(그들의 지위를 빼앗는 게 사회의 정의 실현이라는 말을 듣는 경험은) 그 자체로 급진적이다.
- 매일을 헤엄치는 법
- 묘사하는 마음<라스트 제다이>는 포스란 그것을 갖지 못한 자의 운명을 좌우하는 ‘귀족들'의 특권이나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보위하는 군사력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새롭게 규정된 포스는 계급과 혈통에 무관하게 누구나 닿을 수 있는 힘이되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계속 탐구해야 할 에너지에 가깝다. 이것이 혁명적인 결단인 까닭은 선행한 6부작을 통해 시스에서 퍼스트 오더로 이어지는 악을 막아낼 유일한 힘으로 알려졌던 제다이 기사단의 존재 이유를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포스가 선악을 떠나, 이미 존재하는 정치권력을 호위하는 무력으로서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조지 루카스의 프리퀄이 심지어 혈중 미디클로리안 농도로 포스의 서열을 정했던 것을 상기하면 지각변동이다. 7편의 부제에서 ‘깨어난 포스’는 그저 이번엔 제다이 쪽이 서브권을 가졌다는 이정표가 아니라, 은하계 모든 이름 없는 자들에게 잠재된 포스의 각성이 도래했다는 선언이었던 셈이다. (…) 다스 베이더의 혈통에서 자신이 특별하다는 근거를 찾는 카일로 렌에게는 권위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고,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앞 세대를 제거할 수 있다. 반면 레이는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자유롭다. 레이에게는 모델이 아니라 선생님이 필요할 뿐이다. 외부에 의지하지 않는 단단한 중심을 가진 레이는 불안하지 않기에, 로즈의 대사처럼 대립하는 대상을 없애지 않고 필요한 바를 취할 수 있으며, 사랑하는 것을 지키면 족하다.
-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강간은 진화의 산물일까, 남성 중심 사회의 산물일까? 진화론의 역사는 이런 질문 자체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가르쳐 준다. 강간의 진화를 설명하려 한 진화론의 여러 가설이 일찍부터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거나 포함할 수 있는 길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적 요인의 설명과 양립 가능한 진화론의 가설을 더 드러낼 때다. 진화론은 다양한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효과적인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많은 선구자가 그랬듯, 앞으로 더 많은 여성이 진화론의 친구이자 비판자가 될 수 있다. 나는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호기심’에서만 출발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연과 사물이 나의 몸, 나의 삶과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인지하는 어른의 때 묻은 현실 감각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책에서 함께 보았듯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는 자연과 사물의 세계와 나의 연결 지점에 뿌리내리고 있다. 저마다 출발점은 난자 냉동에 관한 고민일 수도 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받았던 쌍꺼풀 수술일 수도 있으며 화장품 광고만 띄우는 SNS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나의 삶에서부터 시작하는 과학기술이다.
- 소비단식 일기
-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의 경우 이 사람의 자의식과 내 결이 맞으면 그거 대로 뭔가 좋으면서 수치스럽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으엑, 하고 마는 듯.
- 어느 날 멀쩡하던 행거가 무너졌다
- 떼인 근력 찾아드립니다
- 언캐니 밸리하지만 나는 효율적이지 못한 내 삶을 좋아했다. 실리콘 밸리는 하나의 행동 양식이자 사상이었고, 팽창인 동시에 소멸이었으며, 축약된 세계이자 의미심장한 증상이었다. 꿈이었고, 어쩌면 신기루였다. 사람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실리콘 밸리로 퇴근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그 반대가 맞는지도 모호해졌다. 양쪽 모두 사실인 듯했다. 전체 노동 인구 가운데 테크 노동자는 10퍼센트 남짓이었지만 영향력은 그 이상이었다. 도시는 계속해서 변화했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미션 디스트릭트에는 갓 도착한 외지인들을 겨냥한 전단지가 덕지덕지 나붙었다. ‘테크 일자리는 벼슬이 아닙니다. 공공장소에서 정중하게 행동하세요. 천박한 출세주의를 드러내지 마세요.’ 이런 점에서 테크 업계는 출판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저 돈을 벌려고 일한다고 말하는 것은 선을 넘는 짓이었다.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쩌면 테크 업계뿐 아니라 우리 세대 전반의 특징인지도 몰랐다. 일이 시간과 노동력을 돈과 맞바꾸는 거래라는 사실을 왜 이렇게까지 쉬쉬하는 거지? 이미 다들 그렇게 일하고 있는데.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재밌어서 일하는 척해야 하는 거야? 나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한 믿음은 지난 20년간 내게 주입된 교육과, 부모님의 가르침과, 사회경제적 특권과, 우리 세대의 낙관이 버무려진 결과물이었다. 다만 나는 그 남자들과 달리 원하는 것을 똑부러지게 말하는 법을 배우진 못했다. 따라서 자신에게,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해 스스로가 잘났다고 떠벌리는 그 남자들에게 묻어가는 것을 안전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옛날 영화로 제한해 말한다면, 다양한 시공간의 영화들을 보는 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현재는 어쩔 수 없이 과거의 표면에 불과하고 역사는 늘 역동적이고 입체적입니다. 우리가 현재의 어느 지점에 있고 어느 속도로 움직이는지 알려면 과거를 봐야 합니다. 모든 과거를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위치가 어디인지 측량할 수 있을 만큼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단순한 삼각측량을 하려고 해도 최소한 과거의 두 지점이 필요하지요. 최근 들어 여성 서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지면서 이 장르의 영화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많이들 여성 서사라는 개념을 탈색되고 소독된, 투명하고 올바른 무언가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재료와 동기만으로는 생명력 있는 무언가가 나올 수 없습니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기고 이야기의 통제권을 쥐고 아무 거리낌 없이 욕망과 생각을 터트리고 그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운 난장판 안에서 가능한 모든 조합을 찾으며 최대한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 진보적이지도 않았고 페미니스트라는 자의식도 없었으며 그냥 통속적인 오락거리를 추구했을 뿐이지만 자신의 욕망에 솔직했고 창작자와 배우로서 자존심이 만만치 않았던 카메라 앞과 뒤의 여자들이 남자들의 벽 사이에서 쌓아올린 결과물들을 돌이켜 볼 때입니다.
-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지구 역사의 99.998퍼센트는 사람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진행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므로 정말로 지구 전체를 두고 따져본다면,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행동은 죽어가는 지구를 살린다거나, 지구의 운명을 타락에서 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보다는 지구 역사의 최근에 등장해 겨우 적응하는 데 성공한 우리 사람 종족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매달리는 일에 가깝지 않나 싶다. 나는 기후변화 문제를 대홍수 전설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후변화는 지구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선 가뭄과 홍수, 폭염과 한파로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힌다. 우리는 기후변화와 관련된 재난과 사고로 희생되는 사람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지, 분노한 지구가 인류를 징벌하는 최후의 순간을 피하기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구름과 바람에 사죄하기 위해 기후변화 문제에 대처하는 것은 아니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왜냐하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언니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늘 반복적으로 오해해왔다고 말했다. 의사들에게서 오진을 받고, 급우들과 이웃들, 부모, 나에게서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이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 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구름도 생명이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 누가 알겠는가. 해왕성에는 다이아몬드가 비로 내린다는데. 그건 정말이다. 바로 몇 년 전에 과학자들이 알아냈다. 우리가 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다.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 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 IT 회사에 간 문과 여자여성이자 이란 출신 최초로 수학계 최고 권위상인 필즈상을 수상한 마리암 미르자하니 교수는, “수학을 하면서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내가 재능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개인 안에 내재된 창조성을 발현해줄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가 좇아왔던 방향이자,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듣고 싶던 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내게 재능이 있다는 자신감을 선물로 주면서, ‘내가 하면 될 거야. 왠지는 몰라’라는 뻔뻔한 태도를 갖고 싶다. ‘일단 해 보기’의 선순환 구조는 나를 반드시 장기 우상향 곡선에 태워줄 것이다. 나는 보편탈트 붕괴 직전에야 회사의 ‘보편’에 맞출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은 회사에서 오래 살아남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는 거였다. 그러려면 일을 잘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내 삶의 태도를 정의하고 하루하루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삶은 일과 사람과 업무를 마주할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연속이다. 작은 생각들이 모여 말 한마디가 되고 그 한마디들이 모여 내 행동이 되고, 연속적으로 행동할 때 경험이 된다. 내 존재를 증명하는 경험들은 지금의 내가, 앞으로의 내가 된다. 근거를 갖춘 표현을 멈추지 않는 것, 생산적인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이걸 매일매일 작게라도 표현하는 것. 나는 이것들이 내 삶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잊을 지경까지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송곳으로 남는 편을 택했다. 회사를 다니는 한 대체 가능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말은, 우리가 스스로의 경영자가 돼야만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일’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끌어내려면, 최선을 다해 이 일을 사랑해야 한다. 대체될 존재라고 생각하고 대체될 존재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 이 굴레를 끊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 정한 원칙은 일과 사람은 사랑하되 회사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순위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일에 대한 사랑과 회사에 대한 사랑을 분리하는 건 너무 어렵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보편적인 기술을 터득할 수 있는 일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 그래도 이 일이 내 이력서에서 어떤 의미인지 꾸준히 생각하며 지내야 한다. 그래야 어쩌다 보니 일을 사랑하게 된 인생을 지킬 수 있다. 회사가 주는 상황은 우리를 밑도 끝도 없이 끌어내릴 수 있기에 ‘회사’의 공간을 줄여나가고 내 ‘일’의 공간을 넓혀나가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내게 야망은 드라마 속 악역을 위한 재료도 아니고 불안을 심어주는 요소도 아니다. 그저 내 삶의 주인으로, 주어진 삶을 잘 써보겠다는 다짐일 뿐이다. 야망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뜯어보면 사실은 이렇게 소박하고 일상적인 열망의 집합에 불과하다. 야망이 너무 멀고 크게 느껴진다면 노트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보면 된다. 그게 우리의 야망이다.
- 블러드 차일드“만약 이게 제가 하는 일이라면, 왜 당신을 흑인 여성으로 보게 되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린 거죠? 당신을 백인이나 흑인 남자로 보는 것보다 더 진실인 것도 아닌데요?” “말했다시피, 너는 삶이 너를 준비시킨 대로 본단다.” 그런데 내가 누구란 말인가? 내가 글을 통해 하는 말에 왜 누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나? 나에게 할 말이 있기는 한가? 맙소사, 나는 SF와 판타지 소설을 쓰고 있었다. 당시 직업으로 SF를 쓰는 작가는 거의 백인 남자였다. 내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글쎄, 어쨌든 그만둘 수 없었다. 긍정적인 집착이란 두렵다거나 의심이 가득하다는 이유만으로 멈출 수 없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집착은 위험하다. (...) 의심은 온갖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SF가 흑인에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어떤 종류의 문학이든 흑인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과거, 미래, 현재에 대한 SF의 사고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대안적인 사고와 행동을 경고하거나 고려하는 SF의 경향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과학과 기술, 혹은 사회 조직과 정치 방향이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SF의 탐구는 무슨 쓸모가 있을까? 기껏해야 SF는 상상력과 창조력을 자극할 뿐이다. SF는 독자와 작가를 다져진 길 밖으로, ‘모두’가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는 좁고 좁은 오솔길 밖으로 끌어낸다. 지금 그 ‘모두’가 누구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흑인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
-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군인과 소방공무원은 타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위험한 자리를 찾아가는 노동을 반복적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사고를 완전히 예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가장 위험한 자리에서 일하던 이들이 다쳤을 때, 그들을 지키는 것은 사회의 몫이어야 합니다. 2010년 차가운 서해 바다에서 트라우마를 겪고 11년의 시간을 힘겹게 버텨낸 생존장병들에게 상이연금 지급과 국가유공자 등록은 한국 사회가 그들의 노동에 대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인 것입니다. 역사는 후퇴할 수 있고 한국 사회는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연한 사고가 아닙니다. (...) 그것은 거대한 희생을 겪고도 그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바꾸지 못해 발생한 미래입니다. 언젠가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삶을 앗아갈, 아직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또다른 참사의 과거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피해자를 향한 연민을 넘어서야 하고, 슬픔과 분노를 소비하는 행위를 넘어서야 합니다. 김애란 작가는 <침묵의 미래>에서 상처받은 인간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 애도해야 하고, 참사의 상처와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 기념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독일 노동자와 비교할 때 한국 노동자는 일하다가 죽을 위험은 높지만 작업장에서 일하다 다칠 위험은 압도적으로 낮습니다. 국가별로 통계 산출 방법이나 산업구조의 차이가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러한 수치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이 통계 수치들이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한국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상대적으로 숨기기 어려운 사망 사건에 비해 숨기기 쉬운 부상이 더 자주 은폐된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일 것입니다. (...) 통증은 괴롭지만 제대로 고통을 인지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통증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통증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최소한 그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는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고통에 대해 구조적인 무감각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약한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에게 절대로 아프다고 말하지 말라며 입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정부는 아픈 사람이 없다고 발표합니다. 저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른 대립이 더욱 첨예해지기를 바랍니다. 다만 그 대립이 정치적 선동으로 인한 공허한 충돌이 아니라,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현실에 뿌리박은 갈등이기를 바랍니다. 그런 갈등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그런 진통을 겪지 않고 생겨나는 대안은 현실에서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밀레니얼 사회주의 선언> 나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불필요한 고통을 겪는 사회, 인간의 존엄이 운에 따라 주어지고 사회적 카스트가 일상생활 구석구석에 만연한 사회, 원자를 분열시키고 달에 인간을 보내는 문명에서 이런 모든 것이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를 그냥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 *루크 새비지, 자유주의의 이론과 실천, <자코뱅>* > 우리는 이 문제가 무엇이든 서로 돕기 위해 여기에 있다. — *커트 보니것, <나라 없는 사람>* 히스는 좌파의 ‘경제적 문맹’을 한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 그는 좌파가 법을 금지를 통해 사회악을 제거할 수 있는 일종의 요술지팡이로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어리석은 짓을 할까, 아니면 그냥 포기할까의 선택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그 후 대안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나 사실은 저급한 생각이다. 대안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자본주의가 나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신이 더 열심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질병을 치유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질병이 아닌 건 아니다. (...) 우리는 문제를 인정하고 대안을 찾는 데 매진해야 한다. 혁신은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 혁신은 문제에서 시작하지, 답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민주사회주의는 세상이 더 좋아져야 하고 더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며, 우리는 그런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그런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논쟁이 있긴 하지만, 사회주의자는 불의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지구의 번영을 모두가 비슷한 수준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민주사회주의자라는 철학이 반드시 낙관주의적이지는 않다. 스스로의 성공을 예언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사회주의는 착취와 불의가 계속되는 것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수반한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적 태도는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의 태도와 같다. 우리는 성공할 가능성과 상관 없이 참고 견딜 수 없는 조건에 최선을 다해 저항한다. 그 일을 보고 내 삶이 바뀌었습니다. 삶을 바꿀 만한 일이었기에 그들이 함께할 수 있었어요. (...)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불어넣는 것, 이 엄청난 일에 비하면 해고당한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뭐든 바꿀 수 있어요.
-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사람들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알지 못하니 가질 수도 없다. ‘나’와 ‘너’, ‘우리’의 경계에서 빈손으로 헤맬 뿐이다. 이것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결핍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끝없는 가능성이라 말하고 싶다. 우리의 빈손은 잠시 악수를 나누는 동안 충만해진다고, 두 손바닥의 냉기가 맞닿아 온기가 되는 거라고 믿는다. 믿으려는 의지만으론 믿음이 생기지 않아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서른에 공격받는 선량한 이들을 떠올리다 보면, 결국 그들의 가치보다는 서른의 가치를 의심하게 되었다. (...)때로는 서른에 부과된 의무가 오히려 서른의 묘미를 망치는구나 싶기도 했다. 서른이 보장하는 것은 겨우 서른하나뿐일진대 어차피 올 순간들이 두려워 손톱만 씹게 되니 말이다. 서른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내가 겁이 많아 무리수를 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게는 불안할 때마다 인생을 다 아는 척하는 습관이 있었다. 어떤 나쁜 일이 닥쳐올지 전부 안다고 소리쳐두면, 스포일러에 김이 샌 불행이 나를 포기하리란 계산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아는 바가 없었다. 나는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따라 그저 신명 나게 덜그럭거릴 뿐이었다. 이런 방법은 파이팅이 넘쳐 보여도 나약하고 조악한 처세라 오히려 불행의 먹잇감이 되곤 한다. 따지고 보면 나의 얼룩진 1년이 그 증명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서른을 평가하지 않으려 한다. 후회한다거나 후회하지 않는다거나, 좋았다거나 나빴다는 식의 감상도 덧붙이지 않고 넘어간다. 혹여 칭찬만을 허용하더라도 그것 또한 어떤 의미의 다그침이 될 것이기에 차라리 전부 멈추는 것이다.
- 돈독한 트레이닝“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틀에 박힌 듯 살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았거나 목표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잘한 재미에 더 이상 신경을 빼앗기지 않는다. 아침에 무엇을 먹을까, 무슨 옷을 입을까, 어떤 액세서리를 할까 같은 선택은 나에게 별다른 기쁨을 주지 않는다. 그 시간에 오늘은 어떤 글을 쓸지,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하는 게 나에게 더 큰 가치가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기쁨과 행복이 있고 나에게는 그것이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일이다. 나의 작은 기쁨과 행복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그 외의 일은 단순하게 두고 싶은 게 올해 나의 소망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복잡한 듯 보이지만 실은 꽤 단순하다. 단순한 것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는 것. 그것을 더 잘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방법을 연구하는 것. 그것으로 돈을 벌어 생활이 되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도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너무 많은 정보와 뉴스에 노출되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고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에 빠지지 않는 것.결국 내 기분을 좋게 유지하는 것이 내 주변 사람의 기분과 내 통장 잔고까지 보호하는 것이란 걸 늘 잊지 않으려 한다.
- 거인의 포트폴리오
- 욕구들딸은 그런 어머니를 보면 허기와 추구의 세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완전히 압도적인 전투”로 보인다고 말한다. 통신사 칼럼니스트인 엘런 굿먼은 이런 현상을 다룬 글에서 새로 등장한 10대와 20대 여성들이 자기네 어머니들에게서 “스트레스로 나가떨어진 때로는 번아웃된 여성운동의 최전선”을 보고, 넌더리가 난다는 듯 “그런 게 모든 걸 다 가지는 것이라면, 나는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고 되뇌며 돌아선다고 썼다. 나의 젊은 친구도 그 정서에 공감하면서 주장을 더욱 확장한다. 어머니의 높은 성취욕이 진을 빼는 일일 뿐 아니라 위협적이라고도 느끼며, 자신이 그런 어머니의 기준에 도저히 부합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치러야 하는 대가를 보면 그것이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런 게 모든 걸 다 가지는 거라면, 나는 차라리 낮잠이나 자겠어요.” 선택지들이 폭발적으로 열어젖혀진 세계에 이처럼 복잡하게 뒤엉킨 유산이 전해졌으니 모든 예스는 과거의 노와 충돌할 소지가 다분했고 여기엔 당연히 엄청난 혼란이 따른다. 욕구의 밑바닥에 깔린 질문들도 어마어마하다. 무엇이면 만족하겠는가? 당신이 필요로 하는 건 도대체 어느 만큼이고, 무엇인가? 진정한 열정은, 아름다움 혹은 날씬함이라는 외적 목표 뒤에 감춰진 진짜 허기는 무엇인가? 비교적 최근까지도 여자들은 이런 질문을 탐색해보라는 권고를 받은 적이 없었거나, 적어도 깊이 있고 일치되는 견해에 따라 사회가 지지하는 방식으로 권고받은 적은 없었다. 우리는 한 세대에 걸쳐 열어젖혀진 문들과 기존 사회구조의 몰락이 자극하고 장려한, 이른바 포스트 페미니즘적 욕구를 품게 되었지만, 이런 욕구를 갖는 일에 대해 항상 명백하고 확고한 지지나 허가를 받는 것도 아니고, 전통적으로 욕구에 늘 따라붙던 경각심과 경고가 완전히 제거된 것도 아니며, 욕구를 지지해줄 심층적 권리 의식도 아직 갖지 못했다. 자유는 권력과 같지 않다. 이걸 짚고 넣어가는 게 중요하다. 선택할 자유도 실질적인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의 중량이 어떤 식으로든 밑받침해주지 않으면 오히려 안정을 깨뜨리는 느낌,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얄팍하고 힘없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여자들이 한 세대 전보다 더욱 큰 힘을 지니게 된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제약이 훨씬 적고 훨씬 더 자립적이며 정치적으로 훨씬 더 강력해졌다. 적어도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은 있다. (...) 그러나 여자들의 압도적 다수 —80~89퍼센트로 추정된다 — 가 매일 아침 자기혐오의 불안한 동요를 의식며 잠에서 깨고, 스타킹을 끌어올릴 때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바지와 스커트의 지퍼를 올릴 때 배와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착한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여자들이 자기 몸을 부정적으로 느끼는 비율은 남자들의 세 배다. 여성의 80퍼센트가 다이어트를 한 경험이 있고 어느 순간에나 여성의 절반이 적극적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으며 자기 몸이 늘 불만스럽다고 답한 이들이 절반이다. 이런 부정적인 태도는 문화가 매개한 현상이라는 것, (그 자체로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닌) 외모대한 여성의 몰두에 특유의 형태를 부여하고 유독 날씬함에 가차 없이 집중하는 성격을 띠게 만든 것이 문화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외모 전반에 대한, 특히 체중에 대한 불안의 전례 없는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는 그 엄청난 수치는 시각적 표상보다 더욱 복잡한 무엇이 작동하고 있음을, 권력과 유능함과 힘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의식이 아직 본능적 확신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권리와 자격이 본능적이고 영속적이며 실질적인 수준에서 느껴지려면 그것은 자아를 넘어선 영역에 존재해야 하고, 더 폭넓은 차원에서 알려지고 인정되어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여자들은 여전히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다. 지난 40년 동안 이뤄낸 그 모든 개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저 바깥세상을 거의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의회는 여전히 남자들이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미국 최상위 기업 경영진의 98퍼센트가 남자다.
-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나는 사랑의 실패가 필요해서 그를 소개받았다. 말해보자. 그로 글을 몇 편이나 썼는가? 그는 내 문학에 도움이 많이 되었는가? 결론은 아니다. 살며 쓰며 단 두 번 정도, 미술로 치면 어떤 의미의 오브제로써 출연했을 뿐이다. 그는 내 시집의 어떤 리듬을 만들지도, 그 어떤 세계를 짓지도 못했다. 나는 망치고 싶어서 실패하고 싶어서 너를 만났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나는 실패했다. 사랑만 실패하길 바랐는데, 인생사 뜻대로 안 된다고 한동안 나의 문학도 망했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랑에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 새로운 고통을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글이란 낭떠러지로 투신하거나 밀쳐진다 해도 쓸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다만 나는 내게 닥친 이 실패를 포기하지 않았다. 울면서 한 땀 한 땀 적었다. 그러나 애써서 만드는 고통이 과연 창작자로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이것은 확실하다. 내가 그렇게나 가지고 싶었던 인생의 거대한 고통이자 분노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상처가 적어서 실망했던 과거와 행복하다고 믿었던 가정의 기반에 깔려 있었음을, 나는 그를 통해 온전히 배웠다. 지금 도망자들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몇몇을 떠올린다. 나는 그들을 원망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속 깊이는 원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최선을 다했던 내 사랑의 나쁜 결말일 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느끼고 싶은 대로 느낀다. 그들은 여기서 도망자로 적혔으나, 다른 책에는 세상 다시 없을 아름다운 나의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적혀 있다. 독자들도 나처럼 영원히 구분하지 못하리라. 그들이 과연 같은 사람인지. 그들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으므로 나는 계속해서 잘못된 선택과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아마도 너의 세계에서도 나는 영원히 다르게 적힐 것이다.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타이밍이 전부인 세계에서 우리의 시계는 이미 어긋났으므로. 그렇게 내 시 <루즈벨트 아일랜드>에는 세잔과 맥주와 이랑이 나란히 나온다. 그 시의 첫 줄은 금지된 책상에서 적혔다. 그가 바라고 바라던 예보처럼 눈이 아주 많이 왔고, 하는 수 없이 그의 방에 꼼짝없이 갇혀서 질리도록 맨해튼을 보았다. 그날 너와 나는 미국의 법을 어겼다.
- 나에게 맞는 삶을 가꿉니다성실하고 꾸준한 사람이 되고 싶다. 사소한 일을 꾸준히 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 힘을 준다. 그렇게 나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집 앞 자동차 용품점 아저씨다. 매일 아침 7시 30분이 되면 가게 앞을 쓰는 싸리비 소리가 들린다. 싸리비 소리가 들리면 나는 창문을 열고 꼼꼼하게 바닥을 쓰는 아저씨의 규칙적인 동작을 가만히 보곤 한다. 어떤 성실함은 나만 아는 성실함이 있다. 그런 성실함이 삶에 대한 진짜 예의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천재를 동경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무심하게 반복적인 동작을 되풀이하는 사물이나 생명체를 통해 그 안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닮고 싶은 모습을 본다. 나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 쌓일수록 성향과 개별성을 알게 되는데, 나는 에너지가 적은 사람이다. 오감이 예민해서 소진 속도는 빠른 반면 충전 속도는 느리다. 에너지가 소진되면 무기력과 우울증이 오기 때문에 늘 에너지 상태를 확인하고 조금 떨어지면 충전시키려고 한다. 자연에서 산책하며 생각을 비우고, 시끄러운 소리에 노출되지 않으려 하고, 안 맞는 사람과 거리를 두는 편이다. 경제적인 안정감을 주는 금전 관리 루틴을 만들고, 집안일을 쪼개 힘을 적게 쓰는 살림 루틴을 만드는 것도 전부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다. 이렇게 아낀 시간과 에너지를 좋아하는 일에 쓰며 휴식과 충전의 시간을 가진다. 삶의 우선순위에 에너지를 쓰는 에너지 살림의 루틴을 만드는 것이다.
- 다른 의견호기심을 갖지 않는 편이 호기심을 갖는 것보다 언제나 쉽다. 닐 재닌의 말처럼 호기심은 에너지, 시간, 관심이라는 유한한 자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렵다. 당신이 어떤 주제 — 예를 들어 이민 문제 — 에 대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이 나와 다른 경험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차이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려면 지적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데, 나는 그 능력을 투입할 마음이 없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당신이 하는 말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편협한 사람으로 무시해버리는 편이 빠르고 효율적이다. 너무 많은 의견이 쏟아지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선 이렇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러한 충동을 거부해야 한다. 다른 관점에 대한 호기심을 닫아버린다면, 우리는 덜 지적이고 덜 인간적인, 그리고 덜 흥미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톤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부차적인 특성처럼 이야기되곤 한다(”왜 톤을 걱정하죠? 대화 내용에 집중하세요.”). 하지만 톤이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 언어보다 더 깊숙한 곳에 가 닿는 것이기 때문이다. 톤은 우리가 대화 상대와 어떤 관계를 맺기 바라는지 표출하는 매개다. 톤은 대화 상대와 견주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효과적으로 전해준다. 턴불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 아주 능한 이들이 생산적인 질문을 던질 줄 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질문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것(”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이 아니라 상대의 의견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던진 질문 덕분에 의견 제출자가 자신의 입장의 핵심에 반하는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한다(개인적으로 나는 누군가 내 관점을 요약하는 것을 듣는 순간 두려워진다). 이는 진짜 호기심에서 우러나온 질문일 경우에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수사하거나 심문하듯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상대의 의견을 바꾸지 못한다. 그분이 저에게 해주신 최고의 조언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아름다운 퇴로를 열어주라”는 것입니다. 대화를 나누다 의견을 바꾸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충분한 밧줄을 내어주고 충분히 공감해주며 기회를 내어주라는 거지요. 이건 아주 중요한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야!”라고 공격해놓고,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도록 몰아붙이곤 하니까요. 아름다운 퇴로를 열어주지 않은 거예요. 퇴로가 없으면 상대는 반대 의견을 고수하기 위해 참호를 파고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AOC의 말임)
- 어린이라는 세계어린이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개성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고 할 때, 다양하다는 사실상 무한하다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메리 올리버의 문장들이 떠오른다.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활기차고 사무적이다."(『완벽한 날들』 중에서)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은 여성을 도구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성별이나 자녀가 있고 없고가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어린이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린이 스스로 그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안전한 세상은 결국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이다. 우리 중 누가 언제 약자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나는 그것이 결국 개인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 20대 여자“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 자체가 권력이었다. 설명해야 하는 삶과 설명해주는 삶이 가진 권력의 크기는 다르다. 알아서 설명하고 해석해주는 데에서 권력이 작동한다. 정치적 주체로서 20대 여성에 대한 담론이 적은 까닭도 이같은 권력의 속성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여성들은 유권자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시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정치 시스템을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전체를 위한 공공선이다. 이 역량 있는 시민들에게 정치의 가능성을 계속 보여주고, 나아가 그들의 정치력이 시스템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런 시도들이 결국은 기존 정치세력을 ‘지속가능하게'하는 힘이 될 것이다.
- 호호호다만 이제는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는 길만이 나를 진정한 행복으로 데려다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진짜 행복의 모습을 잘 몰랐던 것 같다. 길을 끝까지 걸어서 도착해야만 만날 수 있는 게 행복이라고 착각했던 것도 같다. 오랜 시간 걸으며 깨달은 유일한 것이 있다면, 행복은 도착지에 있는 게 아니라 길 위에 있다는 진실이었다. 목표함 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때론 목표한 곳 없이 떠돌아다녀도 나는 단지 걸을 수 있어 행복했으니까. (...) 그래서 나는 이제 그냥 걷기로 했다. 계속 헷갈리고 오락가락하면서. 쉼 없이 의심하고 흔들리면서.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보면 끝내 어딘가에는 도착해 있겠지. 그러다 보면 마침내 누군가는 되어 있겠지. 사실 꼭 어딘가에 도착하지 않아도, 반드시 누군가가 되지 않아도 좋다. 걷는 동안 행복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멋진 삶일 테니까.
- 젊은 ADHD의 슬픔마음만 먹으면, 글 속의 나는 천사나 돌고래가 될 수 있었다. 스님이나 노숙자, 다음 대선의 서른 살 대통령도 가능했다. 반대로 대통령이 되길 거부한 서른 살도 쉬울 거였다. 좀 더 넓게 역사를 망가뜨리며 나를 섞자면, 닐 암스트롱 대신 최초로 달에 간 인간이나 여성 걸리버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단 생각이 들자, 왠지 절실히도 나 자신이 되고 싶었다. 그건 이상하게 눈물 나는 감각이었다.
-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실무를 잘하는 저연차 여성일수록 관리자가 되기보다 계속 현업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하다. (...) 혼자 일하기도 괜찮은 산업이나 업무 포지션, 성격이라면 전문가 트랙을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일의 특성이나 생활의 안정 때문에 회사에 계속 남기를 택한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은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 “어떤 사람이 조직에서 높이 올라가는지 아세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높이 올라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높이 올라가요. 그런 사람일수록 필요한 일이 아니라 티 나는 일을 주로 하죠.” 일 잘하는 여성들이 곧 높이 올라가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러려면 ‘높이 올라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도니느 게 먼저다. 효율적으로 노를 젓고 더 힘차게 나아가는 레벨의 재미가 있다면, 먼 곳을 조망하며 어느 바다로 나아갈지 방향을 가리키는 스케일의 쾌감은 또 다르다. (...) 자기 자신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자. 높은 자리까지 한번 가보자고 독려하자. 임원이 목표라고 말하고 그렇게 되어보자. 더 큰 예산을 집행하고 더 큰 결정권을 누리는 감각에 익숙해지자. 유능한 실무자에서 멈추는 대신 나만큼 잘하는 실무자를 여럿 키워내겠다는 꿈을 꾸자. 필요한 일만 하다가 소진되지 말고, 티 나는 일도 욕심내고 성과를 널리 알리자. 무엇보다 능력보다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높이 올라가도록 마냥 두고 보지는 말자. 그건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뒤에 올 여성 후배들을 위해서 눈에 보이는 증거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수영을 하던 어떤 여성도 기억에 남는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바다와 자신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었다. 매일 일상의 조각 모음으로 삶이 된다면, 그런 매일로 이루어지는 삶은 아주 단단하고 멋질 것 같았다. 단독자로서 바다에 나서는 짜릿한 감각, 그리고 그때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어떤 힘이 생기는 것 같다. 다만 성년이 된 이후로 20년 이상 살아온 경험을 통해 축적되는, 나와 세상에 관한 빅데이터에서 힘을 얻는다. 나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더 잘 알게 되며, 남들의 눈치를 덜 보면서 원하는 걸 명확하게 추구할 수 있다. 오래 보고 익숙한 내 몸이나 외모에 대해 편안해진다. 예상 밖의 나쁜 일들도 겪어봤기에 세상이나 타인에 대해서 포용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유연하게 대처할 여유와 회복력이 생긴다. 내가 쌓아온 업무의 전문 영역과 네트워크 속에서 잘할 수 있는 일들의 감각이 더 단단해진다. 앞으로도 더 넓은 세상 속에서, 좀 더 자유롭게 움직여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이 있다. 일을 한다는 것은 반복되는 스트레스와 도전 속에 내 자신을 던져놓는 동시에 이 모든 감정의 파도를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일하면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을 한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은 이전의 건조한 평온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 점점 더 나아지기를 소망하고 추구하게 된다. 유한하고 허무한 삶 속에서 우리가 진짜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건, 어떤 환경 속에 나를 내던져보고 깊숙이 들어가 밀도 높게 몰입감을 느낄 때다. 대표적으로 그런 경험이 사랑, 그리고 일이다. 때로 실패할지라도 그 속에 성숙하고 또 새로워지는 경험이 쌓여서 각자 삶의 고유한 이야기를 만든다. 일할 때의 나는 일을 하지 않는 나보다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정원이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듯 인생도 마찬가지다. 바라는 삶을 상상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늘려가며 그 관계의 기억을 자기 삶으로 만들어온 사람이기에 튜더는 91세에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라고 말할 수 있을 거다. 튜더의 정원은 아름답지만 스스로 번 돈으로 토대를 만들어 자신이 설계한 그림을 현실로 만들고 그 속에서 온전히 자기 힘으로 살고 있기에, 그저 주어진 천국이 아니라 쟁취해낸 낙원이다. (...)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냐는 질문에 튜더는 답한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난 이미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았어.” 나는 오직 자신을 위해
- 작별하지 않는다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떨어지지 않는 것들을 격자에 맞추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찢어 떼어 놓는 데 쓰고 있다
- 요즘 애들이번 팬데믹이 우리에게 보여준 대단히 중요하고도 명확한 사실은, 망가지고 실패한 게 단지 하나의 세대가 아니라는 거다. 망가진 건 체제 자체다. (...) 번아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번아웃은 사회적 문제다. 생산성 앱, 불렛 저널, 마스크팩 피부 관리, 망할 놈의 오버나이트 오트밀 따위로 치유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치유책에 끌리는 건 우리 힘으로 이겨낼 수 있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규율과 새 앱, 더 나은 이메일 정리법, 또는 식사 준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만 더하면 우리 삶이 다시 중심을 잡고 기반을 다질 수 있다고, 미디어가 쉽게 장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벌어진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는 일 정도에 불과하다. 일시적 출혈은 멈춰줄지 몰라도 반창고가 떨어지면, 기분은 더 가라앉을 것이다. 열정을 쏟을 만한, 멋진 직업을 욕망하는 것은 굉장히 현대적이며 부르주아적인 현상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욕망은 노동자들이 멋진 일에 따르는 영광을 위해 모든 형태의 착취를 견디게끔 했다. 또한 특정 유형의 직업과 노동을 갈망하게 만드는 수단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평생 단 하루도 일을 하지 않게 된다”라는 수사법은 번아웃으로 빠지는 덫과 같다. 노동을 열정의 언어로 은폐하며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건 그냥 일이지, 우리의 인생 자체가 아닌데도 말이다. (...) 이 방정식은 애초에 번아웃으로 가는 직행 열차인 일과 삶의 통합을 전제로 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고, 일은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된다. 하루 일과(일하는 시간과 일하지 않는 시간) 혹은 자아(일하는 자아와 진짜 자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자신의 자아 전체를 좋아할 수 있는 일에 쏟아 붓는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는 행복과 재정적 안정 모두 얻을 거라 기대하는 하나의 기다린 뫼비우스의 띠만 남는다. 아웃소싱은 직원에게 안정적인 임금을 제공하지 않는다. 직원들의 근무 생활을 개선하지도 않는다. 아웃소싱이 하는 주식시장에서 회사의 가치를 증가시키고, 그럼으로써 주주들과 401k에 가입한 운 좋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다. 아웃소싱된 사람들의 임금을 바닥에 깔고서 말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절실하게 어떤 일자리든 찾으려 하기 때문에 아웃소싱된 노동자들을 채용하는 회사 측에서는 그들에게 안정성, 규칙적인 근무 스케줄, 복지를 제공할 유인이 없다. 이런 근무 상황은 번아웃을 악화시키는 걸 넘어 번아웃을 만들도록 설계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설계의 핵심에는, 선택지가 부족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이용해 큰돈을 버는, 선택받은 소수가 있다. 한때 우버 측에선 운전자가 연간 9만 달러를 벌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 이후 철저하게 반박당했지만) 긱 경제에서 운전을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남는 침실을 빌려주거나, 쉼 없이 마우스를 클릭하는 사람들은 이 일을 n잡으로 삼고 있다. 시궁창 일자리를 보조하기 위한 또 다른 시궁장 일자리인 것이다. 긱 경제는 전통 경제의 대체제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전통 경제가 망가지지 않았다고 설득하면서 전통 경제를 받쳐 주는 존재다. (...) 프리랜서로 일한다는 건 ‘나쁜 건 전부 좋고, 좋은 건 전부 나쁘다’라는 사고방식에 빠진다는 뜻이다. 이는 힘든 노역이 훌륭하게 느껴지고, 실제로 즐거운 활동들이 지울 수 없는 죄책감에 물든다는 점에서. 우버는 바로 이 사고방식을 착취한다. 운전자가 콜을 거부하려 앱을 닫으려 하면, 여러 가지로 변형된 메시지창이 뜬다. “정말 앱을 끄겠습니까? 당신 지역의 수요가 대단히 높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버세요. 지금 멈추지 마세요!” 우리 자신과 가족을 위해, 때론 동료들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길지 않은 여가 시간을 “극대화하는” 전략은, 사실 계급 불안과 직결된다. (...) 다시 말해 엘리트 지위를 강조해 보여주는 여가 활동이나 미디어 상품 감상, 구매를 하고 있다고 남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당신은 곧 당신이 먹는 것이자, 당신이 읽는 것이자, 당신이 보는 것이자, 당신이 입는 것의 총체니까. 사실이
- 언어의 높이뛰기언어는 생각을 담는 도구다. 그런데 그 도구가 생각을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담지 못한다면 언어를 바꾸어야 할까,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할까? (...) 그렇게 배웠으니 그렇게 써야 한다면 우리는 왜 그간 우리의 세계관을 담지 못하는 그 많은 표현들을 새로고침해 왔을까? 우리는 그렇게 배웠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기 위해 잠시의 불편함을 감내했던 우리의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우리가 지양하는 세계관에서 벗어나 우리가 지향하는 세계관이 반영된 표현으로 고쳐가기 위해 우리는 그간 많은 표현들을 바꿔왔다. 언어에는 우열이 존재하지 않지만, 언어 사용자들 사이에는 우열이 분명히 존재한다. 한 언어권 내의 언어 사용자들도 그렇지만 언어권 사이에도 그렇다. 해당 언어 사용자들이 그 언어를 가지고 얼마나 다양한 표현을 해 보았는가에 따라서 언어의 표현력은 달라진다.
- 내일을 위한 내 일💬 어렸을 때 초등학생용 진로 탐색 책을 읽던 게 떠오른다. 책 한 권에 한 100개도 넘는 직업이 같이 실려 있고 한 직업에 한 페이지 분량의 설명이 일러스트와 함께 그려져 있는 책이었다. 매 학년마다 그 중 하나를 장래희망으로 써서 냈다. 그때는 막연히 언젠가 내가 그 100개 중의 하나의 직업을 고르고, 한 24살쯤(!) 되면 그 중 하나가 되어 있을 것이고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면 그녀는 그렇게 디자이너가 되어 평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수준의 결말을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나는 24살은 한참 지났고, 정식으로 일을 한 지는 1년 좀 넘었다. 내 직업은 그때 읽었던 책에는 들어있지 않았지만 내가 (아직까지는) 좋아하는 일이다. 매일매일 큰 사고나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고 무사히 퇴근하는 게 주 관심사였던 날들이 지나가고 이제는 3년 후, 10년 후, 55세 이후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아무리 내가 지금 상태에 만족하더라도, 10년 후에 내가 뭘 하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먹고 살고, 하면서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는 일을 찾아낼까?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 더이상 어떤 직업도 "결말"이 될 수 없다. 이 책을 고른 건 분명 요즘 그런 질문들이 주 관심사가 되었기 때문인데, 솔직히 이 책이 질문의 답이 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분야도 다르고, (서문에 이건 위인전이 아니라고 명시되어 있긴 하지만) 여전히 너무 대단한 사람이들이니까! 그럼에도 언젠가 그들에게도 나와 비슷한 시간들이 있었을 거라고 상상하는 일, 이럴 수도 있고 이런 길도 있다는 걸 다양한 나이와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로 발견하는 것은, 분명 답은 아니지만 도움이 된다. ✦ 정세랑: 쓰다가 막힌다는 말은 글이 문제가 아니라 덜 읽은 거예요. 관련해서 더 많이 읽고 더 자료 조사를 하고 더 많이 사람을 만났어야 했는데 그걸 못했을 때가 막히는 경우가 많아요. 아웃풋이 안 될 땐 아웃풋만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데 인풋을 조정해야 맞아요. 엄윤미: 진짜 리더십이 뭔지, 얼마나 다양한 모습일 수 있는지를 알기 전에 여성들이 CEO 트랙으로 가는 길을 일찌감치 차단하는 게 안타까워요. 어느 순간부터 성공한 리더들의 인터뷰를 보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조간신문을 읽고 등산을 다녀오고 6시면 출근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접해요. 누군가가 나를 돌봐 주고 있고 나는 그들을 돌볼 필요가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루틴을, 성공한 CEO는 이래야 한다는 것처럼 말해 버리는 건 이상한 일이죠. 사람들이 다양하게 사는 여성들을 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꿈의 범위가 달라지니까요. 이상희: 인도네시아에서 토바 화산이 크게 폭발한 적이 있어요. 화산재가 엄청난 규모였기 때문에 넓은 지역에 오랫동안 구름이 드리우면서 지구상의 식물, 동물이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라고 봤죠. 그런데 인도쯤 되는 지역에서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의 석기 공작소가 발견되었어요. 지구가 내일 멸망해도 나는 석기를 만드는, 그런 느낌 아시겠어요? 눈 떠보니까 나는 살아 있었던 거죠. 그래서 오늘 할 일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측 가능한 공정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좋은 교육을 만들기. 인간이 멸종하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는 것보다 그게 더 낫지 않을까요. 멸종은 꼭 필요한 과정이에요. 중생대 지구는 엄청 예뻤어요. 그런데 공룡이 소행성 충돌로 불바다 속에서 죽어갈 때 얼마나 끔찍했겠어요? 하지만 지구는 다시 태어나서 새로운 생명체로 가득 차게 되었어요. 인간이 '우리가 없어지면 이 세상이 끝나는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자만은 없다고 봐요. (...) 우리가 없어진 세상을 준비하기. 그것은 우리가 멸종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에요. 인간은 미래를 생각하고 다음 세상을 생각하니까요.
- 오늘부터 돈독하게그런데 돈 공부를 하고부터 내 돈 독의 크기란 내 상상력의 크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기집 아르바이트나 산후도우미 같은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왜 나는 벌 수 있는 돈의 크기를 200만 원에 맞춰놓고 생각했느냐 하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작은 행복을 발견하길 바란다면 조금 더 큰 세계, 내가 모르는 분야에 도전해서 이제껏 내가 몰랐던 행복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며 받았던 월급은 모두 200만 원 언저리였다. 우리 부모님 역시도 평생을 월 200만 원 언저리로 벌어 나를 키웠다. 작가가 되고 나서 (운이 좋으면) 분기별로 받았던 인세도 200만 원 내외였다. 이렇게 나를 알뜰살뜰 보살피다 보면 누군가에게 어이없는 공격을 당하더라도 ˝뭐야, 내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자식들이 감히!˝ 하고 내가 나의 편이 되어줄 수 있다.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토머스 홉스는 <시민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며, 동시에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한 시민은 다른 시민에게 신이지만, 한 도시는 다른 도시에게 늑대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자연선택이 다정하게 행동하는 개체들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하여 우리가 유연하게 협력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켰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친화력이 높아질수록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강화되는 발달 패턴을 보이고 관련 호르몬 수치가 높은 개인들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욱 성공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내집단의 구성원들이 위협받을 때, 평소에는 타인이나 외집단에게도 무리 없이 잘 느끼던 공감 능력을 차단시킨다. 이에 외부자들도 위협받는다고 느껴 상대 집단을 비인간화하고, 여기서 보복성 비인간화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진다. 서로 접촉하고 교류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위협받는 느낌을 아주 잠깐만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다른 종류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답성 인간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집단 사람들과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사회적 유대감이 더 만힝 형성되며 타인이 지닌 생각에 대한 감수성도 전반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 여자들의 사회나는 “자매애는 있다.”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억압받은 자들의 본능은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는 데 있다. 저항은 아주 드물게 이루어지며 그래서 놀라운 것이다. 자매애는 그냥 생기지 않는다. 여자들이 집단을 이루고, 위아래에 다양한 위치에 포진해 있어야 서로 욕망하고 반목하다가도 저항하고 연대할 수 있다.
- 서점일기점심을 먹고 부모님 집에 가서 산탄총을 찾아, 킨들을 중간에 사라진 <폼프리 타워>라고 상상하면서 쐈다(이미 스크린이 깨진 킨들을 이베이에서 10파운드에 샀다). 화면이 수천 조각으로 깨지는 것을 보니 놀라울 정도로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 내가 총으로 쏜 킨들을 낡은 나무 쟁반으로 만든 판에 고정시켜서 서점 안에 걸었다. 한 손님이 <성나게 하는 군중으로부터 멀리>를 찾았다. 내가 제목이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라고 여러 번 말해도 그는 단호한 태도로 아니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내가 계산대 위에 증거물로 그 책을 떡 하니 올려놓은 다음에도 이렇게 말했다. “뭐, 출판사에서 잘못 인쇄했겠죠.” 아주 성질나는 대화였지만 그래도 고마운 점은 있다. 언젠가 되었든 내가 요행히 은퇴를 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내가 쓸 자서전의 제목에 쓸 좋은 아이디어를 주었기 때문이다. 개인 소장 도서를 사기 전에 판매자와 값을 흥정할 때는 책들이 아주 화려하고 값어치 있어 보인다. 적당한 가격에 합의하고, 악수를 나누고, 수표가 내 손을 빠져나가고 나면, 그때부터 책은 투자한 값에서 한 푼이라도 회수하기 전까지 상자에 담아 승합차에 싣고, 다시 서점으로 옮겨서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 목록을 올리고, 가격을 매겨 책장에 정리해야 하는 짐으로 변하고 난다. 오웰이 언급한 혐오감은 책이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생긴다. 갑자기 책들은 처리해야 할 ‘일거리’로 돌변한다. 하지만 손턴의 <릴리스>와 같은 책을 마난ㄹ 때 느끼게 되는 진귀하고 강렬한 환희는 그런 혐오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 💬 2021 가장 최장기간 읽은 책(결국 22년 되어서 끝냄). 재미가 없어선 아니고 오히려 아주 재미있고 독특한 매력이 있는 책이다. 스코틀랜드의 꽤 유명한 중고서점의 주인이 말 그대로 일기 형태로, 아마존과 괴상하거나 불만 많은 손님들에게 어느 정도 빡쳐 있는 상태로 쓴 글들인데 아주 전형적인 ‘냉소적이면서 웃긴’ 사람임. 읽는 데 오래 걸린 이유는 한 번 잡았을 때 지속적으로 읽게 되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고 일자별 에피소드별로 끊기는 구성이라서 개인적으로 이 설정, 이 인물들로 시트콤 만들면 보겠다 싶은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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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획이 실패가 되지 않게가진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자원을 관리하여, ‘감당할 수 있는 작은 실패’를 많이 경험하는 것이 현실적인 전략이다. 나는 효율적으로 일할 줄 알아서 야근을 그만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야근을 그만두자 업무 시간 내에 일을 마치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8시간 내내 일에 완벽하게 몰두한 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하루 8시간씩 집중할 수 없다. 대신 4시간 정도는 온전히 집중해서 일했는데 그것만으로 그날의 핵심적인 업무는 대체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야간 노동이 무슨 혁신이냐고 따지지는 않겠다. 혁신인지 아닌지는 시장이 판단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법이 아니라고 해서 식사시간 1시간 외에는 휴게시간이 없는 것, 최영애 씨가 사망한 뒤에야 휴게실에 난로를 들인 것, 김동식 소방관의 희생 끝에 겨우 일부 에어컨을 설치하기 시작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야간 노동 중 화장실에서 쓰러진 뒤 숨진 고영준 씨와 같은 인천 4물류센터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쿠팡을 떠난 최준혁 씨는 "코로나 시대에 쿠팡 같은 회사가 없는 일자리를 만들어줘서 고마운 면도 있지만, 생명의 가치, 인간성의 가치도 어느정도 생각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어떨지 상상해보는 능력. 눈부신 성취를 이룬 이 혁신 기업에 딱 하나 없는 것은 바로 그런 상상력이 아닐까. (조성주) "고어 비달이라는 미국의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성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들이 패배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게 성공이라면, 공정을 들고나오는 것은 단순히 소득 감소를 우려해서만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엘리트가 되고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고생했고 고난을 거쳤지만, 그 경쟁을 통과하는 과정 자체가 자신이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 증명해주는 서사로 작동한다. 그 과정을 못 이겨낸 사람들은 패배자로 있어야 자신이 정당해진다. 내가 소득을 많이 올려 성공하는 것보다 남들이 패배자의 위치에 있는 게 더 중요하다." (...) 극 중 화자는 영국 사회가 망가져가는 과정을 지켜본 아흔이 넘은 여성으로, 그는 '우리가 계산대 여자들을 기계가 대체하도록 내버려두었다'며 자조한다. 거리에 나가서 시위하지도, 항의 편지를 쓰지도, 다른 가게로 가지도 않았다고 말이다. 운 좋은 소수에 속하지 못한 사람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심지어 목숨 부지를 걱정해야 하는 세상은 누가 만들었나. 운이 아니라 재능 있는 소수라고 해도 이런 낙차는 정의롭지 않다. 아니, 지속가능하지 않다. 늙은 나도, 젊은 나의 자식도 언젠가 그곳으로 떨어질 것이므로. 존재하는 성벽을 그대로 두고서 추진된 정규직화는, 성벽 밖에 남은 이들의 저항 또는 냉소를 피하기 어렵다. 이번에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이들이 인천공항을 위해 그 일을 계속 해왔고 또한 잘할 수 있는 '자격 있는' 이들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유감스럽게도 돌파하기 어렵다. 그게 우리가 만든 세상이다. 그걸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네이버에서 댓글을 하나 봤다. '출발선이 다르므로 공정한 경쟁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취지의 기사에 달린 댓글이었는데, '결과의 평등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출발선이 다른 건 사실일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던 경쟁의 결과를 인위적으로 비슷하게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거부하겠다는 '결의'가 읽혔다. 나는 진보가 싸워야 하는 전장이 있다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경쟁의 결과가 똑같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격차가 너무 크면 모두가 경쟁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경쟁 자체가 사람들을 구속하는 힘이 커진다. 이러면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기 어렵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격차를 그대로 둔 채 일부만을 성벽 안으로 집어넣는 방식이다. '결과의 평등'까지는 아니더라도 결과가 구속하는 힘을 줄일 필요가 있다. 법철학자 조지프 피시킨은 <병목사회>에서, 경쟁 방식의 공정성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애초에 왜 자원이 희소하고 경쟁이 치열한지 기회구조 자체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회의 평등'을 넘어 '기회구조의 다원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 입시나 대기업 공채 같은 좁은 '병목' 주변에 다른 경로를만들어서, "개인들이 병목을 통과하지 않고도 높이 평가되는 재화와 역할에 도달하게 하라"라고 피시킨은 쓴다. 여기서 '높이 평가되는 재화와 역할'을 나는 노동조합이 사측과 협상해서 만들어낼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본다. 그 방법은 '어떤 숙련이 요구되는 일을 하느냐'에 따라 임금을 주는 것, 곧 직무급이다. (...) 생애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나름의 발전 가능성이 있고 살
- 1차원이 되고 싶어💬 언제쯤 (몇 년 전쯤?) 더 이상 퀴어 청소년 소설을 읽고 싶지 않단 생각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모든 십대의 삶은 전쟁터지만 퀴어 십대의 삶은 총 한자루조차 뺏긴 전쟁터다.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나는 이대로 사라질 것 같다 사라지고 싶지 않다 혹은 사라지고 싶다 하지만 누가 나를 알아봐버리면 그대로 또 뻥 터져서 죽어버릴 것 같다 터지고 싶다 혹은 터지고 싶지 않다* (요약: 정신병 걸리기 직전인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정신병에 걸린다). 이 소설도 그냥 그 시기를 다루고 있다. 내가 한때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았던 것은 그냥 그런 시기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내가 내 그런 시기를 잘 받아들인 어른이 되지 못했던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이런 소설을 읽고 싶지 않았던 그 시기까지 지나버렸다. 그래서 별 저항 없이 이 소설을 읽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솔직히. 1차원이 되고 싶은 기분이 뭔지 모른다. 한때 알았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래서 별 감상도 없나 보다.
