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지학자들이 ‘중층 기술thick deseription’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접하고 나는 마침내 내 생각만큼이나 복합적인 라벨을 발견했다. 나는 사회적 지위라는 개념 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이고, 각자의 역사는 사람마다 다른 강도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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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박사학위를 딴 손녀보다 훨씬 영리했지만 세상을 뜰 때까지 가난했다. 영리함이란 한 사람의 능력과 환경, 그리고 그 사람이 살아낸 시대상 등이 모두 함께 작용해서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다. 나는 유리한 시대에, 세계화라는 시대상에 걸맛은 영리함을 타고났을 뿐이다.
내 에세이는 항상 이 문제를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왜 우리 할머니가 아니고 나일까? 왜 그때가 아니고 지금일까? 왜 다른 미국이 아니라 이런 미국일까?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현재 나의 사회적 지위는 우리 사회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나를 중심에 두고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을 나와 연관 지어서 생각해보려 하 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예를 들어 내 경험은 이민자의 경험을 대변할 수 없다. 내 경험은 성소수자들의 삶을 대변할 수 없다. 사적인 에세이는 그런 차이를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 그 장르를 깎아내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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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의 모습과 자아가 우리 사회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를 구해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 내 역사, 내 정체성의 일부를 공유함으로써 사회 이론을 더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만지고, 냄새를 맡고, 보고, 직접 경험한 감각을 동원할 때 이야기는 더욱 강렬하게 다가간다. 그러나 나는 결코 환기력이 강한 이야기를 하는 데 그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환기력이 강한 이야기가 힘 있는 자들을 향한 문제 제기로 발전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 나는 데이터를 찾고 조사를 한다.
사실 모든 억압적 체제는 자신들의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소수의 예외를 허용한다. 그러지 않으면 억압을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억압을 내면화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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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때문에 아름다움이 절대 선호의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냥 좋아서 좋아하는 거야”라는 말은 자본가들의 영원한 거짓말이다. 아름다움이 완벽하게 순수한 의미에서 선호의 문제에 그쳤다면 자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자본은 아름다움이 고압적이기를 요구한다. 아름다움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제도권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는가, 내게 어떤 규칙들이 적용되는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 등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는 개념이라면 그것은 곧 양식과 제도와 교환의 체계임이 틀림없고, 우리의 선택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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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내면화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심리적으로 둘로 쪼개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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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어떤 것도 자원에 대한 접근성을 제어하고 자본을 가진 사람들을 아름다움의 영역을 지키는 문지기로 즉석에서 임명하는 구조적 장치를 상쇄하지 못한다. 아름다움은 하얗고 나는 검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학교에서 벌을 받을 확률은 더 높아지고,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더 무거운 형을 받고, 결혼할 확률 자체가 낮아지며, 나와 비슷하거나 더 나은 경제적 위치를 지닌 사람과 결혼할 확률도 낮아진다.
이런 실증적 증거를 인정하지 않고 부인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일종의 폭력이다. 심지어 좋은 의도에서 그랬다 해도 그것이 폭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다고도 하고, 추하니까 추해 보인다고도 한다. 둘 다 거짓말이다. 추함은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가해진 모든 것이다. 그 차이를 아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여정의 일부다.
어떤 출신 국가나 장소, 신에도 매여 있지 않은 화이트니스라는 개념과 정체성은 화이트니스가 차지하는 왕좌에 도전하는 모든 집단에 대항해서 자신의 지위를 지킬 수 있을 만큼 확장할 수 있어야 존재가 가능하다. 한때는 유럽인만 백인으로 쳤지만, 폴란드인을 배제하기 위해 아일랜드인은 끼워줬고, 한국인을 배제하려다 보니 결국 폴란드인도 다시 백인으로 인정해야 했다.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한 상황 지배력을 유지하려면 안정적인 대립극이 필요하다. 블랙니스는 그 대립극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미국인들이 오바마와 트럼프를 모두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 있었던 사실에 담긴 역설에서 오바마가 흑인이고 아니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핵심은 그가 화이트니스의 요소를 얼마나 지녔는지(혹은 지니지 못했는지)였다. 오바마-트럼프 논법은 ‘진보-반동’이 아니라 계이름 ‘도-시-도’였다. 같은 총, 같은 스텝, 서로를 비 추는, 한쪽이 있어야 다른 한쪽도 있는 개념이었다.
