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의 대상은 사람이 아닌 인구이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국력’을 계산하고 조절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인간이라는 종의 일부로 간주하는 통계 문제에서는 “개인으로부터 개별성을 박탈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가 아니고, 인구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친구이고, 이웃이며, 가족이고, 연인이고, 제자이고, … 우리는 고유한 타인과 특별한 관계들을 맺으며 살아가는 고유한 존재들이다.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그리고 나와 마주치는 이들을 ‘사람’으로서 대한다는 의미일 테다. 그가 통계적으로 나와 먼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통계적 평균으로서 정상’의 기준에서 지극히 무능해 보이고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그의 고유한 삶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꿈이 개인과 사회가 미래를 그리는 소망의 이미지라고 할 때, 결혼에는 사랑과 안정의 꿈이 담겨 있다. 이것은 대단히 행복한 삶을 위한 결정이 아니라 단지 평범한 삶을 위한 결정일 때가 많았다. 결혼하지 않을 때 생기는 건 단지 눈치밥 먹을 일만이 아니라, 실질적 고립과 외로움이며, 그것은 사랑과 안정의 의미와 실제를 규정하는 유일한 권위를 결혼이 독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며 무수히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안정을 경험한다. 인터뷰이들이 나누어 준 삶의 단면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결혼의 이유만이 아니었다. 결혼이 가져다 주는 안정과 편안함만도 아니었다. 어쩌면 반드시 결혼이 아니었더라도 괜찮았을 세계와 결혼 때문에 오히려 놓칠지 모를 사랑과 안정 또한 그곳에 있었다.
관계적 안정과 경제적 안정은 심리적 안정, 즉 안정감을 생산하고, 제도적 안정이 그러한 안정들과 안정감을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두 사람이 사는 집에, 호적에, 건강보험에, … 생활과 주거와 모든 계약과 공문서에 안착시키고 강화한다. 인터뷰이들에게서 ‘행복’이나 낭만’에 대한 이야기는 드물고 안정이 유일하게 공통된 키워드였던 것은 지금 청년들에게 결혼이 최저선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집에서도, 관계에서도, 사회로부터도 추방되지 않는 것. 고립되지 않는 것. 혼자 쓸쓸하게 늙어서 죽지 않는 것. 이 최소한의 욕망이 결혼이라는 효율적인 제도를 작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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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들이 말한 것들 — 편안한 타인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다는 수빈의 말, 하자가 있어도 떠나지 않는 관계를 원하는 도훈의 말, 귀찮게 만들어서 헤어지기 힘들게 하고 싶다는 상훈의 말—은 모두 이 ‘최저선’을 향하고 있었다. 경제적 불안정, 관계적 불안정, 그것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정. 안정이 이렇게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은 불안정이 그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집을 잃을 수 있다는 것, 관계에서 이탈될 수 있다는 것, 사회적으로 하자 있는 존재로 남겨질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결혼은 불안정으로부터의 탈출이고, 안정은 그 탈출의 목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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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정은 이성애 체계 안에서의 안정이기도 했다. 바로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은정은 혼인신고 수리 가능성이 없어서 그 외의 모든 절차를 다 치르고자 했고, 도훈은 여성과의 결혼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다. 이는 제도적 안정의 진입 조건 자체가 특정한 규범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결혼이 안정의 가장 효율적인 장치인 이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혼이 특정한 형태의 관계만을 안정적인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순환논증으로 구해진 효율성.
결혼이라는 제도를 향해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공동체가 필요했고, 소속이 필요했고, 재산과 신체를 함께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으며, 이것이 모두 오래 지속되도록 법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들을 동시에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이 결혼이었다. 결혼이 하는 일은 사랑을 지키는 것보다 안정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어떤 비난의 가능성은 불식시키고, 어떤 비난의 가능성은 만들어냄으로써.