-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 설명서제목처럼 설명서 같은 앞부분과 <한국, 남자, 게임> 같은 뒷부분(나는 <한국, 남자> 안 읽었지만 대충..뭔 말인지 알지). 사실 앞부분은 대부분 아는 내용이거나 놀라울 것이 없는 실태 조사여서 휙휙 넘겼고 뒷부분은 평소에, 최근 몇년동안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들. 내가 속한 업계에서 한두 회사도 아니고 집단적으로 벌어졌던 불합리한 사상 검증, 라스트오브어스2나 호라이즌 제로 던 같은 걸 재밌게 하고 나서 검색해 보는 순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분노들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경험, 당근마켓에 게임 타이틀 팔러 갔다가 여자분이 이런 걸 하시네요 소리 듣고 짜증 난 상태로 돌아온 날들. 게임에 대한 검열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부당한 검열이고, 어떤 것이 논의해볼 만한 이야기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분 속에서의 토론을 통해 합리적 기준을 만들어가는 것이 업계와 팬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 게임계의 대응은 이 두 가지를 그냥 모두 '검열'로 퉁치고 있는 것에 가깝다. 여기서 일어나는 한가지 얄궂은 일은, 게이머들이 '내 맘대로 게임할 권리'를 외치며 검열에 분노할 때 그것이 권력에게는 별다른 타격이 되지 못하지만, 소수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이머에게는 같은 검열에 대한 저항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동참할 뿐인 결과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 많은 게이머가 PC나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뭐가 과도한지는 알 수 있는 신묘한 판단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PC가 게임의 재미를 망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비백인이고 성소수자라 한들, <슈퍼마리오>가 재미없어질 수 있을까? 내 캐릭터를 흑인 동성애자여성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몬스터헌터>에서 빼앗을 수 있는 재미란 대체 무엇일까? 사실은 모두가 게임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ㅇㅇㅇ는 나야, 둘이 될 수 없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폭력적인 게임이 모방 범죄를 낳는다는 주장에 대해 '게이머들에게는 판단력이 있으며, 게임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모방하고 싶어지는 건 아니'라는 유구한 방어 논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한국 게임업계에도 사상검증 같은 어이없는 사태에 맞서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힘이 없었다. 대부분의 업계는 소비자의 뒤에 숨었고, 매체들 역시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모두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며 도망치기에 바빴고, 사과를 해야 할 이들이 아니라 트롤들에게 납작 엎드려 그들을 더욱더 기고만장하게 했다. 전 세계가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려 고민하고 있는 지금, 한국 게임계에서 소수자 문제와 페미니즘은 금기어처럼 여겨진다. 한국의 주요 게임업계는 더 나은 것을 제공하고 소비자를 설득하지 않고, 소비자들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주면서 그들이 영원히 돈 넣는 기계로 남길 바란다. '게임은 문화다' 캠페인이 초라해지는 것은 이런 상황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게임문화'라고 자신있게 소개할 수 있을까? 언제나 욕설로 뒤범벅되는 게시판과 채팅창인가, 남성 중심의 게임 커뮤니티의 집단 트롤링인가, 여성 게이머에 대한 성폭력인가? 그저 변호사나 의사가 게임을 하면 게임은 문화가 되는가? 이것이 다 게임 탓이라는 것은 사실 앞뒤가 바뀐 말이다. 오히려 세상이 게임에 반영되고 있다. 현실의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현실의 스트레스와 분노가, 현실의 능력주의와 약강강약의 비열함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는 사이버 세상 속에서도 그 지긋지긋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오늘날 게임과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게임에는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이 있고, 이미 그런 잠재력을 보여준 많은 게임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 왜 여성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더 나은 섹스를 하는가💬 와 엄청난 클릭베이트 제목. 동명의 칼럼을 뉴욕타임즈에 싣고 화제가 되어 책까지 나온 듯하다. 20세기 철의장막 저편에서 실패한 사회주의의 역사와 잔재에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어떻게 노동과 리더십과 참정권 등등... 결국은 전반적인 삶의 만족(당연히 섹스를 포함함)에 기여했는지를 다룬다. 작가는 교수고 교수로서의 모든 커리어가 이쪽(구소련/동유럽권에서 국가사회주의의 붕괴가 미친 영향) 연구에 집중된 사람이라, 당연히 이 책에는 수많은 논문들과 데이터가 등장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걸 가장 쉽게 전달한 것은 어떤 통계가 아니라 2장인가 3장쯤 초반에 등장하는 작가의 개인적인 일화다. 작가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해서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지만 작가와 달라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친구네 집에 몇 년 뒤에 놀러갔던 이야기이다. 작가는 저녁 먹으러 나가기 전에 우연히 친구가 남편과 싸우는 것을 몰래 목격한다. 남편은 네가 옷 사는 데 너무 돈을 많이 쓴다고 불평하며 카드를 주지 않겠다고 하고, 친구는 애들 걸 사는 거라고 항변하며 싸운다. 이후 술을 한 잔 하면서 친구는 남편과 싸웠다고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빌은 우리가 섹스를 충분히 안 한다고 생각해." '*그건 내가 들었다고 생각한 싸움이 아니었다.*' 작가는 친구를 배려해 자신이 계산서를 집어들고, 친구는 민망해하며 오늘 남편과 섹스해주고 내일 갚겠다고 대답한다. 이야기 끝.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국가사회주의 정부들은 대개 여성과 남성을 사회주의 국가사업의 동등한 수혜자로 만듦으로써 남성에 대한 여성의 경제적 의존을 줄였다. 이런 정책들은 경제적인 고려에서 사랑과 친밀감을 분리해낼 수 있도록 도왔다. 여성이 자신의 수입원을 가지고 있고 국가가 노령기, 질환, 장애에 대한 사회적 보장을 약속한다면 여성은 폭력적이고 성취감을 주지 못하는 관계 또는 그 외의 건강하지 못한 관계에 머물 경제적인 이유가 없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동독과 같은 국가에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은 개인적 관계가 시장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문화를 실현시켰다. (...) 자본주의사회에서 산업주의는 정식 고용의 공적 영역에 남성을 집중시켰고, 여성은 사적 영역에서 무급 노동을 책임지도록 만들었다. 이론상 남성의 임금은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기에 충분했다. 여성의 가정 내 무급 노동은 고용주의 이익을 보조했는데, 노동자 가정이 미래의 노동인구를 재생산하는 비용을 부담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여성은 임신 조절, 교육 기회 또는 의미 있는 고용 기회 없이 가족이라는 한계 안에 영원히 갇혀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여성은 자신이 남성보다 더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1928년에 버나드 쇼는 썼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남성을 노예로 만들었던 것처럼 남성을 통해 여성에게 돈을 지불함으로써 여성을 그 남성의 노예로 만들었고, 여성은 노예 중에서도 최악인 노예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리더십은 중요하지만 기업과 정치에서 할당제가 소수의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만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여성과 노동계급 여성, 특히 유색인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른 긴급한 문제들을 배제하고 여성이 권력직으로 승진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이방카 트럼프 식의 기업 페미니즘이라는 위험한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 유리 천장은 깨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높은 서열과는 매우 동떨어진 자들의 긴급한 문제를 무시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 여성이 정상에 오르는 것을 돕는 정책들은 언제나 바닥에서 분투하고 있는 여성을 돕는 실질적인 조치들과 결합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정책들은 그저 기존의 불평등을 악화시킬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 노동에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다고, 성 노동이 합법화되고 보호되어야 하며 노동조합이 결성되어야 한다고, 이 경제 부문에서 일을 하기로 자유롭게 선택한 사람들이 공정하게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성 노동은 자
- 데이터 과학자의 일
- 선거로 읽는 한국 정치사
- 불공정한 숫자들집계가 이뤄진다고 해도 반드시 불평등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집계가 되지 않으면 불평등은 확실히 눈에 덜 보일 것이고, 진보의 가능성도 확실히 낮아질 것이다. 제임스 볼드윈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해 보면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직면하는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직면하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집계하지 않는 이유가 결국 정치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정치가 바뀌지 않는다면, 특히 누가 데이터를 소유하고 그 데이터의 수집 과정을 결정하는지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기술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특정한 불균형을 심화하거나 불균형에 대처하지 않으려 할 경우, 그 정부는 데이터가 자신의 의도를 그대로 노출할 정도로 어리석고 낙관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 또한 투명성 요구가 반란 행위가 된다면, 국제기구 및 정부간기구들은 집계를 신뢰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개발 통계 분야에서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면, 즉 기존 체제의 ‘강제적인 전복’이 일어나야 한다면, 그 혁명은 기술적인 해결 방법이 아무리 철저하고 의도가 좋다고 해도, 기술적인 해결 방법의 형태로만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데이터 혁명은 실제로 혁명이어야 한다. 기술적인 난제들을 점진적으로 처리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집계되지 않는 사람들 뒤에 숨어 있는 권력 구조들에 대한 근본적이고 매우 정치적인 도전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어 양극단의 비율, 측 최하위 40%의 소득 비율로 최상위 10%의 소득 비율을 나눈 값이 소득 집중을 측정하는 대체 지표로 사용돼야 한다고 제안했다(*Palma ratio). (...) 궁극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다. 대략 중간 계층들이 국민 전체 소득의 절반을 차지한다면 불평등은 양극단, 즉 소득의 나머지 반을 가져가는 계층들과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이 상황에서 중간층에 과도하게 민감하고 양극단에는 과도하게 둔감한 불평등 측정 지표를 선택해야 할까, 아니면 그 반대의 특징을 가지는 측정 지표를 선택해야 할까? 권력은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넘겨주지 않는다. 하지만 수백만 명이 정의를 요구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권력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다.
- 원더스미스: 모리건 크로우와 원더의 소집자💬 이 시리즈는 분명히 해리 포터의 산물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작가가 아이 시절에 해리 포터를 읽고 자라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글이라는 뜻)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음. 그게 뭐지 하고 잠깐 생각해 봤는데 주인공이 가정폭력 수준이 아니라 전사회적 가스라이팅을 받으면서 자란 여자애고, 막 발아한 상태이긴 하지만 절대적인 힘(뭐 어머니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랑의 힘, 언제나 용기를 잃지 않고 선을 추구하는 그리핀도르 하트 이런 거 아니고 진짜 실체가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나오는 듯. 한때 세상을 흔들었지만 현재 잠적한 상태로 재기를 노리는 클래식한 절대악 캐릭터가 이 힘을 뺏거나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키워주고 싶어한다는 것도? 3권은 한국 발간 아직 안 됐는데 3권보다도 영상화가 더 기대되는 편.
- 네버무어: 모리건 크로우와 원드러스 평가전
-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섹슈얼리티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여성 신체를 안전지대에 놓으려 하기보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여성의 힘으로 전유하는 시도가 <러브 세트>에서 펼쳐진다. 그렇게 등장하는 배두나의 신체는 압도적이고, 그가 틀어쥐고 있는 시선의 힘은 강인하다. 이지은의 얼굴에는 그가 배우로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은밀한 욕망이 떠오른다. 이경미는 덧붙인다. “그렇게 아름다운데, 왜 가려야 하죠?” 이경미 인터뷰 하면서 <러브 세트>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줘서 좋았는데, 나는 마치 <아워 바디>에서 자영이 부장이랑 섹스를 하기 때문에 뭐 '페미니즘 면에서 틀렸다'(나도 이게 뭔 말인지 모름, 대충 그렇게들 말했더랬음)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처구니 없었던 것만큼이나, 이 영화를 두고 여성의 신체를 남성의 눈으로 대상화한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황당했다. <미쓰 홍당무>에서 이종혁이 별 역할 아닌 것처럼 이 영화에선 이지은의 아빠가 아무 역할도 안 하지. 그 사람은 먼지만큼의 존재감도 없고 코트를 가득 채우는 건 배두나의 몸, 이지은의 시선, 땀만큼이나 뚝뚝 떨어지는 욕망 같은 것들인데 여기서 남성의 시선은 어디 있나? 관객이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없거든. 이경미가 안 찍었으면 이렇게 노골적이고 우수울 만큼 섹스만을 외치는 레즈비언 욕망 숏들이 나올 것 같냐고. 시간이 더 흐르면 이건 더이상 과감한 시도가 아니게 되겠지만 그래서 이게 역사가 될 거라고! 아 사실 메인 이야기는 <보건교사 안은영>에 대한 거였다. <안은영>을 보면서 딱히 나쁜 건 아닌데 뭔가 묘하게 걸린다고 생각했던 지점을 이 인터뷰 읽으면서 깨달았다. 왜냐면, > “(<잘돼가? 무엇이든>과 <미쓰 홍당무>에 대해) 두 영화는 만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만나서 좋아지는 이야기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좋다. 그런데 또 ‘남자랑 여자가 만나서 안정감을 느낀다, 무언가가 완성된다’는 유의 이야기에 크게 설득된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쓰게 된 이야기였다.” 일단 이 부분이 이경미 영화의 본질이다. ‘이경미에게 사람은 여자’ 라는 말이 정확하듯 사람과 사람이 사랑하고 구제하는데 거기에 남자가 없다 = 감독 본인이 그런 이야기에 설득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이경미의 세계에는 <안은영>의 홍인표 같은 남자가 없었다. 반면 정세랑의 세계는 홍인표 같은 남자들로 가득 차 있다. 무해하고, 유의미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 아니 무해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이경미를 생각하고 드라마 <안은영>을 보면 좀 이상했었다. <안은영>이 그 두 세계를 성공적으로 봉합했느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지만, 음 이건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갑자기 너무 이경미 얘기만 했나? 어쩔 수 없다. 사랑하니까. ✦ 이 책은 2019년-2020년에 개봉한 영화를 찍은 13명의 여성 감독들을 데려온 손희정 평론가의 인터뷰다. 헤아려 보았는데 이 중에서 4편을 아직 보지 못했다. 얼른 봐야지. 그리고 이 중에서 가장 최근에 본 것은 박지완의 <내가 죽던 날>인데 그것도 무척 좋아서 늦게 본 것을 후회했다. > “이 작품을 기획하던 무렵, 영화 속에서 고난을 겪는 여자들이 모두 죽었다. <화차>도 그랬고 <미씽:사라진 여자>도 그랬다. 저렇게까지 살려고 노력하는데, 살려야 하는 거 아닐까 싶었다. 계속 그 뒷모습만 보고 쫓아갔는데, 어깨를 잡고 돌려서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보고 싶었는데, 그 기회를 안 준다고 느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 구하는 이야기를 해야지.” 영화는 세계의 폭력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탈출구 없는 절망만을 늘어놓지는 않는다. 대신 영화는 말한다. “당신이 스스로 당신을 구해야 해. 그런데 말이야, 잘 들어봐. 그때 당신 옆에는 내가 있을 거야.” 이 인터뷰를 보고, 영화 중반부까지 내내 세진이 죽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이 무색해졌다. 감독은 여자를 죽이는 이야기에 신물이 나 있었고 그 애를 죽일 생각이 없었었는데. 구하는 이야기를 하려고 만든 영환데. 어쨌든 그래서 좋았다.
- 아킬레우스의 노래💬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는데 사실 <키르케>만큼 재미있진 않았다. 익히 아는 일리아드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근데 나 일리아드 왜 읽었지? 교양 수업 같은 거에서 억지로 읽었겠지 아마. <키르케>를 읽고는 이 작가의 재능이 빈틈을 채워넣고 서사를 전환하는 상상력이라고 생각했다면, 여기서는 정해진 이야기 안에서 디테일을 합리적으로 조립하는 능력이 훨씬 더 돋보였다(예를 들면 오디세우스가 여장한 아킬레우스를 찾아내는 장면. 보통 알려진 썰로는 방물장수인 척 물건을 늘어놓아 칼에 관심을 보이는 여자애를 보고 너구나 했다는데 아니 숨으려고 여장한 사람이 왜 멍청하게 티내겠냐고, 같은 것들을 잘 발라서 살짝 바꿔서 잘 붙여 놓음). 뭐 둘 다 할 수 있는 작가라니 멋진 것이다. 그리고 정해진 이야기라는 것이 참 중요하지. 그닥 관심 있는 장르는 아니라 그리스 신화 관련 무엇이든 최근에는 거의 본 적이 없는데,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도 아 세상에 이렇게 지독히 운명론적인 관점이란 게 있었지, 하고 말았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전쟁터에서 활을 아무렇게나 겨눠도 내 신이 봐주면 딱 그때 죽기로 예견되어 있었던 적편 영웅의 심장에 그대로 내리꽂는답니다. 농담이 아니라 파리스가 아킬레우스 쏘기 전에 어디 조준할까요? 하니까 아폴론이 뭘 조준하냐 쏘면 죽는다 걍 쏴라 하는 장면이 있어서 진짜 웃김. 원래 활은 조준을 해야 하는 건데요 그럴 거면 가서 죽여주지 뭐하러 나보고 쏘라고 해? 이런 식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허무가 되는 것 아닌가, 허무와 낭만은 한끗차이인가, 그리고 아무래도 <키르케>에서 가능했던 전복과 탈주는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 그런가, 하는 생각도.
- 혼자서도 잘하는 반려가전 팝니다💬 유포리아에서 새티스파이어를 산 사람이었지만 유포리아가 새티를 국내 정식 수입한 첫 업체인 줄 몰랐다. 사장님이 상하이 박람회까지 가서 PT를 하고 계약을 따왔고, 새티스파이어 본사가 지향하는 점과 맞닿아서 가능했다는 것도 신기함. 그리고 사장님이 엄청 어렸을 때 (대학교 3-4학년때) 이걸 시작한 것도..!
- 언오소독스: 밖으로 나온 아이> 아주 작고 어린 마틸다가 가족 모두를 능가하는 유일한 힘은 지능이었다. _로알드 달, <마틸다> 중에서 최근 몇 년간 읽었던 것 중 가장 충격이었던 타라 웨스트오버의 Educated 를 여러 모로 생각나게 했던 책. 이 책의 모든 챕터는 인용문으로 시작하는데, 첫 챕터의 인용문은 로알드 달의 <마틸다>이다. 모든 몰래 책 읽는 소녀들의 슈퍼히어로. 그래서 첫 장을 펼치자마자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았다. 기본적으로 억압적인 공동체 안에 똑똑한 소녀를 가둬놓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 애가 배우지 못하게, 읽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시딕 유대인들은 미국의 보통교육을 거부하고, 매우 제한된 종교적인 교육만 허용하지만 심지어 탈무드를 다 가르치지도 않는다. 작가인 데버라가 처음 자신을 둘러 싼 종교적 권위에 의문을 가진 것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텍스트를 몰래 찾아 읽고 신성시되는 다윗 왕의 과오를 마주했을 때였다. 책이 주는 지식은 완전하고 당연한 줄 알았던 개인의 세계를 부수고, 어떤 것이 한계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쉬운 부분은 하나도 없다. 할아버지가 책은 남자의 것이고 여자는 부엌에 속해야 한다고 책을 소지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데버라는 내내 시내에서 책을 몰래 빌리고 매트리스 밑에 숨겨놓고 읽는다. 17세에 중매결혼을(!) 한 이후에는 책을 좀 꺼내 놓고 읽나 했더니, 아들을 낳지 못한 1년 동안 시어머니가 쟤가 책을 읽어서 부정해서 그런 거라며(!!!) 책을 다 내다 버리게 한다. 타라 웨스트오버와 마찬가지로 그가 가진 글 쓰는 재능은 이 책의 첫 30페이지만 지나도 즉각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가 하시딕 공동체를 탈출하기 전까지 읽고 글 쓰는 것은 재능의 발현보다는 투쟁에 가까운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폐쇄적인 종교 공동체의 민낯만큼이나 그 투쟁의 근원이 되는 힘이 싹트는 과정, 그리고 그 투쟁을 지속하는 용기에서 감정적인 충격을 느꼈다. ✦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심판을 받을 때 다윗왕이 상벌의 기준이 된다고 배웠다. 첩을 두는 것에 비하면 내가 숨겨둔 영어 책 몇 권 정도는 새 발의 피가 아닌가. 바로 이 생각을 한 순간, 내 안에서 저항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사실을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내가 가진 힘에 눈뜬 순간과 마찬가지로, 나는 어느날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기를 멈추고 내가 속한 이 세상에 관해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 시자한 시점이 바로 이 때였음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나는 고분고분한 아이인 척하기가 힘들어졌다. 나의 생각과 외부의 가르침이 내 안에서 충돌하면서 회오리가 몰아쳤다. 때때로 내면의 소용돌이가 외면의 평정을 깨고 밖으로 흘러넘쳤고, 그러면 사람들은 너무 늦기 전에 내 호기심의 싹을 도려내려고 했다. 나는 지금도 브루클린을 좋아하지 않는다. 갇힌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인생의 출발점이 된, 탈출을 꿈구게 한 이곳을 아주 가끔 방문한다. 로알드 달조차도 나와 같은 여정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과거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과거와 결별하지는 않았다. 나를 있게 한 시간과 경험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내가 살아낸 삶이니까.
- 모두가 기분 나쁜 부동산의 시대
- 대불호텔의 유령그 페이지를 여러 번 뒤지며 내가 원하는 단어를 찾다가, 나는 이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셜리 잭슨은 새로운 삶을 원했다고. 그녀는 삶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고. 그리하여 그 시기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나는 내 배의 선장이다. 웃을 수 있다 웃을 수 있다 웃을 수 있다 *I am the captain of my fate. Laughter is possible laughter is possible laughter is possible*.” 이것이 전부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전부이다.
- 지구 끝의 온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행성에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던 여자들, 그 공동체가 와해되고 나서도 - 진부한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 희망의 씨앗 같은 것을 퍼뜨렸던 여자들, 앞 세대의 역사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여자, 그리고 고전적인 딜레마를 겪으면서 평생의 사랑을 하는 정비공과 사이보그(*역시 여자들)가 나오는 소설임 소개 끝 “자신도 인류를 구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으면서, 차라리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저에게는 구원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뻔뻔함이 흥미로웠죠. 그를 지켜보고 싶었어요. 생각해보면 저의 호기심도, 지수가 제게 가졌던 것과 근본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내면을 평생 궁금해하기만 하다 끝나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 뉴 룰스(그런 일을 여러 번 겪고 나니) ‘다음은 내 차례가 될지 모르니까 기다려야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바로 웍을 돌리고 칼질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편견이 있는 조직과 부딪쳐 그들의 인식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봐달라고 남들을 설득할 시간에 스스로 빛나는 길을 택해서 걷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 좋은 네트워크를 가진다는 건 자기 자신을 잘 지키고 있다는 거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을 하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다 보면 좋은 관계가 만들어진다. 네트워크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거나 나를 너무 바꾸려고 할 필요는 없다. 내 중심을 단단히 채우면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누구나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 내가 잘돼야 내 옆의 여성들이 잘되고, 내 옆의 여성들이 잘돼야 내가 잘된다. 유리 천장을 깨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한 사람의 여성도 중요하지만, 넓은 판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도 중요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기울기를 줄이기 위해 여러 사람이 조금씩 발을 옮기는 게 필요한 거다. 내 옆의 여성들이 어떻게 하면 더 잘될 수 있을지 고민하면 결국은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오늘 하루를 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내 옆의 여성들에게 힘이 될 거다.
- 삶으로서의 일그토록 야만적이고 불확실하고 어느 모로 보나 의미 없는 시기에 왜 그들은 여전히 충성심을 유지하며 열심히 일하는 걸까? (...) 하나는 직원들이 자신들이 만드는 제품을 극도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베스타스의 ‘목적’ 즉 풍력 기술을 제공해 전 세계 에너지 구조를 바꾸고 기후 변화에 맞서 싸우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직원들에게 삶의 의미를 주었다. 직원들은 자신이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고 느꼈고 자신이 하는 일이 이 지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를 해결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직원들은 회사의 전략이 무엇인지 잘 모를 수도 있고 경영진을 동네 중고차 딜러보다 더 신뢰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의미가 직원들에게는 무척 중요한 것이 분명했다.
-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영원히 열화되는 삶에 대하여 선이란 게 뭐지? 사람들이 뭐가 과하다고 하는지 파악하려고 내가 내 것을 들여다보면, 나는 모르겠는 거예요. 내가 뭔가를 이게 과하다고 생각하면, 사회는 또다른 입장이고. 그래서 이건 영원히 맞힐 수 없는 과녁과도 같다. 영원히 불통. 나는, 영원히 빗나가는 화살인겨. 하지만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불완전성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중닭이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순간 같은 것은 없으며 영원히 여기저기 삐걱거릴 것이라서, 그래서 이 시간 축에서 다시 오지 않을, 그 모든 나사 빠진 순간을 끌어안음이 중닭이라면, 그런 고유함과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 중닭이라면. 그 중닭의 아름다움을 인지한 상태에서, 그때부터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균형을 향한 몸부림은 비로소 의미가 생겼다고 나는 생각했다. 우연히 어떤 성장과 노화의 아귀가 들어맞아 몸이 클래식하게 써지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가능한 완전함을 위해 도전하고 완전히 실패하는 것, 그런데 그 실패가 실은 모두 각각의 클래식임을 받아들이는 부분 말이다. 나는 예술에서 중닭의 아름다움이 진하게 느껴질 때 완전히 매혹된다. 영원히 도달하거나 완성하지 못할 어떤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 앞에서 못난이를 숨기지 않은 채 대놓고 ‘나는 그곳에 이르지 못했소! 나는 중닭이오!’ 하고 튀어나온 그 아름다움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된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다 바로 이런 중닭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식물 화분 돌리기를 지속하며 매번 가장 최고의 균형을 찾는 데 실패하고, 그 실패에 대해 “아, 오늘도 역시”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의 대부분에서 우리는 중닭일 것이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매 순간의 중닭스러움에 대해 약간의 위로와 그 고유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남겨보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다 붓을 꺾었다? 아니에요. 그냥 회사 다니다 때려치운 거예요. 기억해야 할 건, 근데 언제든지 또 그걸 다시 할 수 있다는 거. 힘들면 좀 쉴 수도 있고, 딴 일 좀 할 수도 있고. 그게 무슨 순수함을 더럽힌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럴 수 있다는 거죠. (...) 저는 존버의 시간도 고통이 담보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길 하고 싶어요. 존버가 말 그대로 존나 버티는 건데 그 존나가 ‘존나’ 아니고 그냥 ‘재밌게’ 버틸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요소를 계속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우리, 오염된 상태로 같이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순수하지 않게. 다 섞이고.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 데이터 분석가의 숫자유감데이터를 사용하면 언제나 명확하고 반짝이는 현재와 미래를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서 데이터 산업이 지금껏 발전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는 늘 유동적이며 불확실하고, 현재마저도 예외 사항으로 가득하다. 데이터로 말하는 것은, 어쩌면 무언가를 확신하는 말을 아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데이터를 사용한다. 데이터가 완전히 확실한 답을 알려줄 수는 없고, 이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서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그렇다고 데이터가 없던 시절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아주 조금만 더 신경을 쓴다면 우리는 데이터를 더 쉽게 사용할 수 있고, ‘이 내용은 이런 이유로 이 정도 수준으로 확신할 수 없습니다’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 자본주의 키즈의 반자본적의적 분투기물질 그 자체가 오늘날의 사회에서 ‘힘’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요즘 애들’이 갈망하는 돈은 다른 사람을 마치 시종처럼 부리고, 경쟁의 피라미드 윗단에 올라 우월감을 과시하며 가지지 못한 이들을 내려다보기 위한 것이 아니다. 회사, 타인, 월세방 집주인, 혹은 가족 구성원 등 그 어떤 타인으로부터 나의 생각이나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형태로 원하는 삶을 꾸려나가기 위한 ‘충분조건’일 뿐이다. 그러니까 내 또래에게 돈은 ‘나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방어적 수단인 셈이다. 새벽에는 마치 ‘무소유’의 태도로 명상과 요가를 하지만, 오전 9시가 되면 월가의 트레이더라도 된 것처럼 주식을 들여다보는 모습에 누군가는 ‘모순’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도 있겠다. 하지만 판이한 두 행동의 기저에는 무척이나 간단하고 일관된 명제가 깔려 있다. 나라는 작은 존재가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큰 구조에 속절없이 휘둘리지 않고, 그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일상 속에서 분투할 것. 구체제를 전복하고 신체제를 세울 명분도, 의지도, 힘도 없기에 지금의 테두리 안에서 안락한 요새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명상과 요가를 하며 비움을 실천하면서도 동시에 물신을 숭배하는 까닭이다.
- 매우 혼자인 사람들의 일하기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단한 자기 규율까지 만들어가며 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삶이 나에게 적합한 형태의 삶임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을 직접 조직하고 이끌어나가는 감각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혼자 일하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독과 고립 속에서도 온전한 충만감의 조각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 공정하다는 착각사회적 상승의 담론은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당이 도덕적 진보와 정치 개혁을 말할 때 즐겨 써 먹는 이야기가 되었다.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재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성공할 수 있으리라." 능력주의 엘리트는 이 주문을 외우는 데 바빠서 그것이 효력 없는 주문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계화의 전리품을 나눠 갖지 못한 사람들의 높아져 가는 분노에 귀를 막은 채, 그들은 불만이 꽉 찬 공기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녔다. 포퓰리즘의 반격은 그들에게 너무도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내놓은 능력주의 사회 시스템에 내재된 대중을 향한 모욕을 도무지 모르고 있었다. 래시는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때, 19세기 미국 사회의 평등주의적 성격은 사회적 이동성이 아니라 지성과 교육이 모든 계층과 직업에 널리 퍼져 있던 데서 나온다고 보았다. 이는 능력주의적 선별이 망쳐 버린 평등의 유형이다. 능력주의는 지성과 교육을 고등교육의 상아탑에 온통 몰아넣어 두고서, 누구에게나 그 상아탑에 들어올 공평한 경쟁이 보장되리라고만 약속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접근권 배분은 노동의 존엄을 떨어뜨리며 공동선을 오염시킨다. 시민교육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될 수 있다. 향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 그래서 세계화가 일으킨 불평등이 왜 그토록 강력한 분노로 이어졌는지 설명된다. 세계화에 뒤쳐진 사람들은 다른 이들은 번영하는 동안 경제적 곤경에 처했을 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달았다. 사회의 눈에, 그리고 아마 스스로의 눈으로도 극들의 일은 더 이상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라고 비쳐지지 않는다. (...) 당시 사람들의 불만에 대해 케네디가 통찰한 내용은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노동계급과 중산층 유권자들에게 분배적 정의를 더 강화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경제성장의 과실에 대해 더 공정하고 더 적극적인 접근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유권자들이 그보다 더 원하는 것은 그들이 더 정의에 기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고,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고 가치를 두는 일을 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모든 젊은이가 자신의 능력과 야심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스템의 아름다움에 빠진 사람은, 필요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언제나 고통은 존재하며, 존재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긍지는 은은하게 빛나는 귀금속과 비슷한 면이 있고, 어떤 이야기의 어떤 장면은 그렇게 빛도 소리도 없이 영원히 재생된다. 최대 가능성이라는 압축적인 다섯 글자로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 내가 원하는 것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그날부터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이 최대 가능성을 향하는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었다. 외부로부터, 사회로부터 주입되지 않은 종류의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사람에게 힘찬 엔진이 되기 마련이기에 우리는 욕망에 대해 더 이야기해야 한다. 정점을 지나온 작은 도시를 잔잔한 형태로 사랑하고 있다. 그런 형태의 사랑도 있는 것 같다. 영영 비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이 책의 장면들은 흩어져 사라진 것들 뒤에 남은 잔여니까. 모래 그림을 보존하려는 노력처럼, 사람들이 기록하고 또 기록하며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을 포착하려 애쓰는 게 좋다. 그러다 보면 아주 희귀한 알갱이들이 전해지기도 한다고 믿는다.
- 눈앞에 없는 사람나는 즐긴다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한 의문들을: 누군가를 정성 들여 쓰다듬을 때 그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서글플까 언제나 누군가를 환영할 준비가 된 고독은 가짜 고독일까 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전체적으로는 왜 지루할까 몸은 마음을 산 채로 염한 상태를 뜻할까 내 몸이 자주 아픈 것은 내 마음이 원하기 때문일까 누군가 서랍을 열어 그 안의 물건을 꺼내면 서랍은 토하는 기분이 들까 내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누가 나의 내면을 들여다 봐줄까 층계를 오를 때마다 왜 층계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까 숨이 차오를 때마다 왜 숨을 멎고 싶은 생각이 들까 오늘이 왔다
- 사이언티픽 게이머즈
- 근육이 튼튼한 여자가 되고 싶어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내가 궁금해졌다. 나의 한계가 궁금해졌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지루해하는지, 나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답은 쉽게 얻을 수 없었다. 답은 어쩌면 중요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궁리하기. 그 자체가 하나의 여정이었다.
- 데이트가 피곤해 결혼했더니친정집에 갔을 때 가구 위치가 달라져 있으면 나는 엄마에게 작은 울적함이 지나간 흔적을 본다. 남편이 열심히 욕실에 락스를 뿌릴 때면 그에게 기분 전환이 필요한 순간임을 느낀다.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할 때면 내 마음이 조금 우그러졌음을 알아챈다. 다른 이의 포물선에 무기력하게 올라탈 필요도, 불협화음에 당혹스러울 일도, 외로움에 서러울 것도 없다. 각자의 방식으로 천천히, 때로는 즐거운 마음으로 포물선 일치의 순간을 기다리면 되니까. ✦ 결국 '나에 대한 이해'의 문제였다. 내가 어떤 말에 발끈하고, 어떤 상황에 나사가 풀리는지. 날 못 견디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혼하고 나서 확실히 알게 됐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나니, 더는 남편에게 이해받고 싶어 안달 나지 않았다. 날 좀 이해해달라고 아우성치는 대신 마음의 근육을 키운다. 덕분에 나를 감당하는 일이 쉬워졌다. 더는 내가 못 견디는 일 앞에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의 다름이 언제고 '조율 가능한 일', 혹은 '변화 가능한 일'로 분류될 것을 알기에. 나의 예민함이 곧 무뎌질 걸 알기에.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우리라는 트랙을 신나게 달리면 되기에. 그렇게 무아지경 땀을 빼고 나면, 나를 감당하는 일을 한 뼘 더 쉬워질 걸 알기에.
- 캐럴무한은 이해하기 쉬운 것. 무한에는 안도 바깥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고, 단절도 비약도 없다. 그것은 그냥 수긍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신이 그러하듯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무한이 아니라 유한이다. 유한이 존재한다면 거기에는 바깥이 있다는 뜻이다. 바깥이 있어야 유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정이 복잡해진다. 바깥이란 유한과 다른 종류의 세계이고 유한의 입장에서 바깥이란 언제나 미지의 세계이다. 가령 나라는 존재는 유한하고, 나라는 유한의 바깥에는 무수한 당신이 있다. 파도처럼 밀려오며, 무수한 당신은 있다.
- 시드 마이어: 컴퓨터 게임과 함께한 인생내가 디자인 문서를 절대 작성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디자인 문서에 비이성적으로 집착하며 코드 한 줄도 쓰기 전에 전체 게임을 텍스트 문서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에 담아서 보여주길 기대하는 관리자도 있다. 하지만 그건 마치 어떤 지역에 가보기도 전에 “여기에 산이 있을 것이라고 정했어.”라며 지도를 그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만든 디자인 문서를 루이스와 클라크가 들고 나타난다고 해도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들이라면 “곧 답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고 걷기 시작할 것이다. 산은 산이 있는 곳에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산을 찾는 것이지, 산이 어디에 있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다. (...) 적어도 내가 찾아내기 전까지는 내 게임에도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실수가 무서워 주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어떤 기능을 넣을까 말까 몇 시간씩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게임에 넣고 확인한 후에 별로면 삭제한다. 탐험해보기 전에 지도부터 만들거나 게임 제작에 돌입하기 전에 작업 전체를 아우르는 예술적 비전부터 세우지 않았다. 매일 조금 더 나은 결과를 내기 위해 그저 한결같이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어떤 결과물이 탄생할지 알게 될 때까지 늘 최대의 효율을 추구했다. (이렇게 일하는 게 항상 답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 같다고...요즘 생각함) ✦ 어떤 형식의 미디어도 완벽하지 않고 특정 미디어만 중독성을 띠는 것도 아니다. 선택한 매개체로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느냐가 중요하다. 상상력, 설득력 있는 서사, 공감은 어떤 형태로 표현해도 좋은 것이다. 중독은 문제다. 하지만 레저, 약물, 행동, 음식, 심지어 사회적 인정 욕구를 포함한 어떤 형태의 도피주의든 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므로 탁월한 작품을 만들지 말라고 막을 것이 아니라 문제에 맞는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매혹적인 대상을 두려워하기보다 우리에게 이를 쓸모 있게 활용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를 통해 훌륭한 성과를 이룰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 게임은 모두가 함께 즐기기 위해 존재한다.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이 어디에 매력을 느끼는지 항상 알 수는 없었으나 알아내는 데 늘 흥미를 느꼈다. 게임에 관해 이야기할 때 중독이라는 말은 하나의 예술 작품과 강력히 연결되었다고 느끼는 감정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일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감정을 건설적으로 키워나가는 것이 내가 예술가로서 해야 할 일이다. 이왕이면 더 나아가,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경험을 통해 사람 간의 연결까지 끌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도피주의가 제대로 구현된다면 저넹 없던 도피자의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 그게 아니면 고의적으로 작품의 매력을 떨어뜨리고 사람 간의 연결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불합리하지 않은가. 우리는 함께할 때 더 강하며 우리가 만드는 게임이 더 보편적이고 효과적일수록 더 다양한 지식, 더 큰 공감, 더 강한 의욕에 관한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 게임에만 흥미를 느끼는 디자이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기가 매우 어려우며 이는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확신한다. 영감이 어디에서 올지 절대 알 수 없으므로 잘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꾸준히 읽고 배우며 다른 분야에서도 즐거움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스타 트렉> 영화의 짝수 편(스타 트렉 팬들의 말에 따르면 짝수 편이 더 낫다고 한다.)의 작가였던 니콜라스 메이어는 이런 말을 했다. “관객이 어리석을지언정 틀릴 수는 없다.” 파이락사스 사무실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피드백은 진실이다. 누군가 나에게 게임이 답답했다고 말하는데 “아니, 그렇지 않아요. 재밌게 했는데 그걸 당신이 모르는 것뿐이에요!”라고 반박할 수는 없다. 그들이 답답했다며 내 게임이 답답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재미가 반감된다면 고쳐야 하는 문제였다.
- 왜 차별금지법인가물론 모든 사람이 차별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차별이 같은 것은 아니다. 당연히 약자 집단에 속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심하게, 자주 차별받는다. 교차성 강조는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성애자에 대한 역차별도 똑같이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하는 궤변이 아니다. 차별의 경험에 정도의 차이가 있음은 인정하면서도, 차별의 차이가 아닌 공통점에 주목함으로써 공감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차별은 마치 대기 오염과 같다. 오염이 심해지면 가장 먼저 쓰러지는 건 기저 질환이 있는 살마들이겠지만, 계속 방치하면 결국 모두가 호흡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당장 내가 받는 차별이 적다고 해서 아예 무관심하거나 계속 방치한다면, 우리 사회 안에서 차별은 한없이 퍼져 나가고 후에 그 피해는 나와 우리 모두에게 되돌아온다. ✦ 제도적 차별이 악순환의 형태로 재생산되는 것은 차별적인 사회 제도가 개인적 차별을 지속해서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고리를 끊을 방법은 반대로 “차별은 잘못되었다”라는 선언적인 효과를 지닌 제도를 만드는 것뿐이다. 개인적 차별이 이에 부합하는 제도로 인해 더 강해지듯, 반대로 그 차별은 잘못되었다고 명시하는 제도만이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꾼다. 이런 측면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특히 의미가 크다. 대상과 상관없이 모든 차별이 잘못되었다고 명시하는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의 제도화에 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 실제로 차별금지법이 멈춰 선 것은 조직화된 일부 개신교 단체가 정치권과의 밀접한 관계를 이용해 비토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 스티글러는 이런 현상을 규제 포획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어느 정책이든 그 정책에 강한 관심을 가진 소수와 약한 관심, 또는 무관심에 머무는 다수가 있다. 관심이 강한 소수 집단은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결정권자와의 관계를 만들고, 로비 활동을 한다. 이로 인해 소수의 영향력이 과도하게 대표되고, 그 결과 다수에게 불리하고 소수에게만 유리한 정책이 만들어진다.
-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세상은 한없이 아름답고 다정해진다. 내가 그것과 연결되어 있지 않을 때.
-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 줄 필요는 없다출판사: 문예출판사 나는 분노한다.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으려고 읽고, 보고, 쓴다. 수시로 우울하다. 우울함과 잘 살아가기 위해 읽고, 보고, 쓴다. 분노와 우울을 오가는 와중에도 오만이 싹튼다. 내 오만을 다스려 무지를 발굴하기 위해 읽고, 보고, 쓴다. 몸을 움직여 이야기를 전하러 가는 그 ‘북우먼’들처럼 나도 꾸준히 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그렇게 성실하게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 믿는다. ✦ 애니 프루의 말대로 실로 우리는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카프카적인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여자의 몸을 깔고 앉아 예술을 읊조리는 후안무치의 예술가연 하는 인간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냉소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야 한다. 매번 망하지만 매번 새로 사업을 시작하는 와이오밍의 한 가족사를 다룬 애니 프루의 단편 〈어느 가족의 이력서〉처럼 저항의 이력서를 작성해야 한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북 위에 그림을 그리는 병사의 심정으로, 스스로의 품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치열함은 시간을 뚫고 살아남는다. 예술도 운동도 거기에 있다. ✦ 100년 전이라면 나도 치료라는 이름으로 감금되거나 전기의자에 앉았을지도 모른다. 내 안에 있는 열 명, 혹은 백 명의 미친 여자들의 안부를 물으며 아직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죽지 마, 미쳐도 돼, 라고 속삭이면서.
- 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 안젤라 카터의 현대 버전이라고 해야 되나? 연상을 안 할 순 없지만 어쨌든 이건 동화가 아닌 약간의 SF, 약간의 도시전설, 괴담, 약간의 영미권 여초 커뮤니티발 야설 등의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책은 이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진실을, 더 직설적이거나 현실적인 글이라면 잡아내지 못했을 방식으로 잡아내는 기이한 신화들로 가득하다. (…) (수록된 단편 중 하나인 <입주 작가>의 주인공) 리디아는 소설을 통해 몸에 집착하는 여성들에 대해 쓰는 것이 그들을 평가절하하는 행위인가를 질문한다. 이에 대해 마차도의 대답은 이러하다: ‘세계는 미친 여자들을 만들어내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그 다락방이 확실히 당신 자신만의 방이도록 하는 것이다.’” ([출처](https://www.npr.org/2017/10/08/553978325/-her-body-and-other-parties-be-your-own-madwoman)) ✦ 남편의 얼굴을 보니, 그의 욕망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그 얼굴에 새겨져 있어요. 그이는 나쁜 남자가 아니고, 그것이 내 아픔의 뿌리임을 문득 깨닫습니다. 남편은 절대 나쁜 남자가 아니에요. 그이를 악랄하다느니 뻔뻔하다느니 타락했다느니 표현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 몹쓸 짓이죠. 그런데도 —
- 술과 농담한 번도 뭔가에 깊이 빠져본 적 없고 별 기대 없는 미래를 내팽개쳐 본 적 없는 나로서는, 판에 박힌 동일한 나날을 성실하고 근면하게 수행해온 나로서는, 자신을 망칠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빠져드는 충동과 마음의 쓸모를 영영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런 채로 결국은 아무것도 아닐 게 자명한 삶을, 이미 망친 듯한 삶을 지나치게 제정신으로 혹독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 <농담을 설명하는 것만큼 농담에 담긴 마법을 더 잘 빼앗는 방법은 없지요.> 이것은 카프카의 농담에 대해 설명하면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한 말이다. 농담은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만 시와 만나는 것 같다. 논리적 언어로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만큼 시의 마법을 잘 빼앗는 방법은 없으니까. 그런데 말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만일 당신이 어떤 시를 논리적 언어로 세세하게 설명했는데, 그렇게 해서 정말 그 시의 마법을 온전히 빼앗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당신의 책임도 아니고 논리적 언어의 책임도 아니다. 그 시가 빈곤하여 애초에 어떤 마법도 없었다는 증거일 뿐. ✦ >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 생에서의 영이별이라는 결론으로 밀려갔다. 금홍이는 은수저로 소반전을 딱딱 치면서 내가 한 번도 들은 일이 없는 구슬픈 창가를 한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운운’
- 오늘은 또 무슨 헛소리를 써볼까그 이후로 타인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느끼고 살아가는 세상은 나 혼자만의 것이다. 수많은 경험과 방식이 있지만 결국 모든 건 간접적이다. 나는 아예 내가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때 기이한 죄책감이 마음속에서 솟구친다. 타인의 삶, 그 수많은 사건과 생각이 겹치고 겹쳐서 쌓인 세계관을 내가 납작하게 해석해서 쓴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죄를 짓고 있는 것만 같다. (...) 나는 여전히 고민한다. 어떻게 인식의 한계를 넘어, 내 세상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인물로 쓸 수 있을까? 누구도 상처받지 않으면서 재미까지 있는 완벽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거라는 꿈은 꾸지 않는다. 그건 작법이 아니라 마법의 영역에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내 고민이 유의미한 성과를 조금이라도 달성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면 나는 이 일에서 약간이나마 성취를 이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 나는 결코 내 정신의 주인이 아니었고, 주인이 될 수도 없었다. 이전과 바뀐 것이 있다면 이제 누구도 자기 정신의 주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정신은 미지의 영역이라고 믿는다. 모두가 자기 정신이라는 객체와 타협하여, 자기 정신을 설명하고 또 더 좋아지게 하려는 과정을 죽을 때까지 겪는다고 생각한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철학은 다른 과목과는 다르다. 철학은 지식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무엇을'이나 '왜'가 아니라 '어떻게'다. (...) 과학과 달리 철학은 규범적이다. 철학은 세상이 현재 어떤 모습인지뿐만 아니라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까지 말해준다. 작가 대니얼 클라인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게 다음과 같은 최고의 찬사를 던졌다. 에피쿠로스를 철학이라기보단 "삶을 고양시키는 시"라고 생각하고 읽을 것.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이러한 깨달음이 마르쿠스를 움직이게 한다. 마르쿠스에게는 침대 밖으로 나갈 사명이 있다. '사명'이지, '의무'가 아니다. 두 개는 서로 다르다. 사명은 내부에서, 의무는 외부에서 온다. 사명감에서 나온 행동은 자신과 타인을 드높이기 위한 자발적 행동이다.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은 부정적인 결과에서 스스로를, 오직 스스로만을 보호하려는 행동이다. 마르쿠스는 이러한 차이를 알았지만, 늘 그렇듯 스스로에게 그 차이를 다시 상기시켰다. "새벽에 침대에서 나오기가 힘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일해야만 한다.'" 스토아학파나 황제, 심지어 로마인으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우리 문화는 일반적으로 질문을 경험하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 소로처럼 보는 법 소로는 이렇게 적었다. "관찰이 흥미로워지려면, 즉 중요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주관적이어야 한다." ✦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삶은 삶을 가장 덜 인식할 때 행복하다." (...)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향을 염려했다. 그가 눈 돌리는 곳마다 사람들은 정보를 통찰로 착각하며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걸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이터(사실상 소음)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처럼, 인터넷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금욕적인 삶을 살거나, 미학적인 삶을 살거나. 명상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 나는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 유예가 아닌, 더욱 풍성한 다른 세상으로의 침잠, 바로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음악 안에서 본 것임을. ✦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규정했다. 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긍정 정서의 차원에서 쾌락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다. (...) 고통을 피하라는 것은 타당한 조언이다(나도 여기에 찬성한다). 하지만 철학의 기반이 되기엔 너무나도 얄팍하지 않나? 고통에 빠진 사람에겐 그렇지 않다고, 에피쿠로스는 생각했다.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고 상상해보자. 의사를 불렀더니 의사가 즉시 포도 한 접시를 권한다. 뭐가 문제인가? 포도는 우리를 즐겁게 하는데. 그렇지 않은가? 에피쿠로스는 많은 사람이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산더미처럼 쌓인 고통 맨 위에 사소한 즐거움을 올려놓고는 왜 행복하지 않은지 궁금해한다. 어떤 사람은 짧고 강렬한 신체적 고통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뭉근하게 이어지는 정신적 고통을, 또 어떤 사람은 지금 당장 죽고 싶다는 상처받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만, 어쨌거나 고통은 고통이다. 만족에 도달하길 바란다면 반드시 이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딱
-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그러고는 관측자의 일과를 상상한다. 오후 느지막이 올라가서 하늘 플랫을 찍어놓고, 어두워지길 기다리는 동안 멍하니 노을을 보다가 어둠이 찾아오면 기계처럼 오직 관측에만 집중하는 시간. 망원경 시야에 타깃이 들어오도록 맞추고, 초점 조절하고, 노출 주고, 로그 적고 …… 그러다 보름달이 가까이 오면, 달빛이 너무 밝아서 내 타깃이 안 보인다며 불평도 하고 달이 너무 예뻐서 감탄도 하며, 의자에 푹 파묻혀 초코파이를 우적우적. 그러다 달이 지면 아침이 오기 전까지 다시 모니터 속으로 빠져든다. 허락된 짧은 밤이 지나면 아쉬운 마음으로 박명을 맞으며 다시 플랫을 찍는다. 벌게진 눈으로 돔을 닫고 망원경을 제자리에 파킹한다. 유독 밤새 빈틈없이 관측한 날은 파킹하는 그 순간이 가슴 끝까지 뿌듯하다. 너무 졸려서 미각이 거의 마비된 상태로 밥을 국에 말아 후루룩 한 그릇 비우고는, 관측자 숙소의 암막 커튼이 주는 그 따뜻한 어둠 속에서 죽음처럼 잠들고 싶은, 관측하기 딱 좋은 날. ✦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we’라고 칭한다. 물론 과학 논문은 대부분 여러 공동연구자가 함께 내용을 채워넣기 때문에, 우리라고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학위논문이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의 저자는 당사자 한 명인데, 그래도 논문을 쓰는 저자를 칭할 때 ‘우리’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학위논문을 쓸 무렵에는 교수님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선배들도 그렇게 했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따라 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학위를 받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달에 사람을 보낸 것도 미항공우주국의 연구원이나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우리’ 인류인 것이다. 그토록 공들여 얻은 우주 탐사 자료를 전 인류와 나누는 전통은 그래서 당연하다.
- 해피 아포칼립스!한 세계가 몰락으로 가는 길은 다양하다. 인류는 수백 년 전에 그중 한 길을 선택했고, 어느새 그 길의 끝에 와 있다.
- 드래곤 펄💬 쉬는 날 오후에 뒹굴면서 그자리에서 후루룩 다 읽으면 좋을 것 같았던 책 ..그러나 평일에 시작했고 틈틈이 읽어야 했다. 동화 같다. 한국인이라면 너무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존재들이나 개념들(구미호나 무당이나 심지어 '기'까지) 미국인이 읽으면 어떨지 궁금한데 뭐 엄청난 동양의 신비처럼 보이겠지..
- 도움받는 기분히시 나는 오래도록 사랑에 대해 생각해왔어, 히시. 그렇지만 이 두려움이 우리를 데려가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온도와 검정일 뿐이야?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고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을 때. 가까스로 기어 뭍에 다다를 때. 너는 웃으며 서 있었지. 내 이마에 총구를 겨눈 채. 단 한 마디, 가방 내놔. 그 단 한 마디가 전부였지. 그렇지만 무엇도 예감할 수 없는 이 심연 속에서 내가 네게 준 건 단지 그림자뿐이었을까. 그럴까. 너의 마음은 전부 가짜였을까. 내가 끝없이 속으로 물을 때. 혼자. 푸른 물. 마침표 다음 첫 문장. 눈 내리는 사막. 미납 연체. 흉터. 달력. 거울. 산호. 빈 유리병. 혼자 푸른 물속을 떠돌아. 첫 문장 뒤에 찍힌 마침표. 거울 속으로든 걸어 들어가면 사막. 사막을 지나서 안데스. 바닷가에서 주운 산호. 달력에 표시된 귀국 날짜. 정말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묻곤 해. 그래도 네 눈. 초록. 빛. 아주 작은 숨소리. 돌려줄 수 없는 마음과 돌려받을 수 없는 마음. 어깨에는 화상 자국. 콜라를 나눠 마시던 벤치. 빈 병을 불어내던 고동 소리. 이제 혼자. 알 수 없어 떠돌기 시작했는데 점점 더 알 수 없어졌어. 봐, 내 눈을. 내 눈이 뿜어내는 어두운 빛을, 봐. 너는 잠이 오지 않는 밤 뒤척이다 문득 떠올릴 거야. 그리고 중요한 것을 영원히 부숴버렸다는 고통에 내내 뒤척이게 될 거야. 히시. ✦ 1g의 영혼 거꾸로 매달린 새에 관해 거의 추락에 가까운 자세로 흩어지는 그림자에 관해 나는 썼다 그것은 호흡과 가장 깊은 잠 속에 빠진 네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1g의 영혼이라고 했다 어떤 사건은 영혼의 각도를 틀어놓는데, 결코 수정될 수 없는 비틀림도 있다 그런 순간들을 여러 차례 관통하다 보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아주 단순한 표정을 하고 너는 내게 말했지
- 세상을 연결한 여성들💬 재키 플레밍의 <여자라는 문제>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여자들은 수천 년 동안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서로를 끌어내 구해주고 있다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누락된 역사의 페이지에서 여자아이들의 우상이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을 끄집어내는 책. 프로그래밍은 여성의 일로 시작해서 번듯한 엔지니어링의 한 분야가 되는 순간 남성의 영역으로 넘어갔고, 오늘날 일반적인 컴퓨터과학과의 성비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이다. 저자가 에이다 러브레이스에게 하고 싶다고 적어낸 말을 나도 적어두고 싶다. 당신의 손녀와 증손녀들은 끈기있게 일하고 세상을 바꾸고 누군가에게 공을 뺏기고 지워지겠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과 그들이 기억되는 순간이 올 것이고, “당신의 가장 무모한 상상조차 뛰어넘는 기계의 이야기가, 왕국의 중심에 모셔진 책상에서 10대 소녀들에 의해 수백번 쓰일 것입니다.” ✦ (*서문*) 사람들은 줄을 서서 나와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전달한 역사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내 책을 나에게 내밀면서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딸이나 남매, 여성 동료나 아내에게 바친다고 써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렇게 하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는 이들은 자신이 차지한 자리의 힘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또한 새로 알게 된 역사 지식으로 그들의 산업 분야에서 여성을 위한 밝은 미래를 꾀할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갖춘 사람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번에도 그 일을 자신의 삶 속에 있는 여성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기꺼이 따님에게 드리는 헌사를 써드리죠.” 내가 한 남성에게 말했다. “당신이 먼저 이 책을 읽는다면요.” ✦ 말년에 에이다는 찰스 배비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제가 시인이었던 아버지다보다 훨씬 대단한 분석가(그리고 형이상학자)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저에게는 시인과 분석가의 피가 둘 다 흐르니까요.” (...) 그녀가 배비지와 어머니와 많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수학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극심한 불안에 빠진 여성을 만날 수 있다. 에이다는 자신의 특별한 재능을 확신했다. 그녀에게는 어머니가 집에서 가르치며 주입한 뛰어난 추론 능력과, 부재했던 아버지의 유산인 “숨겨진 것들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 있었다. (...) 해석기관은 결국 완성되지 못했지만 컴퓨터 시대의 기본 개념을 최초로 제시했다. 입력, 저장, 처리, 출력이라는 해석기관 설계의 네 가지 구성 요소는 오늘날 모든 컴퓨터의 핵심 구성 요소로 남아 있고, 에이다가 이 새로운 기계를 설명하기 위해 준비한 독창적인 주해는 거의 한 세기를 앞선 최초의 컴퓨터 과학 무헌이다. 해석기관이 어떻게 “인간의 손과 머리”의 힘을 빌리지 않고 베르누이 수를 계산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에이다는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램이라 여기는 수학 증명을 썼고, 이는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는 기계를 위한 것이었다. 에이다는 아이를 셋이나 낳았지만 메나브레아의 논문에 대한 주해를 자신의 첫 아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초고 작성을 마치면서 배비지에게 “그는 대단히 훌륭한 아기에요. 보기 드문 풍채와 힘을 가진 남자로 성장할 겁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이것은 자신의 작품을 남성으로 지칭하고 성명이 아닌 이니셜로만 서명한 에이다 시대의 이야기다. (...) 새디 플랜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백작 부인*countess*도 셈을 하면*count* 안 되는” 시대였다. (...) 에이다의 서신을 읽으면서 나는 수 세기를 뛰어넘어 만나고 싶은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맞아요. 당신 말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후계자들이 있습니다. 당신의 손녀와 증손녀들이죠. 그들은 세계 곳곳에서 싹을 틔우고 언제나처럼 끈기 있게 집중해 멈추지 않고 일할 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공을 차지할 거예요. 하지만 언젠간 더는 그러지 못하는 순간이 오겠죠. *그날이 오면* 당신의 역사가 기록될 거예요.
-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정보 부족과 박약한 신념, 자꾸만 뒤로 미루는 버릇은 가난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가 부딪치는 문제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좀 더 배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수많은 편의 시설에 둘러싸여 살고 있고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 상수도가 설치된 덕분에 아침마다 식수에 염소를 첨가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도 없고, 하수는 저절로 흘러나가므로 그것이 어떻게 배출되는지 알 필요도 없다. 또한 우리는 대부분의 의사가 최선을 다해 진료한다고 믿으며 공중 보건은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보건 의료 제도가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보험회사는 헬스클럽을 이용하는 고객에게 보상을 해준다. 보상 없이는 고객이 헬스클럽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다음 식사 때 먹을 제품을 어디서 구할지 걱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자제력과 결단력에 의존할 필요가 거의 없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늘 자제력과 결단력에 의존해야 한다. (...)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공중 보건 문제에 대한 안목을 기르도록 대중을 교육시킬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포함해 만인을 상대로 반드시 예방접종을 해야 하는 이유와 항생제 의존에서 벗어나야 하는 까닭을 명료하게 설명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정보 그 자체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 사회적 차원으로 시야를 넓히면 이런 신념과 행동이 존재한다는 것인 교육 시스템이 불공평하고 비효율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아이들을 호의적으로 대하며 더 많이, 더 잘 가르쳐 숨은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반면 가난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처음부터 특별한 재능을 보이지 않는 아이를 관심 밖으로 밀어내 온갖 모욕을 주다가 결국 도중에 그만두게 만드는 곳이다. 이런 구조는 엄청난 재능의 낭비를 낳는다. 학교를 중퇴하거나 아예 발도 들여놓지 못한 아이들 가운데 태반은 누군가의 잘못된 판단으로 희생당한 것이다. 부모가 너무 일찍 포기했거나 교사가 가르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경우 혹은 학생 자신이 자신감을 잃은 경우다. 이들 중에는 경제학 교수나 대기업 대표가 될 잠재력이 있는 아이도 있지만 결국에는 일용직 노동자나 소매점 주인, 약간 운이 좋은 경우 하급 사무직원이 된다. 그들이 잃어버린 빈자리는 대개 입신의 기회를 제공할 여력이 있는 부모의 평범한 아이들로 채워진다. ✦ 좋은 의도는 좋은 정책을 형성하는 필수조건이지만 좋은 의도만으로 좋은 정책을 만들 수는 없다. 설령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을지라도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나쁜 정책이 나올 수 있다. ✦ 💬 ”세계 최초로 자연과학의 무작위 대조실험을 경제학에 적용"했다고 되어 있어서 신기함. 경제학에서는 무작위 대조실험을 전혀 안 했었구나..?(경제학 전혀 모름)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따르면 개발경제학계는 주된 흐름이 제도주의라서, 좋은 정책이 아닌 좋은 정치과정이 먼저다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가난과 같은 거대한 문제에는 거대한 해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들이 주로 시도한 (무작위 대조실험을 통해 효용을 입증하는) 작은 주변의 변화 류의 프로젝트는 "왜 쓸데없는 일을 하냐"는 말을 듣고 사소한 연구 주제 취급을 많이 받는다고 함. 그래서 마지막 장에서는 정책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장이 되게 좋았다. 저자들은 반드시 큰 변화를 위해 엄청난 제도의 변혁이 선행되어야 할 필요는 없단 입장이다. "정치는 조금씩 개선할 수 있으며 실제로 조금씩 개선해 나가야 한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개입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제목 번역은 약간 애매한데,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라기보다는 가난이라는 구조적 현실 하에 처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름의 상황에 맞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책 띠지에는 차세대 노벨경제학상 후보들이라고 써
- 일기시대개인이 각자의 정신이 미치지 않도록 기울이는 노력의 형태는 조금씩 다를 것이다. 글만 쓰면 안 된다고, 새로운 경험이 글의 밑천이 될 거라는 말은 반만 맞다. 글쓰기는 도자기 빚기와 같다. 도자기를 빚을 때, 물레는 계속 비슷하게 돈다. 도는 행위는 유지되지만, 미묘한 손길에 변화를 줌으로써 도자기의 형태와 아름다움이 빚어진다. 그러므로 도자기를 빚는 인간에게 왜 자꾸 도냐고, 왜 자꾸 똑같은 동작만 반복하냐고, 그만 돌고 새로운 것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 사람은 거대한 반복 안에서 자신만의 내밀하고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라는 주문이나 새로운 것을 향해 뛰어들라는 유혹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내면에서 발생시키는 실질적인 새로움을 보지 못하는지도. ✦ <언어가 정형의 틀에 매이지 않아도 시적일 수 있듯이, 삶에서 본질적인 형식이 부정되더라도 삶의 진정성을 추구할 수 있다.> 이 문장을 뒤집어서 다시 읽어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삶에서 본질적인 형식이 부정되더라도 삶의 진정성을 추구할 수 있듯, 언어가 정형의 틀에 매이지 않아도 시적일 수 있다.> ✦ <나의 동일시는 불완전한 것이다. (...) 왜냐하면 내가 '진지하게' 그 사람의 불행에 동일시하는 순간, 내가 그 불행에서 읽는 것은 그것이 나 없이 일어났으며, 이렇듯 스스로 불행해진 그가 나를 버리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와는 무관한 이유로 해서 그 사람이 그토록 괴로워한다면, 그건 내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고통이 내 밖에서 이루어지는 한, 그것은 나를 취소하는 거나 다름없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우리는 상대방의 괴로움에 완전히 동참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상대방이 어떤 불행으로 괴로워할 때 나는 소외되기 대문이다. 하기사, 내가 상대방의 고통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연애를 시작하고 14일하고 세 시간 이십칠 분까지만 가능하지 않은가. 이 믿음이 깨지는 것에서 첫 번째 관계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상대방의 고통과 희망의 원천은 한때 나였으나, 이제는 상대는 내가 아닌 다른 고통과 행복에도 눈을 돌린다. 관계의 발전은 다른 고통에게 나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으로, 상대가 내가 아닌 이유로 행복해하고 내가 아닌 이유로 절망하는 모습을 받아들이며 시작된다. ✦ 그런 식으로 계속 걸었다. 가다가 오르막길이 나오면 되돌아갔다. 다시 계단이 나타나면 물러났다. 비가 오면 피했다. 물러나기와 항복하기, 싸우지 않기, 견디지 않기를 했다. 항복하기, 항복하기, 항복하기 연습, 항복을 즐기기. 항복도 계속하다 보니 기분이 좋았다. (왠지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무조건 평지만 걸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어려워지면 발을 빼는 거야. 왜냐하면 내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얻지 않는 순간, 배움이 없는 순간, 성취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 버리는 시간, 그런 시간들을 용서하고 삶에 초대한 것으로, 일명 ‘시간 갖다 버리기’, ‘시간을 쓰레기로 만들고 기뻐하기’, ‘그 쓰레기를 재활용하지 않기’, ‘삶을 일정 부분을 낭비하기’이니까. 『G.H.에 따른 수난』에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마침내 실망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이전의 나는 나에게 이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롭지 못함으로부터 나는 최고의 것을 거두었다. 그것은 희망이다. 스스로의 불행으로부터 미래를 위한 덕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지금 두려움은, 내 새로운 존재방식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인가?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냥 매번 일어나는 일에 나를 맡겨 두면 왜 안 되는가? 나는 우연이라는 성스러운 위험을 감수해야 하리라. 그리하여 운명을 개연성으로 대체하게 되리라.