화이트니스 자체가 그렇듯 트럼프가 있기 때문에 오바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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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유권자들이 버락 오바마를 하나의 개념이자 대통령이 되도록 허용한 것은 자신들을 화이트로 규정하는 역설을 근본적으로 투사하는 것이 오바마였기 때문이 다. 나는 그 사실을 거의 잊을 뻔했다. 우거진 나무들과 뉴 화이트는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내 영혼은 우리 할머니의 경험을 기억한다. 우리의 화이트를 아는 것은 정말이지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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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좀처럼 실망하지 않는다. 화이트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왜 백인들이 버락 오바마에게 표를 던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인 화이트라는 역설적인 개념을 오바마가 매력적으로 투사했기 때문에 그를 하나의 개념, 그리고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그의 매력은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고, 그저 도움이 되는 정도였다.
품위 있고 점잖은 외양과 행동을 하고 받는 보상은 예측 불가능한 도박이지만 우리는 사회적 지위, 부, 권력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진 복잡하기 그지없는 구조적, 사회적 상호 관계가 허락하는 좁디좁은 한도 내에서 그나마 최선을 다한다.
나는 우리 엄마가 캐멀색 케이프나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얼마에 샀는지 모르지만, 그런 투자로 측정하기 어려운 수익을 거뒀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사회복지기관의 직원이 자기 앞에 선 여자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여자들과는 다르게 무시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번 쳐다보는 그 표정, 그리고 서류를 작성하면서 물어봐야 하는지도 몰랐던 정보를 미리 알아서 가르쳐주는 태도의 변화를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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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은 왜 지위 상징status symbol을 사기 위해 멍청하고 비논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까? 아마도 최고로 부유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소득 계층의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이와 비슷한 선택을 하리라고 짐작된다. 우리는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한다. 그저 심리적으로 보상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적절한 시점에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취업이냐 실업이냐, 나쁜 일자리냐 좋은 일자리냐, 혹은 집이냐 노숙자 쉼터냐 등의 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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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이 잘못된 결정을 내려서 애가 터진다는 투의 발언의 저변에는 우리처럼 열심히 일하고 가난하지 않은 현명한 사람들은 절대 그들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우리는 더 나은 판단을 할 것이다. 우리는 돈을 아끼고,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 같은 것에 돈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며, 쿠폰을 모으 고, 절제와 희생을 해서 백만 달러를 모을 것이다! 학교에서 급식 보조를 하던 아주머니가 실은 주변 사람들도 전혀 모르는 부자였는데 죽으면서 모든 유산을 고양이나 자선단체 앞으로 남겼다는 식의 일화가 잊어버릴 만하면 한번씩 나온다. 검소한 생활을 하는 부자들의 삶을 다루는 책에는 그들이 대형 고급차 대신 허름한 중형차를 몰고 다니는 교훈적인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잊고 있는 (그러나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은) 진실은 사회적 위상과 부의 창출과 희생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우리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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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 않다는 사회적 위상을 바꿔보면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이 변화한다. 그 누구도 실제로 가난해지기 전까지는 가난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가 없다. 가끔 돈이 없거나, 예전에는 가난하지 않았다가 가난해졌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가난하게 태어나서 이후로도 계속 가난하게 살 것이 확실한 사람들, 관료와 문지기와 좋은 의도에서 누가 품위 있고 점잖은 사람인지 판단하는 사람들로부터 타고나기를 가난한 사람이라고 취급받는 그런 가난 말이다.
그런 처지에 처해지기 전에는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그것을 사지 않을 수 있는 여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