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두려움과 분노가 『크로스웨이스의 다이애나』가 톡톡히 보여주는 충격적인 현실이다. 메러디스는 사랑이 치명적임을 알리려 한다. 사랑은 우리를 자신과 대립시키고 그 자리에 버려둔다. 진지하게 사랑에 뛰어들고도 침해당한 느낌, 대개는 그 침해를 스스로 저질렀다는 느낌 없이 빠져나올 수도 없는. 메러디스는 기묘한 방식으로 사랑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 앞에서 느끼는 내면의 적대감이 훨씬 더 결정적이다. 그 점이 작가에게 (그리고 작가에 의해) 분명해지면, 그 자체로서 목적이었던 사랑은 점차 영향력을 잃는다.
(…) 언어도, 사회적 상황도 다른 이전 세기의 작품이지만, 자기 자신을 향해 무모하게 돌진하는 여성이라는 핵심 주제는 여전히 놀랍도록 생생하게 다가온다. 다이애나의 사랑은 난파했으나 우리는 낙담에 빠지지 않는다. 가짜 독립이 주는 흥분감, 통제를 잃는 속도, 위협을 느낄 때 드러나는 추악함 등 다이애나 내면에서 벌어지는 진짜 사건이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아온 삶의 의미를 받아들이려 애쓰는 다이애나의 지성이 너무나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자아의 드라마-최초의 수치로부터 기어 나오려는 가공할 노력-이자 그 많은 감상적 강변과는 다르게 사랑이 그 노력을 대신해줄 수는 없다는 끔찍한 인식이다. 좋든 싫든 그 노력은 홀로 해야 하는 것이고, 가정을 이루는 행위보다는 예술을 창조하는 행위에 더 가깝다. 이 노력은 외로움을 인정하고 심지어는 불러들인다. 반면 사랑은 외로움을 두려워하고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이 구절은 이 책을 지배하는 릴리와 램지 부인 사이의 말 없는 교감의 일부다. 릴리에게는 일이 있지만, 릴리는 자기가 지닌 힘이 자신에게 제시하는 현실 앞에서 떨면서 자기 안에 있는 램지 부인에게로 숨어들고 싶어진다. 램지 부인은 가정의 중심이고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안정적 지위를 누리지만, 우울하고, 화가 나 있고, 자신에게조차 추상적인 존재다. 두 사람은 글의 표면 아래에서 전류처럼 흐르는 역학 관계를 완성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세상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밖에 있나, 안에 있나? 그리고 릴리와 램지 부인이 바로 이 질문 자체가 된 인물들이다. 『등대로』는 이 질문 뒤에 있는 은유를 어떤 남성 인물도 (어쩌면 헨리 제임스 소설 속의 인물 한 명 정도를 제외하고) 이 불안하고 지적인 여자들만큼 잘 구현할 수 없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60년이 지난 지금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독자는 어쩌면 어머니와 딸만이 그 관계를 잘 구현할 수 있다고 덧붙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
오늘날, 우리 중 가장 무지한 사람이라도 살인으로 분리를 이룰 수는 없음을 안다. 어머니를 죽일 수는 없다. 죽일 어머니가 사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파괴를 일으키는 어머니는 내 안에 있는 존재다. 이것은 문화의 손가락 끝까지 속속들이 체득된 공유된 지혜다. 글을 쓰는 여자들은 우리의 지혜를 이전보다 더 멀리 끌어가려고 하고 있고, 그렇게 되면 세상은 한층 더 커질 것이다.