-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연애하기랑 결혼하기 왜 이렇게 힘든 건데 이 사람 소설에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썸녀랑 자전거 한번 타려고 온갖 우여곡절 좌충우돌 주변 지인이 동원된 대소동... 그리고 결혼하기로 결정한 지 얼마 안 되고 나서 이 소설의 표제작은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 세계 반바퀴를 돌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무릅쓰고 서울로 돌아온 남자가 흔하디흔한 검은머리 파뿌리 질문 앞에서 생각하기를, <어쩌면 결혼이란 계속해서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기만 하는 그런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래도 한번 저질러보려고 한다. 아직 어린 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며 설레는 마음만으로 혼자서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에 그대로 밤을 지새울 수도 있었던, 그런 그녀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뭐 하여간 대단한 행운이니까. 그리고 그 정도 행운이 주어져 있다면, 너와 함께 겪는 고난은 언제나 해볼 만한 도전이고, 너의 손을 잡고 같이 가는 역경은 항상 새로운 모험이지 않겠냐고.>
- IT 좀 아는 사람💬 걍 원래 아는 것도 많았지만 어쨌든 휙휙 읽기 좋다. 왜 ㅇㅇ가 ㅇㅇ를 인수했는가? 요런 부분들이 특히 재밌었음!
- Lo-fi저지대 그는 입 속에 차곡차곡 쌓아둔 말 때문에 어느 날 밤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말들이 자갈처럼 무거워져서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고 매일매일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고 했다 삼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가라앉고 있다고 이건 꿈이 분명하다고 그런데 이렇게 긴 꿈은 처음이라고 이 꿈에서 깨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 겨우 말을 이었다 그는 입 속의 말들이 어떻게 돌멩이가 되는지 내 속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돌멩이들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고 모든 영화에는 엔딩이 있는데 어째서 이 꿈에는 출구가 없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했다 얼마나 더 아래로 내려가야 바닥에 닿을 수 있는지 과연 바닥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당신이 내가 삼 년 만에 처음 본 사람인데 당신도 이 꿈의 마지막을 알 수 없겠지요, 라고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자갈이 목까지 차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없이 더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나의 나 된 것 매일 같은 시각에 노인은 개를 산책시켰다 아이들은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고 병아리를 파는 남자는 죽은 병아리들을 하수구에 빠뜨렸다 쑥을 뜯으러 갔던 여인들이 며칠째 돌아오지 않았고 주민들이 숲을 수색했다 불 꺼진 교회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받을 축복과 저주의 무게를 달아보았다 한밤중 눈은 계절과 무관하게 내렸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끌고 왔다 사람은 한 번만 죽는 게 아니라고 백 번도 넘게 죽을 수 있다고 너는 말했다 영원히 사는 사람들의 밤에 대해서도 고요히 쌓이는 눈에 대해서도 말했다 이따금 나는 나의 눈을 찔렀다 모두가 나의 나 된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게 더 오래 살 것이다
- 무자비한 알고리즘늦게나마 이런 질문을 던지면 미래의 행동을 예측하고 측정하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재범 위험을 높이는 요인들이 개인 속에 있는 것이 아닐 때, 개인에게 더 높은 재범 리스크를 부여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가령 어느 아이가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고, 교육도 잘 못 받고,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면, 이런 '특성'들을 활용해도 되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가령 그 부모가 전과자라고 해서, 어느 개인에게 더 높은 위험값을 부여하는 것이 법철학적으로 합법적일까?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는 그럴 수 있고, 다른 맥락에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일까? 개인의 이런 특성들이 예측가능성을 대폭 개선한다면 어떻게 할 텐가? 그러면 이런 특성들을 활용해도 될까, 나아가 꼭 활용해야 할까? ✦ 콜린그리지 딜레마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술이 아직 널리 사용되지 않는 한, 부작용의 전모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광범위하게 사용되면, 통제하고 다루기가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각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장 시작해보라. 개인적으로 어떻게 결정을 내릴지 생각해보라. 새로운 동료를 채용할 때 어떤 것에 비중을 둘까? 당신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 데이터가 더 나은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이 될까? 내린 결정이 좋은지, 나쁜지를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그것을 측정할 수 있을까? (...) 자신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무엇이 좋은 결정일지 고민해 보아야 어느 정도로 기계의 뒷받침을 받을 지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가 컴퓨터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당신과 나, 우리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 지구인의 우주 공부현대 과학의 키워드는 불확실성, 확률적 존재, 변화에의 자각이다. 이는 현대 과학의 핵심 법칙인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진화 이론의 바탕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각으로 과학을 받아들여서 세상에 대한 나름의 태도를 취하고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이 21세기 세계 시민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과학적 지식을 강조하는 과학 소양과 달리 과학적 소양은 과학적 태도와 비판적 사고 능력을 강조한다. 과학적 소양을 갖추기 위한 첫걸음은 이런 현대 과학적 인식론을 체화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천문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과학적 사실을 밝혀내고 다시 그것을 전복하고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지 그 과정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불확실성과 확률적 세계관 그리고 변화를 수용하는 진화적 태도를 공유했으면 한다. ✦ 💬 처음 저자가 유학 갔을 때 학식 먹는데 옆에 웬 할아버지가 앉아서 보니 그 할아버지가 오르트 구름의 얀 오르트이며 자신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의 지도교수(!)였고 당시 90세였으나 매일 학교에 나와 연구를 하고 (학식도 먹고..)있었다는 일화가 충격적이어서 잊을 수 없을 듯. 그리고 잘 모르는 분야의 연구 이야기를 접하면 신기하고 생소하다 못해 다소 낭만적이기까지 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항상 생기는데 나에게 천문학의 경우는 오르트 구름이 딱 그랬다. 어떤 면에서 그랬냐면, 오르트 구름은 태양계의 끝에 있어서 아직 그 존재가 실제로 확인된 적은 없는데, 오르트는 혜성의 궤도를 분석해서 오르트 구름이라고 불리는 천체들의 집단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잘 가늠도 가지 않는 먼 거리에 있는 (심지어 그 거리조차도 얼마나 먼 건지 불명확한) 규명되지 않은 무언가를 다른 관측치를 통해서 그 무언가가 거기 있어야만 한다고 보인다는 것이 굉장히 재밌게 느껴진다는 소리.
- 트릭 미러💬 자신의 위치에서 (엄청난 재능으로) 시스템을 뜯어보되, 발 딛은 곳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 그리고 때때로는 그 노력의 한계까지 인정하는 미덕(이것 또한 재능). ✦ 하지만 인터넷은 모든 일에 “나”를 적용한다. 인터넷은 누군가를 지지하면 자동으로 그들의 경험을 나도 공유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연대는 정치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이고 그것은 일상생활에서의 나를 솔직하게 드러냈을 때 최대한 성취된다. 경찰의 탄압에 맞서는 흑인의 투쟁과 신중하게 고른 스타일리시한 옷을 입어야만 무시당하지 않는 과체중 여성의 행보를 지지하고 싶은가? 인터넷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방식으로 이들과 연대를 표시하는 대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면에 드러내는 방식으로 연대를 표현하라고 권한다. 그날은 아마도 자기기만의 시작이었거나 종말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도 나는 여전히 동화 속 소녀들에게 나를 투영했지만 무언가 확실히 달라졌다. 내가 지금까지도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제는 희미한 추억이 되어버린 진정 순수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던 대로 나라는 사람을 경험할 수 있었던 시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천국 같은 여름 방학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텍사스 햇살이 네모난 그림을 그리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던 시절 그리고 이미 복잡한 여성 캐릭터가 된 청소년기에도 “복잡한 여성 캐릭터”라는 표현 같은 건 듣지 못했던 그날들이 진심으로 그리워서일지도 모른다. 동화 속 소녀들은 모두가 씩씩하고, 어른 여주인공들은 모두 억울해한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 이후에 명확해져버린 어떤 사실이 싫다. 이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것과 배제하는 것, 여성들의 용감함과 아픔이 문학에 너무 집중적으로 표현된 것이 싫다. 실제 세상은 여성이 이 모든 감정을 경험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어른이 되면서부터 소설 속 여주인공의 세계에서 나를 찾기가 머뭇거려진 이유는 이 관계가 상호적이지 않으리라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안에서 조 마치를 보지만 이 세계의 조 마치들은 내 안에서 그들을 볼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고 보지도 못한다. 가끔 백인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수다를 떨다가 만약 자기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찍는다면 어떤 배우로 하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다. 백인 친구들은 마치 마트의 한 복도를 전부 차지한 진열대에서 시리얼을 고르듯이 비슷비슷한 연예인들을 데리고 온다. 다채롭고 미묘하게 다른 팬톤의 색감처럼 금발, 갈색 머리, 빨강 머리 친구들은 자기와 닮은 캐릭터들을 다양한 선택지에서 고른다?장애 유무나 체형으로까지 고를 수는 없다?반면 나에게는, 대략 5년 전에 나왔던 영화에서 아시아계 조연 역할을 번갈아서 했던 세 명의 여배우 외에는 선택권이 없다. 물론 요즘 출간되는 현대 소설에 나처럼 생긴 여성들도 등장하긴 한다. 지하철이나 저녁 파티에 꽂아놓는 장식품처럼 나오거나 그 주인공 남녀의 백인성에서는 찾을 수 없는 성실함으로 무장한 캐릭터로 나오기도 한다. 여성이 인간의 조건을 대표하는 어떤 상징으로 보이도록 허락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여성의 조건을 대표하는 상징도 아니었다. 더 최악은 문학 속에서 여성이 처한 조건?백인이자 억압당하는 조건?은 너무나도 불만족스러웠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들어가고 싶지도 않은 영역에서 차단당했다. 여주인공의 텍스트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여성들이 최대한 잘해봐야, 그러니까 구조적 억압을 최소한으로 받는다 해도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의 인생에 의해 파괴된다는 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모범적인 여성상에 대한 전통적인 남성적 정의, 즉 여성은 상냥하고 얌전하고 고분고분하며 평범한 인간으로서 갖는 결점이 없어야 한다는 개념을 해체하고 거부해왔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을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그들이 떨어지는 걸 보면서 즐거워했다면, 페미니즘은 이제까지 그 작동 순서를 뒤집는 데 성공해왔다. 넘어진 여성을 일으켜 세워서 다시 아이돌화하는 것이다. 여성 유명인들은 계속해서 최대한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개념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지만 이제 그 매
- 지속 가능한 삶, 비건 지향
- 비전공자를 위한 이해할 수 있는 IT 지식
- 나의 첫 사이드 프로젝트몇가지 유용한 팁 - 하겠다고 주변에 떠벌려라 - 시즌제처럼 이번 시즌은 3개월이라고 정해놓고 그 기간 동안은 꾸준히 열심히 한다 (지속적으로 기한 없이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은 아무 효용이 없다) - 돈걸고 하는 모임이 최고다
-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리베카 솔닛은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이렇게 썼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물건처럼 이용되고 버려지거나, 쓰레기처럼 그려지거나, 침묵하거나, 아예 안 나오거나, 무가치하게 그려지는 책을 많이 읽으면, 그 경험은 분명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가 사랑하는 장르에 나와 같은 얼굴을 지닌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거나 혹은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그려지는 것은, 게다가 그 장르가 대부분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N. K. 제미신은 처음에는 단지 “내가 쓰는 소설에서 나 자신을 제외시킬 수는 없어서” 작품에 흑인 캐릭터를 넣어 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등장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백인 남성이 고뇌하고, 위기를 해결하고, 세상을 구하며 미래로 가는 이야기들을 줄기차게 소비해왔다(그리고 그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기까지도 꽤 오래 걸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읽으며 그 만족감, 그 통쾌함을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뭐 그런 부분은 떼어 놓고서라도, 아주 매력적인 이야기들이다. 내가 가장 좋았던 단편은 <폐수 엔진>. 다른 단편에 비해서도 유독 가볍고 귀여운 로맨스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영상화되어도 멋질 거라고 확신한다. 두 캐릭터에 몇몇 좋아하는 흑인 여성 배우의 얼굴들을 집어넣어보며 상상해봤다. 앞으로 내가 점점 더 많은 얼굴들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 SF와 판타지 그리고 그 업계에서 뿜어 내는 인종차별과 내가 스스로 내면화한 인종차별에 맞서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야 했는지. 내 민족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리고 마침내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내가 보고 싶은 미래를 자아내기 시작하자 얼마나 흐뭇한지.
-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묘사했던 '마을'이 제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와 가장 닮아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 '마을'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그곳 사람들이 다른 세계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거죠. 유토피아가 완성형 공간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유토피아로 바꿔가려는 개인들이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과정적인 측면에서 유토피아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 재재: 루이제 린저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에 좋아하는 구절이 있어요. "니나는 마치 폭풍우에 좀 파손된, 그러나 대해에 떠 있고 바람을 맞고 있는 배와도 같았다. 그리고 볼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배가 어디든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새로운 대륙의 새로운 해안에 도착해서 대성공을 거두리라는 것을 돈을 걸고 단언할 것 같았다." 훼손과 상처, 두려움의 꺾이지 않고 어디든지 가는 여성. 이런 분들이 제가 사랑하는 여성상이지 않나 싶습니다. ✦ 이슬아 작가 특유의 '등 두드리는 다정' '다정한 선동'에 대해 생각하던 차에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말을 만났다. "다정함이란 다른 존재, 그들의 연약함과 고유의 특성, 그리고 고통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그 존재들의 나약한 속성에 대해 정서적으로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다정함은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유대의 끈을 인식하고, 상대와의 유사성 및 동질성을 깨닫게 합니다. 이 세상이 살아 움직이고 있고,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고, 더불어 협력하고, 상호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올가 토카르추크, 타자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품은 "다정한 서술자"
- 한편 4호: 동물동물원에서의 죽음 철학자 클로에 타일러는 <동물의 죽음에 대한 존중>에서 “우리가 죽은 동물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살아 있는 것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비인간동물의 죽음에 애도하지 못하게 하는 체제에서 비인간동물의 삶은 삶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사람의 사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물의 죽음이 사람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면 살아 있을 때에 온전한 복지가 주어질 가능성은 낮다. 그래서 죽은 동물에게도 존엄성을 부여하는 일은 살아 있는 동물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준다. 그 죽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따라 살아 있는 것들의 삶의 질은 바뀔 것이다. ✦ 플라스틱 바다라는 자연 결과적으로 인간뿐 아니라 다른 동물, 식물, 미생물과 지구의 온갖 사물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플라스틱 지구 속을 헤엄쳐야 한다. 기술이나 관리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낙관도, 자연의 종말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혐오와 두려움도 헤엄치기에 별로 유용하지는 않아 보인다. 이제 플라스틱세계 속에서, 헤러웨이가 말했던 것처럼 문제와 함께 머무를 때가 와 버렸다. “문제와 함께 머무른다는 것은 미래라고 불리는 시간과의 관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실, 문제와 함께 머무는 것은 진실로 현재에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끔찍하거나 지상낙원이었던 과거와 종말론적이거나 구제받는 미래 사이를 회전하며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장소와 시간, 물질과 의미의 무수하고도 끝나지 않는 배열 속에 뒤엉킨 도덕적인 생물체로서 말이다.”
- 아무튼, 후드티💬 챕터 중 하나의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후드티 입은 여자는 어디든 간다." 나도 18년 Women Techmakers 에 갔었어서 오! 하면서 읽었고. ✦ 매일같이 신기술이 나오는 시장, 공부를 손에서 놓았다간 낭떠러지 아래로 떠밀릴 것 같은 IT업계에서 불안감과 조바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심지어 나는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들어갔을 때조차 지금 이 시간에도 뒤처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모바일 웹앱 프로그래밍에 매달렸다. 그런 경험을 어렵사리 꺼내놓자 청중석에 앉은 여성 개발자들 모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발표를 시작할 때는 겁을 먹고 있었는데 불안감을 솔직히 털어놓고 내 이력을 소개하면서 마음이 차츰 안정되었다.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긍정하면서도 자신이 없어서 스스로 IT업계의 주변인이라고만 여겨왔었다. 그날 발표 이후 비로소 내가 IT업계의 일원으로 함께 선 것 같았다. '워너비'를 입는다는 건 단순히 특정한 대상을 동경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속한 세계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담아내는 행위다. 트레이너 선생님이 영양제 회사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속한 운동 세계를 소개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세계 안의 자신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Women Techmakers Korea가 인쇄된 후드티를 입을 때마다 나도 내 워너비를 상기하게 된다. 내가 가진 정보와 아이디어, IT 도구를 결합해 기술이 필요한 곳에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안에 쌓은 것은 단지 기술이 아니라 함께 협업해 온 경험이다. 이건 홀로 익힌 게 아니라 함께 배운 것이다. 함께 배운 만큼 모두를 위해 쓰고 싶다. 무엇보다 나는 얕고 넓은 개발자가 아닌가. 물론 얕고 넓은 개발자는 높은 곳에 갈 수 없다. 그렇지만 더 멀리까지, 더 구석구석 곳곳으로 갈 수 있다. ✦ 한때 나는 '없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수식에 묶여 계속 버둥거렸다. 그렇지 않은 사람임을 계속해서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다. 나는 가능한 한 미래를 계획하지 않으려고 한다.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고 싶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하게 될까. 이렇게 여러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지만 그런 질문은 미뤄놓기로 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일들도 계획과 성과로 달성된 일이 아니다. 그저 좋아하니까 해봤고, 해보니까 또 좋았을 뿐. 기본적으로 나는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 그래도 나에 대한 한 가지 믿음은 있다. 앞으로 내가 어디로 향하든, 그 가운데서 무엇을 선택하든 아마도 그 일이 내게 가장 자연스러우리라는 확신 말이다. 그저 눈앞의 하루를 제멋대로 살아가는 게 다인 삶이지만, 쌓은 게 없는 대신 나는 듯이 뛸 수 있지 않겠는가. 등에는 배낭, 발에는 운동화 그리고 내 몸에 딱 맞는 후드티 한 벌.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 명랑한 은둔자💬 올해의 첫 책. 새해에는 적절한 혼합의 발견과 강하고 유능한 팔을 가질 수 있길. 유고들을 묶어 주제별로 정렬한 책이어서, 명확한 소재가 있었던 다른 대표작들과는 달리 캐럴라인 냅의 종합 세트 같은 책이다. 물론 가장 선명한 글들은 내가 <드링킹>을 좋아했던 만큼 술에 대한 내용이었으나 그건 <드링킹>에서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치게 이야기했으므로. 고독과 고립의 균형, 혼자와 혼자 아님의 혼합은 아마 평생이 필요한 숙제일 것이 맞다. 끊임없는 데이터 수집으로 나에 대해서 배워가는 일도. ✦ 60세 이후 삶에 관한 에세이를 모은 <시간의 마지막 선물 The Last Gift of Time>에서 작가 캐럴린 하일브런은 자신이 삶에서 달성하고자 평생 애써온 이상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사적인 공간이 충분하되 지속적인 교유가 있는 상태*다. 하일브런에게 사적인 공간은 시골의 작은 집이라는 형태로 실현되었고, 교유는 가족과 소규모의 친밀한 친구들로 충족되었다. 하지만 하일브런의 글을 읽다 보면, 이 조합은 — 우정으로 조절된 프라이버시 —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넘어선 일이라는 느낌, 그 조합을 키워내는 것은 오히려 주로 감정적인 작업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에게는 시골의 작은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집을 찾아내는 일, 또한 공감해주는 남편과 친밀한 친구들과 심장과 영혼을 모두 사로잡는 일을 찾아내는 일, 이것은 가공할 만한 작업이고, 종종 평생 추구해야만 하는 작업이며, 하일브런도 60세를 훌쩍 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적절한 균형을, 혼자 있는 시간과 남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적절한 혼합을 달성했던 것이다. 그 적절한 혼합을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사적인 문제다. 혼자 있는 시간은 얼마쯤이면 충분할까? 얼마나 많으면 지나칠까? 안전하게 자신을 보호하는 상태는 언제 자신을 제약하는 상태로 변할까? 당신의 경우, 고독한 행복이 언제 변질하기 시작하여 고립된 절망으로 변형되는가? 하루가 지나면? 열흘? 한 달? 세상을 차단해버리고 싶은 충동은 언제 닥치며, 그 진정한 동기는 무엇인가? 당신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낫기 위해서인가? 숨기 위해서인가? ✦ 그런데도 나는 스스로 쌓아 올린 나만의 이 작은 세계를 여간해서는 떠날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우리의 나라'에서 살아왔고, 이따금 나도 걱정과 필요에 쫓겨서 그곳의 문을 쾅쾅 두드리면서 들여보내달라고 청하곤 했다. 함께 저녁을 먹던 친구가 내게 아무도 사귀지 않는 것은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혼자라는 상태에 절망하고 혼자 있는 것은 열등하고 무서운 상태라고 생각했던 시절의 기분이 어땠는지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주말에 계획이 없다는 말에 친구 웬디가 불편해하는 것을 볼 때, 나는 한때 내가 아무 계획 없는 시간을 얼마나 겁냈는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내 안의 감정이 밖으로 나오도록 여유를 주는 일을 얼마나 어려워했는지 새삼 떠올린다. 그리고 체육관에서 만난 여자처럼 사람들이 '우리'라는 단어를 수시로 입에 올리는 걸 들을 때, 나는 마치 타인과 결부되지 않은 나는 존재 가치가 없다는 듯이 남들과의 관계로만 나 자신을 정의하려고 애썼던 고통스러운 시절을 떠올린다. 그날 밤 부엌에서 켈로그 만찬을 준비하며 내 집의 단정함과 조용함을 즐길 때, 그 시간이 고마운 선물이자 일종의 승리로 느껴졌다. 예전에 내가 애쓰며 괴로워했던 일들이 과거로 좀 더 멀리 물러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원래 숫기 없는 성격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늘 부담스럽게 느껴왔고, 앞으로도 아마 어느 정도는 계속 그럴 것이다. 따라서 나는 혼자 있는 걸 늘 대단히 편하게 여겼지만, 그러면서도 그 상태를 만끽할 줄은 잘 몰랐다. 혼자 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초조해지지 않는 것, 연애의 틀 밖에서도 안락과 위로와 인정을 얻을 수 있다고 느끼는 것. 내가 가진 자원만으로도 — 나라는 사람, 내가 하는 선택만으로도 — 고독의 어두운 복도를 끝까지 걸어서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 이런 것은 잘하지 못했다. 나는 시리얼 그릇을 들고 거실로 가서 TV 앞
- 믿습니까? 믿습니다!결국 우리를 속이는 건, 점쟁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 데모스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셍에서 가장 쉬운 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거라면 뭐든 믿는 존재이기 때문에." 기원전 4세기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지금도 기꺼이 속는다. ✦ 주식시장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다. 모든 일에 인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일이 우연히 일어난다. 그런데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서사를 만들고 그 서사에 맞춰 행동한다. 그래서 이상한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어떤 혼란 속에서도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의 가장 탁월한 능력이지만, 종종 그 능력이 인간의 발목을 잡는다. (...) 앞에서 봤듯 인류의 역사는 종종 무분별한 믿음에서 비롯됐다. 농경처럼 속은 것이기도 하고, 특정 사상처럼 희생한 경우도 있다. 어쨌든 그런 인류의 모습은 그다지 스켑틱하진 않았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런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대의를 찾아서>에서 '신념의 도약'이라고 표현했다. 닿을지 안 닿을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무작정 뛰어드는 행동. 이런 행동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가끔 성공했고, 이는 역사의 단계를 넘어가는 선택이 되곤 했다. 앞으로도 인류는 이제까지 그래 온 것처럼 종종 위기에 처할 것이고, 신념의 도약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 “어떤 이야기를 사랑하고 믿느냐가 세상의 운명을 결정한다." - 해롤드 C. 고다드, The Meaning of Shakespeare
-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문제는 이들이 도식화될 때 발생합니다.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도구로 장르를 택했을 때, 그 결과는 대부분 좋습니다. 하지만 일단 장르물을 만들기로 하고 거기에 딸려 오는 주제를 패키지로 가져온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사고가 제거되는 것이죠. 많은 싸구려 장르물이 이 함저엥 빠집니다. 오래전에 도식화된 장황한 설교를 늘어놓으면서 그게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는 줄 착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더 이상 교훈이 아닙니다. 장르에 추가된 깃털 장식에 불과해요. 철학이 아니라 패션인 것이죠. ✦ 💬 1편이 훨씬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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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적 혼란나는 변모라는 단어에 집착했다. 나는 변모하고 싶었는가? 아니면 변모되길 원했는가? 나는 친절한 주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예전에 단정치 못했던 하녀가 될 것인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변모되었고, 더 이상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 루비프루트 정글"여자가 무슨 모터바이크야." "염병하지 마, 리로이. 내가 갖고 싶으면 탱크라도 사서 안 된다고 말하는 인간들 밀어버릴 거야." ✦ "너 미쳤어. 여자는 결혼을 해야 해. 네가 쉰 살 돼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같이 늙어갈 사람이 있어야 돼. 안 그러면 너 후회해." "난 아흔아홉에 난교 파티 열어서 구속될 거고, 늙어서 같이 살 사람 같은 건 안 키워. 너무 우울한 생각이다. 세상에, 너 지금 스물넷인데 쉰살 때 일을 걱정하고 있잖아. 그게 말이 되냐." ✦ 나는 엄마도, 아빠도, 근본도, 형제자매라 불리는 생물학적 닮은꼴도 없었다. 미래를 생각해봐도 스테이션왜건 한 대와 파스텔색 냉장고가 딸린 이층집이나 터울이 고른 금발의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가정은 내가 바라는게 아니었다. 나는 《매콜》 같은 잡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 모범 주부가 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심지어 남편도, 아니 아예 남자 자체가 필요 없었다. 나는 내 길을 가고 싶었다. 내 꿈은 그게 다였다. ✦ “모르겠다, 몰리. 넌 인생을 어렵게 살려고 해. 의사나 위대한 사람이 되겠다 그러질 않나,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하질 않나. 사람들이 다 하는 걸 조금은 해야지, 안 그럼 사람들이 싫어해.” “사람들이 날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어. 사람들은 다 멍청하다고. 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나를 좋아하느냐는 상관있지. 나한테 진짜 중요한 건 그거야.” ✦ 이 망할 세상이 내가 나로 있을 수 있게 해준다면 좋겠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내 영화를 촬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내가 이룰 수 있는 소원이다. 어떻게든 그 영화들을 다 만들어낼 거고, 싸우다가 오십 살이 되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게 된다면, 두고 보시라. 왜냐하면 난 미시시피 강 이편에서 제일 잘나가는 오십 살이 될 테니 말이다. ✦ 💬 이 책을 어렸을 때 읽을 수 있었다면 작가의 말처럼 나에게 어떤 자유의 길로서의 실마리가 되었을 수 있겠다. 지금도 충분히 재미있고 사랑스러웠지만, 나를 나로서 좋아하는 데 조금 더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보다 그때. 지금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안다. 어떤 사람이 될지를 생각하기보다는 이미 어떤 사람이 된 상태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말을 한다고 해서 몰리 볼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홀리의 말을 이해하는 어른이 되었다. 심지어 나는 그의 말을 위의 인용처럼 받아적지도 않았지만, 대충 이런 말이었지: "너를 사랑하면서도 내가 너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서 네가 조금 미워져."
- 랩 걸엄마와 딸로 산다는 것은 뭔지 모를 원인으로 늘 실패로 끝나고 마는 실험을 하는 느낌이었다. 다섯 살 때 나는 내가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게 무엇이든 남자아이보다 못한 건 확실했다. 오빠들은 우리가 실험실에서 하는 놀이를 바깥 세상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보이스카우트에서 오빠들은 모형차 경주를 했고, 로켓을 만들어 발사하는 놀이도 했다. (...) 나는 아빠의 실험실로 더 깊이 숨어들었다. 그곳은 내가 가장 자유롭게 기계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과학을 선택한 것은 과학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내게 제공해준 것이 과학이었다. ✦ 이 가루가 오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는 이 우주에 단 한 사람, 나뿐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 작고 부족한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나는 나만의 독특하고 별난 유전자들이 모여서 생긴 존재일 뿐 아니라 창조에 관해 내가 알게 된 그 작은 진실 덕분에, 그리고 내가 보고 이해한 그 진실 덕분에 실존적으로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모든 팽나무 씨를 강화하는 광물질이 바로 오팔이라는 확실한 지식은, 누군가에게 전화하기 전까지는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그것이 알 가치가 있는 지식인지 아닌지는 오늘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느꼈다.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그 순간 나는 서서 그 사실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싸구려 장난감이라도 새것일 때는 빛나 보이듯, 내 첫 과학적 발견도 그렇게 반짝였다. ✦ 나는 과학에 대해 가장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실험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세상이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다. ✦ 모두의 얼굴에는 이제 내게 익숙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저 여자가? 그럴 리가. 뭔가 실수가 있었겠지." 전 세계 공공기관 및 사립 기구들에서는 과학계 내 성차별의 역학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이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결론지었다. 내 제한된 경험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지금 네가 절대 너일 리가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성차별이다. ✦ 필요로 인해 시작된 창조 과정은 무척 재미있고 괴팍한 결과로 이어지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독특한 성격을 띤다. 모든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과학적 창조물들도 시대의 영향을 받고, 그 시대에 직면한 문제 해결을 시도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또 모든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창조물도 그 덕분에 가능해진 미래의 시각에서 보면 구식이고 고물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하던 일을 멈추고 선배 과학작들의 손길이 닿은 이런 창조물들을 들여다보면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고, 지엽적인 요소에까지 세심한 신경을 쓴 것을 보고는 점묘화에서 수평선 멀리 있는 작은 배를 표현한 수백 번의 붓 자국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로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식물들은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할 때 항상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한 것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희생하지도 않았다. 너무도 쉬웠고, 내게 과분했기에 더 달콤했다. 되지 않을 일은 천지가 개
-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라는 말은 태아가 아직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다. 태아가 인간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만일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인간으로 성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태아는 인간이 아니지만, 생명권의 주체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 어떻게 인간 아닌 존재가 생명권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위 인용문에서 언급했듯이 생명권은 인간이 지닌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데, 어떻게 인간 아닌 존재가 인간의 기본권을 가질 수 있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헌법불합치 의견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의 논변과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드워킨이 강조하듯, "태아의 생명권"과 "태아 생명의 본래적 가치"를 구별한 것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의 본질적인 요소다. 헌법불합치의견은 이 근본적인 구별을 은근슬쩍 지워버린다. (...) 헌법불합치의견은 엄밀한 법적 논증을 한 것이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는 정치적 판단을 한 것이고, 그 결과 태아의 생명권은 법적 개념이 아니라, 아무 데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정치언어가 되어버렸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낙태죄 폐지를 지지해온 시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임신중단 반대 진영에게 강력한 무기를 쥐여준 꼴이 되어버렸다. ✦ 이런 꼼수의 목적은 태아의 법적 지위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 인간 여성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데 있다. 태아의 생명권은 대부분 임신중단에 관한 논쟁에서만 주장되고, 그 주된 기능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태아 생명과 관련한 다른 문제들, 예컨대 태아가 손해배상청구권을 가질 수 있는지의 문제에서 태아의 생명권이 진지하게 논의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임신중단 논쟁에서 태아의 생명권이 등장하는 순간,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도덕적 믿음, 그리고 여성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가부장주의적 믿음이 뒤섞이게 된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가부장주의적 장치를 활용하는 것일 수도 있고,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규범 자체가 가부장주의에서 태어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태아의 생명권 개념과 가부장주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 임신중단의 사유를 묻는다는 점에서 그냥 그 권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포함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제 임신 유지와 중단에 대해 판단하고 개인의 의지를 형성하는 과정은 오롯이 임시한 여성 자신의 내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 누구도 여성의 동의 없이 그 과정에 개입할 수 없고, 국가도 개인적 결정의 사유를 요구할 수 없다. 만일 국가가 임신중단의 사유를 심사하고, 그 결과에 때라 임신중단을 허용하거나 금지한다면,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는 부정될 것이다. 혹은 임신중단 사유가 허용과 금지의 기준이 되지는 않더라도, 국가가 사유 제출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는 부정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 SF는 정말 끝내주는데앞으로 나아가도록, 그리하여 지난 시절로 돌아갈 수 없도록 불가역적 변화를 야기하는 상호작용이야말로 SF가 재미있는 점이다. 물론 이 장르는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 세계를 만들어도 된다는 점에 치중하여 편안한 도피를 꿈꾸게 하기도 한다. 미국 서부를 무대로 나쁜 인디언을 죽이고 예쁜 여자를 얻는 이야기는 화성에서 나쁜 외계인을 죽이고 예쁜 공주를 얻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개연성이나 정합성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적 올바름 같은 거슬리는 제약은 치워두고, 주인공 및 그에 자신을 이입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충실할수록 우리는 쉽게 현실을 회피할 수 있다. 그러나 SF는 모처럼 세계를 건드리는 장르인 덕분에, 가상의 세계에서조차 결국은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적극적으로 현실의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고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오래 살아남았다. 우리는 SF를 통해 우리가 살아온 세상 너머를 목도하고, 그 뒤로는 현실의 빈틈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가보지 않은 미래를 끌어당기고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를 경험시키는 일은 소설이 본래부터 해온 일지만, 여기서는 그런 일이 노골적으로 일어난다. ✦ 라비니아가 정말로 어떤 인물이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실제 그녀는 라틴어로 말하고 청동기 시절의 사람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2,000년도 훨씬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로마 이전의 라비니아, 베르길리우스의 흐릿한 라비니아, 르귄이 다시 쓴 현대의 라비니아는 시대를 무시하고 혼용된다. 겹겹이 중복되는 서술을 통해 라비니아는 불멸의 모호한 존재가 된다. 이 인물이 실제 역사와 동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라비니아는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지만, 지금도 충분한 호소력을 지닌 화자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죽음을 초월한다. "이해하는 것은 죽어 있는 것과 상관없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시이다." 이야기는 불멸이다. 그것은 모호하기에 언제나 다시 쓰일 여지가 있고, 기회를 얻을 때마다 거듭 되살아난다. 라비니아는 훌륭한 안내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말을 전한다. "우리 모두는 불확실한 존재이다. 적개심은 어리석고 옹졸하며, 분노조차 부적당하다. 나는 바다 표면에 하나의 빛나는 점일 뿐이며, 샛별에서 뻗어 나오는 어렴풋한 반짝임일 뿐이다. 나는 경외감 속에서 산다. 내가 살아 있지 않다면, 그래도 나는 바람을 타는 말없는 날개, 알부네아 숲 속에 형체 없는 목소리이다. 나는 말한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가라, 계속 가라." - <라비니아>, 116쪽 ✦ 과학자의 일은 틀리는 것이다. 그래야 다음 사람이 맞을 테니까. 과학자는 가설을 세우고, 무너뜨리고, 다듬고, 그렇게 증명된 성과를 과학의 탑에 한줄씩 더한다. 다음 사람이 그것을 밟고 한 칸 높이 올라가도록. 과학이 혼자만의 믿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식 체계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혼자서는 지탱할 수 없는 이 거대한 체계는 타인이 있기에 비로소 성립한다. 그것이 학자가 틀려도 괜찮은 이유고, 그럼에도 자신의 연구를 계속해야 할 이유다. 혼자가 아닌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은 새삼 간질간질하고 사랑스러운 경험이었다.
- 위치스 딜리버리💬 음..귀여웠다 한낮에 카페에 앉아 술술 읽어내려가기 좋은 책
- 불안해서 오늘도 버렸습니다시인으로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두 가지다. "뭐 먹고살아요?" 그리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요." 그래서 고요히 읊조려 본다. "시인이니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라는 명령에 침 배고 튑니다. 정해진 순서대로 말하라는 게 괴롭습니다. 천방지축으로 말하고 싶어요. 이해 가능한 형태로 존재하라는 명령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말과 말 사이에 구멍을 뚫어 환기하고 싶습니다. 숨을 쉬고 싶어요. 비약하고 싶습니다. 언어를 해방하는 작업이 나의 직업이며 나의 놀이이고 나의 본질이에요." 이해란 이상한 것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달걀과 닭>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해란 착각의 증거이다. 달걀을 이해하는 것은 달걀을 보는 옳은 방식이 아니다. 달걀에 대해 절대로 생각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달걀을 목격했다는 한 방식이다. 내가 달걀에 대해 모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중요하다. 정확히 내가 달걀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바로 그것이 내게 달걀을 준다. 달걀은 상처가 되는 이해력을 면제받았다." ✦ 인간에게는 여러 종류의 눈물이 있다. 손가락으로 닦는 눈물, 손등으로 훔치는 눈물, 그리고 팔 전체를 이용해서 닦는 눈물. ✦
- 길 하나 끝나면 벼랑 끝내 경험이 나를 갉아먹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을 폭력이라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다. ✦ 💬 이 구조에서 자발적인 구석이나 선택으로 이루어진 길은 단 하나도 없다는 점, 애초에 가난과 폭력 속에서 태어난 여자애들이 더 늘어나는 빚과 착취의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수순, 그럼에도 이 사람은 어떻게 용감하게 여기까지 왔고 그 과정이 얼마나 쉽지 않았는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추기 어려운 책이다. 남자들 태반이 성매매를 하는 나라에서 저자가 20년 동안 만난 구매자들 중 좋은 사람은 한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있었다는 점을 또 생각해야만 한다. 그 숫자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적어도 괜찮은) 사람의 비율과 전혀 맞지 않는다. 즉 업소 밖에서와 자신이 구매한 여성을 만날 때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차이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구분이 되나? 돈을 주고 여성을 구매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밖이라고 여성을 다르게 생각할까? 전혀 아니라고 생각함.
- SF,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앞부부은 그냥 에세이같고 별루 좋은 부분이 없었는데 뒷부분 백과사전? 처럼 된 부분은 재밌었음 ✦ 초광속으로 우주를 이동하는 방법은 무척 다양하다. 이에 당신만의 새로운 설정을 창조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결국 몇 가지 패턴에 그럴싸한 입담을 포장지로 입히고, 전개상 필요한 제약 조건을 덧붙인 결과물일 뿐이다. 과학적이지 않아도 상관없고, 심지어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 구질구질한 원리 따위야 뭐가 중요하겠는가.
- 도시를 걷는 여자들우리가 짓는 건물에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이 반영되기도 하지만, 건물에 따라 우리의 모습이 결정되기도 한다. "도시는 집단적 불멸성의 시도이다."라고 마셜 버먼은 도시의 폐허에 대한 글에서 말한다. "우리는 죽는다. 그러나 우리 도시의 형태와 구조는 지속되리라고 기대한다." 교외에서는 정반대가 진실이다. 교외는 역사가 없고 미래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지속되게끔 지어진 것은 거의 없다. 진행 중이며 끝나지 않는 현재를 사는 문명에게 후대는 무의미하다. 아이에게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과거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전이 된 루이스 멈퍼드의 1961년 연구 <역사 속의 도시>는 교외의 거주민이 "세상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시각", 전적인 정치적 무관심까지는 아닐지라도 안전하다는 헛된 믿음을 유지하게 하는 천진난만함 같은 것의 존재를 설명한다. 다른 곳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라도, 이곳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 나는 제리코 유료도로로 차를 몰고 가며 가건물 같은 건물들을 보면 화가 난다. 우린 더 나은 것을 누릴 수 있지 않나? 인간은 어디에 데려다 놓든 잘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환경은 중요하다. 환경은 결정적이고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를 결정한다. 우리 아버지가 건축계에서 스승으로 생각하는 루이스 칸은 학생들에게 보(*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을 건너지르는 나무)처럼 생각하라, 보처럼 느끼라, 무엇이 너를 미는지 무엇이 너를 끌어당기는지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게 건물을 통해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이게 내가 도시를 통해 생각하는 방식이다. ✦ 그때 그 도시에 깃든 유령이 있었다. 도로시 파커나 이디스 워튼이나 혹은 내가 아직 읽지 않은 누군가의 유령. 배로 스트리트에 있는 오래되어 기우뚱한 건물 안에, 미드타운 터널에서 나오면 바로 등장하는 머리힐의 브라운스톤 건물에 있었다. 웨스트엔드 애버뉴의 책이 빼곡한 아파트에 있었다. 낡은 화장실 네모난 타일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유령을 내 글에서 포착하고 싶었다. 내가 그 유령이 되고 싶었다. 연구조교가 되려고 면접을 보았을 때 나를 면저 뽄 여자가 앨곤퀸 호텔 바에서 술 한 잔을 사주었는데 그때 생각했다. '이거야. 나도 여기의 일부가 된 거야.' ✦ 하지만 만약 그녀가 그곳에 갔는데 거기가 천국이면 어떡하지? — 진 리스, 뤼 드 라리베에서In the Rue de l'Arrivée ✦ 미완성 자서전 <제발 웃어요>에서 밝히기를 리스는 어떤 프랑스 남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는 내 몸에서 나를 분리할 수 있어요.' 남자가 하도 충격을 받은 얼굴이길래 내 프랑스어가 이상하냐고 물었다. 그는 '아 아니요, 하지만...... 끔찍하네요.'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했다." 이런 태도 때문에 리스의 인물들은 수동적이고 정적이고 침체된 상태로 세상의 어떤 가혹함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매켄지 씨를 떠나고>에서 줄리아는 런던에 가서 택시 운전사에게 아무 데로나 데려가 달라고 해서 묵을 호텔을 정한다. <한밤이여 안녕>에서 사샤는 "스물네 시간 중에 열다섯 시간을 잘 수 있게" 베로날을 과용한다. <사중주>의 주인공 마리아는 "무모하고 게으른 천성적 방랑자"로 묘사된다. 어떤 선택도 스스로 하지 않고 그저 계속 "결국 그렇게 된다"고만 한다. ✦ <매켄지 씨를 떠나고>에서 줄리아에게 매켄지를 만나기 전과 후가 있었듯이, 리스에게도 포드 전과 후가 있었다. 포드가 리스에게 작가의 삶의 본질인 고통을 안겨주었다기보다는, 리스가 자기가 남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고 남들처럼 살아갈 수는 없음을 깨닫도록 이끈 촉매가 포드였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게 바로 리스가 겪은 불행의 원인, 리스가 술을 마시도록 몰고 간 원인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리스는 버지니아 울프가 "관점의 차이"라고 부른 것으로 세상을 봤다. 리스가 만들어낸 여성 인물에게서 이런 면이 드러난다. 이들은 옷을 제대로 입지도 말을 제대로 하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이 책은 팩트집? 자료집? 이 따로 있을 정도이고 그 내용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젠더 데이터 공백이란 게 뭔지 그리고 그게 여자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소소한 수준이 아니라 정말 생사를 오가는 수준으로 다방면으로 위협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읽으면서 연신 충격받으며 책갈피를 백장쯤 걸어놨는데 멍청한 크레마 카르타가 혹은 알라딘 뷰어가 다 날려버려서.. 책을 처음부터 다시 훑었다^^ㅎ... ✦ 서론 : 남성이 디폴트 남성이 보편이기 때문에(그리고 여성은 특수이기 때문에), 투표권을 얻기 위한 영국 여자들의 투쟁을 그린 영화 <서프러제트>가 1차 세계대전을 다루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별나게 폐쇄적"이라며 비난당한다(그것도 심지어 <더 가디언>에서). 그리하여 유감스럽게도 1929년 <자기만의 방>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고찰("비평가는 추측합니다. 이것은 전쟁을 다루니까 중요한 책이다. 이것은 응접실에 앉은 여자들의 감정을 다루니까 시시한 책이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V.S. 나이폴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편협하다'고 비판한다. 반면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가 걸프전을 언급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노르웨이 작가 칼 오베 크네우스고르의 6권짜리 자서전 <나의 투쟁>이 <더 뉴요커>로부터 "보편적 고뇌"를 표현했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쓰거나 여성작가 1명 이상의 말을 인용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 최근 들어 문화계의 끈질긴 남성 편향에 반기를 드는 시도가 몇 번 있었으나 대부분은 적대적 반응에 부딪혔다. 마블코믹스가 토르를 여자로 바꿨을 때 팬들은 들고일어났다. 기술지 <와이어드>가 지적한 것처럼, 토르를 개구리로 바꿨을 때는 찍소리도 없었던 사람들이 말이다.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에서 주인공이 여자인 영화 2편을 연속으로 내놓았더니 남성 우월주의 웹사이트들이 아우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최장수 영국 드라마 중 하나인 <닥터 후>는 변신 능력이 있는 외계인이 주기적으로 몸을 바꾸는 SF 판타지 시리즈다. 이 외계인은 열두 번째 몸까지는 전부 남자였다가 2017년에 처음으로 여자로 변했다. 이에 대해 5대 닥터 피터 데이비슨은 닥터 역에 여자를 캐스팅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에 "의구심"을 표했다. 그는 닥터가 남자인 편이 더 좋다면서 "소년들의 롤 모델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했다. 화난 남자들은 트위터로 몰려가 드라마를 보이코시하자며 "PC충", "좌파"의 착한 척이라고 비난했다. 6대 닥터 콜린 베이커는 전임자와 생각이 달랐다. 소년들에게는 "이미 50년 동안 롤 모델이 있었다." 그는 자문했다. 애초에 꼭 롤 모델이 자신과 같은 젠더여야 하나? "롤 모델은 그냥 사람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진 않아요, 콜린. 왜냐하면 앞서 살펴봤듯 '사람'은 남성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남자를 롤 모델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증거가 있지만 남자들은 여자를 롤 모델로 보지 않는다. 여자들은 남자가 작가거나 주인공인 책을 사지만 남자들은 여자가 작가거나 주인공인 책을 (적어도 여자들만큼은) 사지 않는다. (...) 언론인 세라 다이텀은 칼럼에서 이렇게 꾸짖었다. "이봐, 당신들은 파란 고슴도치, 인공두뇌학적으로 강화된 우주 해병, 빌어먹을 용 조련사로 플레이하는 건 마다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내적 세계와 활달한 성격을 가진 주인공이 여자라는 건 상상을 초월하나 보지?" 다이텀의 말은 이론적으로는 옳다. 자신이 파란 고슴도치(*<소닉 더 헤지혹>)라고 상상하는 것보다는 여자라고 상상하는 것이 더 쉬워야 마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다이텀의 말은 틀렸다. 그 파란 고슴도치는 남자 유저들과 종의 차이까지도 뛰어넘는 특별히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소닉이 수컷이라는 사실이다. 소닉은 분홍색이 아니고, 머리에 리본도 없으며, 바보같이 헤실거리지도 않는다. 평범하고, 젠더 표식이 없으며, 이례적인 개체가 아니다. 이 모든 증거가 소닉이 수컷임을
- 화이트 호스가원 하지만 하나는 알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든, 그녀가 온종일 일했기 때문에,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다녔기 때문에, 내게 윽박지르고 몰아붙였기 때문에, 때리고 실망하고, "유지해"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이 동네를 떠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게 되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밥값을 하게 되었다. 박윤보와 같은 남자들을 만나고 얼마든지 그들을 떠나고 다시 만나고 잊었다. 그런 사람으로 자랐다. 나만은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살게 되었다. 살고 있다. 그래. 정말로 안다. 사실 박윤보는 나의 인생, 나의 삶, 나의 미래를 자신의 무엇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 그래서 나의 웃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었던 거라는 것. "야."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응." "진짜야." "뭐가." "나는 지금껏 낮잠이라는 걸 자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웃었다. 할머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차를 빠르게 몰았다. 하지만, 왜, 어째서. 그 무책임한 남자를 미워하는 것이, 이 미련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힘든 것일까. 왜 나는 항상 이 여자 때문에 미칠 것 같은가. 왜 그때 그 마음이 잊혀지지 않는가. 지금까지도. 계속. 가원은 여자의 호로 쓰이는 이름이다. 나는 대답했다. "응, 알아. 우리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지." 다 옛날 일이다. 모두. 그치? ✦ 작가의 말 "아, 나 그 노래 좋아. <화이트 호스>." "왜? 뭐가 좋은데. 왜 좋은데. 어떻게 좋은데." "어, 밥 딜런하고는 완전히 다르게 썼잖아? 의미를 아예 바꿔버렸지."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이걸 써야겠어." "응?" "와 씨, 이걸 소설로 써야겠다고!"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첫 문장을 쓴 뒤 이어 결정했다.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할 거야. 귀신에 시달리는 이야기가 될 거야. 고택에 갇힌 이야기가 될 거고, 고딕 스릴러가 될 거야. 화이트 호서의 의미를 찾는 이야기가 될 거야. 화이트 호서의 역사는 집의 역사가 될 것이고, 이곳에 머문 사람들의 기억이 될 거야. 그들의 기억에 따라 화이트 호스의 의미는 달라질 거야. 왜냐하면 쓰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에 의해 그 의미는 계속 바뀔 수밖에 없으니까. 그게 그들이 하는 일이고,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지. 바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지. 하지만 나는 내가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아. 이미 실패하고 있으니까. 결코 다다르지 못할 거고, 아마 나는 평생 고택 안을 헤매며 살게 되겠지. 바싹 말라 죽겠지. 부유하는 하나의 기억이 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찾아다닐 거야. 그것이 내가 하는 일이고, 이것이 나의 사랑이니까. 그래. 정말 사랑해. 그리하여 이번 소설집은 이런 사람드르이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그 집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고리를 끊고, 의미를 바꾸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모든 실패와 모순과 애착이 만드는 희미한 틈새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삶에 대한 이야기. 다시는 작가의 말을 이렇게 길게 쓰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내게는 소설로 충분하다. ✦ 💬 젊은작가상 수상집에서 일명 가부장제 제사 스릴러로 너무 재미있었던 <음복> 이랑 예전에 어느 잡지에서 읽었던 <오물자의 출현>은 여전히 재미있었고 다른 소설들도 다 너무 좋았다. 앞으로 강화길은 이름만 보고 덥석 집어들 작가가 될 것 같다.
-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여성영화제에서 아니타 사키시안 인터뷰: (게이머게이트, <비디오 게임 속 비유 vs. 여성>)
- 공부란 무엇인가이 세상 속에서 산다는 것은 이러한 모순, 긴장, 혹은 혼란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 세상을 주제로 논술문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모순과 긴장과 혼란을 직시하되, 그에 대해 가능한 한, 모순 없는 문장을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 논술문을 쓰기 위해서는 정교하게 정의한 개념과 분석적 논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외부 세계에 대한 충분한 경험적 지식이 필요하다. (...) 세상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이 쌓일수록, 세상은 모순이나 긴장이나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완벽하게 흠이 없는 혁명가, 오직 탐욕으로만 이루어진 자본가, 오직 순박함으로 이루어진 농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은, 도덕적이고 싶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던 혁명가, 너무 게을러서 탐욕스러워지는 데 실패한 자본가, 섣불리 귀농했다가 야반도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을 자기 희망대로 단순화하지 않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독립운동가 혹은 친일파로 단정해버렸을 때는 보이지 않던 시대의 문제가, 사실은 그가 독립운동과 친일을 동시에 하던 모순적 인물임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진보나 보수로 단정해버렸을 때는 보이지 않던 시대의 문제가, 사실 그가 진보적인 동시에 보수적인 인물임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공부하는 이가 할 일은, 이 모순적 현실을 모순이 없는 것처럼 단순화하는 게 아니라 복잡한 모순을 직시하면서 모순 없는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다. ✦ 호기심에서 출발한 지식 탐구를 통해 어제의 나보다 나아진 나를 체험할 것을 기대한다. 공부를 통해 무지했던 과거의 나로부터 도망치는 재미를 기대한다. 남보다 나아지는 것은 그다지 재밌지 않다. 어차피 남이 아닌가. 자기 갱신의 체험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보고 있다는 감각을 주고, 그 감각을 익힌 사람은 예속된 삶을 거부한다. (...) 그러나 섬세한 구별 없이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 대충 그쪽으로 날아가 봐, 그러다 보면 달에 도착하게 될 거야. 이런 식으로 해서 우주선을 달에 보낼 수는 없다. 방향과 거리를 섬세하게 나누고 계산하여 우주선을 쏘아 올려야 목적지에 제대로 도달할 수 있다. 과학에만 정교하고 섬세한 구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도, 경험에 합당한 언어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 경험을 사라지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독특한 경험에 맞는 섬세한 언어로 자신의 경험을 포착하지 않는 한, 그 경험을 사라지고, 그만큼 자신의 삶도 망실된다. 섬세함은 사회적 삶에서도 중요하다. 섬세한 언어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고 또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훈련을 할 때, 비로소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있다. 거칠게 일반화해도 좋을 만큼 인간의 삶이 단순하지는 않다. 거친 안목과 언어로 상대를 대하다 보면, 상대를 부수거나 난도질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런 식의 거친 공부라면, 편견을 강화해 줄 뿐 편견을 교정해주지는 않는다. 섬세한 언어야말로 자신의 정신을 진전시킬 정교한 쇄빙선이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다면, 다른 세계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 만남에는 섬세한 언어가 필수적이다. 언어라는 쇄빙선을 잘 운용할 수 있다면, 물리적인 의미의 세계는 불변하더라도 자신이 체험하는 우주는 확장할 수 있다. 그 과정 전체에 대해 메타적인 이해마저 더한다면, 그 우주는 입체적으로 변할 것이다. 언어는 이 사회의 혐오 시설이 아니다. 섬세한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공부를 고무하지 않는 사회에서 명철함과 공동체 의식을 갖춘 시민을 기대하는 것은 사막에서 수재민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 생각보다 이랑의 이것저것 에세이였다. 어떤 부분은 재밌었고 어떤 부분은 그냥 그랬고.
