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라타샤 할린스가 아니다. 우리 엄마는 두순자가 아니다.
나는 가게 주인이 절도범으로 오해한 탓에 죽은 아이가 아니다.
나는 내 얼굴, 한국인 얼굴 덕분에 보호받았다. 추행당하긴 했지만, 살해되지는 않았다. 내 아시아인다움은 조금이나마 보호막이 되어 주었는데, 그것은 내게 약간의 특권을 제공하는 것이 기도 했다. 마치 고무줄 저울로 잰 것 같은 특권이긴 했지만 말이다. 두순자가 백인 판사의 동정을 받으며 실형을 면제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시아인다움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모님의 가게가 불타는 것을 막아 주지 못했다. 코리아타운이 초토화되는 것 또한 막아 주지 못했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로 부터 우리를 지켜 주지도 못했다. 나는 뭐였을까? 괴물인가, 아니면 피해자인가? 그 둘 다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엄마와의 뒤틀린 관계가 이 나라에서 내가 겪은 인종적 경험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인종적 상상계가 내게 가르쳐 준 방식 그대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구제불능의 이방인, 모범 소수자라는 고정관념, 괴물, 그리고 살인자로 말이다. 내 머릿속에서 엄마는 곧 두순자였다. 완전한 미국인이 되려면 나는 그녀를 거부해야만 했다. 하지만 엄마가 구제불능의 이방인이라면 나 또한 이방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모범 소수자라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괴물이자 살인자라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종적 상상계는 우리를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존재로 취급했다. 나는 한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미국의 인종이라는 저주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내 안의 상반된 두 자아를 갈라놓지 않고 어떻게 하면 서로 화해시킬 수 있을까? 나는 엄마를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한다. 나는 한국인인 게 좋지만 동시에 싫다. 나는 미국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미국을 증오한다.
그것을 ‘인종적 멜랑콜리’라 부르든, ‘마이너 필링’이라 부르든, 혹은 사이비 증후군이라 부르든, 이 고통은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가 겪는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병리 증상(그렇다고 아직 인정받진 못했지만) 중 하나다. 백인 우월주의는 우리가 고통에 대해 침묵하기를, 그 책임을 전적으로 이민자 부모나 우리 자신의 심리적 나약함 탓으로 돌리기를 원한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사이비라고 생각하길 바라지만, 진짜로 사기를 치는 건 백인 우월주의 체계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다단계 사기극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국의 인종 문제를 “해결”하고, 이곳이 평등한 기회의 땅임을 증명하며, 백인 사회를 책임에서 면제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니 우리 중 그토록 많은 이들이 압박을 이기지 못해 무너져 내리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부모의 꿈과 우리 공동체의 꿈, 그리고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적 환상이라는 천근만근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곳에 앉아, 백인 상담사가 늘어놓는 온갖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방 안의 코끼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곳에 모인 이유는 각기 다를지라도, 우리가 겪는 정신 건강 문제는 백인 우월주의 사회에서 유색인으로 살아온 경험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흑인 남성에게 분노 조절 장애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를 화나게 만들고 그의 분노를 병리화하는 체계는 내버려두는 것, 흑인 여성에게 우울해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그녀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그녀와 가족을 비인간화하는 체계는 내버려두는 것, 그리고 아시아계 여성인 내게 내 문제는 “문화적”인 것이라며 백인 주류 사회가 흑인들을 얼마나 더 혹독하게 대하는지 보라고 말하는 것. 이 모든 과정이 무의미한 헛수고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문제는 호흡 운동 따위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리 없이 끈기 있는 거미 한 마리,
나는 지켜보았다, 작은 곶 위에 그놈이 외로이 서있는 것을.
텅 빈 광활한 주변을 어떻게 탐색하나 살펴보니,
그놈은 제 몸에서 가느다란 실을 뽑고, 뽑고, 뽑아 멀리 내던졌다.
끊임없이 실을 풀어내고, 지친 기색 없이 속도를 높이며.그리고 너, 오 나의 영혼아, 네가 서있는 곳에서,
측량할 길 없는 우주와도 같은 바다에 둘러싸여, 고립된 채,
끊임없이 사색하고, 모험하고, 실을 던지며, 그 대양을 연결 할 행성들을 찾아,
네가 필요로 할 다리가 놓일 때까지, 유연한 닻이 단단히 고정 될 때까지,
네가 던지는 그 가느다란 거미줄이 어딘가에 닿아 걸릴 때까 지, 오 나의 영혼아.
— 월트 휘트먼, 2019, <조용히 인내하는 거미 한 마리>, 『밤의 해변에서 혼자』
거미는 너무나도, 정말이지 너무나도 작다. 우주는 너무나도, 정말이지 너무나도 크다. 거미는 조용히 홀로 일한다. 아무도 거미가 하는 일을 눈치채지 못한다. 시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말이다.
그러고 나서 휘트먼은 시선을 돌려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하게 자신의 영혼에게 말을 건넨다. 거미처럼 휘트먼도 광활한 우주에서 한낱 작은 영혼일 뿐이다. 그 또한 심연 속에서 연결점 찾아 실을 던지고 또 던진다. 작가나 예술가의 작업에 대한 얼마나 절묘한 비유인가. 무명인 채로, 가느다란 실 한 가닥 같은 자신의 작업이 이 “측량할 길 없는 우주와도 같은 바다”에서 동료 영혼에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 그 연결은 끊어지기 쉽다. 던지는 모든 실이 다 어딘가에 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닿는 데 성공한 실들은 “유연한 닻”, 강철 같은 영적 다리가 될 것이다.
읽기와 쓰기는 은혜를 주고받는 행위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을, 개인과 공동체를, 공동체와 세상을 연결해 준다. 은혜는 나누고 서로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대로 전해지는 선물이자 신성한 연결 고리다. 제임스 볼드윈이 내게 줄을 던져 주었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와 그레이스 리 보그스도 그랬다. 내 스승들이 내게 줄을 던져 주었고, 내 학생들 또한 그랬다. 그들은 함께 친족 공동체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내가 심연으로 떨어지지 않게 지켜 주었다.
휘트먼이 나 같은 사람을 자기 독자로 상상이나 했을까? 나 같은 사람이 그의 시가 던진 실을 붙잡으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날 친족으로 여겼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내가 그에게 작으나마 은혜의 손길을 내밀 기회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실이 뜻밖의 장소에 가서 걸리기도 하는 법이니, 오 나의 영혼아.