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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 줄 필요는 없다

이라영 · 문예출판사 · 2020

나는 분노한다.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으려고 읽고, 보고, 쓴다. 수시로 우울하다. 우울함과 잘 살아가기 위해 읽고, 보고, 쓴다. 분노와 우울을 오가는 와중에도 오만이 싹튼다. 내 오만을 다스려 무지를 발굴하기 위해 읽고, 보고, 쓴다. 몸을 움직여 이야기를 전하러 가는 그 ‘북우먼’들처럼 나도 꾸준히 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그렇게 성실하게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 믿는다.


애니 프루의 말대로 실로 우리는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카프카적인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여자의 몸을 깔고 앉아 예술을 읊조리는 후안무치의 예술가연 하는 인간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냉소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야 한다. 매번 망하지만 매번 새로 사업을 시작하는 와이오밍의 한 가족사를 다룬 애니 프루의 단편 〈어느 가족의 이력서〉처럼 저항의 이력서를 작성해야 한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북 위에 그림을 그리는 병사의 심정으로, 스스로의 품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치열함은 시간을 뚫고 살아남는다. 예술도 운동도 거기에 있다.


100년 전이라면 나도 치료라는 이름으로 감금되거나 전기의자에 앉았을지도 모른다. 내 안에 있는 열 명, 혹은 백 명의 미친 여자들의 안부를 물으며 아직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죽지 마, 미쳐도 돼, 라고 속삭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