- 드래곤들과의 춤💬 아 읽으면 뭐하나 6부는 언제 나오나~~~~
- 엔딩 보게 해주세요💬 실제로 게임업계에 몸담은 작가들이 쓴 소설이라 놀랍게도 중학생 때 읽었던 SKT의 작가가 쓴 단편도 있었고 - 그 이후로 계속 게임 기획, 시나리오 작가 일을 했다고 - (장류진을 뜨게 만든) 판교 리얼리티스러움이 잘 드러나는 소설도 있었고.. 뭐 엄청 재밌진 않았고 몇 가지는 매우 별로였지만 <앱솔루트 퀘스트> 가 제일 괜찮았는데 본업은 기획자이고 취미로 소설 쓰는 분이신듯. > *다들 자기가 뭘 바라는지 모르는 거, 가만 보면 재밌어욥. 다들 자기가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 몰라요.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있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모르는 채로 저기 서 있는 거예욥. 결국 세이버 릴리에서 시작한 캐릭터가 실제로 업데이트되는 그 순간까지도 모를걸욥?* 기억에 남는 작가(들 중 하나의)의 말: > 이 이야기를 읽으신 당신이 행복하기를. 게임 회사 사람들이 주 40시간 노동과 자신의 평화를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억에 남는 작가(들 중 하나의)의 말 (위와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있음): > (..) 전부 소모재라는 걸 더 일찍 알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익히 알고 있는 지금 행동하지 않는다면 좀 더 과거로 돌아가도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 지나온 길이 길고 멀어질수록 스스로에게도 세계에도 관대해집니다. 그런데 대충 사는 것과 너그럽게 사는 것은 과연 얼마나 어떻게 다른 걸까요? 요약하자면, 산다는 게 무엇인지조차 아직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알면 꼭 알려주세요.
- 고양이 요람💬 리커버 에디션이라서 사봤다.. 다른 보니것 소설만큼 좋진 않았던 것 같지만 그래도 재밌게 읽었음 “사실, 삶은 변함없이 짧고 잔인하고 야비했지.”
-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앵무새 나오는 소설이 제일 좋았다. 동물이 주인공인 이야기 중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좋다고도 할 수 있겠다.
- 나의 9월은 너의 3월본능 이상의 것 폭설이 우리를 산장에 묶어두었다. 주인 없는 산장에서 보낸 이틀. 눈은 한시도 그치지 않았다. 산장이 눈에 파묻히지 않는 게 안도와 오해를 낳았다. 우리는 네 명이고 이틀 전에는 세 명이었다. 산장보다 좋은 곳을 찾으러 간 한 사람. 나빠져도 혼자가 좋다던 한 사람 있었다. 너희 말을 도저히 더 못 들어주겠다고, 차라리 눈 속으로 들어갔다. 모르는 두 사람은 언제부턴가 우리와 함께였다. 식량이 반에서 반으로 줄고 있었다. 산장은 아주 따뜻해서 지내는 동안 방한복을 벗고 있었다. 산장은 아주 넓어서 우리가 안 쓰는 방들이 수십 개가 넘었다. 먼지 샇인 빵을 먹으며 우리는 정도껏 쌓이는 눈을, 겨울이 지나고도 비참히 내리는 눈을 보았다. 장작이 떨어지자 의자 다리를 부러뜨렸고 의자 다리를 잃어버리자 소설을 넣었고 소설이 재가 되자 역사를 던졌고 역사가 사라지자 성경을 찢었다. 잡담이 아니라면 말을 아꼈다. 벽난로가 식고 우리는 세 명이 되었다. 따뜻해졌다. 빵 대신 빵가루 묻은 먼지를 먹었다. 우리를 떠난 그 사람이 더 잘 지낼 거란 생각이 들어서 슬프게 추웠다. 눈이 비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산장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미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얼어붙었다. 식량이 떨어지고 우리는 두 명이 되었다. 배가 불렀다. 여름이 분명했는데 우리는 산장에 묶여 있었다. 소모적인 대화가 계속되었다. 눈과 비가 절반씩 내리고 있었다. 춥고 배고팠지만 우리는 한 명이었다. 혼잣말을 하다 죽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우리에 관한 뉴스가 평생 실종으로 보도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모든 사랑 좋은 일이 있는 네게 꽃다발을 안겨준다 짧은 감정 이상의 의미로 포장된다 푸르고 깊은 향 노랗고 아무는 모양 이 꽃은 먹을 수도 있다 그 말을 듣고 너는 더욱 단 하나도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든다 가만히 두어도 보고만 있어도 된다 물을 주는 것도 물에 타는 것도 괜찮다 향을 품은 꽃은 모두 생화다 향은 향일 뿐 진실도 거짓도 무용하므로 오늘은 아름답다는 이런 고백도 가능하다 아무 일도 없는 내가 너의 주위에 있다 초에 붙은 불을 끌 때에야 말문이 열린다 기념으로 남긴 사진 안에 아주 뜨겁지도 정말 차갑지도 않은 것이 너의 품에 있다 밤은 고요하다 셀 수 있는 만큼의 행복만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중얼거렸던 너라 이따금 좋아 보인다 이름과 생태를 너는 알고 싶어한다 나는 더는 구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누구도 구해낼 수 없으니 너를 보는 나는 우울하다 너무 많은 아름다움에 파묻혀 네가 보이지 않는다
- SF가 세계를 읽는 방법💬 아 뭔가 세계가 기술적으로 어떻게 될지를 sf 소설처럼 쓴거였는데 개구렸구.. 실제로 sf 소설 공모전에 내면 너무 구려서 다 떨어질듯한... 나는 SF가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sf소설들을 평론 분석하는 내용일 줄 알고 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올해의 생각없어서 실패한 소비1
- 키르케키르케, 그가 말한다. 괜찮을 거예요. 신탁이나 예언이 아니다. 어린애한테 함직한 얘기다. 그가 악몽을 꾼 아이를 안고 흔들며 다시 재울 때, 베인 상처를 소독할 때, 뭔가에 쏘인 곳을 진정시킬 때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들어왔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의 살결이 내 살결만큼 익숙하다. 밤공기 위로 따뜻하게 번지는 그의 숨소리가 들리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는 아프지 않을 거라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다. 무섭지 않다는 뜻에서 한 말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여기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파도 속에서 헤엄친다는 게, 흙을 밟고 걸으며 그 느낌을 감상한다는 게 그런 뜻이다. 살아 있다는 게 그런 뜻이다. 하늘에서 별자리가 어둑어둑해지고 자리를 바꾼다. 바닷속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마지막 햇살처럼 신의 광휘가 내 안에서 빛을 발한다. 예전에는 신이 죽음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죽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바뀌지도 않고,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나는 평생 전진한 끝에 지금 이 자리에 왔다. 인간의 목소리를 가졌으니 그 나머지까지 가져보자. 나는 찰랑거리는 사발을 입술에 대고 마신다. > 작가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 키르케를 투영하며 이렇게 말한다. “키르케 역시 고향을 동경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와는 달랐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기다리는 고향 이타케 같은 곳이 없다. 키르케는 그런 고향을 발견해야만 하고, 직접 개척해야 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자기에게 적대적인 세계에 반항하면서까지.”
- 시선으로부터,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아주 좋다, 좋아. 좋을 줄 알았어요. ✦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 의 사랑이다. 심시선의 이름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름을 한 글자 바꾼 것인데, 할머니가 가질 수 없었던 삶을 소설로나마 드리고자 했다. 나의 계보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이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 만약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일가를 이루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고 싶었다. 쉽지 않았을 해피엔딩을 말이다. 또 예술계 내 권력의 작동 방식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 칵테일, 러브, 좀비💬 심심풀이로 읽기 좋았다. 마지막 시간여행물은 뻔한 듯하면서도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 배움의 발견아버지로부터 나는 책들은 섬기거나 피해야 하는 것들이라고 배웠다. 주님의 책 - 모르몬 선지자들 혹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집필한 책들 - 은 연구 대상이라기보다는 공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다. 매디슨 같은 사람이 쓴 책들이 거푸집이라면 내 생각은 회반죽처럼 그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거푸집에 부어서 그 형태를 그대로 베껴 내야 마땅했다. 그들의 책은 어떻게 스스로 생각하는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생각할지를 배우기 위해서 읽었다. 주님의 책이 아닌 책들은 금지 품목이었다. 그 책들은 위험하고, 그 교활함이 너무도 강력하고 물리칠 수 없이 유혹적이기 때문이었다. 에세이를 쓰기 위해서는 그 책들을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만 했다. 두려움이나 숭배를 마음속에서 배제해야만 했던 것이다. 버크는 영국 왕정을 옹호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가 폭군의 하수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의 책을 집에 들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책에 쓰인 말들을 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읽는 것은 전율이 흐를 정도로 기쁜 일이었다. 그와 동일한 전율을 매디슨, 해밀턴, 제이의 글을 읽을 때도 느꼈다. 특히 그들의 결론보다 버크의 결론에 나 스스로 동조하게 될 때, 혹은 그들의 생각이 내용 면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고 단지 형식적으로만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은 더욱 컸다. 이런 방식으로 책을 읽는 것에는 대단한 가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책들은 나를 속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가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에세이를 끝내고 스타인버그 교수에게 보냈다. 이틀 후, 약속대로 교수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분이 가라앉은 듯 보였다. 책상 건너편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교수를 보며 나는 내 에세이가 엉망이었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무지한 머리의 산물이고, 허황된 가정에, 근거 없는 결론을 너무 많이 도출해 낸 에세이라는 말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내가 케임브리지에서 가르친 지 30년이에요.> 그가 말했다. <이 에세이는 그동안 읽어본 것들 중 가장 훌륭한 에세이 중 하나입니다.> 나는 모욕당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이런 말을 들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 나는 카페에서 나와 도서관으로 갔다. 온라인으로 5분 정도 검색하고 서가에 몇 번 왔다 갔다 한 후, 나는 산더미 같은 책과 함께 늘 앉던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제2의 물결의 주된 저자들이라고 알게 된 베티 프리던, 저메인 그리어,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의 저서들이었다. 그러나 책마다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하고 서둘러 덮고 말았다. 나는 <질>이라는 단어가 인쇄된 것을 본 적도, 소리 내어 말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다시 인터넷을 검색한 다음 서가로 돌아가 제 2의 물결에 관한 책들을 반환하고 제1의 물결 이전의 책들을 찾았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들이었다. 나는 오후 내내, 그리고 저녁까지 그 책들을 읽었고, 처음으로 어릴 적부터 느껴 왔던 불편함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어휘들을 쌓아 갔다. 리처드 오빠는 남자, 나는 여자라는 사실을 처음 이해한 순간부터 오빠의 미래와 나의 미래를 바꾸고 싶었었다. 나의 미래는 어머니, 오빠의 미래는 아버지였다. 두 단어는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자 주도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가족의 질서를 잡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고,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질서를 잡히는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갈망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지식, 그리고 나 자신에 관한 수많은 지식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내 머리에 심어진 것들이었다. 그 목소리들은 때로 속삭이고, 때로는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염려를 하며 나를 평생 따라다녔다. 그 목소리는 내가 옳지 않다고 속삭였다. 내 꿈은 왜곡된 것이라고. 그 목소리는 여러 사람의 것이었고, 다양한 말투로 나타났다. 어떨 때는 아버지의 목소리였지만, 나 자신의 목소리였던 경우가 더 많았다. 나는 그 책들
-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저는 계속 '낳음'에 대해 두리번거렸어요. 하지만 점점 더 드는 확신은, 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이를 낳음으로써 불행해질 거라 생각하지 않고, 저기에 행복이 있을 수 있지만 그 행복은 내 것이 아니라는 거죠."
-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아름다움 바다를 액자에 건다. 바다에 가라앉는 나를 본 적이 있다. 팔다리가 부식되어 산호가 되어갔다. 허옇게 변한 사지가 산호들 사이에 갇혀 있었다. 노랗거나 파란 물고기들이 주변을 배회했다. 저기 열대어가 있어, 스킨다이버들이 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젖은 빵을 찢어 던졌다. 아름답다는 말을 산호 숲에 남겨두고 스킨다이버들은 뭍으로 돌아갔다. 나를 그곳에 둔 채 나도 꿈에서 빠져나왔다. 이곳을 떠나본 자들은 지구가 아름다운 별이라 말했다지만 이곳에서만 살아본 나는 지옥이 여기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 나를 여기에 둔 채 나는 저곳으로 다시 빠져나가서 정육점과 세탁소 사이에 임대문의 종이를 쳐다보고 서 있다. 텅 빈 상가 속에서 마리아가 혼자 퀼트 천을 깁고 있다. 이 액자를 다시 바다에 건다.
-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저희 집에서는 언니가 병뚜껑 열기 담당입니다. 항상 제가 먼저 열겠다고 덤벼들지만, 생각보다 사지에 힘이 없는 스타일이라 결국에는 실패하고 넘기게 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언니는 대신 병을 열며 "자기가 다 돌려놓은 건데 내가 마무리만 한 거야"라고 저를 북돋아 주곤 합니다. 오늘 구청에 가며 왠지 저 생각이 났습니다. 굳게 닫혀 있는 병을 한 명씩 돌려도 보고, 뜨거운 물도 붓고, 그 모습을 보고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시도하다 보면, 제가 열지 못하더라도 결국에 병은 열리게 되어 있지 않을까요? 분명 그럴 겁니다.
- 내_일을 쓰는 여자(…) 이를 눈여겨보면 여성들의 성격적 특성이 잘 드러난다. 성실성과 근면성,사람들의 감정을 신경 쓰고 배려하는 성향, 많은 조직에서 나타나는 집단 문화인 서로 잘났다고 내세우는 현상에 가담하지 않는 것 등이다. 이는 모두 좋은 것들이다. 당신의 타고난 장점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의 당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성공에는 궁극적으로 회사나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어느 정도 포함될 것이다. 따라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활동 무대가 넓어졌다고 해서 이러한 장점을 모두 버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지만 잠재력을 최대한 키우려면 안전지대를 벗어나야만 한다. 자신의 장점이 자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지 알아내는 것은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행동에 포함된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지금 이 자리까지 오는 데 필요했던 기술과 능력, 태도, 행동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여성이 더 영향력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원하는 분야 혹은 소속 조직에서 더 크게 성장해 이 세상에 보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를 바란다.
- 눕기의 기술"침대에서 할 수 없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이다." - 그루초 막스 ✦ 작가 A. L.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잠은 작은 죽음이라고. 그러나 우리를 저지하고 고통을 가하며 죽이는 것은 오히려 깨어남이다." ✦ 치명적 가족성 불면: 전혀 잠에 들지 못하다가 죽음에 이름 ✦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는 1859년 소설 <오블로모프>에서 주인공 오블로모프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 누워 있기만 하는 인간상으로 형상화했다. "집에 있을 때면(그는 거의 언제나 집에 있었다), 그는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고 계속 같은 방에서 지냈다. 그 방은 그에게 침실이자 서재이자 응접실이었다." 페르시아 실크로 짠, 품이 넉넉한 동방의 케이프를 휘감은 30대 초반의 귀족 오블로모프는 침대나 안락의자에 누워 백일몽에 빠졌다. 삶은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푸석푸석하고 부은 모습이었는데 그것은 "나이 탓이라기보다는 운동 부족이거나 신선한 공기 부족이거나, 또는 아마도 이 두 가지 모두가 부족한 탓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나이트가운으로 감싼 소시지와 비슷한 모습이 되어갔다. 그를 조금이나마 생동감 있는 삶으로 이끌려는 손님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한때 강렬한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 경험조차 그의 생활 패턴을 그다지 변화시키지 못했다. 서술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병자나 잠이 부족한 사람처럼 필요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피곤하고 지친 사람처럼 우연하게 일어나는 사건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그의 정상적인 상태였다." ✦ 지젝은 그냥 누운 모습을 공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속옷 차림의 도발적인 모습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진을 보여줄 뿐 아니라, 발가벗은 채 침대에 누워 철학을 한다. 지젝은 우리 삶의 수직/수평 비율이 한참 빗나갔다고 느끼는 신세대 철학자의 대표 격이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자신의 일기 <선들과 날들>에서 독자들에게 그냥 "침대에 머물러 있으라"라고 권한다. "눈이 떠졌을 때 해가 이미 중천에 있다고 곧바로 비바 악티바(viva activa, 행동하는 삶)에 돌입할 필요는 없다"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바야흐로 신 수평 시대(New Horizontal)가 도래한 듯한 느낌이 든다. 왜 이러한 흐름이 생겨났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장황한 인식이나 싸구려 신비주의 같은 것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변화는 현대사회에 만연한 성과주의와 모든 것이 끊임없이 발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대한 십분 이해할 수 있는 반발이다. 번아웃한 탈물질주의 사회는 현재 숙고를 거듭하고 있으며 수평 자세에 대한 재평가가 한창이다.
-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제목이 너무 안끌렸는데 구병모라서 읽었고 역시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제목 빼고 다 좋음 시미와 화인의 관계가 좋았다 마냥 이상적으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지만 그럼에도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연대라고 표현하기도 뭐한 그냥 조금의 애정과 조금의 보살핌과 존중이 있는 관계. 중년 여성이 화자인 글을 더 많이 읽어야지 나도 언젠간 저 나이가 될 것을 생각하고 아..타투는 도마뱀으로 할까봐!
- 런던 거리 헤매기여성의 직업 그것을 쓰는 동안 책을 논평하려면 어떤 환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환영은 여자였지요. 그녀를 잘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유명한 시 <집안의 천사>의 여주인공 이름을 그녀에게 붙여 주었습니다. 내가 논평을 쓸 때면 그녀가 나와 내 글 사이에 끼어들곤 했지요. 나를 성가시게 하고 시간을 허비시키면서 몹시 괴롭혔기에 마침내 나는 그녀를 죽였습니다. (...) 내가 유명한 남자의 소설을 논평하려고 펜을 손에 쥐자마자 그녀는 미끄러지듯 내 뒤에 와서 속삭였습니다. '얘야, 넌 젊은 아가씨야. 남자가 쓴 책에 관해서 쓰고 있구나. 공감을 보이렴. 다정하게 대하고, 아첨도 하고 속삭이려무나. 우리 여성의 온갖 기교와 간계를 발휘하렴. 네게 자기 나름의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무나. 무엇보다도 순결해야 해.' 그러고 나서 그녀는 내 펜을 잡아 이끌어 가려는 듯했습니다. 이제 내가 언급하려는 행동은 어느 정도 내 공이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그 공은 내게 일정한 수입(연 500파운드라고 할까요?)을 물려줘서 내가 생게를 위해 순전히 매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 해 준 훌륭한 조상들에게 돌립니다. 나는 몸을 돌려 그녀를 보고 그녀의 목을 움켜잡았지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죽였습니다. 내가 고발당해 법정에 선다면, 내 행동은 자기방어였다고 변명할 겁니다.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가 나를 죽였을 테니까요. 그녀는 내 글에서 심장을 잡아 뽑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펜을 종이에 대는 순간 알았듯이, 자기 나름의 마음이 없다면, 인간관계나 도덕, 성에 관해 진실이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수 없다면, 소설에 대해서도 논평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 내가 그녀를 해치웠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늘 되돌아왔습니다. 결국 나는 그녀를 죽였다고 우쭐해했지만 치열한 싸움을 벌여 와야 했습니다. 그 많은 시간에 그리스어 문법을 배우거나 모험을 찾아 세계를 방랑했더라면 더 좋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실재하는 경험이었지요. 집안의 천사를 죽이는 것은 여성 작가가 해야 할 일이었던 겁니다.
- 데이터 읽기의 기술💬 아씨 난 경영도서를 못읽어..이것은 데이터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 경영 도서였다.. 어제 모임에서 누가 비즈니스 분석가랑 데이터 분석가를 구분한다 어쩌고 그런 얘기를 했는데 나는 전자는 아니고 이것은 전자에 관한 책이었다
-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대상작인 강화길의 음복은 정말 간만에 너무 재미있는 한국 소설이다. 동시대 한국 소설이 재미있으려면 이정도는 해야지. > 한국문학사에서 가족 서사를 지배했던 장르, 즉 눈물과 감동을 자아내는 멜로드라마는 이제 첨예한 여성주의 의식과 압도적인 스토리텔링 기술을 보유한 강화길을 통해 지독하고 서늘한 여성주의 스릴러의 문법으로 갱신된다. // <무지라는 권력, 아버지의 법과 여성 집행자들> 절대적인 권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권력을 의식해야 하는 이는 권력의 피지배자들이다. 권력이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력이 행사되는 곳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힘이다. 다 그럭저럭 뭐 재밌든지 했는데 김봉곤의 소설은 처음 읽어보는데 충격이다. 게이 작가가 자전성을 넣어서 소설을 쓴다는 이유만으로..이런 뭐같지도 않은 소설이 젊은작가상을.. 물론 나는 퀴어의 이야기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퀴어 이야기가 써지고 읽혔으면 좋겠다 다만 이 소설이 잘 되었다는 것은 퀴어가 걍 존나 묻혀있었다는 증거일 따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음..
-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단어들 우리가 각인된 유령을 불러냈을 때 모두 벗고 있었다. 투명한 시선은 육체를 통과하니까. 우리는 서로의 몸을 만졌는데 미끄럽고 징그러웠지. 이 촉수 같은 시선은 뭐지. 자꾸만 만지니까 검어진다. 검은 유령들이 우리의 내부를 뚫고 다른 풍경으로 빨려 들어갔다. 돌가루가 떠도는 곳 무화과 열매가 떨어지는 곳 언 손이 녹아내리는 곳 벌거벗은 채 언덕 위에서 언제까지 같은 자세로 뒹굴어야 할까요 아무리 외쳐도 물만 흐르는 곳 그래도 우리는 묵묵히 충격을 흡수한다. 우리는 버려진 유령이니까 달라질 게 없지. 삶을 기록하라는 신의 명언은 지하로 스며든다. 쓸 수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데. 흑탄으로 쓰면 구름도 검게 부푼다. 우리가 구름처럼 검은 빗물로 가득 차면 현명한 노인이 될 수 있을까. 만져지지 않는 시간을 통과하는 형벌. 흰 셔츠를 풀고 맑은 땀을 흘리는 안쪽의 우리에게 손을 뻗어본다. 천천히 폭풍이 몰려오는 이 언덕에서 미끄러지며 우리는 무엇이 될까. 춥고 피로한 슬픔의 형태로. 문장 연습 인간적인 좀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얼굴이 부서지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신기한 몸이란 문장을 움켜쥐기에는 나약하다는 것을 알았지. 인간일 때는 몰랐던 세계의 일그러짐이 유연한 몸을 만들고. 타액이 서로에게 섞여들어도 눈물인 줄 모르고. 그냥 우리는 상처를 입히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지. 그렇잖아. 한때는 운동장이 세계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떨어질 듯 구석에 서서 서로를 밀어버리다가. 유연하게 다친다는 것도 결국 무서운 일이라고 침을 흘리곤 했었잖아. 철봉에 매달려 하늘로 올라갈 듯 휘휘 돌다가. 자라지 못한 순간부터 이 통증들은 신기한 몸의 일부라는 것을 알았지. 우리는 자꾸만 짓물러지는 서로의 팔둑에 문장들을 새겨 넣으려다가 실패하고. 그게 어찌나 재미있던지 멈추지 않고 물어뜯었잖아. 아무리 밀어도 밖에서 잠긴 문밖으로는 밀려나지 않아서 그게 어찌나 스릴 있던지. 너는 약해서 죄를 짓는 거야. 네가 낄낄거리며 나를 끌고 운동장을 달렸는데. 인간적인 좀비가 되는 꿈은 아주 오래된 꿈. 그것을 적으려면 한 번은 죽어야 한다고 네가 말했지. 죽고 나면 아무 문장도 움켜쥘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운동장에서 울고 있던 내가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나는 꿈 밖으로 밀려나와 알게 되었지. 어쩌면 약해도 멈출 수 없는 운동장의 세계란 그런 것일까. 유광 자원 하루 종일 어깨를 빛에 대고 있으면 부패의 흔적. 그는 조용히 눈을 뜬다. 빛에서 썩은 날개가 떨어지고 있다. 횡단보도에서는 늙은 개가 일어나지 못하고 뜨거워진다. 지금 내 얼굴은 붉은가. 그가 중얼거린다. 건널목에 핏자국이 빠르게 퍼진다. 공무원은 어디 갔지. 아무도 저 뜨거운 순간을 기록할 수 없는 거지. 그는 손가락을 빨고 있다. 침을 흘리며. 이런 악취는 빛에서 떨어지나. 툭툭 철근을 걷어차다 보면 냄새를 만지게 된다. 이곳으로 모이는 모든 고물은 감각의 일종. 부스러기들이 웅성대고 있다. 놀란 사람들이 늙은 개의 정수리를 긴 막대로 건드리고 있다. 불행의 감각은 너무 가까운 감촉. 그는 무너져 내리는 어깨뼈를 문에 기대고 있다. 이 문은 닫힌 적이 없다. 건물 관리인은 어디로 간 거지. 침이 줄줄 옷 속으로 스며드는데. 샤워 꼭지를 만지다 보면 알 수 있지. 울지 않고도 깊어질 수 있다. 이 맑고도 끈끈한 부정의 얼룩들 매일매일 손금처럼 번지는 핏자국들 그는 조금씩 부서지며 개의 다리를 끌고 온다. 이렇게 이번 삶이 끝나지 않는다면 이 고물은 좀더 생생한 감각이야. 지금 그의 얼굴은 붉은가. 고물상 한가운데에 묘지를 파는 그의 손은. 버려지지 않은 것들은 어디로 갔지. 아무도 이 이상하고 슬픈 순간은 기록할 수 없는 거지. 영토 너의 아름다운 공터. 자라다 만 나무가 있고, 죽지 못한 돌이 있지. 빛이 자기 자신을 그리다 말고 흩어지는 모서리. 나는 놀러 간다. 아무도 오지 않는 그곳에 맨발로 간다. 부서진 욕조 안에서 거미가 어둠을 잇고 있을 때. 너는 모서리에서 떨어지던 기다란 선 하나를 밝고 서 있지. 선 바깥으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네가 쓴
- 뉴욕도서관으로 온 엉뚱한 질문들💬 귀여웠지만 생각햿던거랑 약간 달랐고 살 만한 책이었는지는.. 다큐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가 너무 좋았었다 언젠간 꼭 가봐야지
- 몸의 말들이 책은 몸에 '대한'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 <몸의 말들>은 '몸=나'임을 잘 보여준다. 흔히 하는 '내가 내 몸에 대해 쓴다'는 말은 어불성설, 두 개의 자아가 부닥치는 정신분열이다. 사회운동에서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은 여전히 중요한 권리지만, 정확히 말하면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내가 내 몸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삶이 몸이다. 몸이 나다. 그러나 육체와 정신의 분리와 위계는 너무나 뿌리 깊어서, 이 말은 생각보다 어려운 연설이다. ✦ 내 가치를 몸의 겉겁질에 맡기는 건 단단한 반석이 아니라 흐물거리는 젤리 위에서 자기애라는 계란 한 바구니를 들고 불안정하게 서 있는 것임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 몸은 내가 지상에서 가지고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사적인 공간이면서 늘상 노출되어 있는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과 몸이 만나는 일은 쉽고도 어렵다. 신뢰가 없으면 연결될 수 없다.
- 우리의 사랑은 언제 불행해질까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보다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 행동하는 것이 상식적인 것이다, 내 감정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는 것이 상식적인 것이고, 나이가 들었으니 나이답게 행동하는 게 상식적인 것이고, 작은 일로 크게 상처받는 것은 비상식적인 것이다, 섹스 후 잠깐 돌아누웠다고 갑자기 우는 것은 매우 비상식적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야 했고, 느꼈다 하더라도 표현하지 않고 곰곰이 묵혀 두었다 감정이 다 소화되었을 때 "사실은 내가 그때 그랬다"라면서 나의 감정과 생각을 조곤조곤 설명해 주는 게 어른스럽고 상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엉엉 울며 소리를 질렀다. "돌아눕지 마! 돌아눕지 말라고!" (...) 나의 감정은 거칠고 통제하기 어려웠다. 내 안의 맹수 같은 것이 나를 추하게 만들었다. 비이성적이고 부끄러운 말들을 내뱉고 꽥꽥 소리지르고 사람들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자기밖에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르면서 사랑받고만 싶어 하는 모습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나조차 너무 싫은데. 나는 솔직하기보다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눕지 말라고 소리 지른 순간부터 이미 수습할 수 없었다. 이제 글러먹은 것이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나는 와작와작 깨지고 있었다. 우리는 내가 무너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함께 지켜봤다. 깨진 마음을 벗어던진 나는 알몸으로 세상에 서 있었다. 그 앞에 네가 있었다. 놀라고 당황스럽고 미안한 얼굴로 나를 안으며 어디에도 가지 않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이 관계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걸. 어떤 표정을 지어도 상관없다는 걸.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로 소리 지르며 울어버려도 안아줄 사람이 있는 삶이 시작되었다는 걸. 깨진 마음과, 상식적인 기준들과, 어른스러우려 애써 노력했던 시간들을 다시 걸쳐 입지 않고 방을 나왔다. 아마 나는 그날 다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 "우리는 너무 달라! 우리를 연결해주는 게 뭐야?" 라고 물어볼 것이다. 어쩌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난 날이면 '사실 이런 사람과 연애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은 날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덧칠해도 서로의 색으로 물들지 않는 사람들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낯선 광경에 놀랄 것이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는다면, 새삼스러움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네 속의 낯선 것들이 여전히 낯선 채로 익숙해지고 있었다. ✦ 연인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로 약속한 사이다. 서로에게 생채기를 낼 정도로 가까이 있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며 사랑할 수 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을 내고 아문 자리가 엉겨 붙으며 가까워지는지도 모른다. 나로 인해 상처받는 너를 사랑한다. 눈물을 글성이는 너를 보니 웃음이 날 것 같다. 내가 눈물을 닦아주면 너는 또 나에게 안길 것이다. 너의 상처는 나의 사랑으로 다시 치유될 것이다. 그러니 몇 번이고 나 때문에 울게 되기를. ✦ 우리는 아무 이야기나 서로에게 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낯 뜨거운 욕심이나 남들이 들었다면 재수 없다고 혀를 찼을 생각, 별로 재미 없지만 꼭 하고 싶은 농담 같은 것을 얼마든지 들어준다. 네가 소철 화분에 물을 많이 줘 죽인 것에 두고두고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지만 나는 알고 싶다. 내가 어제저녁 고양이 키우는 꿈을 꿨다는 건 누구도 알 필요 없지만 그게 어떤 고양이었는지 너에게는 말해줄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아니었다면 무심히 흘려보냈을 삶의 사소한 조각들을 발견하고 있다. ✦
- 생강빵과 진저브레드친구라고 하기에는 서로에 대한 소유욕이 지나치게 강하고, 오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격정적이다. 어른들은 그들에게 친구나 연인, 오누이 중 한 가지만 선택해 그에 맞춰 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들은 그 무엇도 되고 싶어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말한다.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나,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어. 그가 나의 기쁨이라서가 아니야. 나 자신도 내게 늘 기쁨이 되어주지 못하는걸. 다만 그는 내 존재 자체로서 내 안에 있는 거야." ✦ 이런 식으로 굴을 먹는 것은 '실용'과는 거리가 멀다. 굴 맛이 주는 쾌락에 온 시간과 정성을 집중함으로써 생활인으로서의 기능은 멈추고 있으니까. 그래서 레빈은 오블론스키에게 이렇게 지적한다. "시골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해서 끼니를 빨리 때우려고 해.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오래 먹을 수 있나 궁리하는군. 그러려고 굴을 먹는 거고......" 맞는 말이다. 오블론스키가 굴을 먹는 장면이 유난히 방탕해 보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굴이 값비싸서이기 때문도, 굴의 물컹한 식감과 껍데기를 입에 가져가는 자세가 에로틱한 연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도, 카사노바가 아침마다 굴을 강장제 삼아 오십 개씩 먹어서 정력을 보충했다는 유명한 일화 때문만도 아니라, 레빈에게 "그게 바로 인간 문명의 목적 아니겠어? 모든 것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것 말이야" 라고 받아치는 오블론스키의 쾌락주의적 가치관이 그의 식습관에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이 소설 주인공인 안나는 무언가를 먹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 안나느 비단 음식뿐 아니라 무엇에도 제 오빠인 오블론스키처럼 즐겁게 탐닉하지 않는 것 같다. (...) 오블론스키는 아내를 버릴 생각이 전혀 없고, 늘 가정으로 돌아와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즐겁게 수행한다. 사실 그런 역할을 지치지 않고 '즐겁게' 해내기 위해 끊임없이 외도를 하고 '인생의 낙'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사는 세상에 별 불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안나는 자신의 남편과 가정을, 아니 남편이라는 존재와 가정이라는 세계 자체를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녀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만 살아야 하는 인생이 아닌 무언가 다른 인생을 원한다. 브론스키에 대한 안나의 사랑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인생의 낙'이 아닌, 자신만의 '인생'. "난 아무것도 증명하고 싶지 않아. 다만 살고 싶을 뿐이야. 나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악한 짓을 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어. 난 그럴 권리가 있잖아. 그렇지 않아?" ✦ 이를테면 특정 동물들을 오로지 편리하게 잡아먹기 위한 목적으로 격리시키고, 우리 손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게끔 길들여놓고, 대대적으로 번식시킨 다음 필요없는 개체들은 대대적으로 죽이고,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 그들을 가혹한 환경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하다가 마침내 도륙하고, 전염병이 번지기라도 하면 한꺼번에 생매장하는 것. 우리가 지금 같은 편리한 식생활을 유지하려면 그런 잔인한 방법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금과 같은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을 해당 직업군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나몰라라 해야 한다. 무지는 현대인의 삶에 필수이다. 우리는 식탁 위에 올라온 갈비, 삼겹살, 치킨을 먹으면서 그것들이 음식이 되기 전, 한 마리의 소, 돼지, 닭으로 살았을 생애를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 도시에서 우리는 고기를 먹으면서 우리는 삶과 죽음을 잊는다. 그리고 그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그 무지와 무관심과 망각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이 고기가 국내산인지 오스트레일리아산인지 미국산인지,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이나 광우병에 걸린 동물의 고기는 아닌지, 방사능에 오염되거나 유전자가 조작된 음식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고기를 사 먹을 때마다 공포를 사 먹는 셈이다. 자연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물론 이누이트들도 자연에서
- 지상 최대의 내기이상하게 표제작 빼고 다 재미있었다. 다만 팟캐스트에서 소개해주는 내용을 듣고 본건데 팟캐스트에서 너무 많은 내용이 이미 얘기되어서 좀 아쉬웠다 다 스포당한 느낌..
- 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 별로 인상적인 책은 아니었다. 각자 개인적인 반려동물 이야기를 하는데 그냥 다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이석원 글은 좀 띠용..이었고 나머지는 다, 아 그냥 사람이 개를 이렇게 사랑할 수밖에 없지 하는 생각.
- 오늘밤은 굶고 자야지💬 음 별 재미는 없었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재밌게 휙휙 읽었고 역시나 표제작이 유일하게 와 좋다, 할 정도로 좋았다. 특히 작가의 말에서 유령 버스 정류장 (노인들이 앉아 있지만 사실 버스가 오려고 만들어진 정류장이 아니며 해가 지면 시설 관리인이 와서 노인들을 데려간다는) 이야기에 영감을 받았다는 걸 알고 더 좋아졌다. 어딘가를 가고자 하는 노인들의 의지. 그리고 늙은 여성 과학자의 이야기인 점도.
- 지구에서 한아뿐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 음 귀여워..이 내 남자친구는 외계인?! 내용일줄이야. 결말까지 모두 행복한 인소같았다..(나쁜 뜻은 아니다. 일케 귀여운 내용인데 굳이 마지막에 현실적으로 죽어버릴 필요 있어?) 작가의 말에서 외계인이 아닌 오리지널 경민의 캐릭터가 자기가 한때 싫어했던 모든 "친구 남자친구"의 총합이라고 해서 웃겼음. ✦
- 아무튼, 메모💬 메모가 이런 메모일 줄이야(실용적인 목적의 메모인 줄 알았음). 아무튼 저자가 이것저것 메모해 수집하듯 나도 이 책에서 몇 개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었다. 열심히 메모는 안 했지만. 한국인 전범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접하지 못한 거여서 정말 처음 들었는데 놀랐다. 그리고 동물원의 꼽추 콘도르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음. ✦
- 김지은입니다💬 다 읽고 나면 김지은 씨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속했던 환경, 안희정이라는 인간이자 거대한 권력을 둘러싼 공간과 관계에서 어떻게 저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사실 안희정에 포인트를 놓고 보면 이런 인간을 대통령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는 점에서 김지은 씨의 미투가 일종의 업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우리는 그렇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수도 없게 된다. 이건 어떤 운동이나 정치적인 영향을 떠나서 개인의 기록이니까. 한 명의 피해자가 이렇게 버텨왔던 것이 대단하고 앞으로도 잘 버티기를, 괜찮기를 바라는 것이 제일 먼저가 된다.
- 여자라는 문제여자들은 수천 년 동안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서로를 끌어내 구해주고 있다네. ✦ 학생들은 그녀의 외모에 불만을 표했으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지. 그녀의 작은 두뇌는 우주의 아름다운 대칭과 질서로 가득 차 있었기에. ✦ 다윈은 위대한 남자들의 목록을 적고 그 옆에 위대한 여자들의 목록을 적으면 남자들이 거의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고 했네. 세기의 천재가 도출했다기에는 어딘가 수상쩍은 결론이긴 하지. 유효한 증거와 자연 선택으로 그가 좀 더 가지고 있다는 객관성 140그램에 따른다면 말이야. 그래도 그가 맞겠지. 왜냐하면 그는 덩치 큰 원숭이니까.
- 증언들나는 흔들린다, 나는 흔들린다. 그러나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다. ✦
- 붕대 감기너는 네가 버스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버스 안에 있다고 믿어. 우린 결국 같이 가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해. 그래서 자꾸 하게 되는 것 같아. 남자들에게는 하지 않은 기대를. ✦ 작가의 말 지난 몇 년간의 설렘과 혼란과 벅참과 아쉬움을 떠올려본다. 누군가의 눈앞에서 문을 꽝 닫아버린 일도 있었고, 내 눈앞에서 문이 꽝 닫힌 일도 있었다. 내 잘못이 아닌 일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강요당한 죄책감에 화가 나기도 했다. 섣부른 판단과 평가가 지긋지긋했지만 언제까지나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가 한없이 비겁해 보이기도 했다. (...) 변화는 꼭 필요하고 변화를 말하는 목소리가 다른 모든 목소리에 대한 부정이 아님을 알면서도, 우리는 너무 약해서 종종 오해하고 잘못 말하고 상처를 받는다. 목소리 안에 있을 땐 동참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외로웠고 바깥에 있을 땐 말할 수 없는 게 많아서 외로웠다.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꿈에도 서로를 사랑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 사람들 역시 은밀히 이어져 모르는 사이에 서로를 돕고 있음을, 돕지 않을 수 없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
- 구글은 어떻게 여성을 차별하는가💬 번역이 너어무 구려서 읽다가 턱턱 막혀서 힘들었다. ✦ A. C. 포스켓은 분류를 시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니콜라스 허드슨 교수는 18세기 인종 분류의 기원에 대해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을 인용해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인들은 '상상의 공동체'를 구상했다고 했다. (...) 이에 힘입어 발전한 분류 체계는 사회와 사람들을 이해하는 과학적 접근법의 하나가 됐다. 그 체계를 전파하는 이들은 권력을 거머쥐게 됐다. 과학적 분류법에 의거해 원주민을 '야만인', 유럽인을 '우월한 종족'으로 규정하는 관습, (...) 19세기까지 인종 분류의 진행 과정은 문화적 차이보다 생물학적 차이에 중점을 두었다. 재산 소유권과 시민권을 합법적으로 거부하기 위한 법제화도 진행됐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역사가 배제된 채 왜곡된 개념화와 유형화는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소외와 주변화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알람표나 분류 시스템에서의 정보와 위계화를 통해 지식 구조의 특권화와 종속화가 이뤄졌다. 물론 도서관학이라는 분야도 늘 사람들이 형성한 조직에 매몰돼왔다. 타인을 희생한 대가로 다른 계층에 특권을 부여해 그들의 권력을 지속시킨 책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 위스콘신대학교 정보대학원 교수이자 대학원 부원장 호프 올슨은 분류의 사회 체계에서 중요한 이론을 주창했다. 올슨에 따르면, 이 분야의 교수들은 도서관, 박물관 또는 정보 전문가들의 권력이 막강하다는 사실을 교육받아야 한다. 시스템 설계를 할 권한을 가진 이들은 특정 정보를 다른 정보보다 중요한 것으로 구조화해 우선순위를 결정할 수 있다. 이러한 편향성의 예가 미국 도서관 정보 분류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신뢰받는 기준인 LCSH로 사람들을 목록화하는 현상이다. 급진적 성향의 도서관 사서인 샌포드 버먼은 LCSH는 편향된 경향이 있고 이는 서양인의 관점이 투영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 올슨은 "분류법에서 드러나는 편견은 사회구조로서 분류되는 양상과 유사하다. 문화가 양산하는 편견은 분류법에 그대로 나타난다"고 했다. 편향성은 온라인에서 정보가 변동되는 양상에서도 나타난다. 어느 왕조의 역사가 문화가 다른 것으로 대체될 때 정복자들은 자신의 문화로 타인의 문화를 덮어 버린다. "분류 체계는 모든 요소 가운데 주류를 우선 반영한다. 사회의 가장 우세한 담론에 의해 분류의 틀이 마련된다. 그 결과 주류에서 벗어난 개념들의 소외 현상이 발생한다." 다른 말로 한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 문화, 즉 백인, 이성애자, 기독교인, 중산층은 스스로의 특권 지위를 바탕으로 합법적 지식을 구성하는 구성원을 통제하려 할 것이다. 우리가 특권을 상속받을 때, 과거의 구조적 불평등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불평등은 방대한 지식, 이미지, 음성 파일, 박물관, 도서관 등의 광대한 지식 체계를 기반으로 한다. 분류 시스템은 명확한 범위와 한계가 있는데 무엇이 포함되고 무엇이 배제되는지 일정한 기준이 있다. ✦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자인 알렉스 갤러웨이는 디지털 테크놀러지는 투명하고 친절한 출입문이어서 누구에게나 가고자 하는 길을 열어준다는 세간의 견해에 반대한다.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담론을 형성하고,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고, 건전한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물리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구글 같은 주요 미디어 플랫폼은 사용자의 미미한 정도의 개입마저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검색은 단순히 페이지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식을 구조화한다. 상용 검색 엔진에서 검색된 결과는 구체적 물리적 현실을 형성해간다. 검색 엔진 회사는 전통적인 정보 과학 연구에서 벗어난 상업적 영리 추구 방식을 연구한다. 이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가치가 반영된 서열화된 정보를 검색 순위의 상위로 올린다. 새로운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기존의 미디어 담론을 그대로 반여하는데 웹 인터페이스, 즉 구글 검색창은 이전 미디어 형식이 변형되고 발전한 것이다. 물론 상용 검색 엔진 같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미디어 자체를 흡수한다. 구글 검색은 단순히 대중에 무해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포털이나 게이트웨이가 아니다. 사회적
- 0 이하의 날들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제발트라는 사람이 아니라 제발트에 끌리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더 정확히 말해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왜 제발트에 열광하는지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제발트를 특별히 애호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공통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공통점이란 거칠게 말해 '문학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문학적이라는 것은 문학과 다르다. 그러니 문학적인 인간들 또한 문학인과 다르며, 차라리 특정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특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학 주위에 둘러앉아 문학적 아우라를 소비하며, 그 아우라에 의지해 세계를 해석하며, 그에 관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들이 갖는 특정한 세계관은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종말 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갖는 최소한의 윤리'로 요약할 수 있다. (...) 이 느낌은 제발트 특유의 억제된, 금욕주의적 서술 태도와 맞물려 독특한 아우라를 발생시킨다. 문제는 이런 측면 때문에 애초 제발트가 의도했던 성찰과 애도의 글쓰기가 정반대로 세련된 스타일리스트의 글쓰기, 즉 극도의 회의주의를 스타일로서 취하는 탁월하게 심미적인 에세이로 귀결되고 만다는 것이다. (...) 그 결과 제발트의 글이 전해주는 과거는 현실과 꿈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게 되고 그것이 제발트의 글에 특유의 환각적인 분위기를 부여한다. 이따금 예기치 않게 결정적 파국의 장면 앞에서 여행이 중단될 때마다 그 환각적인 분위기는 절제된 슬픔과 합쳐져 일종의 명상에 가까운 치유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제발트의 글이 갖는 윤리에 의혹을 갖게 되었다. 그의 글은 윤리적이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고, 치유적이다. 그런데 왜 하필 윤리인가? 왜 우리는 문학에 대해 말할 때 윤리를 말하는가? 흥미롭게도 그것은 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할 때다. (...) 문학 시장은 대중문학 시장과 자신의 가장 큰 차별점으로 윤리를 꼽는다. 한마디로 그 모호하기 짝이 없는 윤리성의 존재 여부를 통해 다른 하찮은 대중소설과 진지한 문학작품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 나는 윤리가 문학에 있어 일종의 알리바이로 쓰인다는 의혹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문학계 사람들이 제발트의 글에서 요즘 시대에 흔치 않은 진정한 문학의 흔적을 보면서 열광하는 이유는 거기에서 문학이라는 사멸해가는 한 시장의 존립 근거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닌가? (...) 다시 제발트의 글로 돌아와서, <토성의 고리>에서 주장하는 문학적인 윤리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잊힌 것들을 애도하는 것이다. 파국의 풍경에서 통증을 느끼고, 결국 여행의 끝에 진짜로 몸에 마비를 일으키는, 신음하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이 윤리라는 것은 일종의 마취제다. 마비시키고 중단시키는 윤리다. 제발트의 글이 소설과 에세이, 허구와 비허구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여 있는 글더미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의 글이 가진 강한 문학적 윤리가 무언가 되기를, 어딘가 가기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려는 인간의 광기가 낳은 것은 폭력이며, 폭력의 반복 속에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폐허의 세계다.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그것을 막으려는 의지는 자연스럽게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도달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2차대전 이후의 모든 지적/예술적 운동의 중심에 놓여 있는 회의주의다.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인 회의가 해체와 거부를 거쳐 마비로, 그러니까 완벽한 교착 상태로 귀결되는 것은 일견 논리적이다. 그러니까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그런데 미탄에 빠져 아무 데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마음을 윤리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가? 그건 회의주의를 가져온 원인 세계를 망각한 채 회의주의 말고는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 일종의 종교가 아닌가? 혹은 '최소한의 윤리'를 주장하는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시즘이 아닌가? 만약 이것을 윤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윤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문학뿐이다.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고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하며, 고장난 기계처럼 문학만을 반복 호명하는 윤리. 그것은 문학을 제외한 모든 것을
-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흥미로웠던 얘기 - 네덜란드의 사례(스프트 드럭-대마초를 합법화): 대마초 흡연 인구는 전체의 8퍼센트, 하드 드럭 경험자는 그 중 10퍼센트, 지속적 복용자는 그 중 1/3, 중독자는 또 그 중 1/3로 모든 수치가 마약을 금지하는 미국에서보다 훨씬 더 낮다. 금지하면 오히려 더 음지로 들어가서 각종 문제가 더 심해짐. 마약과 관련된 범죄들은 대부분 마약을 금지하기 때문에 생김. - 남미 마약 카르텔에 맞서는 오토디펜사(자경단)설립한 시골의사(?). 하지만 자경단과 카르텔이 섞이고 정부와의 알력 다툼 속에서 통제할 수 없이 일이 흘러가면서 결국 자기 마을을 지키지도 못하고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 영화 대사 인용 중 "인생이란 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지만 마약을 한다는 건 쉬운 길이다. 중독자들은 약병에 붙은 라벨만 보고 자신이 다음 순간에 어떻게 될지 안다." 뭐 이런 요지의 ✦ 마지막 인사는 네덜란드 훌스만 보고서(*네덜란드에서 대마 합법화 제안하여 수용된*)의 한 문장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죠. > 국가는 국민의 어떤 행위에 대해, 국가 권력이 생각하는 삶의 개념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동의하지 못한다는 관점에 서서는 안 된다. 네, 그렇답니다. 우리의 국가는 그렇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우리는 국가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 요르가즘요가는 말 그대로 ‘이렇게 저렇게 묘기처럼 자세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숨 쉴 수 있어?’ 테스트기 때문에 ‘숨쉬기운동’이라 불러도 무색하지 않다. 인간은 숨을 안 쉬면 뒤지고 ‘제대로’ 안 쉬면 조금씩 뒈져가기 때문이다. ✦ 스물아홉 살 봄에는 애인이, 여름에는 고양이가 생겼으며, 가을에는 아쉬탕가에 입문했다. 나는 이 기묘현 현상을 두고 반려자와 반려동물과 반려요가를 동시에 얻은 해이니, 아홉수 따위는 거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맞다. 아홉수는 동서양의 숫자 개념에서 나온 헛소리다. 중국은 1에서 10까지의 숫자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새로운 시작의 10을 길수로, 그 끝의 9를 흉수로 본다. 길수와 흉수를 따지는 것부터가 ‘A형은 소심해’처럼 괴상하다. 서양에서는 0을 중시해 0부터 9까지의 숫자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9가 오히려 새로운 시작의 길수가 된다. 타로에서도 0번 카드가 시작이다. 8에서 10번까지의 수는 대체로 완성이라는 특징이 있고, 특히 9번은 완성 직전의 단계로서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결실을 맺었다’는 뜻이다. (...) 서른한 살의 봄에는 요가 연재를 시작했다. 한여름 즈음 끝날 것이다. 나는 늘 이런 식으로 삶을 정리하여 서사시처럼 읊는 짓을 좋아했다. 자질구레한 일상을 표든 글이든 기록하지 않고서는 삶의 이정표를 파악하지 못했다. 7년간 매일 기록을 했다. 이 인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사실, 낭떠러지만 피할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 ✦ 개인적으로 나는 타투인들을 신뢰한다. 자신의 신념을 몸에 적고 타인이 볼 수 있는 부위에 취향을 노출한다는 게 너무 귀엽다. ✦ 💬 나는 요가에 반복해서 실패하면서 요가에 대한 동경이 있다. 이 책도 재밌게 읽었지만 요가 때문이라기보단 작가의 매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책 중간에 편집자의 말이 종이책갈피처럼 들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저자의 캐릭터에 대해 내가 느꼈던 것과 일치하며, 이렇게 편집자의 말을 함께 넣어 파는 것도 매우 마음에 들어서 적어 놓는다(마음에 안 드는 건 출판사의 이름 뿐이다). “저자는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짜릿한 생의 감각을 깨워줄 무언가가 나타나면 그림이든 글이든 운동이든 마다하지 않습니다. 자주 넘어지고 덜컹거릴지라도 자기 호흡과 속도에 맞춰 거리낌없이 나다운 일상을 꾸려가는 그의 삶이 어딘지 부럽기도 했어요. 때로는 수련하지 않아도 될 수백 가지 핑계를 찾아내면서도 기어코 바닥에 매트를 까는, 어딘가 불량한 듯 그럼에도 믿음직한 요가 강사의 하루가 독자님께도 기분 좋은 떨림을 전해주리라 믿습니다.”
- 주인공은 선을 넘는다민중은, 혁명의 본질을 몰랐을까? 로그 원 특공대는 자신들이 죽을지 몰랐을까? 자신들의 열망이 권력자에 의해 변질되고 좌절될지 몰랐을까? 자신들은 역사의 들러리일 뿐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입으로는 위대한 혁명이라고 말해도 뒤로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지금 이 순간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만은, 생판 모르는 이들과 연대한 그 순간만은, 참이 거짓을 이기고 진실이 승리한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도, 설혹 결과가 나쁘더라도, 그 순간만은 역사의 주인이 된다. 그 순간은 찰나지만 영원하다. 들뢰즈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은 재미있다. 영원을 말하지만,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의 행동이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다. 지금 이 순간 포기한다면 영원히 포기하는 것이다. 반면 지금 이 순간 포기한다면 영원히 포기하는 것이다. 반면 지금 일어서면 영원히 일어서는 것이다. 영원회귀, 순간은 영원하다. 아무리 혁명이 단순한 권력의 교차라 해도 혁명을 겪을수록 세상이 조금씩이나마 좋아지는 이유는 이 영원한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경험한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용기 없는 사람은 평생 제대로 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은 영원한 찰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로그 원>에는 스타워즈 시리즈가 시작될 때 꼭 등장하는 특유의 스크롤이 없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스타워즈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가. 그렇다고 그들의 인생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가치 없다 해도 상관없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인생이었다. (...) 우리의 삶은 히스토리가 아니라 해프닝이다. 순간일 뿐이다. 역사에 기록되든 아니든 상관없다. 세상을 바꾸는 건, 기록된 역사가 아니라 한순간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우리 인생에 스크롤은 필요 없다. 우리는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지금을 살아갈 뿐이다. 당신과 나의 새로운 해프닝을 고대한다. ✦ 영화 <미세스 팡>은 보통의 영화라면 절대 신경 쓰지 않는 것에 집착한다. 영화는 누군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팡슈잉 부인 한 사람의 침묵을 촬영한다. 최후의 순간엔느 촬영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부인의 품위를 지켜주기 위해, 기꺼이 영화의 미덕인 스펙터클을 포기해버린다.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다. 재밌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위대하다. 이 작품에는 효율이 아니라 정신으로 써낸 스펙터클이 있다. 관객은 그녀의 죽음을 바라보며 시대가 버린 가치를 떠올린다. 결국, 문제는 사람의 몸값이다. 하지만 이제는 결코 자연적으로 이 가격이 상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야 우리가 최초로 시장에 개입할 순간이 온 것인지도 모란다. 과거 시장에 대한 개입은(그것이 수정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신자유주의든) 결국은 당시의 사회적 효율이 요구한 것이었다. 이제는 효율과 무관하게(어쩌면 효율을 무시하고서라도), 강제로 사람의 가치를 끌어올려야 한다. 법적 장치든 사회적 타협이든 그것만이 자본주의 속에서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자본주의의 요구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를 포기해야만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도 아직 일말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미소와 나의 선택이 달랐던 건, 좋아하는 정도가 달랐기 때문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했고, 미소는 진짜로 좋아하기 때문에 집을 버려서라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포기했기 때문에 그것을 덜 좋아하게 된 것이고, 미소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더 좋아하게 된 것이라고. 영화 속 미소는 복잡한 사람이 아니다. 사회에 대해 그리 큰 고민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녀는 좋아하는 것을 선
- 파워파워는 누가 사용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타래는 그에게 반항하지도, 그가 올바른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른다. 그저 "그래, 난 할 수 있어. 그래,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할 뿐. ✦ 💬 위 인용이 거의 이 소설이 말하고자 했던 모든 것이다. 이 소설은 여성이 지배하는 것이 디폴트가 되었던 사회에서 한 '남류'작가가 아주 오래 전 과거에 어느 날 어린 소녀들이 맨손으로 남자를 죽일 수도 있는 '파워'를 가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상상하여 쓴 내용이다. 즉 현재와 반대의 사회를 설정해 놓고 그 안에서 소설 속 소설로 어떻게 그 반대의 사회가 시작되었는가를 다룬다(그러나 이 남성의 상상일 뿐 소설 내에서 받아들여지는 사실은 아니다). 여성들에게 갑자기 주어진 '파워'는 너무나도 직관적인 이름으로, 손으로 전류를 내보낼 수 있는 힘이지만 이건 직관적으로 권력이다. 항상 주지사와 옥신각신하던 여성 시장이 파워를 얻고 나서 회의 자리에서 자신의 힘을 상기하며, 주지사가 뭐라고 떠들든 심드렁하게 속으로 나는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남자들을 앉은 자리에서 죽여버릴 수도 있어, 하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라. (겉으로는 멀쩡한 직업인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 육체적 권력이란 이런 것이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장면에서 현실에서는 남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여자가 자기 말에 반박하는 순간 속으로는, *아 쪼끄만 게. 어디 데리고 나가서 패버리면 되는데*.) 그러니 이 경우 남성(현실의 여성)이 뭐라 대단한 주장을 하든 그걸 들을 가치가 있을까? 그러니 '가모장제' 사회가 되기 위해서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강력한 육체적 힘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현 권력 체계를 바꾸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힘의 부여, 이게 다른 미러링 스토리와 이 소설의 첫번째 차이점이다(보통은 그냥 여자가 지배하는 세계야! 라고 "설정해놓고" 출발한다.) 그리고 두번째: 흔히 말하는 '미러링'이란 내 생각에는 두 가지다. 사이다이거나 현 체제의 불합리성에 대한 고발. 예컨대 성추행 당한 여성에게 옷차림을 조심했어야지 라고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바꿔 만약 남성이 이런 말을 듣는 사회라면?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많은 컨텐츠들은 결국 여성에게 그러는 것이 얼마나 웃기고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생각하게 하며 일말의 통쾌함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흔한 미러링처럼 홍보되었음에도 그런 방향이 아니다. 여성에게 권력이 주어지고 남성들을 압제하기 시작하면 통쾌한 정의가 구현되는가? 혹은 지금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재치 있게 밝혀주는가? 파워가 발견되고, 번지고, 사용되어 세계를 바꿔놓는 과정은 전혀 아름다운 혁명이 아니다. 힘은 있는 자에게 사용될 뿐이고 그걸 가진 사람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만이 힘의 속성이다. 사람들은 그냥 힘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며, 이 소설 속 소설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그 많은 폭력과 억압, 강간과 살인이 그런 식으로 발생한다. 이 소설의 목적은 여성에게 힘을 주고 여성이 그것으로 서로를 지키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데 있지 않다. 제목처럼 파워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갑자기 똑같은 환경에서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날까? 하는 질문을 생각해봤을 때 남자로 태어나면 살기 편하겠지, 근데 내가 뭐 때문에 편한지도 모르는 그냥 한남 될 것 같애 ..하는 생각을 했던 게 생각남. ✦
-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평범한 사람들도 이,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감정을 알까요? // 지옥을 / 공간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 시간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 나를 가운데 두고 어리둥절해진 채 서로 바라보았다 ✦ 나는 미사일의 탄두에다 꽃이나 대일밴드, 혹은 관용, 이해 같은 단어를 적어 쏘아올릴 것이다* *사실상의 인간, BINA48의 말 내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 / 사고 현장에 우두커니 서서 나는 왜 떨어지고 있는 것인가 점심은 먹고 떨어지는 것인가 옷매무새는 잘 여미고 떨어지는 것인가 몇 층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인가 나는 내가 떨어지는 모습을 처음 목격하기 때문에 내가 떨어지는 것을 끝까지 내버려둔다 떨어진 것이 내가 확실한지 알기 위해서 난간 위에서 누군가 외친다 / 밑에 떨어진 사람 없어요? 아직 다 떨어지지 않았지만 일단은 나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떨어지는 나를 지켜보는 중인 내가 나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이미 누군가 떨어진 적이 있다면 그것도 나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이미 떨어진 사람이 파다하다면 내가 파다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과거에 떨어진 나를 수습하기 위해 떨어지고 있는 중인 나를 그만둬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오래 떨어지고 있는 중인 나를 사람이라 불러도 괜찮은 것인가 내가 도착하지 않는다 운동화와 뿔테안경이 도착한 지 한참 지났지만 내가 도착하지 않는다 가발과 속눈섭이 찰랑찰랑 내려앉은 지 오래됐지만 내가 도착하지 않는다 손발톱과 치아가 후드득 쏟아진 후에도 내가 도착하지 않는다 가슴과 엉덩이, 눈동자와 눈빛이 뭉개진 후에도 내가 도착하지 않는다 전봇대마다 실종 전단이 들러붙은 후에도 나는 도착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지나가버린 것을 끝까지 모른다 내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꾸벅꾸벅 존다 / 꿈결에 사고 현장을 벗어나버린 줄도 모른다 / 걷는다 어딘지도 모른다 ✦ 실패한 번역 (전략) 소중한 비극을 뒤져 발견한 / 단 한 방울의 눈물이 전혀 특별하지 않아서 / 남은 일생 열심히 울겠지 / 역시 시인이란…… ✦ 치(齒) 하나는 안다 / 열까지는 모르고 / 창밖에 비가 온다는 것은 이곳이 수조의 내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 사람과 점심을 먹는다 토끼를 키우고 싶지만 토끼의 고독사가 두려운 사람과 점심을 먹는다 / 토끼를 키우고 싶은 사람이자 반드시 토끼를 고독하게 만들 예정인 사람이라거나 / 토끼를 키우고 싶은 것과 별개로 토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거나 / 열은 모르지만 / 토끼 이야기에 열중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안다 / 점심을 먹는 사람에게 토끼는 / 긴 귀와 짧은 꼬리와 알비노와 간 그리고 기능성 앞니가 아니며 / 소동물치고 크게 자라는 덩치와 공격적인 번식력과 20세기 대량학살 대상은 더욱 아니다 / 다만 나는 토끼가 귀엽습니다 / ; 이 문장은 이상하다 / 토끼를 귀여워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토끼를 귀여워하는 자신을 소외시킨다 / 우리는 토끼가 귀엽습니다 / ; 이 문장은 틀렸을뿐더라 토끼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눈앞의 적을 향해 온힘을 다해 멸시와 저주를 퍼붓는 / 그것이 토끼랍니다 / 어차피 잡아먹힐 것이라는 사실 하나를 스스로 잘 안다는 증거이지요 / 목구멍으로 커피가 한 방울 굴러떨어진다 / 토끼의 최선과 / 목구멍의 최선 점심을 먹던 사람이 카메라를 내밀며 말한다 /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세요 이를테면 토끼나 불로소득 같은 거요 최선을 다해 웃어 보인다 렌즈 밖에서 비가 온다는 것은 이곳이 사진의 내부가 아니라는 것 / 살아있는 세계라는 것 / 하나를 안다 푸줏간의 창밖에 비가 오는 것은 모른다 / 빛을 향해 자라나는 토끼의 앞니를 모른다
- 목소리를 드릴게요작가의 말 중 나는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할까 봐 두렵다. 지금의 우리가 19세기와 20세기의 폭력을 역겨워하듯이 말이다. 문명이 잘못된 경로를 택하는 상황을 조바심 내며 경계하는 것은 SF 작가들의 직업병일지 모르지만, 이 비정상적이고 기분 나쁜 풍요는 최악으로 끝날 것만 같다. 미래의 사람들의 이 시대를 경멸하지 않아도 될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 윤리는 어쩌면 비위에 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자주 곱씹는다. (중략) 2020년은 SF 단편집을 내기에 완벽한 해가 아닌가 싶고, 세계는 더디게 더 많은 존재들을 존엄과 존중의 테두리 안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는다. 너무 늦지만 않으면 좋겠다.