돌봄, 정확히는 양육이 가정만의 몫이 아니라 사회의 몫이라는 이야기는 특히 코로나19를 거치며 더욱 전사회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으나, 이에 응당 이루어져야 할 지원은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해일처럼 아이를 정말로 직접 돌보고 싶은 이들조차 경력과 양육 사이의 이분법에서 외주화를 탈출구로 선택하게 될 때, 그것은 사실 탈출구조차 아니다. 양육을 맡김으로써 경력을 지키는 것이므로,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것처럼 스스로 양육을 하는 데는 실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육은 핵가족 바깥을 모두 아이의 적이나 아이를 위한 자원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탐욕스러운 돌봄’이 되어버리고, 핵가족은 그런 탐욕을 증폭시키는 장치가 된다. 한국에서의 부동산 투기가 “나와 우리 가족이 그 상황으로 인한 불이익은 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중략) 고작 그 정도의 마음을 먹는 것일 뿐이지만 이렇게 시작된 경제실천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시민들의 주거 불안으로 이어진다.”라는 비극적 분석처럼. 이처럼 다른 이들과의 관계, 그러한 관계들의 연결로서 사회가 다름 아닌 우리 가족’의 이름으로 파스스 부서지고 있다.
하지만 뜯어먹고 줍고 담아 옮기며 자연의 리듬에 맞춰 가는 문명에서, 자연에 대한 파악은 착취하기보다 더 잘 의존하기 위해 필요하고, 참을성 있고 전략적인 지력 은 동물들이 죽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다친 이가 회복되어 다시 걷기를 기다리는 데 활용된다. 그리고 이토록 다양한 모든 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문명’의 기원이다. 유전자가 생존과 번성을 위해 작동한다는 영식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영식이나 해일의 주장처럼 그것이 반드시 ‘핵가족 꾸리기’나 ‘남성 가장’으로 이어질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삶과 생활을 책임진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이해할 것인지의 문제이며, 본능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특정한 문화와 가치, 구조에 대한 적극 적이고 강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티에리 오케는 인간 사회의 제도가 자연을 방패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실제 생명에 있어서 수컷과 암컷의 구분조차 모호할 때가 있고 “전통적인 생물학적 정의에 따르면 수컷과 암컷은 생식세포를 뜻하지만 ‘남성’과 ‘여성’이라고 하면 당연히 두 유형의 생식세포와는 다른 것을 지칭한다. ‘남성’과 ‘여성’이 무엇인지는 생물학에서 명확히 말해주지 않으며 결코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생식세포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설명조차 당대의 문화적 문법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다. 인간의 본성이나 본능, 문명의 기원 같은 것은 하나의 유일한 증거나 서사를 찾을 수 없는 해석과 상상의 영역이고, 오랫동안 무수한 가설들이 부딪혀 왔다. 인간의 본능과 문명의 기원이 가설이라는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고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는 픽션fiction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것은 몸의 본질이나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서 출발할 문제다.
제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인류학이 인간의 특징이나 본성을 탐구하고자 했으나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인간이 “온갖 성향을 다 갖고 있”으며, “그 성향들 중에서 다른 성향들에 비해 특별히 더 진정한 것은 있을 수 없”기에 “우리가 어떤 성향을 인간의 바탕으로 여기고 문명의 근거로 삼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결국 중요하다는 사실이라고. 그리고 다른 세계를 만들고자 할 때 “우리에게 지금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의 비전이 아니라 가능한 많은 대안적 상상”이라고.
그런 대안적 상상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함께 고민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픽션이다.
그 픽션을 쓰는 것은 우리다.