윌라 캐더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든 가정에서 자기만의 무언가를 가지려는, 자기 자신이 되려는 투쟁은 모두를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고 가는 긴장을 만들어낸다. […] 화목한 가정에도 이런 이중의 삶이 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집단의 삶이 있고 […] 그 아래에는 비밀스럽고 열정적이고 강렬한 다른 삶이 있는데, 이 삶이 우리 친구들의 얼굴에 인상을 만들고 목소리에 개성을 부여하는 진짜 삶이다. 누구나 늘 마음속으로 달아나려 하고 상황과 자신의 애정으로 스스로 엮어놓은 그물을 찢으려고 한다. […] 인간관계는 인간 삶의 비극적 필연임을 깨닫게 된다. 모든 자아는 절반의 시간 동안은 인간관계를 탐욕스레 갈구하며 보내고 나머지 절반 동안은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30년 동안 캐더가 써낸 짧고 긴 소설은 인간이 어떻게 자신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씨름하는 내용이었다. 인물이 이 투쟁을 성공적으로 해내면, 어떻게든 영광에 이르게 된다. 만약 그러지 못해서 침해할 수 없는 자아가 부정되거나 무시받거나 학대당하거나 형체를 잃게 되면, 인물이 비탄에 빠진다. 캐더는 성적 사랑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이야기 속에서 종종 결혼을 궁지에 몰린 자아의 적으로 손쉽게 설정했다. 그렇지만 캐더의 글쓰기를 보면, 그 풍요롭고 맑은 깊이와 놀라운 포용성을 보면, 캐더의 인식이 그 단계에 머물기만 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캐더는 이 투쟁이 아주 깊은 곳에 있는 두려움과 관련이 있음을 알았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외롭고 두려운 일이며, 결국 당면한 그 과업에 필요한 용기를 만들어내느냐 아니면 만들어내지 않기로 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변이나 재산에 일어나는 일에 따라 삶이 바뀌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일어나는 일이 곧 운명이 된다-오직 그뿐이다.
그러다가,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세계 사방 모든 것이 공모라도 하듯이 우리가 알게 만들었다. 갑자기 이혼이 생겨났다. 정신과 치료도. 이어 섹스와 페미니즘과 약물, 거리의 범죄가 등장했다. 말하자면 로마의 멸망이었던 것이다. 도시의 끝에서 끝까지. 심지어 브롱크스까지도. 두려웠지만 신이 나기도 했다. 종신형 결혼을 했던 이들에게 형 집행 정지가 내려졌다. 이제 실수를 바로잡을 자유가 주어졌다. 우리는 다시 사랑에 빠질 테고, 이번에는 제대로 할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우리가 될 수 있다고 늘 믿던 멋지고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우리는 이혼을 하고, 심리 치료를 받았다. 그러자 이런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사랑했고, 잘못 사랑했다. 우리는 다시 사랑했고, 다시 잘못 사랑했다. 세 번째로 사랑했고, 이제는 경험으로부터 차단된 세상에 사는 게 아니었다. 사랑이 우리를 다정하고 현명하고 너그럽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사랑에 푹 빠져 있을 때조차 두려움도 분노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내면의 자신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전개는 경악스러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방에 깨달음이 가득했고 그 분위기가 하나의 문화로서 우리를 영영 바꾸어놓았다.
(…)
진실은, 사랑은 음식이나 공기처럼 필수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을 대신해줄 수 없다. 이제는 사랑이 삶을 조직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는 게 분명하다. 오늘날의 낭만적 사랑은 감정에 푹 빠졌다가 마법처럼 달라진 존재로 돌아오길 바라는 갈망과 비슷한데, 이제는 자아를 만들려면 의식을 신중히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더 큰 진실임을 많은 사람이 안다. 그런데 문학에서나 삶에서나 사랑을 깨달음의 수단으로 여긴다면 이제는 다소 김빠지는 일이 될 것이다. 소설에서 (현실에서처럼) 인물도 서술자도 애초부터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모른다면 결말에 이르러서도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 이상은 알 수 없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슬픔과 감상적 아쉬움에 빠질 수는 있겠으나 비극이나 숙명의 감각을 이루지는 못한다. 자기 삶이 결국 자신이 꾸릴 수 있는 유일한 삶임을 깨닫는 순간의 공포 — 이런 공포는 주요 사건이 새로운 연애일 뿐인 소설에서라면 결코 다뤄질 수 없다.
(…)
오늘날에 이런 책이 쓰일 수 있을까? 쓰일 수 없다. 이 책의 힘은 전적으로 인물들이 분투하는 세상의 정적인 성질에서 나온다. 이들이 배우고 행하고 되어가는 모든 것은 그 제약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힘이 축적되고, 결국 금기를 깨게 된다. 금기를 깨뜨렸기 때문에 자기 내면을 향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는 깊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소설의 중심에 낭만적 사랑을 놓고 인물들이 사랑을 추구하다 무언가 거대한 것에 도달한다고 하면, 독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우리가 사는 시대는 왜 이러한지, 그런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사랑을 은유로 사용하는 것은 발견의 행위가 아니라 향수에서 비롯된 행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