- 새해💬 1. 현대인이란.. 2. 아동기에서 부모의 존재란.. 3. 이게 16주 베스트셀러인 독일이란.. 요약: 🤔
-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플라스틱의 성장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한다. 괜히 현대를 플라스틱 시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플라스틱 제품은 고장 나거나 파손되면(흑은 싫증 나면) 언제든 다른 플라스틱 제품으로 대체할 수 있다. 압도적인 범용성! 그래서 역설적으로 플라스틱 자체를 대체할 물질은 아무것도 없다. 설혹 그런 물질이 있다 하더라도 단가가 맞지 않는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정신이다. 자본주의에서는 화려하지만 저렴해야 하며, 넘치게 생산하고 금세 바뀌지만 변하지 않아야 한다. 독점이라면 이루 말할 데 없이 완벽하다. ✦ <legendary, lexical, loquacious love> (1996) ✦ 어느 순간 우리는 결정을 할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차라리 광고가 섞여 있어 어떤 것이 진짜인지 가려야 했던 구글 이전의 검색 사이트가 우리에게는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업데이트가 되지 않아 실수를 종종 하는 내비게이션이 우리를 계속 생각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일은 할수록 는다. 운동을 해야 근육이 늘어난다. 결정을 내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세세한 부분에서 결정을 내려봤던 경험이 결정적 순간에도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런데 인간은 이제 그 기회를 완전히 빼앗겼다. 평균적으로 우리는 더 안전하고 더 효율적인 사회로 가고 있고, 그것은 옳다.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 자유는 20세기 중요한 가치였고, 그 가치를 좇은 이들의 노력으로 세상은 이전보다 더 좋은 곳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뇌과학은 자유라는 것도 우리가 받은 자극의 결과일 뿐이라고 폭로한다. 데이터가 모이면 모일수록 데이터는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어떤 판단을 내릴지 알게 된다. 우리는 자유롭게 무언가를 선택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선택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조작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정보와 자유를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가 있다면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데이터화되어도 상관없다. 데이터를 초월해 우리는 자유롭게 결정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기에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 선거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선택은 조작될 것이다.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느끼기에 문제 제기도 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가 조작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내세울 수 있을까. ✦ 데이터과학자 다비도위치는 자신의 책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이렇게 예언한다. “차세대 킨제이는 분명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차세대 푸코는 분명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차세대 마르크스는 분명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차세대 소크는 분명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그의 말은 옳다. 앞으로는 어떤 분야든 새로운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차세대 예수와 무함마드, 심지어 괴벨스까지도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심지어 무분별한 빅데이터 사용을 반대하는 시민운동가 캐시 오닐조차 데이터과학자다. 우리의 사고는 이미 데이터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모든 주장에는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것은 옳고 그름, 좋고 나쁨과는 무관하다. 나쁘다 해도 피할 수 없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어떤’ 데이터과학자가 되느냐 하는 것뿐이다. 그 선택까지 데이터가 대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리눅스 제작에 참여했던 에릭 레이먼드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당과 시장>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성당과 시장이란 기존 제작 방식과 새로운 제작 방식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중세 시절 성당 혹은 수도원을 생각해보라. 중세는 신이 가장 중요한 시절이었고, 수도사 중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많았다. 수도원에 틀어박혀 자신의 재능을 썩혀가던 그들은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들은 수도사이면서 동시에 개발자였다. 하지만 길었던 중세 시대를 생각해보면 그들의 개발은 느리고 비효율적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시장은 정 반대다. 상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소비자와 동료 상인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기존 제품을 보강하고 새로운 것
- 잘돼가?무엇이든“싫다는 감정에는 삶을 달리게 하는 에너지가 있다.”
- 펭귄은 펭귄의 길을 간다💬 이원영 박사의 책을 읽으면 어떤 인간이 이렇게 어떤 대상에게 한없이 격렬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따뜻한 지속적 애정을 갖는다는 게 신기하고 멋지다고 느낀다. 대학 때 들었던 라틴어 수업에서 선생님이 호메로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를 떠올린다. 그리고 공부는 이런 사람들이 해야 하는 거라고도 생각한다.
- 여기까지 인용하세요지옥 내가 시인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으면 좋겠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영상 다큐멘터리 감독이 우리 둘의 일생을 촬영했으면 좋겠다 둘의 철학은 구별된다 너는 나의 태도를 나는 너의 생활을 사랑한다 너와 나는 지옥이 무엇인지에 대해 종종 의견을 나눈다 지옥은 내가 아직 겪어보지 않은 곳이다 내 관점이고 지옥은 이미 겪은 괴로움을 겪는 곳이다 네 관점이다 내가 맞다 내가 지옥에 가면 나는 거기가 지옥이 아니라고 할 것이고 네가 옆에 있다면 너는 여기가 지옥이 맞다고 할 것이다 아니야 여기보다 더 괴로운 데가 있을 거야 너는 지옥에서도 내 해석을 좋아해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둘 중 하나가 병에 걸려 먼저 죽으면 다큐멘터리 감독이 편집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은근슬쩍 한쪽 편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의 거처로 영상 다큐멘터리 감독이 찾아온 것이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땅을 손으로 짚었다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고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고르기아스, 난 항상 왜 네가 누구랑 있는지가 궁금하지? 내 앞에는 아테네의 다른 모든 시민들처럼 은근슬쩍 너의 편만 들어왔던 감독님이 서 계시다 너는 지옥에서 누구랑 있나? ✦ 인기생물 터미는 이제 인기동물이 아니다 너무 자주 사람 흉내를 낸다 / 시간이 지나고 터미가 죽는다 시간이 확확 간다 / 사람들이 동물에 대한 책을 읽는다 거기 터미가 기록 되어 있다 그 식육목 곰과 생물이 사람을 흉내내고 사람을 구했다고 한다 터미의 기록을 읽은 사람에게 터미는 다시 인기동물이다 / 터미를 모티브로 삼은 캐릭터는 그 애니메이션에서 꽤 인기가 / 높아서 점점 비중이 더 높아지고 있다 그 캐릭터의 이름은 머미터미이다 / 머미터미는 이제 인기 캐릭터가 아니다 당연히 인기생물도 아니다 너무 사춘기 소년처럼 행동한다 / 그러나 그러한 캐릭터도 누군가의 최애캐로 자리 잡는다 생명 공학자가 머미터미라는 생명체를 만든다 / 머미터미는 이제 인기동물이다 이 인기동물은 자신의 원본인 인기 캐릭터처럼 사춘기 소년 같다 하지만 아직은 인기동물이다 머미터미를 하나 구입하고 싶다 / 그러나 이 시대에는 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냥 공학자에게 하나만 더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머미터미를 돈으로 구입하고 싶다 돈이라는 것은 나의 최애캐였다 그렇지만 동물이었던 적은 없다 물론 시간과 조건이 맞으면 돈도 동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지금 터미라는 과거의 동물이 인간처럼 행동하는 동영상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시청한다 / 그때의 인간들은 저런 행동을 인간처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나는 터미가 마음에 든다 오늘부터 터미도 내 최애캐다 / 돈과 터미 돈과 터미 내가 공학자라면 돈터미를 만들 것이다 ✦ 행복한 죽음 (위 생략) 나는 그날 이후로 너무 많이 슬플 때면 전시장에 가곤 했다 통일교 기계의 옆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빼뜨로브나의 손녀가 떠들어 댈 때 나는 기계의 미소를 상상하거나 눈물을 상상했다 그가 인간이었다면 어쩌면 우스꽝스러운 불구자였을 것이다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박물관으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것은 우정 같은 그 무엇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 까마귀의 향연💬 대 유 잼 심지어 대너리스 존스노우 티리온을 빼고 나머지 POV만 모아놓은 건데도 재밌다.. 용들과의 춤은 아직 개정판 안 나와서 원서 사버림
- 도서관의 말들나는 주중에는 매일 리슐리외가에 있는 국립 도서관에 가서, 거기서 수많은 다른 정신노동자들과의 말없는 연대감 속에서 대부분 저녁때까지 내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내가 찾아낸 책들의 작게 인쇄된 주석에 빠져 있었으며, 내가 이 노트들에서 언급한 책이나 그 책의 해설에 몰두해 현실에 대한 학문적 기술로부터 점점 후퇴하면서 아주 기이한 세부적인 것까지 가지를 치며 뻗어나가 곧 조망이 불가능해진 나의 기록물을 적어 가는 데 점점 빠져 들었지요. — W. G. 제발트, <아우스터리츠> ✦ 2014년부터 시작된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는 백 년 동안 매년 한 명의 작가가 미공개 작품을 노르웨이의 오슬로 공공 도서관에 보내면 백 년 뒤인 2114년에 출판하는 공공 예술 사업이다. 작품은 백 년 동안 봉인된 채 보관되고, 책 출간에 쓰이는 종이는 오슬로의 숲에 백 년 동안 심은 나무 천 그루를 이용해 만든다고 한다. 마침내 첫 문장을 쓰는 순간, 나는 백 년 뒤의 세계를 믿어야 한다. 거기 아직 내가 쓴 것을 읽을 인간들이 살아남아 있을 것이라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 한강, <미래 도서관, 백 년 동안 긴 기도에 가까운 어떤 것> ✦ “독서와 산책, 빈둥거리기와 내가 사색이라고 부르는 낮잠은 최고의 행복이지.” 비블리오 샤는 종종 이렇게 단언하곤 했지만, 도서관 고양이는 그것이 흄을 인용한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촌은 번지르르하고 속임수 잘 쓰는 표절자라고 여겼다. — 알렉스 하워드, <책 읽는 고양이> ✦ 나는 아직도 개인의 내면 세계가 책의 유무형의 세계와 깊숙이 그리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 명료해진 날을, 그 시간과 공간을 뚜렷이 기억한다. — 슈테판 츠바이크,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 특별한 목적 없이 도서관에 드나들었던 서른 안팎의 나날을 나는 내 인생의 암흑기라고 생각했다. 취업과 전혀 상관없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시간을 놀렸다. 또래 친구들이 한창 직장에 다니며 각자의 능력을 키워 나가고 있을 때 나는 천분의 일쯤 되는 확률의 등단을 막연히 꿈꾸며 아무도 읽어 주지 않을 소설을 썼다. 매일 도서관에 갔지만 그 이유로 내 가족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걱정했다. 그런 내게 도서관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었다. 인격을 갖춘 대상이었다. 따뜻하거나 시원한 실내 온도는 도서관의 체온이었고,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 속 좋은 문장은 도서관의 말이었다. 그럴 때마다 도서관은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받아 주었다. 도서관은 내 감정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러기 전에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한 몸에서 ‘느끼는 사람’과 ’쓰는 사람’을 구분하게 해주었고 이미 그런 경험을 했던 다른 많은 이의 글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도서관이 좋으니 거기 가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세상에는 도서관보다 더 좋은 곳이 많을 테니까. 도서관에 모든 게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뿐더러 온종일 찾아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때가 내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암흑의 한가운데를 비행 중인 사람에게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를 그 여행을 위한 임시 정차 구역이 있다는 것만 알려 주고 싶다. 거기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지만 무언가가 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고.
- 평균의 종말전반적으로 보면 미국 사회 전역에서의 보편적 평균주의 시스템 시행이 비교적 안정적이고 부유한 민주주의의 수립에 기여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평균주의는 우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다. 사회는 우리 모두에게 학교와 직장생활과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정의 편협한 기대치를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려고 기를 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쓴다. (...) 기업, 학교, 정치인들 모두가 하나같이 개개인성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정작 현실은 누가 봐도 모든 것이 당신보다 시스템이 중요하게 설정돼 있는 상황이다. (...) 개개인이 오로지 평균을 참고해야만 평가될 수 있다는 신념에 입각해 있는 사회에서는 어떻게 해야 개개인성을 이해하고 활용할 만한 조건을 구축할 수 있을까? ✦ 📝 에르고딕 스위치 : 평균주의이 유혹에 속아 개개인을 평균과 비교함으로써 개개인에 대해 뭔가 중요한 것을 알아내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지만 정작 실제로는 개개인에 대해 중요한 것을 모조리 무시하고 있는 상태 (예시: 타이핑 속도와 오타의 상관관계 - 집단적으로는 속도가 높을 수록 그냥 타이핑 실력이 좋은 거라 오타가 적음. 개인 단위에서 보면 빨리 칠수록 오타는 많아짐.) ✦ 그 모든 결정은 하나의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우수성을 이루기 위해 나에게 유용한 길이 어딘가에 있지만 그 길이 어떤 형태인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길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했다. ✦ “사람은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에 대한 통제력을 가질 때 가장 행복해집니다.” *모닝스타 ✦ (워트호그를 수동 착륙시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 공로 훈장을 받은 작은 체구의 여성 조종사) 킴 캠벨이 주는 교훈이 한마디로 이것이다. 맞춤이 기회를 만든다. 환경이 자신의 개개인성과 잘 맞지 않으면 (이를테면 조종석에서 팔이 잘 닿지 않아 조종하기 힘들다면) 그 환경이 조종석이든 교실이든 전망 좋은 고급 사무실이든 간에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펼칠 만한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다. 다시 말해 만인에게 평등한 기회를 원한다면, 우리 각자가 잠재력을 한껏 펼칠 기회를 똑같이 누리는 사회를 원한다면 직장·교육·사회조직이 개개인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기회균등을 대하는 일반적인 생각은 이와는 다르다. 평균의 시대 동안 우리는 기회균등을 ‘평등한 접근권’, 즉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경험을 접하게 하는 것으로 규정해왔다. (...) 표준화된 세게에서는 그런 방식이 불공정을 다루는 가능한 최선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평균적인 사람 따위는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평균적인 사람 같은 것이 없다면 평균적으로 평등한 기회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평등한 맞춤만이 평등한 기회의 밑거름이 된다. ✦ 우리 앞에는 밝은 미래가 펼쳐져 있으며 그 시작점은 평균의 종말이다.
- 준최선의 롱런나는 '세상은-'으로 시작하며 내뱉는 문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이라는 말이 너무 크게 들리는 까닭이다. 인류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도 안 사랑한다는 말이고 자식을 글로벌 인재로 키우겠다는 말은 아무것도 아닌 인간으로 키우겠다는 뜻이니까. '세상을 위해서'라는 말도 내게는 텅 비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구체적인 사람은 연민할 수 있어도 세상을 연민할 수는 없는 인간인가 보다. 대신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면 알아듣기 편하다. “걔는 허벅지에 작은 점이 두 개나 있는데 나는 알고 걔는 몰라”라든지 “내가 사랑한 사람은 분홍 핸드백 깊은 곳에 숨기고 다니는 데오도란트 같은 존재였지” 따위의 디테일을 얘기해 줘야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 너무 크게 말하면 들을 수 없게 되나 보다. ✦ 딱히 갖고 싶지 않아서 괜찮다고 말했을 뿐인데, ‘얘는 조르질 않네’하고 어른들에게 칭찬받는 상황을 즐겼다. 또 하나 즐긴 게 있다면 야매 그림이다. 엄마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방에서 그림을 그렸다. 방에는 그림이 많았다. 나는 사진이나 그림을 종이 아래에 놓고 테두리를 따라 그릴 수 있었다. 대고 그린 그림을 가져가 보여 주니, 엄마와 엄마 친구들은 내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며 칭찬했다. 나는 종이에 대고 그렸다고 고백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과 사랑을 즐겼다. 대고 그렸는데 내가 그렸다고 칭찬받는 것을, 안 갖고 싶을 뿐인데 욕심이 없다고 칭찬받는 상황을. 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도록 놔두었다. 사랑이 전적으로 오해에 기반하도록 방치했다. 그래서 누가 나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오해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 어른으로 자란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의 사랑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사랑받는 것을 욕망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해받는 것과 사랑받는 것이 조화를 이룬 적 없었기 때문에, 둘 중 이해 받는 쪽을 자연스럽게 포기해 왔던 것이다. 사랑받으면 장땡이지, 하는 생각으로. 시나 일기, 내면의 것을 토해낸 것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다. 나는 누군가 그런 식으로 나를 사랑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 뒤틀리고 왜곡된 사랑법은, ‘나를 알면 상대가 떠날 것’이라는 불안에 기반한 중증의 방어 기제인 동시에 ‘네가 나를 알아볼 리 없다’는, 타인의 이해력을 신뢰하지 않는 오만함에 기반한다. (이 부분이 너무 공감되어서 적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받은 사랑은 전부 오해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사랑했다. 나는 종종 내 진짜 나를 사랑해 달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가짜 나에 대해 감탄해 줘, 내가 만들어낸 모습대로 마음껏 오해해줘. 그러면 나에게 반하게 될 거야. 근데 이제는 그런 생각도 또 든다. 그게 뭐 어때서?) ✦ 피로회복은 비대칭적 권력 구도를 뜻하는 두 장의 카드를 무시할 수 없었다. 순간, 그는 자신이 어떤 기대를 품었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역겹게 생각할까 두려워졌다. 그리고 사랑은 내가 타인에게 역겨워질 매 순간에 대응, 반발하며 자신의 내면을 지혈하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자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었다.
- 사물들예전 같았으면 욕실에 칠해진 바둑판무늬나, 정원의 분수, 커다란 현관에 깔린 타탄체크 양탄자, 떡갈나무 책장, 도자기, 꽃병, 카펫에 넋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 그것들에 무감각하게 되었다기보다는 이제 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지표를 상실했다. 아마도 여기서 그들이 경험한 튀니지, 화려함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국제 도시 튀니지, 날씨는 온화하고, 일상이 다채롭고 변화무쌍하게 이어지는 이 튀니지야말로 그들이 가장 쉽게 정착할 수 있었을 곳이었다. 과거에 그들이 꿈꾸던 것도 이런 종류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팍스 사람, 시골뜨기, 망명자가 되고 말았다. 기억 없는 세계, 추억 없는 세상, 헤아리지 않아도 무미건조한 날과 주, 시간은 여전히 흘러갔다. 그들은 더는 욕망하지 않았다. 무심한 세계. (...) 그들은 몽유병자나 다름없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상실했다. 예전에, 이 예전이라는 것이 세월에 따라 하루하루 후퇴하는 시간이어서 마치 그들의 이전 삶이 전설이나, 비현실 혹은 모호함 속으로 파묻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그들은 적오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광기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이런 강렬한 욕구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기도 했다. 앞쪽으로 팽팽히 당겨진 듯한 조급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느낌으로 살았다. 그리고? 무엇을 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인가, 아주 천천히 파고드는 조용한 비극과 같은 것이 그들의 느려진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래된 꿈의 파편 가운데, 형태 잃은 잔해 가운데 그들은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경주의 끝, 6년 동안 삶이 굴러온 모호한 궤도의 끝, 어느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우유부단한 탐색의 끝에 서 있었다. (이 다음은 에필로그이며, 다음 문장으로 시작해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될 수도 있었다. (이 문장으로 끝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들이 맛볼 식사는 밋밋할 것이다. ✦ 인용1: 문명이 우리에게 제공한 혜택은 셀 수 없고, 과학의 발명과 발견이 가져온 생산력으로 얻게 된 온갖 풍요로움은 비할 데 없다. 더 행복하고, 더 자유롭고, 더 완벽하고자 인간이 만든 경이로운 창작품들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수정처럼 맑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새로운 삶이라는 샘은 고통스럽고 비루한 노동에 시달리며 이를 좇는 사람들의 목마른 입술에는 여전히 아득히 멀다. — 맬컴 로리 인용2: 수단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일부이다. 진리의 추구는 그 자체로 진실해야 한다. 진실한 추구란 각 단계가 결과로 수렴된 수단의 진실성을 의미한다. — 카를 마르크스
-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당신의 책상 위 황동 재질의 빗 하나 훔치고 싶은 간질거림으로 후닥닥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나오는데 빗어줄 털 한가닥 안 남기고 털 싹 다 밀린 개가 있어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개를 보는데 걔를 보는 심정이니 그 여력과 그 겨를로 아이맥스 영화관 360도 회전이 가능한 의자이듯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달에게는 없고 당신에게만 있는 당신의 없음으로 나는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 나를 못 쓰게 하는 남의 이야기 넷 중국 시인 정샤오충이 ‘시인은 무엇을 생각하는가’라는 주제 아래 발표한 산문 <시의 문>을 요약한 이야기* 나는 18년전 중국 서남부 사천으로 광둥 동관에 이르는 일대에서 공장 생활을 몇 년 하면서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였다. (...) 동료 중에 조립 라인의 업무 강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밤마다 꿈을 꾸며 소리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창백한 얼굴을 보노라면, 그 외침이 내 몸에서 뿜어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 몇 년 동안 나는 내가 따르고 교류했던 무수한 여성 노동자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중에서 그들이 끝내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해왔다. 나는 바로 내가 그 무리 속에서 이들 여성 노동자를 구출하여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한 명의 인간이 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들 모두는 구체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들의 이름, 그들의 이야기, 그들 이름의 이면에는 한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지 무리인 것이 아니다. 나를 신뢰하는 그들은 자기 이야기를 해준다. 나는 그들의 불운을 시로 기록하였다. 모든 이의 이름은 그녀의 존엄을 뜻한다. 이 말은 조립 라인에서 일하던 시절 깊은 깨달음을 준 구절이다. 나의 이름은 정샤오충이다. 나를 중국의 어느 여성 노동자로 부르지 말기를 바란다. (요약 발췌에 제목을 잘 적으면 시가 되는 순간) ✦ 화두는 곡두. 그러나 사랑은 나에게 언어를 주었다.
- 사브리나💬 ㅈㅐ미있었다..근데 여자 죽이는 얘기 그만 보고 싶기도 하고(물론 이 책의 주제가 여자 죽이는 건 아니고 그 사건으로 드러난 현대사회의 어쩌구 단면..)
- 덧니가 보고 싶어작가의 말: 소설이 낡는 속도는 세계가 나아가는 속도와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 여전히 농담이 되고 싶습니다. 간절히 농담이 되고 싶습니다.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의 입속에서 슈팅 스타처럼 톡톡 터지고 싶은 마음은 바뀌지 않습니다. 가벼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는 무게를 가늠하며, 지치지 않고 쓰겠습니다. ✦ 💬 정세랑은 귀엽고 어딘가 아릿한 헤테로 로맨스를 잘 쓴다. 하지만 이 시대에 남자와 귀엽고 아릿한 로맨스는 읽기도 쓰기도 되게 힘든 일이다. 용기와 재화의 이야기보다 재화의 짧은 단편들이 전부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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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 이름 짓기
- 일의 기쁨과 슬픔
-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이런 가짜 세계 중에서도 잘 만들어진 세계가 있고 못 만들어진 세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독창적인 설정을 만들고 그것들을 제대로 운영해낼 줄 아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우주를 만든다는 행동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정도로 똑똑하다는 거죠. 이걸 반대로 이야기한다면, 시작부터 요란하게 자기가 만든 우주를 광고해대는 사람들은 별 실속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왜 맨날 영화의 중대한 사건을 어린아이 혼자 목격하는가에 대해:) 한 가지 그럴싸한 이유를 더 생각해냈는데, 그건 이것이 일종의 복수라는 것입니다. 원래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은 원래 어렸을 때부터 남들이 믿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잔뜩 하기 마련입니다. 당연히 어른들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그것이 너무나도 억울했겠죠.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자기들도 알면서요. 그러니까 이런 괴상한 사건을 목격하는 아이들의 클리셰는 이런 선언인 셈입니다. "그것봐, 내가 그때 한 말은 진짜라니까!"
- 출근길의 주문이것은 나 자신의 과거 경험이기도 하다. 분위기를 봐서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때 혀를 빼꼼 내밀거나 헤헤 웃어버리기. 일할 때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을 듣고는 노력해서 고쳤다. 이런 태도를 보이면 상대는 내가 일에 진지하지 않거나 심하게는 자격 미달이라고 판단한다. ( 💬 나 이거 진짜 고쳐야됨..) ✦ 여성은 주로 '듣는 사람'이기를 요구받는다. (...)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면서 상대에게 내 이야기를 들리게 하는 경험 자체가 여성의 성장기에 존재하지 않는 영역인 경우가 많이 있다. 공적인 자리에서 듣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습관이 되지 않아, 사석에서 말하는 습관을 공석으로 그대로 끌고 들어와 버리는 모습을 볼 때가 적지 않다. 상대가 말을 끊을 때 "잠깐만요" 혹은 "제가 마저 이야기하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당신이 젊은 여성이고 상대가 노회한 남성이라면 그 말은 높은 확률로 "어휴, 무서워서 어디 말하겠나. 마저 해봐요" 같은 반응 혹은 짜증 섞인 분노를 되받게 된다. 그런 맞서는 경험을 쌓지 않으면, 내 말을 들어주는 사석에서만 신나게 말하는 사람이 된다. 처음부터 말 잘하는 사람은 없다. ✦ 여성과 남성을 불문하고 네트워킹에 능한 사람보다 여성끼리 이너서클에 속한 사람이 권한과 보수가 더 좋은 일자리를 찾는다는 결과였다. 여성들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 ✦ 우리는 능숙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재능과 능숙함은 다르고, 후자는 무조건 꾸역꾸역의 나날이 필요하다. 버틴다고 뭐가 되지는 않지만, 그런 보장은 없지만, 재미없는 걸 참아내는 시간 없이는 재미가 오지 않는다. 프로가 된다는 것은, 꾸준히 단련하고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일정한 아웃풋을 만들 수 있으며 자기 자신과 타인의 실력과 능력치를 가늠해 협업에 용이한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일을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좋아한다고 느낄 때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나와 일해서 좋다고 표현할 때다. ✦ 다른 여자를 우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이 든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의 분투를 보며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라며 고민을 스쳐가는 쉬운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한다. 젊은 여자들이 나이 든 여자들의 분투를 보며 "그러게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지 그랬어"라고 개인의 판단 착오로 모든 잘못을 돌리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언제나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지를 따라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최선이 주어진 적은 없어도,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을 만들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들이 처한 구조적인 어려움을 보게 되었다. (...) 어렵고 힘든 얘기를 다 토로하지 않는다 해서, 불가피했던 삶의 깊은 굴곡을 다 노출하지 않는다 해서 남들이 쉬운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옆자리 여자를, 윗자리와 아랫자리 여자를, 옆집 여자를, 당신을 위해 일하는 여자를, 모르는 여자를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존중하자. 다른 여자의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여자만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 여성은 '시간'을 가족을 위해 할애하기를 더 요구받는다. 브리짓 슐트의 <타임 푸어>는 가정 내에서 여성들이 고질적으로 시달리는 시간 부족 문제를 몇 개의 챕터를 할애해 설명하는데, 8장 도입부에는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하이디 하트만의 문장을 인용한다. "페미니즘 때문에 달라진 건 '일을 더 많이 하게 된 것'밖에 없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여성은 일을 해야 하는데 남성은 가정을 돌보는 데 관심이 없어서 결국 여성은 일을 하기 위해 가정까지 착실히 돌봐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 슐트는 둘만 있었던 때는 집안일을 공정하게 나누는 편이었지만 아이들이 태어난 뒤부터 저울추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
- 현기증. 감정들
-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 벌새AB: 내가 여자‘아이’였을 때, 나는 정말이지 여자아이인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자란 60년대는 여자아이인 동시에 삶을 누리고 인격을 가진 인간이 된다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내가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여자아이들과 나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뭐랄까, 당시 ‘여자아이’에 대한 내 태도는 부정적인 쪽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에 내가 읽었던 여성에 대한 이야기들은 전부 다 멍청했다. 실제로 그랬다. BK: ‘멍청한’ 소녀 이야기가 많기도 하다. 소녀들에 대한 ‘멍청한’ 이야기 말이다. AB: 사실 어렸을 때 나는 남자와 소년들만 그림으로 그렸다. 남자들은 항상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멋지고 흥미로운 일들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나는 그런 식으로 나의 여성성을 대체해 버렸다. 내가 봤던 모든 여성 캐릭터들처럼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에) 다른 여자아이들과 맺은 관계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심지어 소녀들을 다룬 책도 읽지 않았다. 낸시 드루의 미스터리 시리즈나 루이자 메이 올콧의 책들은 읽고 싶지 않았다. 물론 결과적으로 <작은 아씨들> 같은 루이자 메이 올콧을 읽기는 했다. 좋은 작품이었고. 하지만 더 어렸을 때는 그런 책들, 그러니까 ‘여자애’들을 위한 책은 절대로 읽고 싶지 않았다. … 맞는 말인 것 같다. 내면화된 여성혐오. 하지만 현실이 그렇기도 했다. 누가 도대체 그런 폄하되는 인간이 되고 싶겠나? (그런 멍청한 캐릭터들과 나를) 절대 동일시할 수 없었다. … <벌새>에서 은희가 영지에게 스스로가 싫어진 적 없냐고 묻는 대사가 참 좋았다. 영지는 “응, 자주 그래”하고 답하는데, 정말 멋진 대답이다.
- 새벽의 방문자들💬 오피스텔 성매매하러 온 남자들 얼굴을 찍는 여자, 공장에서 상사에게 항의하고 자발적으로 잘리는 여자, 스쿨미투로 포스트잇을 붙이는 유미, 성추행 당하고 해고되었는데 데통 들고 나른 전남친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옆집 남자를 추행하는 여자, 인디 가수에게 그루밍 성폭력을 당했던 여자, 운동권 선배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던 여자 끝 다썼나? 페미니즘 테마소설은 너무 적절한 말이었고.. 하나하나 화가 나면서도 이런 얘기가 있어야 해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얘기들이었다. ✦ 베이비 그루피 작가의 말 로리 매틱스에 따르면 그녀가 데이비드 보위와 첫 관계를 맺은 것은 열네 살 때였고, ... 페이지와 함께할 때도 법적 미성년자였다. 이제 쉰 아홉살이 된 그녀는 자신을 그루피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미투 이후로 그녀는 상황을 다르게 보고 있을까? "그 후로 아마도 좀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몇몇 아티클을 읽고 생각했죠. '썅. 어쩌면.'" 이 이야기를 쓰는 동안 자주 친구들과 상의했다. 나는 초와 '나'를 재단했고, 멈춰 서게 하고 싶었고, 때마다 쓰기를 중단해야 했다. 문서를 저장해 친구에게 보내고 옥상에 올라가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곧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 H는 집단 그루밍이 소녀들을 어떻게 불가해한 상태로 몰고 가는지 설명했다. 또 다른 H는 자기의 첫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당시의 '나'가 그걸 사랑이라고 믿을 이유는 백 가지도 된다고 생각해.) 친구 S는 급작스러운 우울을 호소하며 술을 마시러 나오라고 졸랐다. 전화기를 붙들고 옥상을 맴도는 동안 나는 초와 '나'가 언제든 다시 만나 후일담을 나누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내가 친구들의 목소리로 이제 막 한 시절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처럼, 그들에게도. ✦ 예의 바른 악당 언젠가 그를 만난다면 보라는 묻고 싶었다. 지나와 무슨 관계였느냐고, 너희들이 진짜 나를 기만한 게 맞느냐고. 그러나 지나를 떠나는 지금 보라는 다른 것이 궁금하다. 기억 속에서 언제나와 같이 청년위원회 사무실에서 난동을 피우는 그를 붙잡아 세우고 보라는 가만히 묻는다. 선배는 왜, 사람들을 화나게 해요? ✦ 유미의 기분 근데 거기 뭐라고 적혀 있었는 줄 알아? 자기 놀리고 괴롭힌 새끼들한테는 사과 같은 거 받고 싶지 않은데, 나한테는 사과를 받고 싶대. 나는 자길 놀리지도 않고 괴롭히지도 않고 오히려 잘 대해줬는데 그래서 사괄 받고 싶다는 거야. 걔들이 자길 놀리고 비웃을 때 나도 같이 웃었다고. 나는 사과를 할 자격이 있다는 거야. 다른 새끼들은 사과할 자격도 없는데 나는 있대. ... 철민과 유미라는 이름을 두 사람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으나 두 사람 누구도 철민과 유미라는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형석은 사과할 자격을 잃어버리지 않는 인간이야말로 자신을 만만히 여기지 않는 이라고 생각했고, 승우는 사과하지 못했다는 것을 평생 기억하는 인간이야말로 누군가를 만만하게 여기지 않는 이라고 생각했다.
- 노터리어스 RBG💬 역시 시대의 아이콘이 될 만한 사람 다큐도 보고 극작 영화도 봤는데 책 자체도 재미있었다, 만수무강 하세요
- 생각을 빼앗긴 세계터클은 AI가 엔지니어링의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결론지었다. 생각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는 이론을 가진 AI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라는 면에서 정신분석학이나 마르크시즘에 비견된다는 것이다. “개별 이데올로기는 핵심 개념이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재구성한다. 프로이트주의자들에게는 이 개념이 ‘무의식’이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생산수단과의 관계’이다. AI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프로그래밍이라는 아이디어는 초월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그들은 AI를 지금껏 찾지 못했던 열쇠, 즉 지능이라는 미스테리의 실마리가 되는 열쇠로 보았다.” ✦ 알고리듬이 얼마나 쉬지 않고 패턴을 찾는지를 설명할 때 컴퓨터 과학자들이 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데이터를 고문해서 알고 있는 걸 털어놓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에는 확인되지 않은 암시가 숨어 있다. 실제 고문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데이터 역시 취조하는 사람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알고리듬은 때로 만든 사람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하버드 대학의 교수인 라타냐 스위니는 연구를 통해 구글의 광고가 미국 흑인들 사이에 흔한 이름을 가진 사용자에게 전과 기록을 말소해주는 서비스 광고를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구글은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구글의 알고리듬은 그들이 철저하게 지키는 비밀이다. 하지만 우리는 구글이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반영하도록 검색엔진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구글은 웹사이트의 인기도가 유용성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구글은 검색 결과에서 포르노 사이트는 배제하지만 반유대주의 음모론자들의 사이트는 배제하지 않으며, 오래되고 좋은 콘텐츠보다는 최신 기사가 사용자들에게 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선택은 타당한 선택이자 사업적으로 현명한 결정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디까지나 선택이지 과학이 아니다. 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컴퓨터과학도 선호하는 모델이 존재하고, 세상에 대한 암묵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다. 프로그래머들이 알고리듬적인 사고를 배울 때는 효율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배운다. 그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단계가 지나치게 많은 알고리듬은 컴퓨터를 느리게 만들고 서버를 무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율성 역시 하나의 가치다. 속도를 높인다는 것은 필요에 따라 절차를 생략하고 일반화를 한다는 뜻이다. 알고리듬은 논리적 사고의 아름다운 표현이며, 편리함과 놀라움의 원천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19세기 책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내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초등학교 친구와 연락이 닿게 해주고, 원하는 상품이 매장에서 집까지 광속으로 배달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오래지 않아 알고리듬은 자율주행 차량을 안내할 것이고, 몸 안에서 자라는 암세포를 정확하게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 알고리듬은 끊임없이 우리를 측정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린다. 문제는 우리가 사고를 기계에 아웃소싱하면, 사실은 그 기계를 운영하는 기업에게 아웃소싱하는 거라는 점이다. ✦ 자기들이 주장하는 가치를 내면화하지(아니, 어쩌면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은 이런 테크 기업들 사이에 만연해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충분히 근거 있는 공포감, 즉 권력이 하나의 기관에 쏠리면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불안감 위에 세워졌다. 테크 기업들은 그런 공포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우리 삶에 더 깊숙이 개입할수록 더 좋다고 생각하며, 거기에는 아무런 제한도 없다. 물론 그 기업들이 자신의 힘을 걱정할 리는 없다. 그런 걱정은 우리의 몫이므로, 우리가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민주주의에 관심이 없는 기업들이 우리의 민주주의에서 지나치게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이다. ✦ 문제는 미디어가 단순히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에 의존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실리콘밸리의 가치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테크 기업들과 똑같이, 언론은 맹목적으로 데이터를 숭배하게 되었다. 그
- 배틀그라운드너는 넘어지는 방식으로 세계에 포함되었습니다 ✦ 도망가는 자는 사방을 닫고 자기 자신을 즐긴다. 즐기다 들키는 것까지 포함해서 즐긴다. 사망 후 데스캠으로 본다. 날 죽인 사람의 시점으로 죽기 직전의 나를 보는 건 유익하다. 나는 무너진 건물 창턱에 앉아있었구나. 그것도 도망이라고. 왜 죽였는지는 묻지 말고 어떻게 죽였는지만 배우면 된다. 저렇게 먼데 죽였다고? 배율의 문제. 너무 멀잖아. 부조리해. 핵쟁이의 짓인가. 나는 도망치고 있구나. 문을 놔두고 창문을 타고 드나들면 열심히 사는 기분이 들었거든. 원에 대한 악감정은 없지만 다른 데 봤다. 연약함을 처리해야 할 때. 멀리 있는 사람은 아름답고 밋밋해. 밤은 기장이 길고 나는 인간에게 익숙하지 않은 물건이므로 잠시 일그러진다. 먼 거리에 중독되기 시작한다. 눈이 마주칠 때 나보다 오래 머무는 건 너의 나쁜 성격에 속한다. 아무것에도 중독되지 않는 사람은 지루해. 나를 쐈다. 죽는 순간의 나를 본다. 상처와 취미의 문제. 죽는 순간. 나는 폭소하는 빵이구나. ✦ 지금 이 장면이 아름답다면 아름다움은 실수에 가깝습니다
- 아무튼, 예능인간이 뜨겁거나 미지근한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진짜 소리를 질렀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 배운 생활 지식이다. 나는 차가운 물, 그것도 얼음을 가득 넣은 물을 어떤 음료수보다도 좋아했는데, 가뜩이나 내가 하는 모든 걸 세상이 저지한다고 생각할 무렵이라 저 얘기를 듣자마자 진절머리를 쳤다. 하다하다 물 처먹는 거로도 나를 반대하려고 하는구나! 분했다. 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전부 나한테 해롭지? 왜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면 인내하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행동하고, 반성해야 하지? 어른이 되면 내가 직관적으로, 본능적으로 선택한 것들이 다 옳은 것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정말 신기한 지혜와 현명함이 나에게 저절로 주어질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판단하고, 적응하고, 때로는 참아내는 능력을 기르지 않았다. 살다 보면 나에 대한 나의 믿음도 그냥 자연스럽게 깊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 아무것도 훈련되지 않고 할 계획도 없는 자신을 향해서 계속 믿는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이 말 하나로 나는 내 모든 생각과 행동을 승인하고 스스로를 자주 속였다. ... '위대한 하루' 같은 것은 어쨌든 내 상상 속 목표니까 한번쯤 실행해볼 만한 일이겠지만 내 일상의 풍경이 될 순 없을 것이다. 기적의 졸부가 되어 좋은 집을 산다 한들 기상 시간부터 글러먹었다. 전엔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지독하게 싫었다. 어떻게든 저 모형에 다가가고 싶었고 그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남들에게 보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숨겼고, 자책했고, 울었고, 화냈고, 자포자기했고, 결국 모든 것을 비아냥대며 자조에 빠졌다. 저게 다 각각의 독립된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처럼 전부 이어져 있단 사실을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는 '껍데기만 위대한 하루'를 내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욕망하고 거기에 맞게 노력하는 방법을 배웠어야 했는데 잘 안 됐다. 이제 크게 바라는 건 없다. 진짜 성취감을 느껴보고 싶다. 거창한 말들에 속지 않고 매일 무언가가 쌓이고 걸러지는 '그저 그런 하루'가 필요하다. ✦ 💬 (예능을 좋아하지 않아서 한 권을 다 읽고도 예능과 별 상관없는 챕터가 제일 좋았다. 그 부분만 남겨둔다.)
-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성폭력 신고를 누가 하는지 아세요? 손님에게 돈을 받지 못한 매춘부들이 하는 겁니다." 경사는 대답했다. 브라운밀러는 경사의 태도가 법 집행기관에 뿌리내린 심각한 문제점을 시사한다고 보았다. "강간이란 범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찰이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는 하나뿐이다." 그녀는 썼다. 유사한 사건들이 마리가 강간당한 이후 몇 년 동안 언론과 학술 논문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 볼티모어 카운티 경찰서는 전체 강간 신고의 34퍼센트를 허위 또는 사실무근으로 결론 냈다. 이 비율 자체도 충분히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더 불편한 것은 그에 도달한 과정이다. 경찰은 성범죄 전문 형사의 성폭력 피해자 면담이라는 기초적인 단계조차 밟지 않고 수사를 포기해 버린다. ✦ *내가 한 것이라곤 살아남은 것뿐인데 나는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후에 진실로 밝혀질 성폭력을 당하고도 가짜 주장을 한다는 비난을 받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 통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앰버는 진술서에서 강간 이후 자신이 변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현관에 세 개의 자물쇠를 달아놓았고 집에 오자마자 그것들을 채운다. 여름밤이면 바람을 쐬기 위해 창문을 열고 자곤 했으나 이제 언제나 창문을 꽁꽁 잠근다. 연말연시면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좋아했던 색깔, 방을 장식했던 그 색은 이제 강간을 상기시키는 색깔이 되었다. ... 진술 막바지에 도리스는 오리어리를 돌아보면서 어떻게 자신을 찾아냈는지 직접 물어보았다. "왜 오로라에 있었나요? 우리 동네에 내가 걱정해야 할 당신 친구나 친척이 살고 있나요? 내가 계속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어떻게 나를 이토록 나약하게 만들어버렸습니까?" 그녀는 당신을 강간한 남성에게 물었다.
- 스켑틱 17: 과학은 선악을 다룰 수 있는가
-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 나는 이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잘 모르는데 진짜 옛날사람이고 일본 아재라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거슬려서 못 읽겠는..
-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다음날 아침 스탠리는 어제 자신이 한 행동 때문에 무섭게 당황했고 물고기들에게 여러번 사과했다. 그러나 물고기들은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스탠리는 바로 물고기들의 물고기다움을 조롱했던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용서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 "이봐, 우린 언제나 음악이 있어야지! 네가 가지고 있는 이것은 매우 이상한 시스템이야. 거의 인간과 같거나, 거의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야. 넌 이것을 주시해야만 해. 만약 조금이라도 묘한 일이 생기면 전화해. 알았지?" ✦ 오늘 나는 정말로 이상한 것을 우편으로 받았다. 그것은 내가 사막에서 낙타를 타는 사진이었다. 그러나 나는 낙타를 탄 적이 없고 사막에 가본 적도 없다. 나는 젤라바를 입고 케피야를 두르고 장총을 흔드고 있었다. 나는 돋보기로 그 사진을 살펴보았다. 그건 확실히 나였다. 나는 그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사막에서 낙타를 타는 것은 꿈꿔본 적도 없다. 내 눈 속의 광포함으로 내가 어떤 성스러운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 사진을 감춰야 한다. 그들은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면 안된다. 나도 알면 안된다. ✦ "선생, 당신이 오그라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내가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우리 은행 안에서는 그런 종류의 행위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여길 떠나달라고 요청해야겠네요." 내 속에서 공기가 소리를 내며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거의 사라져버릴 지경이었다. ✦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거기 앉아 한시간 내내 포스트모던한 버팔로의 삶을 곰곰 생각해보았고, 버팔로의 소유주들을 해체했다가, 다시는 그들을 제자리에 되돌려놓지 않았다. ✦ 새 건물들이 도시 여기저기에서 올라가고 있었다. 커다란 빌딩들은 무엇이 어찌 될지 전혀 모르겠고, 그것이 나를 겁먹게 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아무도 그것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단 한 마디도. 마치 그들이 그 빌딩들을 보지도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신문에도 그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하루는 내가 9번 도로를 운전하고 가는데 거기 세개의 빌딩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틀 뒤에는 여섯개가 있었다. 며칠 뒤에는 아홉개가 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포자처럼 퍼지고 있었지만 그 크기는 거대했다. 모두 개성이 없었고, 디자인도 없었다. 그리고 거의 완성되어갈 때쯤에는 은밀함, 보안, 익명성이 그들의 주된 목적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들 회사의 이름을 알리는 어떤 간판도 없었다. 어떤 구인 광고도 없었다. 차 한대도 드나들지 않았다. 그것은 찍소리 하나 없이 도래한 신세계인 것 같았고, 그리고 마치 누군가는 우리가 그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티타늄 펜치를 가지고 그 어두운 복도를 조용히 미끄러져 통과하고 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젖소들이 반추하던 곳>
-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직접적으로 미투 고발한 시가 있다. 그 용기에 드는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제하고 생각해보려 했다가 1) 일단 왜 제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2) 직설적으로 쓴 시는 못 쓴 시라는 느낌은 어떤 이유에서 강제되는지 궁금해졌다.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챕터의 제목은 <지리멸렬한 고통>. 동명의 시도 있다. ✦ 바위로 계란 깨기 나는 내 명예가 그의 명예보다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무슨 상을 받지 않았지만, 무슨무슨 상 후보로도 오르지 않은 계란으로 바위를 친 게 아니라, 바위로 계란을 깨뜨린 거지 우상을 숭배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썩은 계란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피라미드를 흔든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었지
- 펭귄의 여름로빈스가 도중에 연구를 그만뒀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위즈덤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고, 레이산알바트로스가 그렇게 오래 사는 동물이라는 사실도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는 알 수 없는 것. 어떤 연구는 이렇게 긴 호흡이 필요하다.
-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재밌었고 왜 영상화 안 된 거지.. 아 근데 중간중간 나오는 소아성애 개새끼 입장이 너무 꼴보기가 싫어서 그리고 워낙 드라마 작가다 보니 대사를 찰지게 재밌게 쓰는 건 있는데 좀 힘이 많이 들어간 느낌들이다 그래도 재밌었음!
- 스페이스 크로니클진정한 혁신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묻습니다. — “스핀오프 spin-off를 좋아한다면 그것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그냥 처음부터 원천 기술에 집중 투자하면 되지 않는가?” 답 — 아닙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열물리학자이고 열에 관한 한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가정해봅시다. 나는 당신을 찾아가 “성능이 더 좋은 오븐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신은 대류를 이용한 오븐을 만들 수도 있고, 외부 단열성이 좋은 오븐을 만들 수도 있으며, 내용물을 넣고 꺼내기가 더욱 편리해진 오븐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투자해도, 당신은 마이크로파를 이용한 오븐을 만들지 않을 겁니다. 사실 그것은 엉뚱한 곳에서 태어났기 대문이죠. 마이크로파 오븐은 과거 레이더 통신을 개발하면서 부수적으로 탄생한 스핀오프였습니다. 즉, 이것을 발명한 주인공은 열물리학자가 아니라 전쟁이었습니다. 분야 간 교접은 항상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 나는 '우주 기술 명예의 전당'의 일원이 된 것을 그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음 세대의 관심을 끌고 싶으면 규모가 크면서 누구나 꿈꿀 만한 일을 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 자체가 나라는 존재를 정의하기 때문이죠. ✦ 우주 기술 명예의 전당이 남긴 업적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우주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지구 너머의 세상을 꿈구는 관점이며, 오늘과 다른 내일을 상상하는 관점입니다.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특권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습니다. 꿈이 없는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수십 년 전에 사람들이 꾸었던 꿈을 되돌아보며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힘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똑똑하며, 야망에 찬 인물도 많습니다. 이런 우리가 다음 세대에 꿈을 물려주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능력이 너무 넘쳐서 탈이지,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여러분은 '꿈을 꿀 수 있는 특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 역자의 말에 이렇게 미국인만을 위한 책을 번역해본 건 처음이라고 해서 웃겼다..
- 항구의 사랑선배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난 좌절감에 휩싸여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난 이런 사람이 아니에요. 사실은 상당히 재치있고 매력적인 아이예요. 정말이에요. 진짜 내 모습을 보면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안 되겠어요. 시간이 필요해요. 제발 조금만 더 시간을 줘요. 지금 모습만 보고 나에 대해 판단을 내리면 안 돼요…….” ✦ 왜 누군가를 사랑하면 갑자기 주변 모든 사람들이 위협적일 만큼 매력적인 존재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나는 울고 싶어진다.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모두 나의 적이다.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들의 매력을 알아볼 것만 같아서 나는 애가 탄다. 그들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인다. ✦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집 밖으로 나가는 인간이 훌륭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인간과 그런 인간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동경했었다. 그런데 문학의 세계에서는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밖으로 나갔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것, 심지어 그때 죽어서 애도의 대상이 되지도 못하고 평생 폐를 끼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이며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 버리면 너무 체념적이지 않을까. ✦
-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선💬 시 수업시간에 다뤘던 책이다. 오코너를 검색하면 구글에 먼저 뜨는 글중에 "오코너의 소설에서 세계는 근본적으로 악의로 구성되어있다."로 시작하는 게 있다. 선생님은 오코너가 진짜 인간을 싫어하는 것 같아서 가끔 ___하다고 하였다(놀랍게도 빈칸의 말이 기억이 안 남). 오코너는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하는 속물들을 싫어하는 인물을 만들고 그 사람도 또 싫어한다. 사실.. 수업시간에 고른 단편들 위주로 읽었고 다 읽진 못했다, 너무 두껍다. 거의 두달 붙들고 있으면서 대출 연장하다가 미련과 함께 보내주었음.
- 대도시의 사랑법내가 원하는 작품을 쓰는 데 실패할 때마다, 세상에는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마다 규호는 내게 일본식 카레며 경양식 덮밥 같은 것을 사준다. — 왜 이렇게 잘 못 먹어. — 있잖아, 규호야. — 응. — 나…… 카레 싫어해. 내 소설 속에서 규호는 여러번 죽었다. 농약을 마시고, 목을 매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손목을 긋고…… 규호는 헤테로 남자가 됐다 게이도 됐고, 여자가 되기도 하고, 아이도, 군인도 되고…… 아무튼 인간이 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다 되었다가 결국 죽는다. 죽은 상태로 내 사랑의 대상이 되고, 추억의 대상이 되고, 꿈의 대상이 되며 결국 대상으로 남는다. 내 기억 속의 규호는 언제나 완결된 상태로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 ✦ 때때로 그는 내게 있어서 사랑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게 규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규호의 실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랑의 존재와 실체에 대해 증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껏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몇번이고 나에게 있어서 규호가, 우리의 관계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둘만의 특별한 어떤 것이었다고, 그러니까 순도 백 퍼센트의 진짜라고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온갖 종류의 다른 방식으로 규호를 창조하고 덧씌우며 그와 나의 관계를, 우리의 시간들을 온전히 보여주고자 했지만, 애쓰면 애쓸수록 규호라는 존재와 그때의 내 감정과는 점점 더 멀어져 버리고 만다. 내 소설 속 가상의 규호는 몇번이고 죽고 다치며 온전한 사랑의 방식으로 남아 있지만 현실의 규호는 숨을 쉬며 자꾸만 자신의 삶을 걸어나간다. 그 간극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모든 것을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지난 시간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써왔지만 결국 나의 몸과 나의 마음과 내 일상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더 여실히 깨달을 따름이었다. 공허하고 의미 없는 낱말들이 다 흩어져 오직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만이 남는다.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미간에 짙은 주름을 짓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의 호흡만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세상. — 늦은 우기의 바캉스
- 버드 스트라이크비오가 다음에 돌아온다면 그건 우리한테로가 아니라 너한테로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어떤 새도 영원히 허공에서만 살 수 없고 언젠가 땅에 내려앉아서 두 발을 디뎌야 한다면, 네가 그의 유일한 영토이니까. ... 비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네가 주었으니까. 비오는 네 거니까 네 마음대로 결론을 내려도 괜찮아. 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실은 그날 밤 나무 기둥 아래에서 서로의 목을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사람을 봤을 거라든지 그런 생각은 할 필요 없어. 비오가 너에게 신을 벗어 건네주고 네가 그것을 신은 그 새벽의 사막에서부터 비오는 이미 네 것이었어.
