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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 동아시아 · 2023

과학적 탐구란 무엇일까? 언젠가 한국의 트랜스젠더를 대표하는 인구 집단에 대한 데이터가 만들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데이터를 분석하는 다음 세대의 연구자들은 우리가 쓴 논문들의 대표성이 부족했다고 정확하게 비판할 것이고, 그때에는 2016년 연구비를 구할 수 없어 시민들의 돈을 모아 진행했던 347명 트랜스젠더가 참여한 우리의 연구는 과거의 유물처럼 서문에 인용될 것이다. 연구자로서 그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그렇게 우리를 디딤돌 삼아 더 깊고 풍성한 연구가 세상에 나올 테니까. 과학이 절대적으로 옳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한 시대의 가용한 자원을 활용한 최선의 설명이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말하건대 우리의 연구는 과학적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당사자들의 투쟁을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연구자는 이미 존재하는 사실관계에 따라서, 그 데이터에 기반해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 합리성은 종종 보수적인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역사는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에 도전하며 판에 균열을 만들어 낸 이들이 열어왔다. 많은 경우, 연구자의 언어는 그 변화를 사후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제 학문에서도 거리를 두고 시스템을 관찰하고 보다 냉정하게 분석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세상을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려면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내놓는 과정이 과학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생산되지 않은 지식을 생산하는 일은 누군가가 매우 의도적으로 준비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나와 내 동료들이 변화가 시급하다고 생각하며 당장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현실이 변화할 가능성은 요원합니다. 일반화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과학의 자정능력도 실은 그 구체적인 과정을 바라보면 누군가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안간힘을 쓰며 노력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정치적으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순간, 이 책의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에 맞는 사실들만 모아 말하며 상대 진영을 비난할 수 있는 길을 찾고 끝내면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이 나아가는 건 답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질문을 잃지 않아서 나아가는 거예요. 중요한 질문들을 놓지 않고 있어서, 삶에 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갖고 있어서 그 긴장으로 나아가는 거거든요. 자신의 정치적 진영을 옹호하는 수준에서 천안함 사건을 이해하면 그 긴장이 ‘정리’가 되어버려요. 안심이 되고 편안해지거든요. 그럼 이 책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질문이 되지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