구조는 그렇게 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우리는 그렇게 구조를 경험하고, 이해하고, 수용한다. 구조에 대한 비판은 그 사람에 대한 비난처럼 느껴져서 비판 대신 이해라는 이름의 체념을 선택하곤 한다. 구조는 친밀한 관계와 먹고사는 문제를 매개로 우리의 의존을 얻어낸다. 구조가 덫이라면 친밀성과 생계는 미끼다. 그러므로 구조에 대한 질문에는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다.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먹고살고, 무엇을 매력으로 느끼고, 무엇을 편하다 느끼는가? 구조는 그런 구체성 안에 살아숨쉬며 생명력을 얻는다. 이처럼 우리는 때로 서로에게 어떤 세계의 손과 얼굴이 되어 다가간다. 개인에게 세계의 하중이 얹혀 있다. 삶이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고작 한 사람조차 세계를 짊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는 것이 곧 ‘가부장제에 대한 부역’은 당연히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한국이라는 곳에서 1인분을 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남자 혹은 여자가 되어 사람구실을 한다고 증명하기 위해 선택하는 길일 뿐이다. 그러나 결혼을 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결혼 이후 자신이 행사할 수 있게 된 특권을 보호하고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자신이 (다른 무수한 이들과 함께) 겪고 있는 불행과 폭력의 배경인 불평등을 외면할 때, 가부장제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안에서 경제적•정동적으로 정당화될 뿐 아니라 더욱 촘촘히 강화된다.
그러므로 쾌락 없는 책임은 책임이 아니며, 책임 없는 쾌락은 쾌락이 아니다. 그리고 돌봄은 책임과 쾌락을 연결함으로써 살 만한 삶을, 나아가 살 만한 관계들을 구성하는 실천이다. 이때 돌봄은 현실의 문제를 작은 부분들부터 대응하고 바꾸어 감으로써 거대한 문제들에 맞서는 일, 그렇게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수 있는 부분들로 쪼개어 직면함으로써 무력감과 체념에서 벗어나는 일, 그것은 즐겁지 않은 순간들을 무사히 견뎌냄으로써 돌봄의 즐거움을 기어코 붙잡아낼 수 있도록 최저선을 보장함으로써 모두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저 일상을 살아갈 뿐인 우리는 대부분 어쩌다 세계가 이 꼴이 되었는지 설명할 책임accountability을 충분히 다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며 거기에 응답할 책임responsibility만큼은 다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에게 빚진 최소한의 몫이자, 서로의 존재를 최대한으로 피어나게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그때, 기존에 이야기되기 어려웠던 욕망들을 드러내고 신나게 떠드는 일은 분명 모두에게 더 살 만한 세계를 만드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 최저선은 생계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으며, 사람을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복잡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포함한다. 이는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면서도, 그걸 견디고 남을 만큼 소중하고 사소하며 빛나는 새 일상과 세계를 구성하는 보람찬 일, 무엇보다도 재밌는 일일 테다.
살던 곳을 떠나는 일이란 언제나 고통스럽고 슬픈 상실이며, 긴 적응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을 깎아내면서, 사랑하는 이에게 체념하면서까지 평범한 자리들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익숙한 삶의 방식.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익숙하고 폭력적인 경로로부터의 이탈을 감수할 만큼 매력적인 다른 세계와 삶을 제시하고, 다른 세계와 삶을 향해 나아갈 때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망명이 하나의 집을 떠나 다른 집을 찾고 짓는 일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과정으로서 탈출과 착륙은 언제나 집을 짓는 일이며, 따라서 돌봄임을 상기한다. 모두가 살 수 있는 집. 정치가 무엇보다도 사람이 살게 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일이라면, 정치는 망명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망명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정치라면, 정치란 집을 짓는 일이다.
어디로 가면 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고, 그렇게만 가면 무난하게 살다가 외롭지 않게 죽을 수 있다는 일방통행로는 회전교차로 같은 인생에 명료한 질서를 부여해서 그걸 통제할 수 있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였을지 모른다.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인 데는 순전한 강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방통행로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정해진 방향과 속도에서는 나 자신도, 내 곁의 소중한 이들도 제대로 살필 수 없다. 회전교차로에서 우리는 때로 한 곳을 빙글빙글 돌거나 온 길로 돌아가기도 한다. 일방통행로를 달리는 우리는 어딘가로 돌아가는 일을 혼란, 포기, 실패라고 배웠지만, 그것은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나쳐 온 실패조차 돌아갈 곳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언제나 집을 짓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서로를 놓지 않을 것이므로, 나를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떠나든 더 많은 안전한 집을 만들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