- 모두 거짓말을 한다카를 포퍼는 프로이트가 가졌던 세상에 대한 괴팍한 시각이 과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포퍼의 비판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그의 비판은 단순히 프로이트를 향한 공격에만 머물지 않았다. 포퍼는 어떤 사회과학자도 그리 과학적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물리학자, 생물학자, 화학자가 진정한 과학자라는 데 동의한다. 그들은 엄정한 시험을 거쳐서 물리적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낸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전문용어를 늘어놓으며 종신 교수직을 얻는 안이한 과학자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것이 진실이었다면, 빅데이터 혁명은 그 지점에 변화를 가져왔다. ... 폭력적인 영화가 개봉하면 범죄가 늘어날까 줄어들까? 많은 사람들이 광고에 노출되면 해당 제품의 이용이 늘어날까? 한 남성이 20세 때 우승했던 야구팀을 마흔이 되어도 응원하게 될까? 이는 모두 참인지 거짓인지 분명한 질문이다. 우리는 솔직한 데이터 더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과학의 산물이지 사이비 과학이 아니다. ... 혁명은 연구에 이은 연구로, 발견에 이은 발견으로, 단편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 정신과 사회라는 복잡한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서서히 넓혀 갈 것이다. ... 학자들이 단일한 실험을 수행할 소수의 대학생들을 찾는 데 수개월을 투자하는 시대는 곧 끝날 것이다. 대신 학자들은 디지털 데이터를 이용해서 아이디어 수백, 수천 개를 단 몇 초만에 시험할 것이다. 우리는 훨씬 적은 시간에 훨씬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 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그녀가 옳았다. 어느 쪽이든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운명은 이미 오래 전에 정해졌다. 나는 언제나 그녀 곁에 있을 것이고, 그녀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 💬 여기서 동생은 내가 쉽게 사랑하는 종류의 캐릭터다. 그래서 나는 언니에게 완벽하게 이입했다. 동생은 아름답고 이기적이고 자신의 범죄를 언니에게 처리하도록 만든다. 심지어 언니가 관심을 두고 있던 남자도 그 중 하나가 되어가는데, 여기까지 쓰면 언니가 동생을 질투하고 증오할 것이라는 게 뻔해보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책장을 처음 펼칠 때부터 알았다. 언니가 동생을 사랑할 것이고 마지막 순간에 동생을 택한다는 것, 그게 둘이 같은 독재자-아버지- 밑에 있었던 어렸을 때부터 정해진 운명적 선택이라는 것을.
- 햄버거에 대한 명상💬 너무 빻은 시가 많았다...시 수업에서 선생님이 낭독 시키려다가 읽다말고 어 씨발 이 문장 봐 이러면서 후회하는 그런 시들 특히 낙태 관련된 시, 미제 문화 비판하는(진짜 과거의..) 시 가 기억에 남는다 이 책 읽고서 정치 얘기를 해버리면 문학이 자연스럽게 시간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낡아버리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 오늘 너무 슬픔온전하고도 깡마른 사람이 되고 싶어 나는 먹보면서 동시에 형편없는 페미니스트다. 아마도 그럴 거다.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여자일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먹고 살았을 것 같다. 피자를 엄청 많이 먹었을 거다. 마운틴듀를 넘치도록 마셨을 테고, 다이어트도 안 했겠지. 그렇다면 나는 내가 여자기 때문에 피자를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건데, 다른 여자들을 보는 내 시선은 또 어떻겠는가? 내가 내 몸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여자들의 몸을 사랑할 수 있나? 좋은 페미니스트로 행세하기 위해 "나는 내 몸을 사랑해"라고 말하고 다닐 수야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미워하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척 꾸미는 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먹보면서 좋은 페미니스트기도 하다. 아마도 그럴 거다. 그래도 솔직하기는 하니까. 지금 나는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 몸과 다른 여자들 몸을 보는 방식을 규정짓는 비틀린 도식들을 아직 부수지 못했다고. 그러니 당신도 당신만의 엿 같은 도식들을 얼마나, 어떻게 부수고 있는 중인지 내게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는 뜻이다. 당신이 뭔가를 꼭 부숴야만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나와 함께하자는 뜻이다. 여기서 이렇게, 부수지 못한 채로 함께하면서, 바로 이것이 우리의 처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우리가 존재하는 바로 이곳에서 서로를 사랑하자. 심지어 우리가 서로를 비교하는 순간에도. 그래, 친구야, 힘든 일이라는 거 나도 알아. ✦ 내가 인간이 아닐 수 있게 도와줘 거긴 클리토리스가 아니야: 사랑 이야기.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그저 섹스라는 걸 알고 있었던 바로 그 섹스가 그리워: 사랑 이야기. 너는 나를 내 인생에서 구해주지 않겠지: 사랑 이야기. ✦ 친구들을 가까이, 불안은 더욱 가까이 음, 지금 당장만 해도 나는 이 글이 당신에게 재미없을까 봐 두렵다. 지금 나는 평소에 쓰던 가면을 벗고 있다. '내 상태가 좆되긴 했지만 그래도 통제할 수는 있다'는 표정을 짓는 가면. 그 가면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해 왔다."걱정 마세요. 그래도 나는 충분히 나를 추스를 수 있는걸요. 이렇게 불안을 넘어서서 여러분을 웃겨 줄 정도는 되죠. 나는 괜찮아요." 최근에 한 여성 독자가 말하기를 내 글이 '징징거리는 계집애' 같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녀는 내 유머러스한 가면이 좋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공황 발작에 하도 시달려서 징징거리는 계집애가 되지 않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징징거리는 여자애가 되어 볼지를 나 스스로 정하고 싶다! 정 내 글이 당신의 흥미를 떨어트릴 거라면 흥미를 떨어트리는 방식은 내가 통제하고 싶은 거다. 당신을 지루하게 하는 인격을 창조해 선보이고 싶다. 진짜 나 자신이, 나의 연약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내 통제 밖으로 새어 나가는 바람에 당신이 도망치는 상황은 원치 않는다. 나는 절박해지고 싶지 않다. 만약 내가 정말로 안 괜찮다는 걸 당신이 알게 되면 어떡할 건가? 내가 지금도 엄청나게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며 진짜로 공포에 질려 있다는 걸 당신이 안다면? 내게서 도망칠 건가? 나는 그 결과를 알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내 연약함을 유머로 또는 고리타분한 지혜로 감추는 것이다. 언젠가 무척 존경하는 여성 음악가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녀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고 알려진 사람이다. 오랜 세월 빼어난 재능을 발휘했지만 기행도 보여주었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발작을 일으킨 적도 몇 번 있다. 그녀는 광기와 재능을 둘 다 가진 사람이다. 인터뷰어는 그녀에게 평소 일상에 대해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준비를 하시나요? 달걀 프라이를 만든다든가요." 그러자 그녀는 그를 차갑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나는 달걀을 안 먹어요." 그 순간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물어볼 가치가 있는 단 하나의 질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재능이란 게 대단히 민감한 정신과 근본적으로 연관이 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런 정신 때문에 당신이 고통받아야 한다면, 그럼에도 재능 있는 사람이 될 가치가 있는 걸까요?" 그녀가 대답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
-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 보면서 너무...답답했다 이 지경인데 둘 다 왜 만나는가...그리고 아무리 풍자의 형식이어도 남자의 목소리 넘 안 듣고 싶은
- 그로칼랭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텍사스의 학자들은 단호하게 자신들의 무지를 드러냈다. 그런데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그로칼랭을 볼 때면 저런 것이 존재 가능하다는 생각만 해도 무지와 이해 부족이 덮쳐와 그로칼랭이 가능성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다른 것, 다른 누구에 대한 가능성을 예감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이해할 수 없는 불안이다. 희망을 품지 않으면 확실히 죽도록 무서울 일도 없다. 희망과 공포는 늘 붙어 다닌다. ✦ 그래서 난 그 사람 뒷통수에 대고 말해줬어요. 확실히 나는 반자연적 현상이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은 다 그렇고, 나는 그게 자랑스럽다, 사람이 숨 쉬는 것은 열망하기 위해서이고 열망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인의 행동처럼 반자연적 행위다, 미안하지만 자연이라면 진절머리가 나고, 나는 빌어먹을 사랑과 애정과 우정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 나는 통계 일을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고독에는 통계만큼 나쁜 것이 없다. 수십억 단위의 수를 계산하는 데 하루를 보낸 당신은 평가절하되어 0에 가까운 상태로 집에 돌아간다. 그때 찰리 채플린의 슬픈 희극처럼 가난하고 불안에 떠는 숫자 1은 애처로워진다. 나는 1이라는 숫자를 볼 때마다 도망치게 해주고 싶다. 1은 부모가 없어 고아원에서 혼자 자랐고, 뒤에서는 줄곧 0이 쫓아와 따라잡으려 하고 앞에서는 큰 수들의 마피아가 모두 그를 노리고 있다. 1은 난자가 없어 수정이 되지 않는 출생 전 증명서와 같다. 그것은 2가 되는 것을 꿈꾸며 쉬지 않고 달리면서도 늘 제자리이기 때문에 희극이 된다. 늘 미생물 상태인 것이다. ... 내가 대단한 사람이었으면 항상 채플린에게 그 작은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채 커다란 0에 쫓기는 1을 연기하게 했을 것이다. 커다란 0은 동그란 눈을 부릅뜨고 겁을 주면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1이 2가 되는 것을 방해한다. 0은 1이 일억이 되기를 바라며 그보다 적은 수는 바라지 않는다. 인구 통계학적인 수가 되어야 수지가 맞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실 사업이 되어 아무도 정자은행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채플린은 항상 도망칠 수밖에 없고 항상 시작도 끝도 없이 다시 혼자 남는 것이다. 나는 채플린이 무엇을 먹는지 궁금하다. 삶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진지한 문제가 된다. ✦ 난 내 자신을 환경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우리에게 맞춰주기를 바란다. 나는 가끔 아주 외로운 기분이 들 때 복수형으로 '우리'라고 한다. ... 그래도 역시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캘리포니아에서 트럭 앞유리창에 부딪혀 으깨지는 엄청나게 많은 사랑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랑은 본성 속에 존재한다. 나는 그로칼랭을 인간의 목소리로 말하게 해 환상에 빠지게 하려는 생각도 포기했다. 이제 속임수는 됐다. 나는 가끔 모든 사람이 입술을 움직이지만 실제 흘러나오는 대사와 잘 맞지 않는 더빙된 영화 속에 사는 기분이 든다. 촬영 후에 녹음하는 것인데 가끔 녹음이 아주 잘되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
- 아무튼, 요가💬 이걸 읽으면 요가에 대한 어떤 동기부여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너무 다른 세계(프로의..?) 이야기라 그런 건 전혀 들지 않았음.
- 사하맨션> 사하맨션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라에게 세상은 딱 그 크기, 그 만큼의 빛과 질감, 그 정도의 난이도였다. 그런데 요즘 사라에게 너머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왔던 많은 일들에 화가 나고 억울했다. ✦ *그 사람들은 그냥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어.* 💬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그냥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조금씩 모일 때. 우리는 한 걸음 갈 때마다 두 걸음 뒤로 밀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는 뭐, 괴로운 희망에 대한 얘기.
- 바나나의 웃음아 바나나 하고 웃는 바나나
- 에듀케이션💬 내가 이걸 전에 읽었던가 아니면 나의 자랑 이랑 같은 것만 알고 있었던가? 아무튼 시 수업에서 읽었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큼은 좋지 않았구
-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우럭 한 점 우주의 맛 그녀에게 나의 글쓰기가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생각하면 언제나 낭떠러지 아래를 바라보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는 벌써 서른한 살이고, 성인이 된 지도 십 년이 넘었고, 그녀가 내 삶을 지연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누구보다도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 정도로 성장했다. 그녀는 그저 그녀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 나를 옥죌 의도가 없고, 나 역시 그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다. 다만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며 암이나 곰팡이처럼, 지구의 자전이나 태양의 흑점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주의 현상이다.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그녀가 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인 것만 같았다. 살가죽만 남은 채 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이 혐오스럽지만 그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 — 엄마 있잖아,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입을 뗐는데, 다음 말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할말이 너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 있잖아,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알지만, 나는 엄마를, 당신을, —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 뭘? — 정말 미안한데, 아마도 영영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 얘가 갑자기 뚱딴지같이 뭔 소리래.
-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를 아는 것만 같고,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 어떤 사람이야?” 어떤 애인에게 시도 때도 없이 물었다. 인생방치병에 걸려 함께 골골대던 애인이다. 우리는 인생을 방조하도록 태어난 인간들 같았다. 세상의 모든 계획과 약속 그리고 의무가 우리를 병들게 했다. 우리는 도망가서 쥐를 키우며 살았다. 어느 날 나는 더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건강하고 싶었다. 나도 인생에 계획이라는 것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증명하고 싶어서 애인 몰래 문구점에 갔다. 예쁜 계획노트를 한 권 사서, 첫 장에 앞으로 할 일들의 목록을 적었다. 기뻤다. 매일 하루의 계획을 세웠다. 침대에 누운 애인에게 “뭐 할 거야, 오늘?” 하고 물었는데, 가혹한 질문이었나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대신, “나는 어떤 사람이야?” 하고 물었다. 애인은 중얼거렸다. “너? 넌, 매니큐어가 마를 때까지 잘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이지.” 애인은 천재다. 나는 더 말해달라고 졸랐다. “너는 양말을 벗고 자지 못해. 양말 한 짝을 벗기면 불안해해. 그렇잖아도 너는 불안이 많아. 요즘에는 더욱. 나를 볼 때조차 불안해하는 것 같아. 너는 비밀이 두 개 있어. 그런데 너는 그 사실을 모르지. 너는 신장이 안 좋아. 태어날 때부터 폐도 안 좋았어. 너는 네가 한 행동은 잘 까먹지만 당한 건 잘 기억해. 거울 앞에서는 이상하고 바보 같은 표정을 지어. 카메라를 갖다 대면 갑자기 못생겨져. 너는 허벅지에 작은 점이 있어. 그런데 너는 그게 점이 아니라고 우기지. 너는 예술적이고 다채로워. 그런데 둔해. 너는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싶어 해. 하지만 그 순간에 끝내야 하는 말들이 있어. 우리가 좋은 말을 나누었다는 기억만 남도록.”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말했다.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애인이 답했다.
- 도둑의 도시 가이드사람들은 보통 도둑이 훔쳐간 물건에만 관심을 가지지만 정말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어떻게 움직였냐는 점이다. 도둑들은 공간을 탐험한다. (...) 하나의 장이 끝나면 소품을 치우고 다음 장의 소품을 배치하고 무대 세트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보이지 않는 스테이지핸드처럼, 도둑은 세계 곳곳의 건물과 도시에서 사람들의 집을 조용히 지켜보며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그러나 누구에게도 고용된 적 없는 전문 이삿짐센터 직원들이다. 도둑 각자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겠으나 그 이야기의 결론은 모두 같을 것이다. “도둑이 도시를 더 잘 이용한다.” 모두들 결국엔 붙잡히고 말 테지만. ✦ 그는 “건물을 좋아했다”며 특히 고층 건물을 좋아했다고 덧붙였다. 건물이라는 것은 “삼엄한 경비를 둟고 안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얻어낼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죠. 처음에는 일종의 게임이었습니다. 그러다 도전할 만한 것이 되었고,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그 일에 중독됐습니다.” 메이슨은 오하이오에서 사우스 플로리다까지 호텔, 아파트, 고층 타워 등을 가리지 않고 털었다. 침입한 모든 건물의 구조는 치밀하게 짜인 공간적 퍼즐이었다. 각각의 범행에는 새로운 게임 레벨같이 각기 다른 보상과 장애물, 비밀스런 함정과 조심해야 할 감시인이 있었다. 메이슨은 그의 책에 “한번은 어떻게 위험하고 어려운 침입절도를 성공시킬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과학자나 발명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퍼즐을 풀어낼 것이고, 그러고 나면 실행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건물의 유혹에 자석처럼 이끌렸다. 보석은 그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에 불과해 보였다.
- 양성애: 열두 개의 퀴어 이야기그렇다면 다시 질문해보자. 양성애란 무엇인가? 양성애자 여성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이러한 질문 자체가 처음부터 틀린 전제에서 출반한 것일지 모른다. 인간이 성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젠더 정체성이라는 틀을 벗어나면 안 되며 이때 젠더 정체성이란 두 개의 항, 즉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항으로만 구성된 것이므로 성애에 대한 어떤 논의든 여성/남성이라는 이항 안에 갇혀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전제 말이다.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 이항적 틀을 벗어나 있다. (...) 가버와 스토가 지적하였듯 양성애/여성의 모호한 위치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그것이 이성애/남성중심적 규범과 맺는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성과 성차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론을 통해 안전하게 지켜지고 있는 이성애/남성중심성을 새롭고 해체적으로 의미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던져준다. ✦ 버틀러는 여기에서 그러면 성sex은 생래적으로 주어지는 것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수행성 개념과 인지 가능성에 기반한 문화적 의미화에 대한 논의를 통해 성차뿐만 아니라 성 자체도 구성된 것이라고 말한다. 성차가 문화적 구성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각 성과 성차가 절대적인 연관관계를 가질 이유가 없고 성이 두 개의 범주로 분리된다고 해서 성차가 이에 상응해 반드시 두 범주로 이해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버틀러는 성의 의미가 성차의 의미처럼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고 문화적으로 구성된 의미를 통해 성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라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성이 아니라 성차였다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이 이미 성차화된 문화적 범주라면 성에 대한 문화적 해석인 성차와 성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틀러는 성차뿐만 아니라 성 자체도 구성된 것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몸에 기반한 성은 전담론적인prediscursive 해부학적 사실로서의 자격을 가질 수가 없다. 성은 언제나 성차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과 성차를 구분해서 인식하는 것 자체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 성이 문화가 있기 이전에 이미 있었던 전담론적 성격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성의 생산을 전담론적으로 보는 것 자체가 성차의 생산에 따른 문화적 장치의 효과라고 볼 수 있다. 전담론적인 성이라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담론생산의 작동과정 자체가 이성애적 가부장체제의 권력이 재생산되는 장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 이리가레이에 따르면 남근이성중심적 문화에서 여성과 여성적 쾌락은 말해질 수 없다. 왜냐면 여성의 쾌락, 즉, 음핵의 능동성과 질의 수동성 등에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쾌락, 다양하고 복잡하고 예민하며 저마다의 차이를 가지고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어서 하나의 무엇만으로 상징해야 하는 상상력 속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쾌락을 남근이성중심적 문화 안에서 의미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과 존재에 단일하고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는 남근이성중심적 인식론으로서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여성적인 것, 규저어 자체를 거부하고 부정하며 어떠한 ‘적당한’ 이름도 가지지 않는 여성적인 것, 즉, 특정한 하나one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none으로 간주되며 형태상 가식적인 오직 하나의 성기인 페니스penis의 부정, 반대 혹은 역전reverse으로만 인식될 뿐인 ‘여성적인 것’을 의미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가레이는 여성은 남근이성중심주의가 그녀에게 부여한 성의 단일함 그 이상이고 또한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적인 것은 고정되고 완결된 코드와 틀을 가지고 들으려 할 때는 들리지 않는 말이고, 정착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고정되지 않기 위해 해체되면서 다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동시에 모든 것을 생각하며 분리와 경계짓기를 거부하고 어느 것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는 강요 앞에서 그리고 오직 남성의 반대항의 위치만을 점하라고 하는 강제 앞에서 모든 것으로 남기 위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주체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 있다는 것은 자기 쾌락의 어떤 것도 어떤 다른 것을 위해
-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일치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나온다
- 마이크로소프트웨어 vol 395. 데이터 탐험
- 비벌리 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세번, 깊은 관 같은 섹스 후 우린 삶과 충동은 강처럼 순환한다는 언약서를 어색하게 읽는다 때로 명과 암에 대응하다 청각마저 잃게 될 때 천장에 나비 모빌 대신 사라진 꿈들이 돌아간다 언 입김들이 벽에 부딪힌다, 네가 내 안을 떠나는 날 난 어두운 골목에서 자위 중인 남자와 마주쳐도 너의 피에 흘려 멀어버린 눈동자들을 내다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골방에서 알몸으로 흘러나오던 모든 라이브 거칠었지만 붉은 목덜미를 하나씩 가지고 있어 만지려 할 때마다 고독인 듯 사랑인 듯 아름다워져갔다 — 레오까디아*와의 동거 (*고야가 만년에 같이 산 여자) ✦ 기대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자고 다짐했었지 해변에서 영원히 아픔 같은 건 모르고 바위틈을 기어다닐 갯강구를 보며 징그럽게 다리가 많아 나는 그렇게 속닥였다 사진도 찍고 인 자오양 그림에 파묻히기도 했지만 하지만 네 품이라면 어떨까 난 남을까 내 모습은 그 안에서 남겨질 수 있을까 아라타…… 난 여기 있어 아라타는 물어 내가 바람둥이라도 좋아? 성 밖의 거지나 인간쓰레기라도 인 자오양 그림만 편식하고 야채는 골라내고 널 안으려고 숨을 헐떡이는, 그럴 때 나는 습기와 독버섯으로 가득한 숲 속을 생각하지 어둠에 모인 울프들이 이를 번뜩이면서 살점을 뜯어내는 소리 너도 그렇게 나를 먹고 싶지 먹고 싶어 했잖아 울프들의 피 묻은 입가를 떠올리면 금방이라도 울프들의 새끼를 내가 낳을 것만 같아 독버섯 수프를 떠먹여줘도 무럭무럭 자라겠지 허송세월을 보낸 여자처럼 눈 밑이 검어지겠지 난, 어리고 상처받는 게 지났어 아라타 너와 바닥에 눕고 싶어 딱딱해진 너와, 니가 밤바람이 되어 흩어진다고 해도 좋아, 좋아 좋아해 아라타 (니가 보고 싶은데 이제 다 틀렸어) — 아비뇽 시내에 있는 기차역(Gare d'Avignon Centre)에서 기차를 타고 어제는 비 오는 아를(Arles) 그리고 아라타에게 ✦ 혐오라는 말을 붙여줄까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머리를 감겨주고 등 때도 밀어주며 장화를 신고 함께 걷던 애인조차 떠났을 때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살았다 발 아픈 나의 애견이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운다 그리고 몸의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내게 저벅저벅 다가와 간신히 쓰러지고는, 그런 이야기를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할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는 닮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너는 아직도 어렵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우리가 한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있었냐고 되물었다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 길고 어두운 복도 우리를 찢고 나온 슬픈 광대들이 난간에서 떨어지고, 떨어져 살점으로 흩어지는 동안 그러나 너는 이상하게 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 작별 나는 그것들과 작별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향해 가요(배수아 <북쪽 거실>) ✦ 삶이 진정 혐오스러운 여행이라는 사실만이 불변하지* (루이지 피까치 <프란시스 베이컨>) ✦ 그곳에서 뭐가 보이지? 너는 항상 몸집이 크고 털이 많은 남자와 붙어다니지 오월의 까페 테라스에서 너를 처음 봤을 때 좋은 옷 좋은 구두 그런 것들이 너의 나쁜 태생 배경을 한 겹 빛으로 감싸주고 있구나 생각했어 네 커다란 눈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어떤 일이든 한번은 꼭 일어날 것 같은 — 미찌꼬의 호사가들 ✦ 시인의 말 플로베르 문장을 빌리자면 예술가는 ‘다람쥐처럼 아찔하게 높은 나무 꼭대기에 기어올라서 호두를 터는 녀석’이다. 쓰기의 운명은 어떤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 것에만 있으며 비극을 써내려가는 동안 아름다운 입맞춤들을 기억해내고 다시 원하게 될 것이다. 그에 관한 사랑도.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것을 안고 사라진 노동자들을 위해. 모든 것이 녹고 다시 태어나는 계절에도 당신들의 살고자 함을 잊지 않고 기록할 것이다.
- 팩트풀니스5장은 죽은 아이들과 관련한 데이터로 가득하다. 아이들 목숨을 살리는 것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일이기 때문이다. 죽은 아이의 수를 세고, 아이의 죽음과 비용 효과를 한 문장에서 동시에 언급하는 것이 매정하고 잔인해 보인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최대한 많은 아이의 목숨을 살릴, 비용 효과가 가장 뛰어난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덜 매정한 행위다. 내가 앞에서 통계 이면에 있는 개별 이야기를 보라고 다그쳤듯, 이번에는 개별 이야기 이면에 있는 통계를 보라고 다그쳐야겠다. 수치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으며, 수치만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다. ✦ 데이터를 보면 세계적으로 아동 생존율 증가의 절반은 엄마들의 탈문맹에서 나왔다. 지금은 아동 생존율이 더 높아졌다. 처음부터 아예 병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훈련받은 산파가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돕고, 간호사는 아기에게 면역력을 심어준다. 아기는 잘 먹고, 부모는 아기를 늘 따뜻하고 청결하게 관리한다. 그리고 아기 주변 사람들은 손을 씻고, 엄마는 약통에 붙은 지시 사항을 읽을 줄 알게 되었다. 따라서 1, 2단계에서 보건 의료 발전에 돈을 투자한다면 초등학교, 간호 교육, 예방접종에 투자해야 한다. 휘황찬란한 대형 병원은 조금 미뤄도 상관없다. ✦ 스웨덴에서 곰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는 일은 한 세기에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다. 반면 여성이 옛 애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은 30일에 한 번꼴로 일어난다. 규모로 치면 1,300배나 많이 발생한다. 그런 가정 내 살인 사건은 한 건 더 일어나봤자 제대로 집계되지도 않는 반면, 사냥 중 사망 사건은 큰 뉴스거리가 되었다. 언론 보도가 우리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하든, 죽음은 다 똑같이 비극적이고 참혹하다. 언론이 우리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하든, 사람 목숨을 구하는 데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곰보다 가정 폭력에 훨씬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수치를 비교하면 그 점을 확연히 알 수 있다. ✦ 인간의 목숨을 놓고 이런 셈을 하는 걸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셈을 하지 않는 것이 되레 부끄럽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의 수만 보면 내가 그걸 잘못 해석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하지만 수를 비교하고 나눠보면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 “글쎄요, 도표도 훌륭하고 말씀도 잘하시는데, 아무린 비전이 없네요.” 자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게 나한테는 더욱 충격이었다. “네? 비전이 부족해요? 아프리카 극빈층이 앞으로 20년 안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 거라고 말했는데요?” 나는 기분이 상해 되물었다. 은코사자나는 어떤 감정이나 동작도 섞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극빈층이 사라질 거라고 말했어요. 그게 시작이었고, 거기서 끝났죠. 아프리카 사람들이 극빈층이 사라지는 걸로 만족하면서 적당히 가난하게 사는 정도로 행복해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러곤 내 팔을 힘주어 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화를 내지도 않고, 웃음기도 없었다. 내 단점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은코사자나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교수님 손주들이 우리가 건설할 새로운 고속열차를 타고 아프리카를 여행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어떤 비전인가요? 유럽의 낡은 비전과 뭐가 다르죠? ‘우리’ 손주들도 ‘교수님’ 대륙에 가서 ‘교수님 나라의’ 고속열차를 타고 여행하며, 스웨덴 북쪽에 있다는 이국적인 얼음 호텔에 갈 겁니다. 물론 오래 걸리겠죠, 아시다시피. 현명한 결단도, 대규모 투자도 많이 필요할 거고요. 하지만 내 50년 비전으로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에서, 원치 않는 난민이 아니라 관광객으로 환영받을 겁니다.” ✦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는 심각한 재앙이다. 항공기 추락 사고에 견줄 만한 지식수준이다. 하지만 언론인을 비난하는 것은 졸았던 기장을 탓하는 것만큼이나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는 언론인이 세계를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유(답: 그들도 극적 본능을 지닌 인간이라서)와 언론 시스템의 어떤 요소가 그들로 하여금 왜곡되
-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는 말은 허구의 맥락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 현실성을 가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는 한편으로 체제 전복적인 표현이다. 전복이란 말은 삶을 성공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끼며 모든 일이 있는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만사에 그리해야 마땅한 방식이 지켜지도록 공권력의 자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판타지 소설은 “모든 일이 늘 하던 식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어떨까?” 라고 묻는 데에 그치지 않고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일이 흘러갈 경우 펼쳐질 수 있는 결과를 보여주며, 이로써 뭐든 지금처럼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믿음의 기반 자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그렇게 상상력과 원리주의가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순전히 창작된 상상의 세계는 종교라든가 여타 우주론과 여러모로 비슷한 일종의 정신적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유사성은 전통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보기에 매우 불편할 수 있다. (...) 꿈과 판타지 문학을 비교하더라도 둘은 오직 아주 심오하며 일반적으로는 접근 불가능한 수준의 정신 상태와 서로 연관이 있을 뿐이다. 꿈이 지적인 통제를 벗어난다. 서사적으로 비논리적이고 불안정하다. 꿈에 심미적 가치가 있다면 그건 우연의 결과이다. 반면 판타지 문학은 여타 언어로 된 모든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지적인 면과 심미적인 면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 판타지 소설은,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완전한 이성의 산물이다. (...) 불확실성의 자유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판타지 소설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나로서는 과학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판타지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쉽사리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과학과 판타지는 둘 다 아주 지대한 부분을 불확실성에 기반하고 있으며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기꺼이 수용하고 있다. 물론 과학자들은 만사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어떨까를 상상하지 않고 어째서 만물이 이처럼 작용하는지에 의문을 가진다. 그렇지만 그 두 가지가 서로 상반되는 작업일까? 우리가 가진 관례, 신념, 통설, 현실구조에 의문을 품는 방식만으로는 현실에 직접적인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갈릴레오가 했던 말, 그리고 다윈이 했던 말은 ‘꼭 우리가 알던 방식대로일 필요는 없다.’가 아니었던가. ✦ 여성 집단이 합심하여 거대한 중심 세력을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다. 남성적 기관들이 집합적으로 가하는 매우 끈질긴 압력이 여성들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남성의 단합이 권력 쟁탈의 과정에서 생긴 공격적이고 철저한 통제에 의해 만들어진 반면 여성의 결속력은 상호 협력의 바람과 필요에 의해 파생된다. 그리고 때로는 박해로부터의 자유를 찾는 과정에서 다져지기도 한다. 모호함은 유동성의 본질이다. 그리하여 여성의 상호의존성이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의존성, 임신 양육, 가족 부양, 남성 부양 등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을 위협한다고 여겨질 경우에는 너무나도 쉽게 상호의존성의 존재 자체를 간단히 부인해 버린다. 여성은 충성심도 없고 우정이 뭔지도 모른다는 등의 말이 그런 맥락에서 나온다. 공포에 빠져 있을 때는 부인이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여성의 주체성과 상호의존성이라는 아이디어는 남성 및 남성 지배의 혜택을 받는 여성들의 조롱 섞인 증오에 직면한다. 여성 혐오는 결코 남자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남자들의 세상’을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남자들만큼, 혹은 남자들보다 더 강하게 스스로를 불신하고 두려워한다. 여성의 주체성과 상호의존성을 예찬하며 두려움을 이용했던 1970년대의 페미니즘은 불길처럼 일어났다. 우리는 ‘자매애는 강하다’라고 외쳤고 여성들은 그 말을 믿었다.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이 화력을 더할 성냥을 찾기도 전에 겁에 질린 여성 혐오자들은 남녀 할 것 없이 가정이 무너진다며 울부짖었다. 자매애의 본질은 그 힘이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형제애의 권력과 완전히 다르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그동안 목격한 건 그 힘이 미칠
- 디디의 우산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남쪽의 가요를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두고 음악이 흐르는 전투기에 실려 북측과 남측의 경계를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그 아득한 허공을 날던 순간의 그가 말입니다.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 나는 책의 형태의 종이를 수집한다.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노트보다는 무언가 인쇄된 책이 종이로서 더 완전하다고 나는 느낀다. 그림이나 사진보다는 도면이나 문장이 인쇄된 종이가 좋다. 만지기에 더 좋다는 면에서 말이다. 면지의 두께, 감촉, 잉크의 색이나 인쇄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로 무작정 책을 구입하는 일도 많다. 2009년 10월 19일에 인쇄된,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On the Road*> 1판 1쇄본과 2009년 2월 16일에 출간된 외젠 다비의 <북호텔 *L'Hotel de Nord*> 1판 1쇄본 같은 번역본 책들. 하우게의 시집도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고 나는 그 책의 종이적 상태에 매우 만족한다. 예전에는 그 정도로 만족스러운 종이를 만나면 똑같은 책을 한권 더 구입하고는 했는데 이제 그런 일은 없다. 같은 날, 같은 인쇄소에서 같은 잉크로 인쇄된 책이라도 상태가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아니까. 미묘하게 다른 것이다 농도나 인쇄 상태 같은 것이. 예컨대 지금 막 식탁 위에 내가 펼쳐둔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 *Die Welt von Gestern*>에서 172페이지부터 한동안 이어지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 관한, 거의 예찬에 가까운 설명 부분은, 다른 책에서는 반복되지 않는다. 내가 가진 <어제의 세계>에서 이 부분은 몹시 아름답게 검고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지만, 다른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어제의 세계>에서 같은 부분의 인쇄 상태가 내 것과 같을 확률은 높지 않다. 그 누군가의 어제와 나의 어제가 다른 것만큼은 다를 것이다. 같은 제목, 같은 저자, 같은 출판사로 그 차이가 매우 근소하더라도 그 근소한 차이는 엄연한 차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차이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은 결국, 종이에 인쇄된 검은 잉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각각의 책은 냄새도 다르다. 내가 가진 페이지들은 빛바랜 단면 색종이 같은 냄새를 풍기지만 다른 것들은 다를 것이다. 각각의 책은 그것이 속한 공간의 냄새를 풍길 테니까. ✦ 아름다운 것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나는 별과 책을 생각한다. 내가 읽은 별 이야기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앙뚜안 드 생떽쥐뻬리의 고원 착륙기였다. 사하라를 가로질러 프랑스 항공 노선을 개척하던 시기에 그와 그의 우편기는 호버곶과 시스네로스 사이의 편평한 고원에 착륙한 적이 있었다. 수백만년 동안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융기된 해저 단면에서 생떽쥐뻬리는 운석의 잔해를 주웠고, 그것을 이야기로 기록해 남겼다. “사과나무 아래 펼쳐놓은 보자기에는 사과만 떨어지듯, 별 아래 펼쳐놓은 보자기에는 오로지 별의 가루만이 떨어질 뿐이다.” 생떽쥐뻬리는 그 편평한 고원을 하늘 아래 펼쳐진 식탁보, 라고 칭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것은 또다른 식탁보, 에 관한 이야기로구나. 울라브 하우게의 식탁보와는 다르면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식탁보.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를 썼고 2차 세계대전 중에 정찰기를 타고 나섰다가 실종되었다는 사실 외에 생떽쥐뻬리가 한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그가 300미터 높이의 고원에 착륙해 운석 조각들을 줍고 “그렇게 하여 나는 별의 우량계가 된 그 고원 위에서, 놀랄 만큼 축약된 형태로, 느리게 쏟아지는 불의 소나기를 목격했던 것”(<인간의 대지>)이라고 기록한 덕분에, 그가 목격했다는 불의 소나기를 나도 목격할 수
-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김하나는 자신의 지향점이나 캐치볼 위클리의 정신을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집 평수나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라 자신의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얼마나 잘 나가는지, 얼마나 힘이 있는지가 아니라 친구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지 누구는 또 얼마나 잘 얻어먹는지 얼마나 잠을 잘 자고 얼마나 노래를 잘하며 얼마나 약지 못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고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추억을 가졌는지 인생에서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런 것들입니다.> (...) “친구들은 사회적 정서적 안정망이다.” 김하나가 늘 강조하던 이야기처럼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같이 살고 있다. 다른 온도와 습도를 가진 기후대처럼, 사람은 같이 사는 사람을 둘러싼 총체적 환경이 된다. 상대의 장점을 곧잘 발견하고 그걸 북돋아주는 김하나의 칭찬 폭격기적 면모에 내가 가장 직접적으로 수혜를 받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술을 마시고 어처구니없는 추억들이 쌓인다. 요리를 잘하고 또 잘 얻어먹는다. 이런 데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는 사실을 나는 동거인에게서 배워간다. 김하나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고서 열린 새 세계다. ✦ “창밖으로 플라타너스들이 눈 아래 일렁이는 게 바다 같았어.” 그리고 차에 타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좋아.” 나는 그 순간 세상 모든 플라타너스 잎이 한꺼번에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렇게 바꾸어도 말이 될 것 같다. “사람은 멀리서 보면 멋있기 쉽고, 가까이서 보면 우습기 쉽다.” 충분한 거리를 둘 수 없기 때문에 서로 한심하고 웃기는 순간도 목격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동거인은 여전히 멋있는 사람이다. 눈속임이 불가능할 만큼 가까이에서 삶에 대한 근면함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내가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이나 생활을 대하는 태도 역시 낱낱이 동거인에게 목격될 거라는 자각은, 너무 방만하게만 살지 않도록 나를 다잡아준다. 그 증거로 오늘 글 한 편은 쓸 거라고 큰 소리를 치다가 미루고 미룬 밤에 거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편 건 동거인에게 너무 한심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긴장의 발로였다.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테이블 건너편 자리에서는 동거인이 역시나 잠옷을 입은 채 연재하는 수필을 위한 삽화를 그리느라 애쓰고 있다. 비염이 심해져서 콧물을 막기 위해, 한쪽 콧구멍에 티슈를 길게 말아 꽂은 채로 말이다. 오늘도 내 동거인은 아주 우습고 또 존경스러운, 딱 그만큼의 거리에 있다. ✦ 자취와 독신의 구분에도 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언제까지를 ‘자취’라고 부르는가? 그건 아무도 정해주지 않는다. 당신이 어느 날, 스스로의 생활을 ‘독신’으로 바꾸어 부르는 순간까지다. 그 이전의 생활은 제각각인 수건들의 시기와도 비슷하다. 어찌어찌 시작되었고, 시작되었으니 그럭저럭 이어진다. 내 생각에 자취와 독신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지금의 생활을 ‘한시적’인 것으로 여기느냐 ‘반영구적’인 것으로 여기느냐 인 듯하다. 나는 나의 생활이 자취에서 독신으로 바뀐 시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나의 아름다운 책장이 생긴 날부터다. (....) 완성되어 내 집의 한 벽을 가득 메운 책장은 대단히 멋있고 아름다웠다. 키 156cm에 체구도 자그마한 내 친구가 손으로 직접 만든 육중하고 근사한 가구. 책을 꽂는 기능을 넘어선 뭔가 엄청난 것이 내 집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월넛과 오크의 아름다운 색깔과 무늬, 두툼하고 단정한 선들, 매끄럽고 따뜻한 표면의 질감, 칸칸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균형. 이 가구는 집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을 재배열했다. 어른이 된 느낌이 들었다. 소품이나 가구를 들이드러다 책장과 결이 맞을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아주 신중해졌다. 이제 내 집의 가구와 물건들은 이후의 어떤 시점에 이르기 전가지 한시적으로 쓰는 것들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물건’을 마련할 그날 같은 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제대로 된 물건이 얼결에 들어서버리자 생활이 가지런해졌다. 아름답게 잘 만든 물건의 힘이란 이토록
-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하지만 저에게 허구의 이야기란 바다와 육지에서의 감동적인 사건들에 대한 것입니다. 전 이런 이야기가 경험하지 못한 낯선 세계로 저를 데려다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야기꾼으로서 전 독자들에게 역시 같은 일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 현실도피가 아니냐고요. 물론 도피 맞습니다. 왜 다들 이걸 그렇게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어요. 현실도피는 모든 예술, 아니 모든 문명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문명은 현실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들의 망상과 노력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아니, 현실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건 다른 모든 의식 있는 존재들도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셜리 잭슨의 호러 장편 <힐 하우스의 유령>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되지요. “그 어떤 생명체도 절대적 현실에 갇힌 채로 살아간다면 광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 그럴 리가요. 무언가 예술이라고 불린다면 그건 예술이라는 상자 안에 들어 있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세상엔 존재 자체가 공해인 수많은 영화, 소설, 음악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예술이 아닌 것은 아니거든요. 그것들이 예술이라고 해서 아침 산책이나 떡볶이 간식보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되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 게임이 가치 있고 중요한 무언가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그것이 예술이라고 우기는 대신 일반적인 예술이 커버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게 나아요. 적어도 그게 당시 제 주장이었죠. 그런데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게임이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냐고요? 아뇨, 전 이야기를 다루는 영역에서 예술의 비중이 그렇게 높을 필요가 없으며 앞으로 예술의 비중은 점점 더 낮아질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예술로 보는 것은 다소 기형적인 생산과 소비의 구조 때문입니다. 이 구조 안에서는 검증받은 소수의 창작자가 이야기를 생산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걸 수동적으로 소비하죠. (...) 요새 느끼는 건 지금까지 소수의 창작자만 누렸던 즐거움을 일반 대중도 누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앞의 챕터에서 말했지만 수많은 사람이 전에는 쓰지 않았던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 여전히 훌륭한 작품들은 만들어질 것이고 운이 좋다면 그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감상되고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영역에서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높아질 거예요. 고정된 이야기들을 얌전히 감상하는 사람들보다 살아 숨쉬는 이야기들이 꿈틀거리고 비명을 지르고 투쟁하다가 소멸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해 즐기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런 세계가 된다면 어디에나 널려 있는 창작자보다 이야기 규칙, 그러니까 우주의 창조자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날이 올 수도 있겠죠. 이 미래를 진지하게 믿냐고요? 아뇨, 전 지금 지하철 안에서 아이폰을 두드리며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겁니다. ✦ 문제는 그럴 능력이 없거나 그런 것을 이해할 생각이 없는 소비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 “여자 주인공엔 감정이입을 못 해요.”라고 아주 태평스럽게 말하는 남자들을 의외로 많이 만납니다.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할 수는 없죠. 하지만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면 그들이 뭉쳐 모인 영토가 의외로 넓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토는 결코 호러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안정된 놀이터를 제공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어느 곳에나 있죠. 그들은 당연히 장르의 탐험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비슷한 자극을 반복하고 싶어 하며, 변화를 거부하니까요.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 가능하다고 경멸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죠. ✦ 소설 몇 권 정도의 배경이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스타트렉>이나 <스타워즈>처럼 몇십 년을 끌면서 성장하는 프랜차이즈의 우주라면 그 우주를 끊임없이 수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그 세계가 그나마 덜 이상해 보이고 말이 되기 때문이죠. 그러는 동안 세계는 일관성을 잃고 팬들이 좋아했던
-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불행해지지만 말자. 나는 다짐했다. 그것이 무슨 일이든 상관없다. 어떤 선택으로 어떤 상황에 처하건 불행하다고 느끼지만 않을 수 있다면, 무엇이건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불행한가 그렇지 않은가뿐이다. 사실 불행해지지 말자라는 말만으로는 좀 부족하다. 불행하다는 것은 어떤 과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말자고 해서 안 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관한 것이 아니다. 돌아보면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고통은 참아야 한다는 생각이 내 모든 불행의 원천이었다. 미래에 진짜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뜬구름 같은 행복을 위해 나는 분명히 실재하는 오늘의 고통과 슬픔을 무수히 감내해야만 했다. (...) 그러므로 불행해지지만 말자는 말은 현재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불행해지지 말자는 셈이다. 행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너무 먼 얘기이기 때문이다.
- 창작 수업그들은 다 같이 앞쪽 베란다에 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헤밍웨이, 포크너, T. S.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 함순, 월리스 스티븐스, e.e. 커밍스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 “얘야.” 어머니가 말했다. “저 사람들 입 좀 다물라고 할 수 없니?” “안 돼요.” 나는 말했다. “순 헛소리만 지껄이는 인간들.” 아버지가 말했다. “일을 안 하니 저 모양이지.” “저 사람들 일해요.” 내가 말했다. “헛짓거리나 하겠지.” 아버지가 말했다. “그렇긴 하죠.” (<그들과 우리>) ✦ 담배를 피우는 것도 훌륭한 쇼가 된다. 특히 이른 아침 뒤편에 베니션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을 때 담배 연기는 구불구불 올라가며 갖가지 모양을 띠고 마음에는 평화가 깃든다. 정말 그렇다. 그 이상이다. 주크박스에서 아끼는 옛 노래 한 곡이 흐르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바텐더가 늙었고 약간 피곤하고 약간 현명하다면 그가 있는 풍경 그가 무얼 하는 모습은 흐뭇하다. (...) 술집은 숨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시간은 내 통제 아래 흐른다. 마음껏 뛰어들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전문가는 필요 없다. 신마저도. 존재하는 것 말고는 짊어질 기대는 없다. 기대를 짊어지지 않는 이들은 잃을 것이 없다. (*제목 안 적어놓음.) ✦ 배고픈 시절이었다. 술집을 전전하고 밤에는 몇 시간이고 걸어 다녔다. 달빛은 늘 가짜처럼 보였다. 정말 가짜였는지도 모르지. (<뉴올리언스의 청춘>) ✦ 컴퓨터 앞에 있는 나를 혐오할 사람들을 생각해 보렴. 우린 그들을 떨거지에 포함시키고 계속 전진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 거야. (<처음 컴퓨터로 쓴 시> ㅋㅋㅋㅋㅋㅋㅋ귀여운..일흔살..) ✦ 내가 e.e. 커밍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말에서 신성함을 쪽 빼고 매력과 도박을 가미해 똥밭을 돌파하는 시를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일이었다! 우리는 낡고 피로한 틀에 갇혀 시들어가고 있었다. <대가> ✦ 술꾼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하지만 술꾼은 스스로를 용서한다. 다시 술을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 참으로 끝내주게 멋진 나날이었다. 이 광기의 강 들이파고 약탈하는 이 광기는 부디 오로지 나에게만 내려 주소서 아멘. ✦ 💬 부코스키의 매력과 재능이 뭔지는 누구나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나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그의 매력과 재능이다.
- 먹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go places > 문을 나서는 순간, 모험이 시작되니까요. 내 앞에 있는 큰 문이 닫혀 있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찬찬히 찾아보니 작은 문들은 열려 있었고, 그 문은 생각보다 다양한 장소로 통했고, 부엌 싱크대와 작업실 책상에서 만나지 못했던 다채로운 풍경과 사색의 가능성을 선물했다. 그래서 어디가 되었든 올해는 집과 작업실에 있는 동네를 몰래몰래 벗어나 보리라, 다른 지붕과 다른 나무와 다른 얼굴을 보고 오리라 다짐한다. (...) 그리고 go places의 뜻처럼 사비를 들여서가 아니라, 가족이 움직여서가 아니라, 재능이나 커리어 덕분에 언젠가 ‘이곳에 초대받게 될 줄은, 이런 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어’ 하는 생각하게 될 순간이 오길 조심스레 기대한다. 아직 상상까지 포기하진 않았다. *그리고 번역한 책의 북토크와 라디오 방송 게스트 출연을 했다는 후기. <이 두 장소는 오로지 내 직업 덕분에 가게 된 것이다.> reminiscence *이전에 일하곤 했던, 이제는 멋진 카페로 변한 도서관 로비에 대해 이 공간에 또다른 나를 심을 수 있을까. 검토서의 분량을 늘리고 다음 일이 들어올까 걱정하며 번역하던 나는 아닐 것 같았다. 난 그때와 달라졌고 달라지고 싶다. 자꾸 움츠러들고 피지 못한 봉어리같이 느껴졌던 그 시절의 나는 누구도 눈여겨봐주지 않던 그 쓸쓸하고 적막했던 로비와 어울렸다. 그리고 그건 그것대로 아름다웠다. day to day 그러니 번역은 이제 그저 반복적인 하루 일과 같다. (...) 만약 내가 번역한 책을 전부 기억하거나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나는 아마 모르는 명품이 없는 패션 전문가, 프랑스 여행 박사, 자기계발의 여왕, 페미니즘 강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박학다식한 사람 근처에도 못 가고, 최근의 내 관심사만 겨우 말할 줄 아는 지극히 평범한 지성의 소유자며 특히 요즘에는 친구와 대화하다 수시로 “그거 뭐더라?”, “그 사람 있잖아?”라고 팔을 휘젓는 설단 현상까지 심하게 앓고 있어 내가 번역한 책의 저자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도 가끔은 나의 수많은 하루 중 어떤 하루나 어떤 순간을 일부러 기억하기 위해서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번역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내 안에 영원히 남는다. 오래도록 나를 떠나지 않고 나만의 이미지가 되고 문장이 되고 내 인생의 일부가 된다. (...) 어떤 화가의 작품을 뉴욕이나 파리의 미술관에서 직접 본 그림보다 훨씬 더 친밀하게 느끼기도 한다. (적어도 내 마음속에선) ‘저건 나의 그림이야, 나의 작가야, 나의 도시야’하고 속삭인다. 가보지 못한 도시를 가본 것처럼 그리워하고 만나보지 못한 사람을 한때 사랑했던 친구처럼 여긴다. embarrass myself 그런데도 왜 나보다 좋은 책을 번역하는 사람들과 자기 책을 내는 사람들에 대한 맹렬한 질투심이 가시질 않지? 왜 이 욕망은 없어지질 않지? 왜 이 욕망 때문에 스스로 망신을 자초하고 있지? 왜 자꾸 비참해지고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이 감정은 언제쯤 사라지고 그저 그런 책이라도 꾸준히 하는 번역가로만 만족할 수 있을까. (...) 포기하려 해도 포기가 잘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져서도, 지방에서 올라와서도 소설 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자기보다 한참 어린 선생과 대학생들에게 비판을 받고 또다시 망신을 당한다. 그러면서도 신춘문예에 도전하고 자비출판을 알아본다. 그것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컸던 시절 더 밀어붙이지 못하고 당장의 생활에 안주한 대가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그런데 바로 그 ‘간절함’, ‘포기 안 됨’이 재능일 수도 있다. (...) 나 역시 나를 표현하고픈 욕구는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왔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embarrass myself’를 계속해보자 싶었다. 여전히 재능을 의심하고 여전히 맷집 따위 없지만 어차피 아무리 팡팡 때리고 눌러도 고개를 드는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 같은 것이 나의 욕망이라면 계속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들어오는 책은 마다하지 않고 번역했고 아무도 보지 않고
- 시민 쿠데타우리 사회가 사람을 가득 실은 버스라고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모두 함께 어느 목적지로 가려고 합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이 중 버스 기사를 정하는 일입니다. 일종의 대표자를 뽑는 대의 민주주의죠. 기사는 승객들을 만족시키고 목적지에 제대로 이르기 위해 가끔 뒤를 돌아보며 물어봅니다. ‘라디오 들으시겠어요? 에어컨 켤까요?’ 이것이 참여 민주주의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맨 앞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요구 민주주의(democratle d' interpellation)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을 주려는 것입니다. 버스 뒤쪽에 앉아 있지만 마찬가지로 사회 구성원인 이들이 기사에게 원하는 바를 요구하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 📝 - 우리 민주주의는 얼핏 보면 잘 돌아가고 있는 듯하지만, 선거 지상주의로 인해 정치는 점점 삶에서 멀어진다. - 그나마 내 삶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이 될 때는 대개 구체적 동기가 분노로 표출되는 경우; 사회에서 가장 약한 존재를 과녁으로 삼아 골라주는 정치가 인기를 얻게 된다. (극우포퓰리즘의 득세) - 이는 대의민주주의의 왜곡이 아닌 근본적인 한계다. (투표 행사가 주권 행사의 전부라고 믿을 때) - 대의민주주의란 프랑스혁명 당시 지도자들이 고안한 발명품일 뿐이며, 세습 귀족주의에서 선출 귀족주의로의 전환이었다. - 이 책은 이에 대한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하려는 목적으로 쓰였다. 전세계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행동가들의 구체적 실천에 대한 기록물이다.
- 연애하지 않을 자유💬 별루였다 딱히 재미있는 얘기 없었음 ✦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여기에서 사용하는 ‘정치’는 랑시에르의 용어를 따른다. 자크 랑시에르는 그리스어 ‘폴리테이아(politeia)’가 정치(politique)와 치안(police)라는 두 가지 번역 용례를 가진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두 종류의 정치를 구별할 것을 주장한다. 통념적 정치활동은 후자, 즉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치안의 정치다. 한편 이러한 치안의 논리를 넘어서는 미학의 정치가 존재한다. <정치의 논리는 자리들의 나눔(분배)을 흐트러뜨리는 동시에 전체의 샘, 그리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나눔을 흐트러뜨린다. 정치의 논리는 욕구들(이 지배하는) 어두운 삶에만 속해 있는 것으로 셈해지던 자들을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들로 보이게 만든다. 정치의 논리는 어두운 삶(에서 새어나오는) 소음으로밖에 자각되지 않았던 것을 담론으로 들리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내가 ‘몫 없는 자들의 몫’ 또는 ‘셈해지지 않은 것들을 셈하기’라고 불렀던 것들이다.> 자크 랑시에르 <랑시에르식으로 말하면, 정치적 투쟁이란 본래 복합적 이익 사이의 합리적 논쟁이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지고 정당한 상대자의 목소리로 인정되기 위한 투쟁이다. 우리의 세계는 치안과 정치, 이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굴러간다. 특정한 정치 체제는 특정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발화만을 인간의 언어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합당한 정치적 자리와 몫을 할당하는 반면, 그 집단 외부의 사람들의 목소리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동물이 내는 소음으로 간주하며 그들에게 어떤 몫도 할당하지 않으려 한다.> 진은영, 숭고의 윤리에서 미학의 정치로-자크 랑시에르의 미학의 정치 이것은 정치체제가 존재의 가시화와 비가시화를 분배하고 결정하는 방식이다. 정치는 이에 대항하여 특정 분배의 형식 속에서 제 몫을 전혀 갖지 못한 이들이 이견을 제기하고,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밥그릇 싸움’이라고 폄하하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정치적 투쟁은 밥그릇 싸움이다. 도대체 무슨 고상한 것을 위해서 싸워야 직성이 풀리는가? 목소리를 내고, 지워졌던 정체성을 드러내며,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몫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정치적 투쟁이고 밥그릇 싸움이다. 마치 집 요정처럼 ‘보이지 않는 노동을 수행’해야 했던 청소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사례나, 아동 및 성소수자 인권 개념도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정치를 특정 정치체제 안에서 권력을 소유하는 문제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둘째, 몫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몫을 부여하는 새로운 분배 형식을 찾아가는 활동을 하나의 정치체제에서 다른 정치체제로의 이행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의 특징이 나타난다. 정치는 ‘일치(consensus)’를 넘어선 ‘불일치(dissensus)’의 분배 활동이라는 것이다.> 진은영, 앞의 글
-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구걸 결국 그들을 모두 용서하게 됐지만 도저히 나 자신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소멸할 존재라는 자각은 가끔 사람을 이상하고 일터에 부적합한 인간으로 자유 기업의 노예이기를 거부하는 불쾌한 인간으로 만든다. ✦ 면도날 같은 낮, 쥐들이 들끓는 밤 내 삶은 술집과 도서관으로 양분돼 있었다. 그 외에는 일상을 어떻게 꾸려 갔는지 모르겠다. 그쪽으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책이나 술이 있으면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바보들은 자신의 파라다이스를 만드는 법이다. ... 달이 거기 없다고 주장한 사람은 기억이 난다. 하도 그럴싸해 그 책을 읽고 나니 달이 거기 없다는 그의 주장이 믿어졌다. 달이 거기 없다면 하루 여덟 시간의 노동을 감내할 청년이 누가 있겠나? 뭐가 아쉬워서? 그런데 문학보다 문학 평론가라는 자들이 더 좋았다. 참으로 밥맛 떨어지는 그자들은 세련된 언어를 동원해 아름다운 방식으로 다른 평론가와 작가를 등신 취급했고 나는 그 덕에 기운이 났다. ✦ 지옥은 닫힌 문이다. 작가만큼 서서히 힘겹게 죽어가는 것은 없다. ✦ (같은 책인데 어떤 시에서는) 여보게, 공기와 빛과 시간과 공간은 창작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아. 새로운 변명거리를 찾아낼 만큼 살날이 길다면 또 모르지만. (하지만 다른 시에서는) 거리에서는 글을 쓸 수 없었다. 방 하나, 문 하나, 벽들을 갖추는 게 몹시 중요했다. ✦ 불씨 하급 노동자로 살 때는 단 한 순간도 분노가 가신 적 없었다. 늘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리고 어지럽고 미칠 것 같았다. 왜 내 삶을 스스로 도살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루하고 몰지각한 노동뿐 아니라 괴로운 기색 하나 없고 심지어 만족한 듯 보이는 많은 동료들 때문에 환장할 지경이었다. 노동자들은 굴복했다. 노동은 그들을 무용지물로 파괴했고 그들은 단물을 빨리고 내쳐졌다. 나는 매 순간 분노했다. 매 순간 내 시간은 도륙당했고 아무것도 단조로움을 달래 주지 않았다. 자살을 생각했다. 한 줌의 여가 시간을 술로 보냈다. 긴 세월 노동을 했다. 최악의 여자들과 같이 살았고 노동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들은 그녀들 손에 죽어 갔다. 나는 죽어 가고 있었다. 내면의 무엇이 속삭였다. 저지르라고, 죽으라고, 그들처럼 되라고, 받아들이라고. 내면의 또다른 무엇이 속삭였다. 안 돼 가장 작은 조각을 살려 봐. 많이도 필요 없어, 그냥 불씨만 살려 둬. 불씨 하나가 숲 전체를 태울 수 있어. 그냥 불씨 하나만. 그걸 살려 둬. 해낸 것 같다. 다행히도. 참 우라지게 복도 많지. ✦ 그래도 나는 운이 좋다, 고독을 먹고 살면서 군중을 절대 그리워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위대한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위대한 책은 내게 관심이 없다.
-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접어둔 꿈을 펼친다. 너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었고. 텅 비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네 자신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연약하고도 슬픈 기질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너를 문장이라는 말의 그늘로. 아니. 문장이라는 종이의 여백으로 이끌었고. 혼자만의 방에서도 오래도록 외롭지 않았던 것은. 네 오랜 꿈의 원형인 듯 책상 한구석에서 타오르던 어둡고 희미한 불꽃이. 매 순간 너와 함께 네 마음속에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접어둔 꿈을 펼친다. 거리는 거리로 이어지고 집은 집으로 이어져. 첫번째 집은 문이 없었고. 쉽게 다음으로 건너뛰지 못하는 미련한 마음이 다음 집과 다음 집도 첫번째 집으로 오인하도록 하였기에. 결국 네가 찾고 있는 것은 열리지 않는 문이라는 듯이 너는 너 자신을 속였으나. 이내 문이 있는 집이 나타났고. 당연하게도 너는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았고. 지금껏 줄곧 그래왔듯이 너는 첫번째 집을 찾아 헤매듯 다음 또 다음으로 천천히 천천히 집과 집 사이를 건너뛰었고. 결국 네가 찾고 있는 것은 문이 없는 집이라는 사실을 너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까 결국. 끝없이 끝없이 바깥으로만 바깥으로만 떠돌도록 하는 모종의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너는 인정해야만 했고. 건너뛰어 가는 동안, 종이 위로 새겨지는 네 목소리 위로 또 다른 목소리가 내려앉는 것을 너는 보았고. 들었고. 그것은 오래도록 내뱉지 못한 네 입속말의 부스러기들이었고. 바깥으로 향하는 목소리를 따라. 그렇게 바깥으로 향하는 공간으로 뛰어들기를 반복하여서 다시금 어제의 밤은 몰려왔고. 그러면 이제 무언가를 붙잡아야만 한다고. 그러면 이제 어딘가에 도착해야만 한다고. 그러나.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들여다보듯이. 희미한 것들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빛의 둘레로부터 어른거리며 물러나는 무언가를 너는 보았고. 들었고. 그 어렴풋한 그림자야말로 네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아니. 네가 잊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떠올렸고. 손을 펼치면 저 너머로부터 말들의 그늘이 번져오고 있었고. 더이상 많은 낱말과 낱말로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더는 숱한 비유와 비유로 문장을 꾸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너는 뒤늦게 알아차렸으나. 심연을 향해 나아가듯 같은 낱말이 또 다른 뜻으로 너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너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고. 연필을 쥔 너의 손가락은 어느새 종이 위를 빠르게 미끄러져갔고. 글자가 아닌 그림처럼. 그림이 아닌 음악처럼. 어떤 시선을. 어떤 흔적을. 어떤 공백을. 너는 읽으면서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심해로부터 번져오듯 같은 낱말이 다시 다가오면서 물러나고 있는 것을 너는 느끼면서. 자신의 표정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문장을 인용하는 무수한 얼굴을 생각했고. 그리하여 다시. 마주 보는 이중의 거울 속에서. 끝없이 끝없이 맺히며 펼쳐지는 거울상의. 그 어떤 예비된 묵시들처럼. 그리하여 다시. 꿈은 어디로부터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빈칸을 건너뛰듯 희미한 보폭으로 사라져가는 저 무수한 길 위에서. 한 줄 건너뛰면 다시 한 줄 흔들리는 저 무수한 나뭇가지 사이에서.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출판 검열관과 나눈 대화에서: — 그래요, 우리는 정말 어렵게 승리를 쟁취했소. 그래서 당신은 영웅적인 사례들을 써야만 하는 거요. 그리고 그런 예는 수백 가지도 넘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전쟁의 추악한 면만 보여주고 있소. 냄새나는 속옷만 보여줬단 말이오. 우리의 승리가 당신한테는 끔찍하고 무서운 것에 불과한 거요?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 진실들. — 당신은 삶 속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거리에 있다고 말이오. 당신이 말하는 진실은 천박해요. 지나치게 세속적이오. 아니, 진실은 우리가 꿈꾸는 바로 그것이오. 우리가 되고자 하는 바로 그것! ✦ 이미 수천 번도 넘는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음에도(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봤는데, 지구 상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들을 합치면 3천 번도 넘는다고 한다), 전쟁은 여전히 인간사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비밀 중 하나로 남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할말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 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 영토 — 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 — 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 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대화하는 중에도 아픔과 공포의 그늘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이기에. 순간 스치는 고통의 표정 앞에서 간혹 나도 모르게 ‘사람은 고통이 있기에 아름다운 건 아닐까’라는 불순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다. 그러고는 나 자신에게 흠칫 놀란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 “내가 정말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총을 쏘았는지는 이야기할 수 있어. 하지만 어떻게 울었는지는 말 못하겠어. (…) 당신은 작가잖아. 직접 한번 생각해봐. 뭔가 아름다운 말. 들끓는 이도 더러운 진흙탕도 없고 구토물도 없는…… 보드카 냄새도 피 냄새도 없는 그런 말을…… 우리 삶처럼 끔찍한 그런 거 말고 …….” 아나스타시야 이바노브나 메드베드키나, 사병, 기관총 사수 ✦ <이제는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의 침묵에 대하여> ✦ 그런데 전장에서 조금 벗어나 포연이 옅어지는 순간에 보니까, 글쎄, 내가 그 고생을 하며 끌고 온 사람이 우리 전차병만이 아닌 거야. 한 명이 독일 병사인 거야, 글쎄…… 세상에, 얼마나 놀라고 기가 막히던지. 전장에서는 우리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판에 나는 적군이나 구하고 있었으니. (…) 내가 그대로 버려두면 그는 곧바로 숨을 거두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 과다출혈로…… 결국 나는 그 병사를 데리러 되돌아갔어. 그리고 계속 두 사람을 끌고 갔지…… 스탈린그라드에서 있었던 일이야…… 스탈린그라드전투는 정말 무시무시한 전투였어. 그렇게 처참하고 끔찍한 전투가 또 있을까. ‘심장 하나는 증오를 위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위해 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사람은 심장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늘 어떻게 하면 내 심장을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 ✦ 💬 승리의 기록이 아닌 여자들의 목소리로서의 전쟁. 같은 전쟁에서 같이 싸웠지만 돌아온 여성들은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 그때의 싸움보다 사랑에 대해 더 말하기 어려워했다는 것. 수많은 말줄임표들. 인터뷰를 가득 채웠을 pause들.
- 아무튼, 스릴러하지만 현실에서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현실의 범죄도 없겠지만 범죄물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범죄물을 누가 쓰고 누가 읽겠느냐 말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기는 낙원에서 범죄물 읽기다. 앞에서 <스노우맨>을 쓴 노르웨이 소설과 요네스뵈를 인터뷰했던 때 이야기를 했다. 나는 물었다. 당신의 소설에는 연쇄살인이 자주 등장한다. 강력범죄도 많다. 노르웨이의 현실을 반영했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사실은 살인사건이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굉장히 안전하다. 소설과 현실은 전혀 다르다. 범죄가 발생하는 이유는 단순히 악의에만 있는 건 아니다. 선의가 실수로 이어지기도 하고, 자기방어가 살인이라는 결과를 맺을 수도 있다. 가해자의 악의뿐 아니라 피해자의 악의가 범죄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래서 범죄물을 읽는다. 이해할 수 없는 악의의 정체가 궁금해서,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가 이루어지고 또 그것을 해결하는 천재적인 두뇌플레이를 보고 싶어서, 그 안에서는 언제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서사 안에서 안전한 쾌락을 느끼고 싶어서. 하지만 '내가 파는 장르'가 무엇을 소비하는지 알고는 있어야 한다. 부디 바라건대, 이 글을 쓰는 나나 읽는 여러분의 삶은 평온하기를. 그리고 이 세상도, 약간은 평온해지기를. 인간들이 서로를 때리거나 죽이지 않아도, 환경오염 덕에 조만간 다 함께 망할 듯하니 더더욱. 어쩐지 결론이 토정비결 점괘같이 되고 말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서로의 안녕을 있는 힘껏 빌어주어도, 일간지 사회면에는 범죄가 넘쳐나리라.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사건 뒤에 사람 있어요. ✦ <스릴러는 풍토병과 닮았다>
- 신경 끄기의 기술💬 네가 최고이거나 최악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조언이 인상적이었는데, 너무 미국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인 아닌 인간들에게 너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장황하게 설득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지? 태평양의 패잔병 오노다의 얘기가 마음에 들었다. 전혀 슬프지도 비장하지도 멋있지도 않았지만 블랙코미디로서. 제국에 충성하기 위해 반평생을 나무뿌리를 뜯어먹으며 민간인을 살해했는데 마침내 돌아와 이전의 자기가 수호하려 했던 가치가 전혀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다니. 아 이거 근데 캡틴 아메리카 아니야? 포커는 반은 운이고 반은 그렇지 않다. 내게 좋은 패가 주어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확실히 게임은 많은 걸 가르쳐 준다고 생각함. 윌리엄 제임스 얘기는 제사 크리스핀의 책이 생각났다. <제임스는 노트에 적었다. 다음 일 년 동안만 내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제임스는 어스름 속을 헤매다가 문득 자신에게 삶의 방향을 결정할 자유의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 “내가 처음 자유의지로 행한 건 자유의지가 있음을 믿는 것이었다.”> 같은 얘기를 다른 방식으로 쓰는 것에 대해 좀 생각을 해보자. 확실한 건 나는 후자가 훨씬 마음에 든다는 사실이다. 최악의 순간이 사람을 더 발전하게 만든단 얘기 하면서 전쟁 생존자가 전쟁을 겪고 나서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더 나은 사람이 됐다는 얘길 하면 어떡해? 개인적으로 그런 말은 그 당사자 아니면 존나 주제넘는 거라 생각.. 여기서 심각하게 멈추고 싶었지만 일단 70프로 정도 읽어버려서 참았다. 러시아 얘기도 싫었다. 미국 중산층 출신 백인이 완전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깨달음 얻는 얘기 대노잼이지 그럼.. 나는 자기계발서가 너무싫다 일단 누가 나한테 이래라 저래래 하는 게 싫고 진짜 행동-자극-동기 그러니까 일단 행동해! 이런 류의 얘기들. 말은 쉽지. > 무엇을 거부하느냐가 우리를 규정한다.
- 릿터 15호: 연애소설[[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이 글과 [[잉카 쇼니바레와 잉그리드 폴라드의 차이]]에 대한 글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언어, 다른 시선에 대한 생각이 들게 해서 좋았다. 소설 중에서 강화길의 <오물자의 출현> 이 매우 좋았다. "대체 김미진이 뭐길래? 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기에? 수많은 인간, 연예인, 작가, 딸, 누나, 연인, 아내, 여자, 오물자. 그것들 중 하나에 불과한 그녀가 대체 무엇이길래?" 이것은 [[이소호 김수영문학상 수상소감]] 과도 같은 결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맨 앞의 플래쉬 픽션 중 거의 에세이라고도 읽을 수 있는 정세랑의, (로맨스를 좋아하는) 여성 작가로서의 고민도 흥미롭다.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눈앞에 실존하는 폭력을 제외하고, 보편의 남성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가지고, 이전과 같이 이성애 로맨스를 쓰는 것이 가능합니까? [[배수아 오늘의 작가상 수상소감]]은 소설만큼이나 재미있다. 사람을 얼굴도 이름도 아닌 그 사람이 한 말로 기억하는 것, 이야기를 사랑하면서 이야기로부터 도망치는 것.
- 잉카 쇼니바레와 잉그리드 폴라드의 차이그렇지만 폴라드의 작업에는 쇼니바레와 공통점을 보이면서도 명확한 차이점도 있다. 그녀가 카리브해 지역(가이아나)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여성이라는 사실과도 큰 관계가 있을 것이다. ... “흑인으로 살아가는 생활과 체험이 발생하는 장소는 언제나 도시 환경 속에 한정된 듯 여겨진다. 처음에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찾았을 때는 멋진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변을 산책하는 흑인은 나 혼자뿐이었다. 하얀 망망대해 속에 던져진 흑인 한 명이라는 느낌이었다. 시골을 찾아가는 일은, 언제나 불안과 공포를 길동무로 삼아야 한다.” 일반적인 백인 남성은 느낄 수 없을 감각일 것이다. ‘전형적으로 영국적인’ 풍경, 그 속에 몸을 두는 행위 자체만으로 ‘노예 출신의 여성’에게는 강한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 ‘포스트콜로니얼’ 시대의 미술은 우리에게 이러한 시점, 다름 아닌 ‘타자의 시점’을 요구한다. 무척이나 힘겹지만 우리의 시야를 확실히 넓혀 주는 요구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 남성인 나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찾아갔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괜찮은 걸까? 이렇게 말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 걸까? 190205 서경식의 인문기행 : 런던 — 잉카 쇼니바레, 릿터 15호:연애소설
-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대해<내 운동화는 몇 명인가?>. 주어의 성격과 동사가 일치하지도 않은 이런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다 물어본다. “무슨 내용이에요?”라고. 그럼 나는 또 얼른 대답을 못한다. 우선은 “운동화 한 켤레가 우리 소비자 손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다큐멘터리입니다.”라고 이야기할 뿐이다. ... 부산 사투리와, 번역자가 힘들어한 키나발루산 주변 원주민의 사투리와, 번역자를 찾기도 힘들었던 슬로바키아어와, 미얀마인들이 쓰는 영어로 전해지는 노동자들의 ‘생활’을 온전히 담고 싶었다.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삶을. 그것이 지금 단계에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다큐멘터리였다. 이 정의는 그대로 글쓰기의 한 장르로서 논픽션에도 해당할 것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이러한 정의가 적용된 논픽션의 고전이다. “25만명의 광부가 실업을 당한다고 할 때, 뉴캐슬 뒷골목에 사는 광부 앨프 스미스라는 사람이 일자리를 잃는 것은 일종의 순리라고 할 수 있다. 앨프 스미스는 단지 25만이라는 숫자 가운데 하나, 말하자면 하나의 통계 단위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을 하나의 통계 단위로 보기는 쉽지 않다.” ...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고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단순히 광부들의 열악한 삶을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 외에, 서로 다른 세계에서는 언어도 달라진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섬세한 감각까지 지니고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오웰이 살던 시대, 그가 살아온 삶의 경험에서 그 ‘언어의 다름’은 지나치게 일방적이었다. 그는 제국의 공무원으로 식민지에 파견되었던 사람이었다. 버마에서, 그리고 파리와 런던의 슬럼 지역에서 서로 다른 언어들이 마주칠 때, 그것들은 동등하지 않았다. 제국의 언어가 식민지의 언어에 비해, 그리고 가진 자의 언어가 빈민의 언어에 비해 압도적으로 ‘옳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때 언어는 힘의 관계를 그대로 담고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 관계란 또, 그대로 식민지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삶의 경험이 놓여 있는 관계이기도 했다. 오웰은 그 관계를 바닥까지 경험한 후에, 정말 어느 쪽이 옳은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그의 모든 글쓰기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그 관계를 뒤집고 싶었다. ‘옳다’고 말해지는 세계가 옳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느낀 죄책감은 너무 엄청나서 속죄를 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장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을 5년 동안이나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번민 끝에 결국 얻은 결론은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었다. 잘못된 이론일지 모르나 압제자가 되어 본 사람으로 얻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있음을 깨닫는 것, 그 세계에서는 같은 언어가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도 깨닫는 것, 그런 까닭에 타인과 나를 함부로 묶어서 ‘우리’라고 칭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 이 모든 깨달음은 왜 가치가 있는 걸까? 그 깨달음이 오웰을 전사로 만들었다. 190205 <컨테이너선에서의 만남>, 김현우 / 릿터 15호: 연애소설
- 재인, 재욱, 재훈💬 정세랑 소설 중에 제일 별로 - 까진 아니고 덜 좋았지만. 이전부터 꾸준히 친절한 사람들이 친절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였다고 생각했다. 재인이 경아를 구하고 나서 원래부터 여자아이가 여자아이를 구하는 이야기를 좋아했다고 말하는 게 좋았다.
- 캣콜링루즈벨트 아일랜드 빛 속에서 그늘을 들쳐 업고 너와 섬에서 물담배 피우고 싶다. 글라스로 와인 한 잔을 시키고 시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그럼 넌 내 눈을 보고 그림 이야기를 하겠지. 여러 개의 시선이 뒤섞인 세잔에 대해서. 세잔을 말할 때 반짝이던 네 눈에 대해서, 쓰겠지. 좁은 캔버스에 갇힌 검은 침대와 컵과 흰 장미를. 한 쌍의 브래지어를 우리에게 채우는 나라에 대해서. 그럼 우린 왜 이 순간이 위대한지 말하겠지. 우린 섬에서 또 다른 섬에 가 눕겠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네 방에 앉아서 맨해튼을 바라보겠지. 내일은 그랜드 센트럴에 가서 우리 주니어스 치즈 케이크를 먹자. 먹으면서 왕가위 영화를 보자. 이랑의 노래를 듣자. 들키지 말자. 그리고 우리 참 지질하다고 웃겠지. 목에 커튼을 걸고 거울 앞에 서서 우린 잘 어울린다고 말하겠지.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째서 사랑이 아니야? 웃겠지 내가 돌아가는 그 날은 눈이 아주 많이 왔다고 네가 그랬다. 뉴욕에 있는 사람들 그 누구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그랬다 네가. ✦ ... 이 글이 써내려갈 읽기의 기록이 어떠한 시대적 규범 하에서 작동하고 있는지를 의식화하기 위해서다. 사실 '읽기'란 두려운 것이다. 시사키 아타루가 '읽기'와 '혁명'의 관계를 논의하며 가장 먼저 강조했던 것이 읽기란 본래 무의식적 접속이기에 읽는 자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방어를 하게 된다는 사실이 아니었던가.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겪어 내야 하는 일이고, 타인의 꿈을 대신 꾼다는 것은 읽는 자의 실존을 뒤흔들 만큼 위협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읽기'를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마침내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최후의 고독'이라고 비유했던 것을 인용하며, "그 싸움에서 우리는 하얀 종이의 표면에 비치는 광기와 그것을 읽지 않겠다고 하는 자신의 방어 기제에 동시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차례로 넘기는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우리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무의식의 벌거벗은 형태로 도박을 하는 것"이라 정의 내릴 때, '읽을 수 없는 것'이란 사실 '읽고 싶지 않은 것'에 다름 아니다. ✦ *영감을 준 현대 미술의 여성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쉬린 네샤트, 니키 드생팔, 실비아 슬레이, 트레이시 에민, 루이스 부르주아 *사라진 사람과 사라지지 않은 __ 혹은 그 반대 ✦ 💬 여성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폭력으로 뭘 쓰고 싶었던 걸까요🤔
- 헝거-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하긴 상처가 아니라면, 왜 쓰겠는가? 상처가 없으면 쓸 일도 없다. 작가는 (학자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 덮어도 덮어도 솟아오르는 상처wound가 있어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삶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 어떤 딸이 어떤 엄마의 딸이 되는 방식은 무한하다. ✦ 또 다른 광고에서 오프라는 진지한 어조로 말한다. "모든 과체중 여성 안에는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이룰 수 있는 이상적인 모습이 있죠." 매우 인기 있는 개념으로, 우리 뚱뚱한 여자들 안에는 날씬한 여자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광고를 볼 때마다 난 생각한다. 내가 그 말라빠진 여자 잡아먹어버렸지. 맛있긴 했지만 양이 너무 적더군. 그러면 진짜 나다운 나란 사기꾼이나 강탈자나 불법 거주자 같은 이 뚱뚱한 몸 안에 숨어 있는 날씬한 몸의 여자란 말인가. 이 얼마나 빌어먹을 소리인가. ✦ 나는 나를 싫어한다. 아니, 이 사회 전체가 나를 싫어할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내 생각에 적어도 내가 이것만큼은 제대로 해내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내 몸을 싫어한다고. 나는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의 나약함을 싫어한다. 내 몸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내 몸을 보는 방식이 싫다. 사람들이 내 몸을 훑어보고 내 몸을 대하고 내 몸에 말을 보태는 방식이 싫다. 내 자아의 가치를 내 몸의 상태와 동일시하는 것도 싫고 이 동일시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서 싫다. 나의 인간적인 취약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싫다. 내 몸을 내 사이즈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수많은 여성들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싫다. 하지만 나는 나를 좋아하기도 한다. 나의 인격, 나의 특이함, 나의 유머 감각, 거칠면서도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내가 좋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과 내가 글 쓰는 방식이 좋고 친절함과 까칠함이 공존하는 내 성격과 말투가 좋다. 이제 40대가 되어서야 나는 나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직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심이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혐오에 힘없이 굴복하며 살았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사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과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긍정하는 그 단순한 기쁨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덜 신경 쓰고 되었다. 그 모든 발전 없는 자기혐오에 지쳐버렸고, 내가 나를 싫어했던 이유 중 일부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나 자신을 싫어하는 걸 당연한 일로 여길 거라고 추측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뚱뚱한 몸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당연히 자기혐오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듯한 세상이 지긋지긋해졌다. ... 나 자신을 바꾸고 싶지 않다. 내 외모를 바꾸고는 싶다. 기운이 좀 있는 날에는, 투쟁심을 발휘하여 세상이 나의 외모에 반응하는 방식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진짜 문제는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운이 없는 날에는, 내 인격, 즉 나라는 사람의 본질과 내 몸을 어떻게 분리해야 하는지 잊어버린다. 이 세상의 잔인함으로부터 나를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 폭력은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당신에게 폭력을 행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 곁에 남을 수도 있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완전히 낯선 이에게 폭력을 당할 수도 있다. 당신은 너무나 끔찍한 방식으로도, 너무나 친밀한 방식으로도 폭력을 당하고 해를 입게 될 수 있다. ✦ 자기 관리란 어떤 면에서 부정이나 거부의 몸짓이기도 하다. 원하지만 가질 수 없다. ✦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타인의 잔인한 눈초리와 지적질에서, 너무나 좁은 의지에서, 아니 이 너무나 큰 몸에는 너무나 작은 모든 것에서 도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행복의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가. 우리가 행복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것.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그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만한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 시야의 확대가 따르지 않는 성장은 진정한 성장이 아니다. 확대된 시야 없이는 상처를 심미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없다. 동시에 아무리 심미적 거리를 유지해도 상처가 없으면, 향유할 대상 자체가 없다. 상처가 없다면,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 용기가 없어 망설이다가 끝낸 인생에 불과하다. 태어난 이상, 성장할 수밖에 없고, 성장 과정에서 상처는 불가피하다. 제대로 된 성장은 보다 넓은 시야와 거리를 선물하기에, 우리는 상처를 입어도 그 상처를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상처도 언젠가는 피 흘리기를 그치고 심미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성장이,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이다. ✦ 생활인으로 살기 위해서 입시, 취직, 고시 공부를 해야만 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써 시험공부를해서 기왕에 대학에 들어왔다면, 반드시 지식을 통해 머리에 전구가 들어오는 경험을 해야 한다. 자루에 갇혀 있다가 튀어나온 고양이처럼 그러한 사치스러운 지적 경험을 찾아 캠퍼스를 헤매야 한다. 그리고 입시를 위해 보내야 했던 그 지루했던 시간에 대한 진정한 보상을 그 환한 앎에서 얻어야 한다. 세상에는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할 수도 있는 다른 종류의 공부가 있음을 영원히 모른 채로 죽지 않기 위해서. ✦ Q. 학자가 되면 좋은 점은 없나요? A. 어느 시점이 되면, 내가 책을 좋아할 뿐 아니라 책도 내심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죠. 나도 책을 읽으면 행복하지만, 책도 나에게 읽히는 게 분명 행복할 거야, 라는 충족감이 들죠. 그리고 직장인들이 월요일 아침에 허겁지겁 출근할 때, 창문을 열고 '월요일이란 무엇인가!'라고 소리를 지를 수 있어요. ✦ 에세이집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말미에서 스가 아쓰코는, 각자 가지고 있던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몰락해간 사회 변혁 운동의 과정에 대해 이렇게 쓴다. "우리의 차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궁극적으로 지니고 살아야 하는 고독과 이웃하고 있으며, 각자 자신의 고독을 확립해야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나는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이어 덧붙인다, 꿈꾸었던 공동체의 몰락이 꼭 저주만은 아니었다고. "젊은 날 마음속에 그린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을 서서히 잃어감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고독이 한때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황야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 같다." ✦ 책은 인류가 발명한, 사람을 경청하게 만드는 정말 많지 않은 매개 중 하나죠. 그렇게 경청하는 순간 우리가 아주 조금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기를 비우고 남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자세요. ✦ 저는 차라리 불확실성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그나마 큰 고통 없이 살아가기를 원해요.
- 옥상에서 만나요웨딩드레스 44 "남편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제도에 숙이고 들어간 거야.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깨달은 한국 사회는 나에게 당위로 말하기 시작했지. 갑자기 모두가 나에게 '해야 한다'로 끝나는 말을 해. 성인이 되고 나서 그런 말 듣지 않은지 오래되었는데 대뜸 다시. 남편과 나는 같은 시험에 붙었잖아. 그런데 가족들이 내게만 '살살 다닐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해. 왜 나는 살살 살아야 하지? 왜 그게 당연하지?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굴욕적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열다섯번째 여자는 입 밖으로 말해서 더 분명해지는 것들을 잠시 가만히 헤아렸다. ✦ 여자는 출근하는 남편 앞에서 문어 춤을 추었다. "비켜, 이 타코야끼야." "뭐라고? 어떻게 그렇게 말 한마디로 나를 토막 칠 수 있어?" ✦ 이혼 세일 어쩌면 다들 이재보다도 이재가 이끌고 다니는 공기 같은 것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함께 있으면 심장이 약간 느리게 뛰게 되는 감미로운 공간 장악 능력 같은 것 말이다. 이재의 반경에선 모든 모서리와 테두리가 달라졌다. ✦ 효진 혹시 나의 특징은 도망치는 능력이 아닐까? 누구나 타고나게 잘하는 일은 다르잖아. 그게 내 경우에 도주 능력인 거지. 참 잘 도망치는 사람인 거야. 상황이 너무 나빠지기 전에, 다치기 전에, 너덜너덜해지기 전에 도망치는 사람. ... 적당히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거기서 얻는 것들은 분명히 있어. ✦ 옥상에서 만나요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모든 사람 이야기는 사실 절망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그러니 부디 발견해줘,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 너의 운명적 사랑을.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기이한 수단을. 옥상에서 만나, 시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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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한 새벽 세 시
-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
- 뱀과 물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신비롭다. 그것은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비순차적인 시간을 몽상하는 어떤 자의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 꿈은 글과 마찬가지로 직관의 일종이야.
- 쓰기의 말들: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관심과 냉소는 지성의 표시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이다. _한나 아렌트 기록한다는 것은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 들어오는 인생의 무기력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죠. _김영하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_고레에다 히로카즈 ✦ 고통은 창작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지만, 상실을 체험한다고 다 좋은 작품을 쓰는 건 아니다. 고통에 익사당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작가는 얼마나 많을까 싶다. 그 차이는 뭘까. 오래 안고 가고 싶은 물음이다. 왜 어떤 상실이나 고통은 존재의 몰락을 초래하고, 어떤 결핍은 힘들의 과잉 상태를 낳는가. 개인마다 경제, 계급, 문화 자원 그리고 기질과 성향의 건강이 다르니까 일반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삶을 살펴보면 책이 삶의 거친 파도를 피하는 방파제가 되어 주었다. 고통이 글을 낳았다. 어쩌면 내가 그런 작가에만 끌리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내가 머리맡에 두고 읽는 책 <멀고도 가까운>에서 리베카 솔닛은 고백한다. "나는 평생 책을 타고 떠다녔고, 어린 시절에는 내게 친절하지 않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책으로 만든 탑과 벽을 쌓아 올렸다."
-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거리 출몰하기: 런던 모험 연필 한 자루를 향한 열렬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를 소유하는 것이 지극히 바람직할 수 있는 상황이 있다. 오후의 차를 마시는 시간과 저녁식사 시간 사이에 런던을 정처 없이 걷고 싶다는 하나의 목적을 품고 핑계를 대는 순간이 그런 때이다. 여우사냥꾼들은 여우들의 품종을 보존하기 위해 사냥하고 골프를 치는 사람들은 열린 공간들이 건축업자들로부터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에 골프를 친다고 하듯, 거리를 거닐어야겠다는 욕망이 퍼뜩 떠올랐을 때 우리는 연필이 할 일을 구실로 일어나면서 말한다. "정말로 연필을 하나 사야만 해." 마치 이를 핑계 삼아 겨울에 도시의 삶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안전하게 탐닉할 수 있는 것처럼 - 런던의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것 말이다. 시간은 저녁이어야 하며 계절은 겨울이어야 한다. 겨울은 공기가 한없이 맑고 투명하며 거리의 친숙함이 반갑기 때문이다. 그늘과 외딴 곳, 풀밭에서 불어오는 달콤한 공기를 갈망하는 여름과 달리 우리는 그때에는 조롱을 받지 않는다. 어둠과 가로등 불빛이 드리우는 저녁 시간은 우리에게 무책임함 또한 선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지극히 우리 자신이 아니다. 날 좋은 저녁 네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집을 나서면, 우리는 친구들이 아는 우리의 자아를 버리고 익명의 보행자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화국 군대의 일부가 된다. 자기만의 방에서 고독을 맛본 뒤라 그들과의 어울림은 참으로 기분이 좋다. ... ...연필을 한 자루 샀으며 거리는 완전히 텅 비게 되었다. 삶은 꼭대기층으로 물러났고, 가로등들이 켜졌다. 인도는 메마르고 딱딱했으며, 길은 망치로 두드려 편 듯한 은빛이었다. 그 황량함 사이로 집으로 걸어가면서 우리는 난쟁이에 대해, 맹인에 대해, 메이페어 저택의 파티에 대해, 문구점에서의 말다툼에 대해 스스로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저마다의 삶 속으로 우리는 살짝 뚫고 들어가 하나의 마음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몇 분 동안만이라도 잠시 타자의 몸과 마음을 취할 수 있다는 환상을 충분히 스스로에게 불어넣을 수 있다. 우리는 세탁부가 될 수도, 술집 주인이 될 수도, 거리의 가수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성이라는 곧게 뻗은 길을 떠나, 검은딸기나무들과 빽빽한 나무줄기들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지나 우리의 동료들인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는 숲 한가운데로 발을 디디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과 경이로움이 있을 수 있을까? 일탈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며, 겨울의 거리에 출몰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모험이라는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집 현관 계단에 다다르면서, 오래된 소유물과 오래된 편견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느낌에 위안을 받는다. 그토록 여러 거리 구석구석에서 이리저리 떠돌았고, 그토록 여러 접근하기 어려운 전등들의 불길에 나방처럼 난타당한 자아는 보호받고 에워싸인다. 여기에 다시 평소의 문이 있다. 여기에 우리가 떠나면서 빙그르 돌아갔던 의자와 도자기 접시와 양탄자 위에 난 갈색의 동그라미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 — 살살 부드럽게 살펴보자, 경외심을 갖고 만져보자 — 도시의 모든 보물로부터 되찾아온 유일한 전리품인 연필이 한 자루 있다.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그런데 일기는 원체 사적이고 워낙 본능적이어서 또 다른 자아로 하여금 쓰는 자아로부터 분리하고 그 자아가 쓰는 것을 약간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볼 수 있게 해준다. 쓰고 있는 자아는 기묘한 자아였다. 때로는 쓰도록 유발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쓸 일이 너무도 많은데 나는 거의 쓰지 않는다. 늘 작업하고 있는 척하고 있을 때 늘 작업하고 있었더라면 여기서의 삶은 거의 완벽했을 것이다. 발단에서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이야기들을 보라. ...... 다음 날이다. 이를테면, 오늘 아침을 보자. 나는 어떤 것도 쓰고 싶지 않다. 우중충한 날이다. 후텁지근하고 흐리다. 단편소설은 비현실적이며 쓸만한 가치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쓰고 싶지 않다. 나는 살고 싶다. 이 말은 무슨 뜻으로 하는 걸까? 그걸 말하는 건 그다지 쉽지 않다. 하지만 사실이 그
-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오스카 와일드: "대중은 아름다움의 새로운 방식을 몹시 싫어한다. 그래서 그것과 마주칠 때마다 분노하고 당혹해하면서 언제나 바보 같은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하나는 예술 작품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 작품이 지극히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전자는 예술가가 새로운 무언가를 말했거나 전에 없던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냈음을 의미한다. 후자는 예술가가 사실을 말했거나 그것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형상화했음을 의미한다. 전자는 스타일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소재에 관한 것이다." ✦ > 지혜는 없다. 많은 지혜들이 있을 뿐이다. 아름답고, 망상적인. 이 대목에서 맨 뒤의 '아름답고 망상적인'의 반짝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소설 읽기만 한 시간 낭비는 또 없다. 그런데 데이비드 실즈의 이 책이 특별한 점은, 그가 삶을 맹렬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라는 데 있다. 가상의 세계로 도망쳐 지내기 위해 소설에 빠져 있는 게 아니라 소설을 읽는 만큼 소설 밖의 세상에서 해서 좋은 것, 안 해도 되는 것, 하지 않는 게 좋은 것 등을 열심히 하며 산다. ✦ 이 시기에 대해 발터 벤야민은 <일방통행로>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철봉에서 대회전을 하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소년 시절에는 스스로가 회전식 추첨기를 돌리는데, 그곳으로부터 빠르든 늦든 대박이 터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15살 때 알고 있던, 아니면 하고 있던 것만이 이후 어느날 우리의 매력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부모님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그러한 나이 때에는 48시간만 방치되어도 그것으로부터 삶의 행복의 결정이 알칼리 용액 속에서처럼 형성된다." ✦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이 온통 뒤범벅이 된다. 있는 힘껏, 내가 무엇이 될지 한번 시험해보고 싶다는 마음. 아주 좋은 책과 아주 좋은 여행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보통의 책과 보통의 여행도, 나쁜 책과 나쁜 여행도 나를 조금씩, 하지만 영구적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리고 알게 되는 것이다. 좋고 나쁨을 말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하리라고. 나빴다고 생각한 일이 나중에 더 좋은 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소설 속 주인공을 구경하며 깨달은 것을 내가 경험으로 배운다. 책을 통해 다른 사람과 다른 세계를 이해했고, 그들과 직접 만난 경험은 책을 더 잘 이해하게 했다. 언제나 시작은 책이었고 여행이었으며, 그 둘은 마치 걷는 일이 그러하듯이,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걸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나를 과거에서 현재의 시간으로 이끌었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보다 먼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그렇게 지금의 내가 되었다. ... 간접경험과 직접경험을 통해 원하는 삶을 기획하기. 언제나 책과 여행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읽기와 경험학, 쓰기는 내가 나 자신을 탐색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들이었다. 간접경험과 직접경험, 그리고 그 모두에 존재하는 나 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기. 글쓰기. 나 자신이 되겠다는, 가장 강력한 행동. ✦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되는 삶의 진실 중 하나. 나라는 인간의 특성이자 개성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젊음이었다. 여행에 관련된 거의 모든 것들이 그렇다. 비행기 타는 것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경유항공편 타기가 취미였다. 침대 여덟 개 있는 도미토리 룸에서 자고, 아침엔 바나나 하나 저녁엔 기네스 파인트 한 잔으로 사흘씩 돌아다녔다. 숙박비가 아까우면 도시 간 이동은 심야버스나 심야기차를 이용했고,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이 나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냥 젊어서 그런 것이었다. 아침보다는 밤에 원고를 더 잘 쓷나든가, 술 마시며 밤새도록 어울리길 좋아한다든가 하는 것 전부. ✦ 퇴근 뒤에 글을 쓴다는 허황된 계획이다. 허황되었단 말을 하는 이유는 회사라는 곳이 당신에게 여분의 에너지를 남겨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백하자면 나도 그런 꿈을 꾸었다. 헛된 꿈을. 그리고 원고를 쓰지 못한 채 새해목표로 '내 글 쓰기' 같
- 단 하나의 문장
- 이만큼 가까이정말 놀라운 건, 종종 내 친구들과 똑같은 얼굴의 아이들과 마주친다는 것이다. 친척도 아니고 아무도 아니다. 아무 관계도 없이 그렇게나 똑같은 얼굴로 태어난다. 누군가 이 세계에 우리와 똑같은 얼굴들을 계속 채워넣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려운 것은 그 똑같은 얼굴 뒤 거의 다르지 않을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유일하지도 않으며 소중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대체된다. 모두가 그 사실에 치를 떨면서. ✦ "내 생각에, 인간은 잘못 설계된 것 같아." 주연이가 말했을 때 아무도 '왜 또?' 하고 반문하지 않았다. "소중한 걸 끊임없이 잃을 수밖에 없는데, 사랑했던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걸 이겨내도록 설계되지 않았어." 우리는 그렇게 모여서 함께 망가지고 고장나고 그러다 한사람씩 사라질 것을 예감했으나 이른 포기의 달콤함 같은 것이 깃들어 있어서 그리 무거워지진 않았다. 열개의 인디언 인형처럼 하나씩, 운이 좋으면 길게 머물 거고 아니라면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었다. 순서를 기다리면서 담담하게 치킨을 먹고 생일 파티를 하고 경조사를 챙겼다. 살아진다는 어른들의 말에 진저리를 내면서도 살아졌다. 그사이에 다시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떠났다가 돌아왔다가 할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과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고 먼 도시에서 살 것이었다. 영원히 쿨한 갱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해도 어쨌건 나는 거기 소속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친구들을 만나는 게 어째선지 편안했다. ✦ "그래도 책은 그런 괴물들과 싸우기 위한 무기인데, 그런 책을 만드는 회사들이 더 나쁘면 안돼. 그 간극은 참을 수 없어. 이런 식으로 좋은 사람들이 다 떠나고 싸우던 사람들이 다 지치고 나면, 부당한 일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순응하는 인간들만 남아 책을 만들 거야. 깃털 부풀리기나 하는 사기꾼들만 남아 책 비슷하지만 책 아닌 그런 걸 만들 거라고. 그런 책은 읽고 싶지 않아." ✦ 남자친구: 무슨 생각해? 나: 고래 고환. 남자친구: 고래도 고환이 달려 있구나. 크겠네. 나: 몸속에 있어. 남자친구: 어쩐지 본 적 없더라니. 나: 몸속에 있어서 뜨거워질까봐, 지느러미 쪽의 차가운 정맥과 이어져 있어. 식혀주는 거야. 남자친구: 신기하다. 그런데 고래 불알은 왜 생각해? 나: 머리가 뜨거워질 때 생각하면 다시 시원해져. 남자친구: 넌 이상해. 나: 이상해서 싫어? 남자친구: 싫은 거랑은 달라. 하지만 이상해. ✦ 주연: 너 워프의 원리를 알아? 나: 워프? 주연: 왜, SF에서 우주선들이 하는 거. 쓩, 하고 뛰어넘는 거 말야. 나: 몰라. 주연: 여러가지 버전의 설정이 있지만 대개는 그거 차원을 찢는 거야. 그래서 하고 나면 우주선에 탄 사람들은 성공한 워프만 기억하지만,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차원에서는 실패에서 우주선도 사람들도 산산조각 난 거지. 나: 기분이 이상하겠네. 주연: 그래도 하고 또 하고 또 해. 끔찍한 차원들을 무한히 남기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사람들은 대단해. 자기가 어느 차원에서는 찢겨 죽었다 해도 괜찮은 거야.
- 민트의 세계
-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 보편적 정신
- 내게 무해한 사람💬 지금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 적는 거라 정확히 뭐였는지 생각 안 나는데 이 책에 실린 단편 중 하나가 너무 모욕적이고 구리다. 레즈비언 좀 그만 죽여라. 그냥 죽이는 것도 열 받는데 철저히 주인공의 깨달음과 참회를 위한 도구적 죽음이라니. 최은영이 쓰는 게이란 제목 그대로 '내게 무해할(위협적이지 않을)' 뿐더러 처연하고 슬픈 사연으로 이성애자님들이 보시기에 흡족하고 아름다우셔서 소설이 되기에 적합한 그런 존재다. 안일하다 못해 악의까지 느껴지는 시각.
- 마흔 이후, 누구와 살 것인가
- 검의 폭풍
- N.E.W.
- 체체파리의 비법💬 마지막 단편(<비애곡>)이 제일 좋았는데, 이건 이 책에 실린 소설들 중 유일하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자기 정체를 들키고 나서 발표한 작품이라고 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에 홀로 인간임을 유지하기로 한 소녀가 나오고, 그 소녀와 사랑에 빠진 소년이 나오고, 그리고 그 소녀가 스스로의 그 인간적임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내용이다.
-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그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점은커녕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했다. 인생을 걸고 했던 것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버렸다. 칸영화제를 가기는커녕 제대로 된 퀴어 영화를 찍지도 못했고, 현대무용가가 되지도 못했다. 보란듯이 사랑을 하지도 못했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어영부영 나이만 처먹었다. 동성애자이면서 제대로 동성애를 하지도 못했고 그것도 모자라 이성애자들로부터 마이크 하나조차 제대로 훔치지 못했다. 이토록 처절한 실패는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우리는 망했다. 망해먹은 채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우리는 웃고 떠들고 술 먹고 섹스하다 죽을 줄이나 아는 동성애자들일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 릿터 13호: 여성-서사
- 릿터 12호-선거
- 수학자의 아침비가 내려, 비가 내리면 장롱 속에서 카디건을 꺼내 입어, 카디건을 꺼내 입으면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조개껍데기가 만져져, 아침이야 비가 내려, 출처를 알 수 없는 조개껍데기 하나는 지난 계절의 모든 바다들을 불러들이고, 모두가 다른 파도, 모두가 다른 포말, 모두가 다른 햇살이 모두에게 똑같은 그림자를 선물해, 지난 계절의 기억나지 않는 바다야 지금은 조금 더 먼 곳을 생각하자 런던의 우산 퀘백의 눈사람 아이슬란드의 털모자 너무 쓸쓸하다면, 봄베이의 담요 몬테비데오 어부의 가슴장화 비가 내려, 개구리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려, 언젠가 진짜 비가 내리는 날은 진짜가 되는 날, 진짜 비와 진짜 우산이 만나는 날, 하늘의 위독함이 우리의 위독함으로 바통을 넘기는 날, 비가 내려, 비가 내리면 장롱 속 카디건 속 호주머니 속 조개 껍데기 속의 바다 속 물고기들이 더 깊은 바다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모두가 똑같은 부레를 지녔다면? 비가 내릴 일은 없었겠지, 비가 내려, 다행이야 — 다행한 일들 ✦ 맨 처음 우리는 귀였을 거예요 아마. 따스한 낱말과 낱말이 포켓 사전처럼 대롱거리는 귓불이었을 거예요 아마. 그때 우린 사전의 속살을 들춰 보았죠. 여긴 두 페이지가 같네요? 파본인가요? 그다음 우리는 그릇이었을 테죠 어쩌면. 아이스크림을 컵에 담듯 살아온 날들의 독백이 녹아 흘러내리지 않게 자그마한 그릇처럼 웅크려야 했을 테죠. 그때 우리는 맛있었죠. 그때 우리는 양 손바닥처럼 밀착되었을 테죠. 고해와 같았을 테죠 어쩌면. 딸기 맛과 멜론 맛이 회오리처럼 섞일 때면 하루가 저물었죠. 그런 후에 우리는 서로의 기록이었죠. 손목이 손을 놓치는 순간에 대해, 시계가 시간을 놓치는 순간에 대해, 대지와 하늘이 그렇게 하여 지평선을 만들듯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그렇게 하여 침묵을 만들었죠. 등 뒤에서는 별똥별이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내렸죠. 그러곤 우리는 방울이 되었어요. 움직이면 요란해지고 멈춰 서면 잠잠해지는, 동그랗게 열중하는 공명통이 되었죠. 환호작약 흐느낌, 낄낄거리는 대성통곡. 은총과도 같이 도마뱀의 꼬리와도 같이. 우리는 비로소 물줄기가 되었죠. 우리는 비로소 물끄러미가 되었죠. 이제 우리는 질문이 될 시간이에요. 눈먼 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시간이죠. 덧없지 않아요. 가없지 않아요. 홀로 발음하는 안부들이 여울물처럼 흘러내리는 이곳은 어느 나라의 어느 골짜기인가요. 이것은 불시착인가요 도착인가요. 자, 우리의 질문들은 낙서인가요 호소인가요, 언젠가 기도인가요? — 메타포의 질량
- 경애의 마음마음을 어떻게 폐기하느냐고 물었지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그 사람이 나 너랑 전처럼 자고 싶어, 따뜻하게, 라고 말한 날이 있었고 당신은 결정했고 그렇게 욕실에 들어갔다 나오자 정작 그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옷을, 양말까지 챙겨 신은 뒤였다고. 그러고 나서 데려다주겠다는 그 사람 차에 타지 않고 택시로 강변북로를 달려 돌아오는데 자신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잖아요. 그 새끼 뭔가요, 뭐, 사람 테스트해본 겁니까. 대체 어떤 욕을 해주어야 하나, 아주 고퀄 레전드급으로 쌍욕을 하고 싶지만 언니, 폐기 안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채소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들에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구원은 그렇게 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적극성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시흥의 창고에서 생각했다.
- 잘돼가? 무엇이든나는 나를 믿는 일이 제일 어렵다. 어쨌든, 아주 조금씩 가고 있다. 엄마한텐 아빠가 있고, 동생한텐 제부가 있고 ...... 그래, 나한텐 영화가 있어. 근데 걔는 내 손도 못 잡아주고 백허그도 한번 해주지 못하는 주제에 심지어 나를 딱 반만 죽여놔서 내가 지금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근데 생각해보면 내가 이런 고충을 제대로 표현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왜냐하면 자존심이 상했거든!
- 게으름에 대한 찬양*게으름에 대한 찬양*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전에는 다수의 노동이 있어야만 소수의 여가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기술은 만인을 위한 생활 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 (….) 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무엇보다도 인생의 행복과 환희가 충만할 것이다. 신경 쇠약과 피로와 소화불량증 대신에 말이다.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는 일 없이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가 시간에 지쳐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류의 오락거리들만 찾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1퍼센트는, 직업상의 일에 써 버리지 않은 시간을 뭔가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데 바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들은 그들의 생계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창성이 방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나이 많고 박식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표준에 맞출 필요도 없을 것이다. ✦ *우리 시대 청년들의 냉소주의* 어느 정도 만연된 회의주의는 지적 원인보다는 사회적인 원인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 주요 원인은 언제나 힘이 없는 것에 대한 위안이다. 힘을 가진 자들은 냉소적이지 않다. 자신들의 사상을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압제의 희생자들도 냉소적이지 않다. 그들은 증오로 가득 차 있으며 증오란 것은 다른 강한 열정들과 마찬가지로 부수적인 일련의 믿음들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교육과 민주주의와 대량 생산이 등장하기 전까진 어느 곳에서나 지식인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수뇌들이 쓰러졌더라도 영향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인들은 대단히 달라진 상황에 처해 있다. 선전가가 되거나 법정의 어릿광대가 되어 어리석은 부자들에게 서비스를 팔 마음이 있다면야 좋은 일자리와 높은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 결코 힘들진 않다. 대량 생산과 초등 교육으로 인해 어리석임이 문명의 발흥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견고해졌기 때문이다. (…) 지식인들이 볼 때 자신들에게 일을 지시하고 대가를 주는 정부나 부자들의 목적이 해롭기까진 않다 하더라도 불합리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약간만 냉소적으로 되면 그 상황에 자신의 양심을 맞출 수가 있다. 물론 대단히 존경할 만한 작업을 권력이 원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미국의 경우 그 가운데 으뜸이 과학이고 그 다음이 공공 건축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받은 교육이 문학적인 것이라면 - 이것은 너무도 흔한 경우다 - 그는 22살이 되었을 때 자신이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방법으로도 발휘할 기회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서구에서조차도 냉소적이지 않다. 그들은 그 사회의 전폭적인 승인과 더불어 자신의 최대 기량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현대의 지식인들 가운데 예외적으로 운이 좋은 것이다. 만일 이러한 진단이 옳다며 ㄴ곰ㄱ사나 선생들이 낡아빠진 미신의 녹슨 병기고에서 낚아 올린 이상들보다 좀더 나은 이상을 설교하거나 젊은이들 앞에 제시하는 것만으론 현대의 냉소주의는 치유될 수 없다.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창조적인 충동을 구체화하는 직업을 찾아낼 수 있을 때만 치유가 가능하다.
-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
-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나혜석은 칼자루를 쥔 남성중심 사회를 바꾸기 위해 칼날을 쥔 여성이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과 글을 남겨야 한다고 믿었다. (...) 여성의 글은 여성이 삶과 분리될 수 없다. 그녀는 여성이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사회적 실천이라 믿었다. > 나는 분만기가 닥쳐올수록 이러한 생각이 났다. ‘내가 사람의 ‘모’가 될 자격이 있을까? 그러나 있기에 자식이 생기는 것이지.’ 하며 아무리 이리저리 있을 듯한 것을 끌어 보니 생리상 구조의 자격 외에는 겸사가 아니라 정신상으로는 아무 자격이 없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품이 조급하여 조금조금씩 자라 가는 것을 기다릴 수 없을 듯도 싶고, 과민한 신경이 늘 고독한 것을 찾기 때문에 무시로 빽빽 우는 소리를 참을 만한 인내성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무지몰각하니 무엇으로 그 아이에게 숨어 있는 천분과 재능을 틀림없이 열어 인도할 수 있으며, 또 만일 머겨 주는 남편에게 불행이 있다 하면 나와 그의 두 몸의 생명을 어찌 보존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의 그림은 점점 불충실해지고 독서는 시간을 얻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내 자신을 교양하여 사람답고 여성답게, 그리고 개성적으로 살 만한 내용을 준비하려면 썩 침착한 사색과 공부와 실행을 위한 허다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생기고 보면 그러한 여유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내게는 군일 같았고, 내 개인적 발전상에는 큰 방해물이 생긴 것 같았다. 이해와 자유의 행복된 생활을 두 사람 사이에 하게 되고, 다시 얻을 수 없는 사랑의 창조요 구체화요 해답인 줄 알면서도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행복과 환락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어찌나 슬펐는지 몰랐다. 여성이 직접 말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일체의 행위 자체가 당시 남성들에게는 그저 못마땅한 일이었다. 나혜석은 불완전한 상태로라도 스스로 고민하고 방황하며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가는 여성의 삶을 꿈꾸었고, 그 꿈을 글쓰기로 실천했다. 여성의 삶이 모순적이고 분노와 좌절의 연속인데, 어떻게 여성의 언어가 아름답고 완전하고 완벽하기를 바라느냐는 나혜석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 그리하여 이 한 때에 행복을 빼앗길 때마다 어느 때든지 그 상처를 아물릴만한 행복을 늘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더할 수 없는 일거리 되는 바이다. 이는 역시 자기를 잊지 말고 살아가려는 목표를 정하는 여하에 있는 것이다. 즉 무의식하게 자기를 잊고 살아온 가운데서 유의식하게 자기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가장 무서워하는 불행이 언제든지 내습할지라도 염려 없이 받아넘길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아무러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 고통 중에서 일신일변할지언정 결코 패배를 당할 이치는 만무하다. 즉 외형의 여하한 행복을 받든지 또는 외형의 여하한 행복을 잃어버리든지 행복의 샘, 내 마음 하나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을 사람은 어느 시기에 가서 자각한다. 아무라도 한 번이나 두 번은 다 자기 힘을 자각한다. 그것을 받는 사람은 즉 자기를 잊지 않는 행복을 느끼는 자다. 또 사람은 자기 내심에 자기도 모르는 정말 자기가 있는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자기를 찾아 내는 것이 곧 자기를 잊지 않은 것이 된다. (...) 하루 뒤, 1년 뒤, 지나는 순간마다는 후회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가 된 큰 과거는 얼마나 느낌 있는 과거인가. 또 그 중에 마디마디를 멀리 있어 돌아다보니 얼마나 즐거웠던 때이었나.
-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물건처럼 이용되고 버려지거나, 쓰레기처럼 그려지거나, 침묵하거나, 아예 안 나오거나, 무가치하게 그려지는 책을 많이 읽으면, 그 경험은 분명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예술은 세상을 만드니까. 예술은 중요하니까. 예술은 우리를 만드니까. 혹은 망가뜨리니까. ✦ “그것은 내가 동일시하려고 애쓰는 책이 나를 거부한다고 느낀 최초의 경험이었다. 나는 결국 충격을 받아들였지만, 그 경험 때문에 자연히 내 몸이나 그밖의 것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여주인공이 되는 법
- 피프티 피플
-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어떤 언어를 들으면 머릿속에서는 그와 관련된 이미지가 활성화된다. 자연사, 안락사, 입양이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적어도 고통의 이미지는 아닐 것이다. 언어가 누락한 현실을 발견하고 이미지가 조장한 허상을 거부하는 일은 중요하다. 어떤 자연사는 가장 비참한 죽음이라는 것을, 어떤 안락사는 고통사라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을, 어떤 입양은 죽음으로 가는 급행열차라는 것을, 언어들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 대신 저 언어들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고통을 은폐한다. 그래서 모든 보호소가 인도적인 장소라고, 모든 유기동물이 마지막 순간만큼은 편안하다고 믿게 만든다. 언어와 현실이 동떨어져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할까. 언어? 아니면 현실? ✦ 모든 타자가 내게 특별해진 존재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 깨달음과 일치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감상주의를 넘어서야 했고 내 안의 도덕적 한계를 재설정해야 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튀어나오는 자기모순을 당혹감에 휩싸여 응시해야 했다. 동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사람은 이 모순에 대해 공격적인 질문을 받는다. “개, 고양이를 먹지 말자고? 소, 돼지, 닭은?” “모피를 입지 말자고? 가죽 신발과 가죽 가방은?”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화장품을 쓰자고? 동물실험을 한 의약품은?” 그리고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나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중요한 선택을 한 사람들, 생명윤리에 있어 엄격한 생활을 하는 실천주의자들(나는 아니다)은 극단적인 동물 애호가라는 조롱을 당한다. 동물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생활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삶의 방식을 재고하기보단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모순을 찾아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싶어한다. 동물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평범했던 일상이 딜레마로 전환되는 일이다. 나를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외부의 적이 아닌 스스로의 모순과 싸우는 일이다. ✦ 어느 나라도 축산물로 지정한 적 없는 종을 우리나라 축산업에 추가하고, 나아가 동물복지까지 개선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 게다가 190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새로운 동물을 주된 축산 종에 포함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이 비용은 산출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법화를 해서 기준에 맞는 축종과 사육과 도살 방식을 연구하고, 이에 상응하는 시설 마련을 한다면 그에 따른 비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 개농장 주인들이 할 리는 없다. 결국 개고기를 먹든 안 먹든 모두가 내는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여기다 국제 사회에서 ‘세계 최초의 개 식용 합법화 국가’라는 타이틀이 가져올 유무형의 손실과 전염병이 발생할 경우 수습 비용까지 계산하면 우리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불하게 된다. 나는 온라인에서 개식용과 관련된 논쟁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개고기 합법화를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여긴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신뢰할 수도 없고 그 수요마저 줄고 있는 개고기를 합법화하느라 엄청난 혈세를 쏟아붓는 것이 ‘합리적’인 일일까? 무엇보다 이것이 ‘가치 있는’ 일일까? … “합법화해라. 아무도 손해보지 않는다. 개 식육업자들은 당당하게 영업해서 좋고, 개고기 먹는 사람들은 깨끗하고 안전하게 먹어서 좋다. ...” 누가 손해를 보는가? 우리 모두다. 모두가 손해 보는 일이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일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은 얻는 것이 더 많아서가 아니다. 혹자의 말처럼 얻는 것은 항상 명확한 반면 잃는 것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단순한 주장의 진짜 문제점은 여전히 손익의 대상을 인간으로 국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동물을 배제했던 비인간성이 현대 축산업을 참극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거나 완전히 잊고 있는 것이다. 개식용 합법화 주장이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오인되는 상황은 우리가 현대 축산업의 비극으로부터 아무 교훈도 배우지 못했음을, 우리의 기억상실을, 어리석음을 증명할 뿐이다. ✦ 모든 사람
- 질의 응답뜨개바늘, 비법을 아는 산파, 가파른 계단, 독약은 임신 중단이 불법이거나 접근성이 낮은 지역에서 아직도 일부 여성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의지하는 방법이다. 매년 2천만 명의 여성이 위험한 방법으로 임신 중단을 시도한다. 전 세계의 임신 10건 중 1건에 육박하는 비율이다. 그 여성들 중 약 5만 명이 불필요한 죽음을 맞고, 약 690만 명은 합병증 때문에 치료가 필요한 상태에 처한다. 만약 안전한 임신 중단이 제공된다면, 그 여성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합법적이고 안전한 임신 중단은 여성의 건강에 꼭 필요한 일이다. 임신 중단을 금한다고 해서 잠재적 태아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절박한 여성들이 다칠 뿐이다. ... 우리의 목표가 임신 중단율을 낮추는 것이라면, 가장 효과적인 조치는 안전하고 손쉬운 피임법을 널리 보급하고 올바른 성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임신 중단을 제약하는 지역에서는 저 두 가지 대중보건 서비스도 부실할 때가 많다. 임신 중단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모래에 머리를 처박고는 문제가 자기 눈에 안 보이니까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타조 같은 짓에 불과하다.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눈 먼 암살자진실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쓰는 것을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훗날의 나 자신조차도.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글쓰기가 오른손의 검지에서 흘러나오는 잉크의 긴 두루마리처럼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왼손이 그것을 지우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 그러나 삶에서 비극이란 단일한 긴 비명이 아니다. 그것에 이르도록 만든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하찮은 매 시간, 매일, 매년, 그런 다음 갑작스러운 순간이 도래한다. 칼부림, 총알 발사, 다리에서 추락하는 차. ✦ 사진은 행복에 관한 것이고,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행복이란 유리벽으로 보호된 정원이다. 그곳으로는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다. 낙원에는 이야기가 없다. 그곳에는 여로가 없기 때문이다. 상실과 후회와 비참함과 열망이 굴곡진 길을 따라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앎을 택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불구로 만든다. ✦ 로라는 네가 생각해왔던 것과 다른 사람이고, 너 역시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존재란다. 그것은 충격적이지만 위안이 되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너는 위니프리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리처드와도 그렇다. 네게 그리픈 가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 네 진짜 할아버지는 알렉스 토머스고, 네 아버지는, 글쎄, 하늘만이 그 가능성의 한계가 되겠지. 부자, 가난뱅이, 거지, 성자, 수십 개의 출신 국가, 수십 개의 취소된 지도, 수백 개의 파괴된 마을들. 네 마음대로 고르렴. 그로부터 네가 물려받은 유산은 무한한 추론의 영역이다. 너는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단다. … 내가 네게서 무엇을 원하게 될까?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건 너무 과분하다. 용서도 아닐 것이다, 그건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저 내게 귀기울여 주는 사람을 원할 것이다, 그냥 나를 바라봐 줄 누군가. 그렇지만 무엇을 하든 나를 미화하지는 마라, 나는 장식된 해골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네 손에 나 자신을 남겨 둔다. 내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네가 이 마지막 장을 읽을 때 내가 존재할 유일한 곳은 - 만일 내가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 바로 거기일 것이다.
- 네 이웃의 식탁
-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 세상이 잠든 동안100달러짜리 키스 A. 저는 번 피트리를 기절시켰습니다. 고등어보다도 더 완벽하게 뻗게 했죠. 갑자기 이 세상의 문제가 바로 번 피트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Q. 이 세상의 문제가 뭡니까? A. 모두 사진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아무도 피사체 자체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요. ✦ “만약 우리가 결혼하면,” 그녀가 말했다. “오래 못 갈 거야. 내가 나쁜 행동을 해도 너는 충분히 화를 내지 않을 거고.” 긴 침묵이 흐른 뒤 마침내 조지는 그녀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가 선한지 악한지에 관심 가질 만큼 그녀를 사랑한 사람이 이제껏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겼다. 벌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었다.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하는 일에 자신이 화를 내지 않는다면, 자신은 무가치한 목사가 될 거라는 것 또한 조지는 이해했다. 원만함, 수줍음, 용서는 소용이 없다. 그녀는 화를 낼 정도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그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온 세상이, 화를 낼 정도로 관심을 가져달라고, 그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결혼하든 말든,” 그가 말했다. “만약 네가 앞으로도 자신을 쓰레기처럼 대하고, 신이 만드신 이 지구를 쓰레기처리장처럼 대한다면, 난 네가 지옥에서 불타기를 진심으로 바랄 거야.” 글로리아 세인트피에르의 기쁨은 선명했고 깊었다. 조지는 이제껏 한 번도 여자에게 자기 자신에게나 그토록 큰 기쁨을 주어본 적이 없었다. 순진한 그는 다음 단계가 결혼일 거라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그녀는 받아들였다. 좋은 결혼이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순수함의 끝이었다.
- 하룻밤만의 자유“저는 진짜 이야기가 좋아요.” “왜요?” “예상 밖의 전개가 없거든요.” “예상 밖의 전개가 싫으세요?” “다섯 살 생일날 폭탄 케이크를 받았거든요.” “먹을 수 있었어요?” “촛불은 작은 다이너마이트였고, 그놈들이 터지면서 방 안을 온통 케이크 천지로 만들어버렸죠.”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벽에 붙은 케이크 조각을 떼어 냈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느라고요.” “어려운 얘기네요.....” “아, 그렇죠.” (그리고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그게 바로 인생이에요. 위에 다이너마이트 막대기를 꽂은 케이크 같죠.” “그건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인생처럼 들리진 않는데요.” “아, 하지만 사실이 그래요. 정말 그렇죠. 그 다이너마이트는 내 앞에서 터져 버리려 해요.” ✦ “삶이 직선적인 것일까요?” “직설적인 해답이 있지 않아요?” “나의 세계에서는 안 그렇죠.” “어떤데요?” “당신의 세계에 의해 구부러져 있는 세계죠.” “당신이 잘 때 등의 곡선이 아름답긴 해요.” ✦ 힘이 포함되지 않은 아름다움이란 없다. 당신은 그걸 알아야 했다. 아름답지 않은 힘은 없다. 큰 바위를 들어올리는 것이나,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나.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큰 바위를 들어올리는 것과 같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편이 더 쉬울 것이고, 난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하는지 이유를 잘 모른다.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내 모든 힘을 쏟아야 하고, 모든 집중력을 동원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신이 하룻밤 자고 떠날 사람이 당신을 이렇게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 그러므로 당신이 내게 왜 좀 더 조용히 사랑해 주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 주겠다. ✦ “너 뭐하는 짓이니?” “광야에 가려고 했어요.” “거긴 아무것도 없어. 알잖아.”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 해도 없을 거 아녜요.”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게 있는 줄 아니.” “왜요?” “거기 아무것도 없다면, 넌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해. 공허함을 참을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없을 거야. 너는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속일 거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은 참말이에요.” “너 자신에게 하는 말은 이야기일 뿐이다.” “이것도 다 이야기일 뿐이에요. 어머니, 나, 먹 미든, 보물.” “아니, 실제의 삶이다.” “어떻게 알아요?” “아무도 그걸 보려고 돈을 내지 않으니까.” 어머니는 몸을 돌려 쓰러져 가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렇게 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난 뭐든지 내겠다.” “이렇게 살지 말아요. 바꿔 봐요.” “이해를 못하는구나, 도대체.” “뭘 이해 못한다는 거예요?” “이건 실제의 삶이란 말이다.”
- 내 이름은 루시 바턴
- 코끼리 가면
- 슬픔이 없는 십오 초노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생의 완벽을 꿈도 꾸지 못했으리 ✦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이부분이 갑자기 확 구림..) ✦ 그대는 말한다, 당신은 첫 페이지부터 파본인 가여운 책 한 권 같군요, 나는 수치심에 젖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묻는다, 여기 모든 것에 대한 거짓말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진실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덜 슬프겠는가, 어느 것이 먼 훗날 불멸의 침대 위에 놓이겠는가, 확률은 반반이다, 확률이란 비극의 신분을 감춘 숫자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계산법이 아닌가
-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인생은 저기 있는 게 아닐까. 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인생이 저기 있는 게 아닐지 몰라도 여기에는 확실히 없는 것 같아. 매 순간 레누가 절절하게 고백하는 질투의 감정이야말로, 우리를 이 책에 매어놓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우리가 가장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감정은,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질투와 나 자신에 대한 끝없는 불안이니까. 소녀를 여자로 만드는 것은 남자보다는 여자라고 생각해왔다. 엘레나 페란테는 그게 정확히 어떤 뜻인지를, 아주 두꺼운 네 권의 소설로 들려주고 있다. ✦ 문제는 웬만큼 배워서 한번에 고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편견에 기인한 생각을 뿌리 뽑겠다고 마음먹기는 쉬운데, 늘 어딘가에 생각의 조각들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더 간절히, 누군가가 나 대신 책임지고 모든 것을 정리해서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욕망을 느낀다는 이유에서 가이드는 있어서는 안 될 것이고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남이 만든 지도를 따르겠다는 게으름이야말로, 나 자신으로부터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노력을 떼어놓는 (그리고 타인에게 위임해버린 뒤 책임까지 전가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설령 지도를 만든다 해도, 업데이트 주기는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스스로 해결하고자 고민하지 않은 질문을 남이 만든 기준으로 답해준다고 바로 달라질 리 없으며, 시대와 지역에 무관한 절대 가이드가 있다면 그것은 경전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내가 스무 살 때 배웠던 몇몇 좋아 보였던 가치들이 이제는 낡게 보인다는 점이 기쁘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더 많은 것들이 좋아졌고, 나 자신이 더 멀리까지 왔다는 믿음이 생긴다. 동시에 지금의 내가 믿고 있는 가치들 또한 매번 점검하고 업데이트 또는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닿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며 과거의 인간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가. 지금 이 시점에서의 고민, 옳다고 믿는 것들을 책에 쓰면서 가까운 미래에는 이 책에서 하는 말이 까마득한 옛날 일로 느껴지기를 바란다. 그러니 되뇐다. 가이드 없음, 전진 가능.
-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자기소개를 하자 우에노 선생님이 “미나시타 씨, 시를 쓰신다면서요?”라고 물었다. 순간 움찔했다. 우에노 선생님이 시라고 하니까 죽음이 떠올랐다. … 나는 일본이란 국가가 국민의 삶이 어떤지 그 내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희생만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가 이토록 살기 힘든 사회가 됐는데, 이토록 아이를 키우기 힘든 사회가 됐는데, 껍데기만 남은 가족 규범에 집착한다. 개성과 다양성을 중시한다고 기치를 내걸었지만, 실상을 보면 극히 균질적인 생활만 허용한다. 그 뿌리에 있는 상상력의 빈곤이 두렵다. 이 나라는 사회가 변할 때 항상 여성의 힘을 이용해 왔다. 고도성장기에는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와 기업 전사가 된 남성들을 온 힘으로 지원해 줄 전업주부로 여성을 이용했다.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복지 재원이 부족해지자, ‘일본형 복지사회’랍시고 여성이 가족 내부에서 돌봄을 책임지라고 한다. 이제 생산이 가능한 인구가 감소하자, 여성의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동시에 저출산에 대응해야 하니 출산이나 육아도 해야 한다고 한다. 종전의 가족 규범을 따르지 않는 여성과 이런 여성의 아이들에게 국가는 아주 냉담하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지원이나 배려를 하지 않고, ‘죽음’으로 향하는 제도만 고집한다. 능력도 시간도 없는 내가 숨을 할딱거리고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근대 가족’이란 망령이 보인다. 미래 세대 아이들이 죽은 규범,아니 사라질 수밖에 없는 규범에 사로잡혀 있도록 둘 수는 없다.
- 죽은 숙녀들의 사회누워 잠 못 이루던 밤들, 내가 걸지 않은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윌리엄 제임스가 나타나기를 바라던 밤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왔다. 지난 삶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좀더 나이들고 좀더 자신있는 모습으로,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때로 그는 침대 끄트머리에 가만히 앉아 내가 잠들 때까지 담요 아래로 발을 주물러주곤 했다. 때로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보통은 죽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만드는 깊고 깊은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럴 때면 제임스는 상냥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어스름이라고 생각해라. 땅을 보고 길을 찾기가 무척 어려울 때지. 앞으로 어둠은 더 짙어지겠지만 그땐 하늘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제임스는 어스름 속을 헤매다가 문득 자신에게 삶의 방향을 직접 결정할 자유의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는 철학적 개념이었지만, 그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자신에게 강요된 믿음을 거부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게 순전히 우연으로만 여겨지진 않는다. “내가 처음 자유의지로 행한 건 자유의지를 믿는 것이었다.” 그날 제임스는 일기에 적었다. 북극성을 처음 찾은 날이었다. 그는 그러고도 몇년을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고 우울감에 젖어 있었지만 방향만은 잡고 있었다. ✦ 레프 톨스토이가 아내를 강간했다고? 윌리엄 S. 버로스는 아내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었다고? 로만 폴란스키는 열세살 소녀를 항문 강간했다고? 큰 틀에서 생각해 볼 때 그게 진짜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지만 아내는 다르다. 아내가 천재의 발목을 잡으면, 화가 나서 벽난로에 캔버스를 던져넣거나 무의식 속에서 어떤 시구를 떠올리고 있던 남편을 방해해서 그 구절을 아주 사라지게 만든다면 우리는 결코 그녀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게 지금것 노라가 문맹, 재미없는 사람, 잡년으로만 그려진 이유일 거다. ✦ 걸으면서 나는 트리에스테에 정착하여 이 여관을 사들이고 위대한 여행가였던 버턴의 이름을 붙이는 상상에 빠진다. 이곳에 정착한다면 나도 나의 걸작을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른다. 크레이그리스트에 광고를 낼 수도 있다. ‘내 아내가 될 남자를 찾습니다.’ ✦ 어머니에게서 충분한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해 불행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한다. 비슷한 선택을 한 아무 여자에게나 자기 어머니의 얼굴을 투영하고 신나게 분노를 토해낸다. 반면 아버지들은 면피권을 받는다. 기대치가 워낙에 낮아서 발레 공연을 천번쯤 빠지고 생일을 열번쯤 까먹고 크리스마스카드에 이름 철자를 틀리게 적더라도 (아빠도 참!) 여전히 존경받는다. 반면 어머니들은 독심술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가 무얼 필요로 하는지 알아맞히지 못한다는 이유로 상처를 줘서 몇년간 심리치료를 받게 만든다. 리베카의 아들 웨스트 씨는 어머니를 공공연히 비난했으나 항시 자리를 비웠고 경제적으로도 무책임했던 아버지를 존경했다. ✦ 그리고 나는 리베카 웨스트의 책이 다른 책과 어떻게 다른지 깨닫는다. 웨스트의 책에는 여자들이 있다. ... 그들에겐 이름이 있고, 생각과 인생과 욕망이 있다. … 웨스트와 콘스탄틴은 그녀에게 목적지까지 태워줄지 묻는다. 여인은 대답한다.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걸으면서 어쩌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고 있어요.” 비평가 메리 만은 이 여인을 <검은 양과 회색 매>의 ‘히어로’라고 부르고, 나도 그에 동의한다. 구경거리가 끝나고 다른 곳에서 벌어진 다른 재난, 비유에 써먹을 만한 다른 분쟁에 관심을 집중하느라 발칸반도에서 시선을 돌린 뒤에도, 사람들은 우리가 보든지 말든지 삶을 살아갈 것이므로. 삶을 버티는 것이야말로 영웅적 행위다. ✦ 마거릿에게 일이 그렇게 중요했던 것 같진 않다. 그녀가 원하는 건 삶이었다. 마침내 삶을 쟁취하자, 원하는 삶을 얻기 위해 곁에 두고 싶은 사람들의 책을 출판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자, 잡지의 의의는 퇴색되었다. 기성 미국 문예계에 등을 돌리고 프랑스의 변방에서 집을 찾은 건 옳은 판단이었다. 문지기와 취향 생산자, 출판인과 권력자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그녀는 변해야 했을 테고
- 아내들의 학교
- 커버링: 민권을 파괴하는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그러나 불변성 논리가 정교화될수록 나는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오류라는 확신이 든다. 이 논리에는 결점이 있는데, 일종이 암묵적인 변명이라는 점 때문이다. 불변성 논리는 “나는 변하지 않을 거야.” 대신에 “나는 변할 수 없어.”라고 말함으로써 전환 요구에 저항한다. ... 물론 논리적 차원에서 불변성 논리와 타당성 논리는 공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 차원에서 이 두 항변은 수사적 논증으로서 서로를 무효화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어떤 정체성이 변할 수 없다면, 이것이 타당한지 여부를 따지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 역시 사실이라면, 즉 어떤 정체성이 타당하다면, 사람들은 이 정체성이 불변적인지 여부를 따지지 않을 것이다. 문학 교수 레오 베르사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잘못된 길에 와 있다는 가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라는 질문 자체를 도처에서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 누군가 전환을 요구할 때, 선택 가능한 두 가지 거절 방법이 있고 이들 간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우리는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변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인가? 우리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할 것인가? ✦ “너의 가장 큰 재능은,”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너 스스로를 직시하는 능력이란다.” 이 말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서부터 시작하여 몇 해 동안 계속해서 가슴에 박혀 있었다. 내 생각에 그것은 웃긴 말이었는데, 나는 자신을 심지어 말 그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거울 근처에 있으면 정말로 불안했고, 비스듬히 다가가지 않으면 거울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거울 쪽으로 쭈뼛쭈뼛 다가가는 식이었다. 마치 자신의 모습을 너무 빨리 보면 전신을 다 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철저히 분리시켜 놓았던 반쪽이 함께 덤벼들까 봐 두렵다는 듯이. 그래서 나는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용기 없는 나를 질책했다. 지나고 보니, 나는 스스로에게 누구보다 조심스러웠다. 보지 않으려는 나의 욕망이 자기 보호의 한 형태였음을 알고 있다. 나는 자신의 첫 번째 관객이었고,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곁눈질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내가, 불규칙적이긴 했지만 준비를 하는 중이라는 뜻이었다. ✦ 아마도 우리 중 누구도 낭만적 사랑을 천부적 권리라고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있어야 이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자라면서 나는 내가 어떤 단어와도 운율이 맞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마치 ‘실버’나 ‘오렌지’라는 단어처럼 밝게 빛나지만 소네트는 엉망이 되고, 언제나 혼자 떠돌아다녔다. 먼 곳에서의 대화 소리를 듣는 것처럼, 어디선가 사랑이 진행 중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내가 가는 길 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폴을 품에 안고, 햇빛에서 그늘로 시선을 옮길 때 그의 눈꺼풀 아래 눈동자는 어떤 색깔일까 궁금해 하는 것은 정말로 엄청난 일이었다. 벗은 몸의 표면이 타인의 피부에 의해 충분히 압박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 누구도 적절하게 쓴 적이 없다. 이는 자아가 느리게 해체되는 과정이고, ‘나’를 ‘나 아닌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본능이 중지되는 과정이다. 다른 세기였더라면 이 필수불가결한 따뜻함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죽었으리라는 확신에 몸을 떨었다. 나는 폴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는 나의 룸펜, 실체가 있는 사람, 영광스러운 도치이자, 상상을 달래러 온 현실이었다. 잠에 빠져들면서, 나는 지금 여기서 모든 것이 멈추었으면 했다. ✦ “난 출근해서는 회의에 어린 아들을 데려온 동료에게 멋진 아빠라고 칭찬을 하지. 그게 나를 미치게 해. 만약에 내가 그랬다면, 그건 커리어 자살행위였을 거야. 여자는 집에서 애를 더 많이 보고 직장에서는 그걸 숨겨야 하지. 남자는 집에서는 애를 덜보면서 직장에서는 숨기지 않아도 되고.” ✦ 재닛은 의과 대학에 진학하면서 문신을 했다. 그녀는 필립 러바인의 시에 나오는 파란 별을 골랐다. 그 시에서 별은 한 남자의 가슴 위에서 작고 완벽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 남자는 “전구의 빛”을
-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이상한 정상가족📝 삶은 개인적으로, 문제 해법은 집단적으로 하는 것 - 스웨덴과 한국의 차이 ✦ 블룸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상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낯선 사람을 친구와 동등하게 느낄 정도로 공감의 기울기가 평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20세기 최악의 유토피아적 이상과 다르지 않다”라고까지 신랄하게 비판했다. 핑커는 공감은 이타성을 촉진할 수 있고, 다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의 관점을 취하면 그 계층에게 공감이 확대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입의 문명’을 추구하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족벌주의처럼 감정이입과 공정성이 상충되는 예도 많기 때문이다. 핑커가 ‘네 이웃과 적을 사랑하라’보다 더 낫다고 추천한 이상은 다음과 같다. “네 이웃과 적을 죽이지 마라. 설령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의 선을 정하는 게 먼저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는 공감의 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물론 필요하지만 이를 개인의 도덕적 과제, 감성의 영역으로만 남겨두어선 안 된다. ‘우리’의 폭을 넓히려는 교육이 공교육에 제도적으로 포함되어야 하고, 차별금지법과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게 우리를 같이 살아가게 해주는 공감의 제도화다. 역지사지하고 공감하는 능력보다 사적 관계에선 예의, 공적 관계에선 정책과 제도가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인간적인 장치다.
- 책기둥끝 끝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 끝처럼 서 있잖아 ✦ 입장모독 신은 부하들을 시켜, 세계에 입장하는 이들에게 수고비 대신 코스트코 빵을 나눠 주었다 사람들이 태어났다 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우리는 모여 골똘히 생각했다 왜 우리들은 빵을 받지 못한 걸까? 1. 옷이 한 벌밖에 없었다 목둘레가 해진 런닝구만 걸치고 아랫도리 없이 입장하려 들었다 2. 영국식 파이프 담배 모양의 영혼을 소망하는 것으로 신성모독을 했다 3. 성당 의자에 너무 오래 앉아 있는 여자를 보며 그 모습이 상처 난 부위에 딱지 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4. 매일매일 신나는 꿈을 꾸었고 그래서 꿈과 현실을 바꿔치기하고 싶었다 5. 신을 보며 저 사람은 소화기관에 작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6. 제대로 된 사람, 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7. 그래서 학교를 잘 나가지 않았다 8. 세상의 모든 도서관이 불에 탔을 때 구하고 싶은 책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9. 책을 너무 많이 읽었다 10. 그래서 희망을 무서워했다 11. 그래서 미친 개가 자꾸 쫓아왔다 12. 그래서 뛰어, 뛰어, 뛰어다녔다 우리가 빵을 기다리고 있다
- 배고픔의 자서전나는 사람들에게서 감탄을 유발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감탄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감탄하는 것, 이것은 오묘하고도 절묘한 행위다. 두 손이 따끔따끔거리고, 호흡이 쉬워졌다. 독서는 감탄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이었다. 나는 자주 감탄하기 위해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 “그래도 내가 더 사랑해줬으면 하거든 나를 유혹해보렴.” 나는 이 말에 분개했다. 울부짖었다. “싫어! 엄마는 엄마잖아! 내가 엄마를 유혹할 수는 없지! 엄마는 당연히 나를 사랑해 줘야지!” ✦ 문학적 아름다움을 경험한 일을 남에게 전달한다는 것이, 마치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자기 애인의 매력을 전달하는 것만큼이나 힘들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혼자 저절로 그 아름다움에 도취하지 않고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험이다. 이것은 나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 글쓰기는 내게 역동적인 밀어내기, 짜릿짜릿 쾌감이 느껴지는 두려움, 끊임없이 거듭나는 욕망, 관능적인 필요에 다름이 아니다.
-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다 ... 여름은 아주 짧았다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다, 생각하던 무참한 때였다, 짧았다, 는 내 진술은 순간의 의심에 불과했다 길어서 우리는 충분히 울었다 ✦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 나의 출생지는 우연한 감염이었네 ... 우연한 감염 끝에 존재가 발생하다가 갑자기 뚝 끊겨버리는 적막의 1초 // 어디론가 가버린 태아들은 태어나지 않은 오후 5시에 흘러나올 검은 비 같은 뉴스를 들으며 구약을 읽을 거야 그 뒤에 흘러나올 빗물 같은 레게 음악을 들으며 바빌론 점성가들에게 문자를 보낼 거야 // 모든 우울한 점성의 별들을 태아 상태로 머물게 해요, 얼굴 없는 타락들로 가득 찬 계절이 오고 있어요, 라고 ✦ 동쪽에는 지나가지 못하는 나라가 있고 // 이 도시 사람들은 동쪽을 바라보며 희망은 맨 마지막에 죽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이라는 것이 너무나 뜨거워 잡을 수가 없을 때 희망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 희망을 신뢰한 적은 없었으나 흠모하며 희망의 관광객으로 걸은 적은 있었지 별이 인간의 말인 희망을 긴 어둠의 터널에 가두고 먼지로 마셔버리는 것을 본 적도 있었지 ✦ 푸른 별에는 당신의 눈동자를 가진 쥐가 산다고 나는 말했지요, 당신, 나와 쥐의 공동체를, 신화는 실험실에서 완성되는 이 불우한 사정을 말할 때 // 내 손을 잡아줄래요? /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 그 막연함도 들어볼래요? // 이건 불행이라고, 중얼거리면 / 모든 음악이 전쟁의 손으로 우리를 안아주는 그런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 이건 사랑이라고, 중얼거리면 / 모든 음악이 검은빛으로 변하는 그런 처참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 다만 손을 잡아달라는 간절한 몸의 부탁일 뿐입니다 / 내가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을 가진 쥐가 당신에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 얼어죽은 국회에게, 라는 편지도 맞아죽은 은행에게, 우주로 납치된 악몽에게, 달에 있는 나의 거대한 저택에게, 라고 시작되는 편지도 어떤 편지도, 아니 내가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식물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 악몽을 파는 가게 1
- 문학소녀: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남들과 달라지겠다는 그 허영심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성장해온 출발점이 아닌가? ✦ 현실 세계에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지만 문학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고, 본질적으로는 평범했지만 생의 어떤 특정한 순간의 상황과 우연의 힘을 빌려, 잠시 동안 특별할 수 있었던, 그리고 그 시절을 두고두고 추억하며 자기위안을 동력으로 삼는 수많은 사람들의 대표 명사로서 전혜린의 힘은 강력하다. … 전혜린은 어떤 의미에서 예외적으로 돌출된 존재라기보다 익숙한 패턴의 일부였고,
- 아픔이 길이 되려면
- 미나수정은 계속해서 젤리를 먹는다.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도피적이야. 벽장 속이 좋아봤자 벽장 속이지. 벽장 속에서 행복해봤자 벽장 밖에선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알아야 하는데. 미나. 젤리가 되고 싶었니.” “벽장 안은 넓어서 벽장 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벽장 밖을 좀 생각해봐야지. 이건 아주 달아. 그래봤자 벽장 속이지. 그러나. 나는 내일 정말로 학교에 가기 싫지만 갈 거야. 나는 여기서 나가기 싫지만 나갈 거야. 진짜야.” …. 갑자기 수정은 자신이 더이상 미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이 비밀스러운 이유는 비밀만이 사랑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미나의 비밀을 손에 넣었으니 수정은 이제 더이상 미나를 사랑할 수 없다. 이제 그녀가 미나를 순수하게 경멸할 수 있다는 의미다. 수정은 미나를 지우며, 계속해서, 젤리를 씹어먹는다. 평소처럼 모든 불필요한 기억들이 빠르게 지워져간다. 시간은 여전히 밤 아홉시 이십분에 멈추어져 있고, 벽장 속은 크고 넓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우리 이지는 꿀벌 조련사야.” “내가요?” “그래, 너.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야.” “서툴렀어요?” “천만에. 아주 훌륭했어. 그걸 몰랐던 거니?” “아뇨. 미친 짓이라고 해야 하나? 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아. 아주 멋진걸.” 루스는 허리를 굽혀 이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넌 멋진 꿀벌 조련사야, 이지 스레드굿. 그게 바로 너야…….” 이지는 루스를 보고 마주 웃으며 그녀의 눈에 비친 맑고 푸른 하늘을 들여다보았다. 여름철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렇듯 이지는 마냥 행복했다. ✦ 늘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 점차 사랑을 느끼게 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루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지가 환하게 웃으며 벌꿀이 든 병을 건네주려 했을 때, 그토록 억제하려 했던 감정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이지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안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날 울음을 터뜨렸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터였다. ✦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 어둠 속의 희망우리의 현재 위치와 과거 위치를 견주어봄으로써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 하나 있다면, 그건 상상 불가능이 일상적 조건이라는 사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거의 절대 한눈에 들어오는 직선도로가 아니며, 우리의 직관은 물론이고 맹점마저 받아들임으로서 대비해야 하는, 뜻밖의 일과 선물과 고통이 도사린 구절양장의 길이라는 사실이다. ... <총과 돈을 가졌으며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암암리에 결심한 듯한 저들의 권력이 얼핏 보기에 압도적이라 해서, 정의를 위한 투쟁을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 압도적으로 보이는 저 권력이 (앨라배마와 남아프리카의 흑인이건,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베트남의 농민이건, 폴란드, 헝가리, 소련의 노동자와 지식이긴이건 간에) 사람들의 도덕적 열의, 결단, 단합, 조직, 희생, 재치, 기발함, 끈기 앞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거듭 또 거듭 입증됐다. ✦ 인과론은 역사가 전진한다고 가정하지만, 역사는 군대가 아니다. 그건 서둘러 옆걸음 치는 게이고, 돌을 마모시키는 부드러운 물방울이며, 수세기에 걸친 긴장 관계를 깨뜨리는 지진이다. 때로 한 사람이 어떤 운동의 영감이 되거나 한 사람의 말이 몇십년 뒤 그리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열정적인 몇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때로 그들이 거대한 운동을 촉발하여 몇백만이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때로 그 몇백만을 똑같은 분노나 똑같은 이상이 뒤흔들면, 변화는 마치 날씨가 바뀌듯 우리를 덮친다. 이런 모든 변화의 공통점은 상상에서, 희망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희망하는 건 도박과도 같다. 그건 미래에, 당신의 열망에, 열린 마음과 불확실성이 음울함과 안정보다 나을 가능성에 거는 것이다. 희망하는 건 위험하지만, 두려움의 반대다. 산다는 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기에.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지은 멋들어진 우화 하나를 소개하자. 13세기가 막바지로 다가갈 무렵, 신이 우리에 갇힌 표범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이 감옥에 살다 죽게 되는 건, 내가 아는 어떤 인간이 널 몇 번 본 뒤 잊지 않고, 네 형상과 상징을 우주의 얼개 안에 정해진 자리가 있는 한편의 시 속에 자리잡도록 하기 위해서다. 너는 갇혀 고통을 겪지만, 너로 인해 그 시가 단어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그 시의 제목으니 ‘신곡’이고 표범을 보게 되는 인간은 단테다. 어쩌면 슬레이메노프가 그 모든 시를 쓴 건 어느날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서서 시가 아니라 선언문을 낭독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룬다티 로이가 자신을 국제적 작가의 반열에 쏘아올린 매혹적인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을 쓴 것도 그가 댐과 기업과 부패와 지역성의 파괴를 반대하고 나섰을 때 사람들이 주목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시도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지구가 유린당하는 데 반대했는지도 모른다. 몇해 전 친구 하나가 편지를 보내 운동보다는 글쓰기의 서정적 목표에 초점을 맞추라고 권하기에, 다음과 같이 내가 답했던 적이 있다. “가려진 것,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 시장에 내놓을 수 없는 것, 경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지역적인 것, 시적인 것, 상궤에서 벗어난 것 등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기업 주도 지구화에 저항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그래서 그런 것을, 당장 실천하고 예찬하고 연구할 필요도 있는 거지.” … 1940년 죽기 전 한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저 비길 데 없고 독특한 독일계 유대인 에세이스트이자 문예이론가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오늘 무사히 발표하는 글 한줄 한줄은–우리가 그 글을 내맡기는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 암흑의 힘에서 쟁취한 승리다.”
-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나는 어디까지 가려고 이 차를 탄 걸까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따 내리기 전에 그 대사 한 번만 더 들려주세요. 대체 어디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그다음 회부터 완결까지 듬성듬성 건너뛰었고 결말이 기억 나지 않는데, 주인공은 잃어버린 신수를 어떻게 되찾았나요? 못 찾았어요? 끝까지 신수 없이 경기를 해냈어요? 그 시대 만화치고 혁명적인 발상이긴 한데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더 만화적이네요. 신수의 힘도 빌리지 않고 최소한 어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행하거나 도약했다는 거잖아요? 단지 주인공이 뒤늦게 정신 차리고 그전까지 직진 일변도이던 길의 방향을 꺾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 그 길이 내가 가려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알게 되는 거죠? 어디까지 갔을 때 사람은 자신의 심연에서 가장 단순하며 온전한 것 하나를 발견하고 비로소 되돌아올 여지를 찾을 수 있거나, 아니면 되돌아올 길이 없어 그대로 다리 아래로 몸을 던져버리게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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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스
- 저 뚱뚱한 남자를 죽이겠습니까?
- 풀이 눕는다상상력이 부족한 내 머릿속에서 세상은 아주 단조롭고 무엇이든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세상은 번번이 내 단순한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어 무지갯빛으로 펼쳐졌다. 그래서 나는 온갖 것들에 쉽게 매혹되고 쉽게 감동했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이미 천국이 있는 인간이라면, 천국의 모든 색깔과 지옥의 모든 냄새를 자신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그런 인간이라면, 결코 나처럼 온 세상에 쉽게 매혹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에 쉽게 뛰어들고 어디든지 쫓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풀은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기에 모든 것에 쉽게 매혹되고 길 잃은 강아지처럼 아무나 쫓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려 깊은 애정에 이르지 못했다. ✦ Air, , ‘The Virgin Suicides’ ✦ 내가 풀의 그림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 형태와 색을 감싸고 있던 어떤 다정함이었다. … 왜냐하면 나는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눈을 꼭 감고 그 다정함에 내 몸을 휙 던졌고, 그렇게 그 다정함이 감추고 있는 몇 가지 사소한 것들에서 눈을 돌렸다. 그가 그 다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해버렸다. ✦ 모든 게 선명해졌다. 나는 시집들을 모두 던져버렸다.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 앞으로 세 달 동안 하루에 한 편씩 백 편 쓸 거야. — 오. — 네 그림같이 죽이는 시를 쓸 거야. ✦ 그날 저녁 나는 술에 취해 울며 풀에게 나가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사과하는 마음을 담아 하트 모양의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한 손에 숟가락을 들고 선언했다. 오늘부터 달라질 거야. 다시 글을 쓸 거야. 책도 읽을 거야. 그리고 산책도 할 거야.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할 거야. 그리고 술도 끊을 거야. 아니……. 끊을 수는 없고 줄일 거야. 진짜. 많이 줄일 거야. 선언 끝. ✦ 왜냐하면 누군가 날 구해줄 테니까. 그리고 난 그게 풀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벌레 이야기
-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창밖에서는 달이 밝게 빛났고, 방 안의 모든 것이 희미하게 빛났지만 당신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당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난 살짝 겁이 났고 다시금 발가락이 움츠러들었지. 그러다 꿈에서 빠져나와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깼어. 어때, 대단한 꿈이지? 맙소사. 무슨 꿈인 것 같아? 당신은 아무 꿈도 꾸지 않지, 그렇지?” 아내는 커피를 훌쩍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그 내용을 꿈책에 기록해두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 가능세계도움의 돌 우리는 모든 쓸모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로 생각을 한다. 시장 앞 골목에 서서 고등어와 갈치 매달려 있는 돼지의 몸통과 잘린 머리를 본다. 차곡히 쌓여 있는 백합향 비누와 반쯤 돌아선 여배우의 얼굴이 늘어선 샴푸를 본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포터 트럭이 시동을 건다. 나는 너무 느린 스스로를 원망하지만 이것은 애초에 어떤 흐름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간이나 미러볼 혹은 죽음과 사랑을 소재로 삼았다. 특별한 것 센 것이 근원에 가까이 갈 수 있는 통로가 될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 실종된 형제에 대해 쓰고 폭력과 근친에 대해 썼다. 수치스럽고 즐거웠다. 파란 트럭의 속력처럼. 마침내 불을 밝힌 가로등 아래 연인들의 포개진 어깨처럼. 거대한 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므로. 사랑한다고 죽어버리라고 했다. 강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찢어진 타이어 속을 오가는 민물고기나 오래전에 투신해 앙상해진 몸을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씩 반복해서 말해야만 하고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중요하다. 잘린 머리들은 모두 다른 표정이라서 끔찍하고 남의 글을 훔쳐볼 때 쉽게 느끼곤 하는 자괴처럼 단순하다. 나는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흔들리는 긴 머리카락, 뼈에서 유추할 수 없는 원래의 모습, 마지막 목소리 같은 것에 몰두해야만 한다. 혼종에 대해 말하거나 쓰는 것 그런 담론 속으로 이끌려가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혼종은 없으므로. 우리는 혼종에 대한 혼종, 일종의 갈망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사라진 마을에 대한 복기이고, 그 마을의 나무 아래 있던 돌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돌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안다. ✦ 여름시 나는 이곳의 사람들에게 영화를 만든다고 거짓말했다. 그건 옛날에 사라진 왕국에 대한 이야기야. 왕국이 생겨날 때의 이야기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가 여왕이 되고 목이 잘려 죽기까지의 이야기야. 너를 꺼내고 싶다. 눈을 처음 본 아이들이 고개를 들어 아, 하고 혀를 내밀 때. 언덕 너머까지 달려가 사라져버릴 때. 두 손은 꽁꽁 얼어 있을 때. 나무 아래서 올려다본 벌집. 그것이 네 얼굴이었다.
- 어떤 소송날 약 올리려 할 때면 모리츠는 내가 예술가가 됐어야 했다고 말하지. 그 애는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이 나를 망쳤다고 생각했지. 눈앞에 보이는 대상뿐 아니라 보는 자신도 엄청난 원자 소용돌이의 일부분이고 그런 원자 소용돌이에서 만물이 생겨난다는 걸 항상 생각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어떤 대상을 관찰하며, 심지어 어떻게 사랑하는 존재를 바라볼 수 있을까 하고 모리츠는 물었어. 두뇌, 우리의 유일한 관찰 도구이자 이해 도구인 두뇌가 관찰 대상, 이해 대상과 같은 입자로 이루어졌다는 걸 어찌 견딜 수 있을까? 그러곤 모리츠는 소리쳤지. 스스로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물질이라니, 뭐란 말이지? 하고. … 그 애는 사랑을 위해 살고자 했어. 그 애 말을 경청하다 보면 사랑이란 그저 그 애 마음에 드는 모든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란 걸 알 수 있었지. … 천공기처럼 뇌에 각인을 찍어 이후 그 길로만 생각이 흐르도록 하는 문장들이 있어. ✦ “꿈속에서 나는 삶을 위한 도시를 보네. …타인에 대해. 도시에 대해. 삶에 대해. 그곳에서 나는 맨발로 공사장을 지나가며 지켜보네. 진창이 내 발가락 사이사이로 삐져나오는 걸.” “유치하고 끔찍해. 시인은 가둬버려야 해.” “벌써 그러지. 대중 선동죄로 팔 개월.” ✦ 마녀란 말은 울타리 타는 여자란 표현에서 나왔어. 마녀는 울타리 귀신이야. 울타리 위에 사는 존재지. 빗자루는 원래는 끝이 갈라진 울타리 버팀대였어. 울타리는 경계선이야, 미아. 울타리에 올라탄 여자는 문명과 야생 사이 경계선에 머물러. 이쪽과 저쪽, 삶과 죽음, 몸과 정신 사이에. 긍정과 부정 사이, 신앙과 무신론 사이에. 그녀는 자기가 어디 속하는지 몰라. 그녀의 영역은 그 사이야. ✦ 넌 그렇게 영리했어. 그 다음부터 나는 ‘비가 온다.’라고 말할 대마다 씩 웃지 않을 수 없었지. 비가 오나? 지금이 대체 무슨 계절이지? 누구나 창 앞 어두운 나무우듬지나 길 건너편 비스듬한 검은색 지붕을 봐야 해. 비가 오는지 알아낼 수 있게 빤히 바라볼 게 뭐라도 있어야지. 우리에겐 칠흑에 대한 기본권이 있어. 내가 그걸 위해 노력할 거야. 우리가 조금씩 어둠에 적응하도록 밤이 만들어졌어. 매일 밤 우리가 죽음에 적응하도록 잠이 발명됐어. 불을 꺼. 때때로 긴 생각의 여로 끝에 나오는 결과는 지금이 가을이라는 것뿐이지.
- 젊은 베르터의 고통
- 표류하는 흑발얘들아 나도 불가피하게 사람인데 너무한 거 아니니 ✦ 몇 번 죽어보면 살아날 수 있다고 했지만 영원히 살 것 같은 기분에 두려웠다 ✦ 임시로 숨 쉬는 것 같아 ✦ 나는 이런 부작용으로 그를 사랑한다
- 소년이 온다
- 명예로잘리에, 죽으러 가다 말은 그럴듯하게 잘하시는군. 엿이나 먹으라지!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누가 이런 말을 로잘리에에게 가르쳤는지 난 모른다. 어울리지 않으며, 문체적 부조화며, 내 산문을 해친다. 제발 정신 좀 차려! 그러기 싫어. 난 아파. 당신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거고, 누군가 당신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될 거야. 로잘리에, 그게 바로 차이점이야. 난 존재하거든. 그래서? 난 인성과 감정이 있고 영혼이 있어. 내 영혼이 불멸은 아닐지 모르지만 실제이긴 해. 왜 웃는 거야?
- 딸에 대하여이해라는 말 속엔 늘 실패로 끝나는 시도만 있다고 생각한 기억도 난다. 그럼에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뒤렌마트 희곡선
- 책 읽어주는 남자
- 더 나쁜 쪽으로내가 뭘 쓰냐고? 정말로 궁금해? 그렇다면 말해줄게. 나는 아주 자기도취적인 글을 쓰고 있어. 그건 자본주의에 대한 글이지. 아니, 파시즘에 대한 것인가? 사실 증오에 대한 글을 쓰고 있어. 열등감과 수치심에 대한 글을 쓰고 있어. 불안과 혐오에 대한 글을 쓰고 있어. 그건 패션에 대한 글이야. 패션과 혁명과 불안정 노동. 예술과 사회와 정치와 과학과 사랑과…… 그래. 나는 내가 전혀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써. (그게 나의 재능이지.) 나는 교양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대화에 관심이 있어. 실패한 삶과 불행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지. 어, 나는 오직 내가 전혀 모르는 모든 것에만 관심이 있어.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뭔가 몹시 이상하지 않아? 그건 우리가 잠들어야 할 시간에 깨어있기 때문인가? 지금 이건 마치 악몽 같지 않아? 그런데 악몽 아닌 꿈이 있어? 너는 악몽이 아닌 꿈을 꾸어본 적 있어? ✦ “You said maps and the people mother, you told me that you have maps and there are people on it, you said it is a perfect map and I am on it mother, I believed it, but it was a lie you deceived me, maps and the people were your own fantasy “ 바라는 게 있다면 그전에, 내가 진짜 망하기 전에 누가 날 지도에서 발견해주길. 제발. 하지만 누구도 지도를 읽을 줄 모른다. ✦ ……전에는 인간들이 말이라는 것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자해에 가까울지라도. 하지만 내가 말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게임은 끝나 있었다. 지도는 완성되었고, 내 위치는 아무데도 없었다. 아니, 지도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그것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작정이다(그렇다고 한다). 어리다는 것은 끔찍한 기분이다. 나체로 모기가 가득한 방에 들어가는 그런 기분. 허물어져가는 뭔가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말한다. “오, 내가 찬란했던 그때.” 엄마가 그랬다. “모기에 엄청 많이 물어뜯긴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 보건교사 안은영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 여긴다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 “엄청 차근차근 추근거리네.” “좋아해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꽃무늬만 입는다 해도.” 그리하여 인표는 자발적으로 꽃무늬 지옥에 걸어들어갔다. (…) 서로의 흉터에 입을 맞추고 사는 삶은 삶의 다른 나쁜 조건들을 잊게 해주었다. (…) 그 빛나는 얼굴이 인표의 수면등이었다. ✦ 저는 이 이야기를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습니다.
-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조지 : 나는 마비상태야… 술 때문이 아니라, 물론 술 탓도 있긴 하겠지만, 해가 갈수록 점점 뇌세포가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 같아. 이젠 마비가 되어서 우리끼리 있어도 당신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아. …설사 듣는다 하더라도, 나는 뭐든지 체로 걸러보지,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아, 그래서 사실상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듣지 않는 거지, 이게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 허니 : (변명 조로, 브랜디 병을 들어보이며) 난 라벨을 벗겨. 조지 : 우리 모두 라벨을 벗겨, 자기야. 세 가지 층의 피부를 지나 근육을 통과해 조직 옆 체액과 (닉을 보며) 조직도 여전히 체액이긴 하지, (다시 허니에게) 그리고 뼈에 도달하지……. 그 다음엔 어떻게 하는지 알아? 허니: (매우 관심을 보이며) 몰라요! 조지: 뼈에 도달해도 아직 다 간 게 아니지. 뼈 안에 여전히 뭔가 들어 있거든……. 골수…… 그게 우리가 목표로 하는 거야. (마사에게 기묘한 미소를 짓는다.) ✦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가는 누가 큰 나쁜 늑대를 두려워하는가를 의미하고 … 누가 거짓 환상이 없는 삶을 두려워하는가를 의미합니다”
- 세상의 생일
- 시녀 이야기무슨 이야기라도 털어놓다 보면, 적어도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기 있어서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사실로 믿을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당신에게 털어놓음으로써, 당신이 존재할 것을 의지로 명하는 바이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당신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그래서 스스로 견뎌낼 작정이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부분은 결코 당신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착하게 굴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무엇 하나 빼먹거나 생략하지는 않으려 한다. 아무튼 당신은 이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왔고, 내가 빠뜨린 이야기들, 별 건 아니라도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 왕들의 전쟁
- 한편 5호: 일제러미 리프킨이 예언한 ‘노동의 종말’은 결국 노동소득에 대한 자본소득의 우위라는 모습으로 실현되었다. 산업혁명이자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인 자본주의의 바탕인 프로테스탄티즘적 윤리는 노동의 종말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오늘날에는 근면한 노동이 아니라 자본이 자본을 낳는다. 자본주의가 성숙할수록 자본은 추상화되어서 돈이 돈을 낳는 것처럼 현상하는 반면, 노동은 그 어떠한 연대도 가능하지 않을 만큼 잘게 쪼개진다. (...) 노동하는 개인으로서의 ‘나’는 나의 노동을 통해 타자와, 더 나아가 세계와 관계 맺는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 맺음의 매개인 ‘나의 노동’은 내가 생산한 노동생산물로서의 상품, 더 나아가 화폐이며, 이 화폐가 나의 존재와 인식을 거꾸로 뒤집어 지배하고 세계 또한 거꾸로 뒤집힌 모습으로 형성하고 유지한다. 이것이 바로 화폐의 물신숭배적 권력이다. 화폐는 주식이라는 투자를 통해서든 심지어 도둑질을 통해서든 더 많이 가져오면 그만인 어떤 고정된 외부의 물체가 아니다. 그 권력이 우리에게 시사하듯, 화폐는 노동으로 형성된 관계 그 자체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이 아니라 주식투자를 통해, 소액주주의 자격으로 자본의 ‘파트너’가 됨으로써 돈을 벌 수 있다면 모두가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세상이 도래하게 될까? 그렇지 않다. 화폐를 창출하는 것은 노동이기 때문이다. ‘쥐꼬리’라는 표현이 드러내듯 노동소득이 없느니만 못한 수준으로 전락해도 노동이 화폐를 만든다는 점은, 그러니까 결국 자본이 아니라 노동이 사회의 근간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정치철학에서는 권력과 권리를 외연이 동일한 범주로 간주한다. 노동소득보다 자본소득이 우위에 선다는 것인 노동자의 권리는 점점 축소되고 자본가의 권리는 점점 확대된다는 의미다. (...)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권리를 향유하는 것은 개인이지만 그 권리의 쟁취는 항상 집단적 운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져 왔다고 갈파한 바 있다. 내가 노동자의 주식투자에 제동을 거는 것은 ‘땀 흘려 노동해 번 돈이 정직하고 선한 것’이라는 도덕주의적 비판도 아니고, 노동자가 비대칭적 정보 권력관계 속에서 주식 투자에 성공할 가능성이 낮아 ‘패가망신’할 수 있으니 ‘헛꿈’ 꾸지 말라는 조언도 아니다. 너무 힘들다는 문자를 남기고 과로사한 택배노동자, 비닐하우스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이주노동자, 코로나 19로 실직한 뒤 생활고로 극단적 선택을 한 항공사 승무원. 바닥으로 떨어진 노동의 권리와 오늘도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는 코스피 지수는 화폐라는 매개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노동자가 주식을 함으로써 자본의 파트너가 되면 자본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나의 소득을 주식에 넣는 만큼, 그러니까 동학개미가 힘을 모아 주식시장을 부양하는 그 화폐의 양만큼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자본에 양도하게 되고, 노종자가 노동을 통해 정당한 임금을 받아 낼 수 있는 힘, 일터에서 자본가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할 힘은 줄어든다. 도덕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경제학적,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내가 주식에 넣은 돈만큼 노동자로서의 내 권리가 줄어든다. 이것은 화폐를 매개로 하나의 논리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 나라 없는 사람지금 지구는 엉망이다. 그러나 과거에도 항상 엉망이었다. ‘행복했던 시절’ 따윈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지난 시절만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손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날 쳐다보지 마라. 그냥 이렇게 됐구나.” 늙은 바보들은 우리가 어떻게든 대공황이나 2차 대전이나 베트남 전쟁 같이 흔히 말하는 유명한 재난을 겪어낸 후에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자살까지는 아니어도 파괴를 유도하는 이런 그릇된 믿음은 소설가들 때문에 생겨났다. 수많은 소설에서 끔찍한 불행을 겪은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내뱉는 말이 있다. “나는 이제 여자가 되었다. 이제 나는 남자가 되었다. 끝.” 2차 대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댄 삼촌은 내 등을 철썩 치면서 “이젠 어른이 다 됐구나” 라고 말했다. 순간 삼촌을 죽이고 싶었다.
- 동성결혼은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가결론: 안 바꾼다! 바꿀 거라는 건 그냥 혐오 레토릭일 뿐
- 제 5도살장“그게 정말이지 클라이맥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그런 건 전혀 몰라.” 그가 말했다. “그건 네 밥벌이잖아. 내 밥벌이가 아니라.” ✦ 그리고 나는 현재에 관해 자문했다. 현재는 얼마나 넓고, 얼마나 깊으며, 그 가운데 내 것으로 챙길 것은 얼마나 되는가. ✦ 트랄파마도어에는 전문이 없습니다. 각 기호들의 덩어리는 짧고 급한 메세지입니다–하나의 상황, 하나의 장면을 묘사하지요. 우리는 그것을 하나씩 차례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꺼번에 읽습니다. 그 모든 메세지들 사이에 특별한 관계는 없습니다. 다만 저자는 모두 신중하게 골랐지요. 그래서 모두 한꺼번에 보면 아름답고 놀랍고 깊은 삶의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에서 사랑하는 것은 모두가 한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경이로운 순간들의 바다입니다. ✦ 하느님, 저에게 /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 바꿀 수 있는 용기와 / 언제나 그 차이를 / 분별할 수 있는 / 지혜를 주소서. 빌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었다. ✦ 그들 둘 다 인생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에서 본 것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로즈워터는 독일군 병사라고 오인하여 열네 살짜리 소방수를 쏘았다. 뭐 그런 거지. 빌리는 유럽사 최대의 학살을 보았는데, 그것은 드레스덴 폭격이었다. 뭐 그런 거지.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과 우주를 다시 만들어내려 하고 있었다. 과학소설이 큰 도움이 되었다. ✦ 로즈워터는 언젠가 과학소설이 아닌 책에 관하여 빌리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삶에 관해 알아야 할 것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다 들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로 충분치가 않아.” 로즈워터는 말했다. ✦ 이 이야기에는 등장인물이 거의 없고 극적인 대결도 거의 없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병든데다 엄청난 힘에 휘둘리는 무기력한 노리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전쟁의 주된 영향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등장인물이 되는 것을 포기한다는 점이다. ✦ So it goes.
- 그럼에도, 페미니즘
- 걸 온 더 트레인
- 82년생 김지영
- 체스의 모든 것
- 드링킹가방 속에 든 스카치는 내게 안전을 보장해주었다. … 그것은 욕구가 지나치게 강렬해졌을 때도 나 자신을 돌볼 수단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 그리고 언젠가부터 나는 아버지의 그런 말들이 가감없는 사실의 진술인지, 그가 말함으로써 사실이 되어버린 암시인지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나는 그게 좋았다. 감정을 그렇게 다루는 사람들, 속마음을 줄줄 흘리면서 통찰이나 분석적 사고니 하는 것들을 비웃어주는 사람들 틈에 있는 게 좋았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게 좋았다. 술집에서 그들과 나란히 앉아 똑같이 감정을 쏟아내면 해방된 도락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나는 술을 마시고 그런 사람이 되는 게 좋았다. 뻔뻔하고 반항적이고 냉소적인 사람, 빈정대는 이야기로 친구들을 웃길 수 있는 사람, 그것은 내가 평생토록 찾아 헤맨 것이었다. .. 알코올이 ‘딸각’하고 스위치를 올리자 익숙한 마법이 시작되었고, 나는 웃고 춤추고 섹스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술이라는 정신의 마취제 없이도 하루하루를 밀고 나가는 사람들은 외부의 힘에 막연한 기대를 하지 않으며, 개인의 진정한 힘과 희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즉 자기 앞에 닥친 과제들을 하나하나 해내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뚫고 지나가는 것과 그것을 외면하는 것의 다른 점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멍청히 앉아 술을 들이켜다가 취하는 것뿐이다.
- 구르브 연락 없다멘도사, 바르셀로나에 바치는 오마주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오십 년 이상 그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 도시에서 모두는 익명이 되고, 모든 것은 전혀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기능한다. … 사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그러다 보니 생식적인 관계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 구르브. 왜?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넌? 너도 찾았으니, 이제 다시 우리 별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어. 아, 그래? …자? 왜, 구르브? 넌 우리 별로 돌아가고 싶어? 그야 물론이지. 너는 안 그래? 아, 몰라, 난 모르겠어. 사실 우리 별은 너무 따분하고 고루해.
-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오늘날 우리에게는 여성이 교육받는 일 자체는 당연하다. 그러나 조금만 이전 시대로 가보아도 여성은 교육 대상으로 고려되지조차 않았다. 여성이 직접 선언문을 게재하고, 요구하고, 실패하고, 또 요구하고, 어느 단체는 망하고, 또 다른 단체가 생겨나고, 누군가 전국을 돌며 순회강연을 하고, 호소하고, 모금을 했다. 시대와 맞물려 요구가 조금 더 관철되고, 때로 좌절되는 과정을 겪으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이 역사는 자주 생략되어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모두에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었던 양 착각하게 된다. ✦ 여성에게는 역사가 없다는 말이 있다. …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있었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 세상은 분명 변했다. 정말 낯설던 이들의 목소리는 이제 조금 덜 낯설어졌다. 여전히 오래전의 그들과 똑같은 소리를 해야만 하는 이들이 있지만, 오늘날엔 좀 덜 외로워졌다.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 이들의 절망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그들이 희망하던 세상에 한 발짝 다가갔다. 그리고 내 앞에 누가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공들여 찾아낸 그들은 지금의 우리와 놀라우리만큼 닮았다. “주동자는 없다”고 말하던 동일방직의 여공과 “우리가 배후다”라고 외치는 이화여대의 투쟁, 가락지와 비녀를 모아 세운 근화여학교와 크라우드 펀딩으로 성사되는 수많은 페미니즘 프로젝트, 소속된 단체도 규약도 없이 개인으로 존재하던 영 페미니스트와 오늘날의 우리. … 우리는 불편함을 직시하면서 같은 곳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가시적인 움직임이 없어 흔히 침체기라고 평가받던 시기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걸었다. 기관으로, 연구소로, 각자의 자리를 만들어 내실을 다져갔고 그곳에서 또 다른 움직임에 동참한 이들을 맞이했다. 그러니 역사를 가진 쪽은 사실 누구인가? 나는 유구한 역사의 결과물이다.
- 아무도 아닌양의 미래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이었다. 비정한 목격자. 보호가 필요한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은 어른. 나는 그게 되었다. ✦ 명실 그녀는 실리의 책들과 더불어 이 집에 남아 있었다. 수만 권의 책, 그걸 담은 선반. 그걸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그게 그녀의 등 뒤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매 순간 그 소리를 들었다. 흡족하게 그 소리를 들었다. 실리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그 책들 앞에 서서 그 이름들을, 그 이름들이 새겨진 책들을 골똘하게 노려보았다. 그게 실리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이까짓 것들. 엄청난 활자들, 이야기들, 실리의 이름이라고는 한 점 찾아볼 수도 없는, 아우성들. 실리는 그것을 읽으려고 자주 밤을 새웠고 그러고 나면 아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느 때 그녀는 실리가 그 책들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 장 한 장 실리가 죽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책장에서 날아오르는 각질들, 실리의 숨을 틀어막는 먼지들, 그런 것을 뿜어내며 형편없이 낡아가는 사물들. 그녀는 그 책들 위로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성냥을 던지고 싶었다. 그 이야기들에 이르는 이야기를 쓰지 못해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실리는 또 어땠나. 그까짓 것, 그까짓 것들이 실리를 죽였다.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어느 것도 펼쳐보지 않았다. 펼쳐보는 이 없으면 속수무책인 책들. 한 권도 버리지 않고 그 책들을, 그 책장을…… 닥치게 만들었고 죽게 내버려두었다. 이렇게 앉아서 몇 번의 겨울을 더 맞게 될까. 몇 번의 봄과 몇 번의 여름을. 그녀는 생각했다. 죽은 뒤에도 실리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난처한 상상인가. 얼마나 난처하고 허망한가. 허망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그녀는 노트에 만년필을 대고 잉크가 흐르기를 기다렸다. 제목을 적고 쉼표를 그리고 이름을 적었다. ✦ 웃는 남자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 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나가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그것을 생각해왔다. ✦ 복경 사람이 날 때부터 존귀하다면 그것을 스스로 알아채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학습되는 것입니까? 스스로 귀하다는 것은…… 자존, 존귀, 귀하다는 것은, 존, 그것은 존, 존나 귀하다는 의미입니까. 내가 존귀합니까. 나는 그냥 있었는데요 언제나 여기저기에 있었는데요. 이렇게 그냥 있어도 존귀할 수 있습니까. 존귀하다는 것, 그것은…… 아무래도 상태는 아니지 않아? 정태靜態가 아니고 동태動態가 아닙니까? 가만히 있어도 존나 귀하다면 그것은 일단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냥 있는 것 자체로 존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인간에 속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요. 왜냐하면 인간은 똥을 싸는 데에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생물이니까 병원비도 생활비도 벌어야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은 어떻습니까. 괜찮습니까. 자존하고 있습니까 제대로……. 존귀합니까. 존나 귀합니까…… 누구에게 그것을 배웠습니까. 나는 웃는 인간입니다. 언제나 웃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